-호모커넥투스 이야기 4
*이 글은 최민자 지음, <호모커넥투스: 초연결 세계와 신인류의 연금술적 공생>의 서문 내용의 일부입니다.
호모커넥투스는 초연결·초융합·초지능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부응하는 인간의 새로운 정체성을 나타내는 신조어다. 사람과 사물, 공간 등이 상호 연결된 초연결사회의 인간, 즉 ‘초연결의 인간’을 의미한다.
호모커넥투스의 본질은 연결성이다. 연결성은 곧 소통성이므로 ‘하나됨(oneness)’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호모커넥투스란 용어가 외적·기술적 연결에 추동되어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애초부터 전 우주는 분리할 수 없는 파동의 대양[氣海]이며 단 한순간도 연결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본래 호모커넥투스다! 왜냐하면 우주의 본질은 생명이고, 우리 모두는 ‘불가분의 전체성(undivided wholeness)’인 생명이라는 피륙의 한 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모커넥투스의 진실은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물질주의 과학에서 재발견되고 있다.
‘접속의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크게 두 가지, 즉 문화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지역 문화가 고갈되고 지구 문화의 동질화가 심화되면서 인류 지식의 보고(寶庫)가 사라지고 문화적 다양성이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가치가 형성되는 유일한 원천인 문화의 상품화로 인해 문화생활을 구성하는 수많은 관계는 물론 인간 자체도 상품화됨으로써 사회적 신뢰와 사회 자본이 고갈되어 인류 문명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화 자본주의가 ‘효용 가치’를 앞세운 나머지 ‘내재 가치’가 밀려나면서 가장 깊은 의미에서 호모커넥투스의 자기정체성은 혼란을 겪고 있다. 호모커넥투스라는 신조어가 인간 본래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내적 자아’와 연결되지 못한 채 단지 외적·기술적 연결에 머문다면 공감의 신문명은 창출되기 어려울 것이다. 스스로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드러난 질서[물질계, 현상계]와 숨겨진 질서[의식계, 본체계]의 유비적(類比的) 대응관계에 주목하는 것은, 사실 그대로의 우주, 인간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삶의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 실효성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주는 부분들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유기적 통일체이며 우주만물은 개별적 실체성을 갖지 않고 전일적인 흐름(holomovement)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실재하는 것은 전체성이고, 단지 분절적 사고(fragmentary thought) 습관에 따른 미망의 지각작용에 의해 이 우주가 분절적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절적인 사고 습관을 그만두는 것이다. 미시세계에서의 파동-입자의 이중성은 생명의 본질 자체가 내재와 초월, 본체[理, 숨겨진 질서]와 작용[氣, 드러난 질서]을 상호관통하는 완전한 소통성, 즉 생명계가 완전한 ‘열린계(open system)’인 데에 기인한다.
양자역학을 필두로 한 포스트 물질주의 과학은 철학, 종교, 문학 등 다양한 분야와의 대화를 통해 ‘하드 사이언스(hard science)’에서 ‘소프트 사이언스(soft science)’로 과학의 외연을 확장시키며 과학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다. 양자역학적 관점에서는 양자계가 근원적으로 비분리성 또는 비국소성을 갖고 파동인 동시에 입자로서의 속성을 상보적으로 지닌다고 보는데, 이는 물질[氣·色·有]의 궁극적 본질이 비물질[理·空·無]과 하나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진여(眞如)인 동시에 생멸(生滅)로 나타나는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면, 파동인 동시에 입자로 나타나는 양자역학적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다. 한마디로 양자역학은 ‘마음의 과학’이다. 홀로그램 원리가 말하여 주듯 생명은 비분리성·비이원성을 본질로 하는 영원한 ‘에너지 무도(energy dance)’이다. 참자아가 곧 하늘(天·神·靈)이며 ‘양자 신(quantum God)’이고 보편적 실재로서의 ‘나’, 즉 생명이고 진리이다.
전체(우주)는 빅데이터를 돌려서 얻는 부분(정보)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이 우주는 ‘인드라망’과도 같이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의 세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물만상이 끝없이 상호 연결된 생명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두 입자가 공간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비국소적으로(nonlocally)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매개체 없이도 즉각적으로 서로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양자 얽힘’ 이론과도 상통한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 즉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과 결정론적 해석 간의 논쟁은 곧 우연과 필연의 해묵은 논쟁으로 그것은 필변(必變)의 ‘보이는 우주[현상계, 물질계]’와 불변(不變)의 ‘보이지 않는 우주[본체계, 의식계]’의 관계적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현실은 실재의 투사영(projection)이며 실재와 분리될 수 없다. 해석은 인식론상의 문제다. 양자역학이 물리학으로만 남을 수 없는 이유다. ‘양자 형이상학’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의 내적 상태나 생각 또는 느낌이 외부 세계의 사건에 의해 발현되거나 확인될 때 우리는 동시성 현상을 체험한다.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삶과 죽음이라는 이원론적 상황에 대한 정신의 종속으로 인해 스스로를 현상의 세계에 가둬 버린 존재에게, 무의식은 숨겨진 광대한 질서의 한 자락을 틈새로 드러내며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근본지(根本智)를 향한 열망을 불타오르게 한다. 동시성의 원리는 만물이 비롯되고 또 돌아가야 할 ‘unus mundus (근원적 실재)’를 드러내는 원리이다. 흔들리는 깃발을 통해서 바람의 존재를 인식하듯이 우리는 동시성 현상을 통해서 ‘unus mundus’를 인식한다. 천변만화(千變萬化)가 ‘unus mundus’의 놀이이며 만물만상이 ‘unus mundus ’의 모습임을, 무의식은 물질적 사건을 방편 삼아 무언의 암시와 메시지를 보낸다.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에 길들여진 존재에게 무의식이 전하는 강렬한 무위법(無爲法)이다. 전 우주는 자연법인 카르마의 지배하에 있다. 영적 진화과정에서 생성과 소멸의 주기를 반복하면서 작용하는 이 삶의 법칙은 인간 행위의 불완전성에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