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벽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글은 <개벽신문> 제81호(2019.1) '개벽의 창'입니다]
개벽-동학의 새 바람이 분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오던 ‘개벽-동학’ 바람이, 지난해에는 개벽학, 학회, 학당, 문명, 대학 등의 말들로 분화-결합을 거듭하며, 큰 흐름을 이루어 가고 있다. 올해부터 이를 좀더 본격화하자는 뜻을 모으는 모임이 계속되고 있다. 연초의 첫 번째 모임에서는 그동안의 흐름을 살펴보고 공유하였으며, 이러한 바람과 기획을 이끌고 담아낼 매체로서 <개벽신문>의 활용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1월 19일에는 두 번째 모임이 진행되었다. 정혜정 교수가 곧 출간될『초등교서』(오상준 지음, 정혜정 역주)의 해제 부분을 발제한 후, 그 내용을 중심으로 개벽(파, 학회, 학당, 문명, 대학, 이하 ‘개벽+’로 칭함. ‘개벽2.0’이라고 명명한 분도 있었다)의 지향을 어떻게 계승하고, 심화하고, 확장-포덕해 나갈지 진진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이 책은 ‘동학 시대’의 개벽 사상이 ‘천도교 시대’로 어떻게 전이하고 재구성되는지, 특히 서학을 어떻게 수용하고 변용하며 용시용활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좋은 자극제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1차 모임에 이어 ‘개벽+’의 마중물이자 돛단배로서 ‘매체의 발간’의 방향(창간이냐, 개벽신문의 창조적 계승이냐)과 더불어 ‘개벽+’의 중심으로서의 편집위원회 구성과 편집위원회를 통한 담론의 재구성이라는 실전(實戰)적인 방법으로 공부와 창간(발간)과 창립(?) 준비를 병행해 나가자고 하였다.
‘개벽+’의 시대 구분과 내공의 이력
‘개벽+’의 원조로 여기는 동학이 1860년에 창도되어 우리 역사와 마음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내력이 있다. 그것을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개벽+’ 논의와 실천을 가늠하고 가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수운의 성공은 동학 창도(득도) 이전에 성리학은 물론이고 당대에 유행한 제 학문과 문화를 충분히(?) 섭렵한 학력(學歷)과 20년에 걸쳐 주유천하한 경력(經歷), 그리고 종교체험의 삼박자가 어우러진 덕분이다.
둘째, 해월의 성공은 절치부심한 자기 수양(修行과 修學)과 30년이라는 시간을 경과하며 치러낸 ‘대장정’의 온축된 경험과 민중의 지혜(민중 속에서, 민중과 소통하며)가 펼쳐질 수 있었던 덕분이다.
셋째, 의암의 성공은 (1)외유(外遊-日本)를 통한 세계 문명의 조망 (2)신진 지식인(1900년 전후로 동학에 입도한 권동진, 오세창 등)과 동학 시대 때부터의 지혜 많은 도사(道師-3·1혁명 당시 천도교측 민족대표들은 대개가 ‘道師’였다), 그리고 동학으로 회향한 전통적 지식인(양한묵 등 유학자 출신)이 조화를 이룬 지적인 인프라 속에서 동학-천도교의 개벽 담론(교리 근대화)을 진척시킬 수 있었던 덕분이다.
다시 말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내공을 쌓고, 내실이 다져진 가운데서만 성과·성공은 이루어졌다.
네 번째 ‘개벽+’의 공과
반면에 동학이 좌절을 겪는 사건·시기들마다 내실·내공에 비례하지 않는 과제를 감당하려 들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초-인플레이션’(초급성장)된 교세를 배경으로 큰일을 도모하거나, 대외적인 활동을 하기에 급급하여 내실·내공을 지속적으로 연마·장양하는 데 소홀하였던 이력이 개재(介在)한다.
네 번째의 ‘개벽+’의 흥기(興起) 시대이며, 지금 여기와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 1920년대의 천도교청년당 활동과『개벽』 등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해, 1900-1910년대에 천도교가 주력했던 교육출판과 계몽운동의 성과이다.
그 공과는 무엇일까? 서구의 신문화를 주체적으로 승화하려고 한 점은 ‘개벽+’의 한 모범이랄 수 있으나(공), 역시 내실과 내공을 충분히 다지지 못한 점, 최후의 보루로서의 아지트(교육기관과 안정적 시스템. 예:전문교역자)를 마련하지 못한 점, 그 결과로 30년대 이후의 정치(일본 군국주의화)·경제(천도교의 물적 지원 단절)적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점, 종교 영역과 운동(정치사회) 영역으로 지향이 분산된 점 등에 따른 주체 역량의 부족(과)이 교훈으로 남는다.
다섯 번째 ‘개벽+’와 플랫폼
다섯 번째의 ‘개벽+’ 부활인 광복 이후 북한 지역의 청우당의 폭발적 성장은 바람직한 사례로 거론될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양적 초-인플레이션’의 사례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불과 2-3년 사이에 거의 300만의 교인-주로 청우당원이 생겨났다]. 그러고 나서, 6·25를 거치며 분단이 고착화된 이후 남한 사회에서 오늘까지 동학(천도교)가 지속적인 쇠락을 거듭해 온 것은 외적인 조건(분단/미국 중심 서구화와 기독교화, 知彼)은 물론이지만, 우리 자신에게 우선 긴요한 것은 과거의 영광에 얽매임과 현실파악(知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점이다.
이상의 시대 구분으로 볼 때, 지금 여기에서 ‘개벽+’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일은 이런 점에서 바탕(내공/내실/내용-콘텐츠)을 다지는 공부가 핵심 축이 되어야 한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매체’의 발명이다. 수운의 개문납객(開門納客; 문을 열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아 들림), 해월의 통문과 더불어삶(함께함)과 포접제, 의암의 언론·출판, 1920년대의 잡지와 소년회, 청년당 들은 그 시대의 매체(플랫폼) 구실을 하였다. 그에 착안하면, 지금 여기에서의 ‘개벽+’ 준비와 운동은 현시점에서 동원하고 활용할 수 있는 플랫폼의 특장을 최대한 집중시켜 발현하고, 혹은 스스로를 플랫폼으로 만들어 가는 전략이 병행되어야 한다. 지금 이 시기는 '연결 시대'이며, '매체'란 연결의 매게이다.
‘개벽+’의 미래를 전망한다.
새롭게 출범(출발/계승)하는 매체는 그 플랫폼의 마중물이자, 결실(서론이면서 본론이자 소결론-재서론)이어야 할 것이다. 개벽 플랫폼은 현행의 주류 플랫폼의 아류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발명품이 되지 않으면, 양적·질적 경쟁을 뚫고 생존·생산·생장할 수가 없다.
오늘의 ‘개벽+’의 상황이 지금까지(크게 4波/잘게 5波)의 ‘개벽+’의 흥기(興起)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원불교(와 원광대학교)’라는 대안적 토대가 있다는 점, ‘한살림운동’의 경험[자본주의 체제 내애서의 ‘개벽+’]이 있다는 점 외에 개벽파로 견인할 수 있는 광범위한 그룹(신진학자와 시민운동)이 존재한다는 점 등이겠다. 다만 그들 대부분이 자기 작업을 ‘개벽+’의 관점에서 재구성/재정의(再定意)·재정위(再正位)하지 못하고, 반-개화, 반-척사 즈음을 맴돌고 있다고―좀 도식적으로―정리해 볼 수 있겠다.
그들에게 ‘개벽+’로의 물꼬를 틔우고, 그들과 더불어 ‘개벽+’의 물길을 새롭게 열어 나가는 것이 지금 ‘개벽+’를 논의하는 일의 중심이 되면 좋겠다다시 말해, 우선은 역량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보다 이미 구축된 역량들로부터 새로운 숨결을 불러내는 것이다.
‘개벽+’ 플랫폼 - 들숨과 날숨
그러한 ‘(준)개벽+’ 바깥에 여전히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근대적 과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폐의 청산, 반민족행위 잔재의 청산, 분단의 극복과 통일, 자주의 완수, 인권과 정의 실현, 평등과 자유의 구현, 기상이변에의 대응, 생태/생명 등등. 계층과 빈부, 남녀, 보혁의 갈등이 그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 그것들을 해소하는 길은 의로운 투쟁을 거듭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개벽+’의 지평에서 볼 때, ‘상대를 타자화’한 바탕 위에서 전개하는 타파(他破/打破)보다는 문제에 대한 질문 자체를 바꿈으로써, 문제를 내파(內破)/완파(完破)하고 초탈(超脫)하는 길이 더 바람직하고 미래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벽+’란 또 그런 점에서의 개벽(새로운) 플랫폼이기를 바란다. 플랫폼의 본질은 ‘오가는 길의 중심’이라는 데 있다. 오가는 것은 ‘들숨과 날숨’ 같은 것이다. 숨결은 명(命)이다. 명(命)은 명(明)이며 명덕(明德)이다. 덕의 뒷면이 도(道)이다. 그것을 아울러 ‘학’이라 할 수 있다. 그 학을 해서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새로운 문명 세계, 다시 개벽의 길이다. 사람과 만물이 서로를 한울님처럼 모시는 세계이다. 그 세계에도 슬픔과 갈등은 있겠으나, 건강한 치유가 수시로 이루어지는 세계. 공부와 공경이 넘치는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