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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03. 2019

외로움의 말

- 선성한 말 19


한 작가(사상가, 시인)의 작품을 보면(읽으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言]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작가가 (평소에, 그 작품을 쓰기 전에) 읽은 것(텍스트, 만난 사람, 보아온 시대풍경)을 들여다 보면,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한 것[意=語]을 알 수(도) 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말해진 것을 공부하는 것은 독서이고, 말하고자 한 것을 읽는/읽으려고 하는 것이 공부이다. 말해진 것(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도 있지만, 작가가 '읽은 것'을 통해서만이 알아챌 수 있는 '말하고자 했던 것'을 알아가려는 노력/마음이 더 깊은 공부이다. 이때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 작가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가 세상에 드러나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 세상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그리는/말하는 내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서 떠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을 통해 내가 모르는 내 모습/말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래?/그랬어?"라고 반문하는가. 사람과 대화할 때, 책을 읽을 때, 여행을 하며 '바라볼 때' -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의 말(책), 바깥의 풍경이 아니라 사실은 '나'를 찾는 것(대화)이고, '나'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독서), 나를 보려고 애쓰는 것(여행-풍경)이다. 그러므로, 겸양하고 예의하고 염치하는 것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기본 덕목이 아니랴! 

홀로 나는 것이다 

게다가 더욱이, 나는 얼마나 말하려고 했던 바를 멀리 우회하여 얼토당토 않은 말을 말해 버렸던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그들은 내 말하고자 하는 바는커녕, 말한바조차 귀기울이지도 않고, 듣고도 모른척하였던가. 더욱이 얼마나 많은 내 시도들은 의도한 바를 실현하는 데 실패하여 처참하게 나뒹굴곤 했던가. 그때마다 나는 하염없이 타기만 한 채, 타 버린 연탄재가 되어 무심한 발길에 이리저리 채이곤 했던가. 


작가뿐이랴! 우리는 얼마나 '말하고자 한 바'를 제대로 '말하고' 살아가며, 또 남들의 말 속에서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들으려 마음을 기울이며 살아가는가. 



드러난 말로써 소통하는 데에 지친 마음을 안고, 드러나지 않은 말에 귀와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뜬귀에 상처받으며 살아온 시간들을 아무리고 아무리고 아무리며, 말해지지 않는 말도 들어주는 사람들의 마을, 그 시간이 그리운 날!


그러므로 우리는 홀로 나는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로운 존재이지만, 그 외로움이 또한 창조와 도약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노이무공한 한울님도, 불출산외하는 수운 선생도 외로운 이가 아닌가. 


오직, 경청! 


오심즉여심!



<참고>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초인 소쉬르가 처음 사용한 낱말들로, 언어활동(불어: langage)에서 사회적이고 체계적 측면을 랑그라고 하였고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발화의 실행과 관련된 측면을 파롤이라고 불렀다. 랑그와 파롤은 서로 상반되지만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파롤은 같은 내용의 언어가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실제 발화 행위이며, 이러한 다양한 파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랑그이다.

언어는 다른 이와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개별적' 으로 대화하는 것을 파롤,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원칙을 랑그라고 한다. 가령 사람들은 공통적인 '살다'라는 낱말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이를 랑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실제 대화할 때 상황에 따라 '살다' 는 조금씩 다른 느낌(뉘앙스)을 줄 수 있는데, 그 각각의 용례들을 파롤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이나 억양에 따라 받아들이는 뜻이 달라지는 것도 이 파롤 때문이다. 두명의 사람에게 [살다] 라는 것을 발음하게 했을 때보다 열 명의 사람에게 발음하게 하면 각각 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파롤 때문이다.

소쉬르는 언어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랑그' 뿐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파롤은 상황에 따라 쓰이는 느낌, 또는 뉘앙스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랑그만을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점은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러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언어학자들은 보통 랑그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위키백과]


기표(記表, 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signifié 시니피에[*])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의해 정의된 언어학 용어이다.

"시니피앙"은 프랑스어 동사 signifier의 현재분사로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며, "시니피에"는 같은 동사의 과거 분사로 "의미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기표란 말이 갖는 감각적 측면으로, 예컨대 바다라는 말에서 "바다"라는 문자와 /bada/라는 음성을 말한다. 기의는 이 기표에 의해 의미되거나 표시되는 바다의 이미지와 바다라는 개념 또는 의미 내용이다. 기표와 기의를 하나로 묶어 기호(記號, 프랑스어: signe 사인[*])라고 한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 즉 의미작용(意味作用, 프랑스어: signification 시니피카시옹[*])은 그 관계에 필연성이 없다(기호의 자의성). 예컨대 "바다"를 "바다"라고 쓰고 /bada/라고 발음하는 데 있어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만약 그것이 있었다면 모든 언어에서 바다는 /bada/로 발음되고 있을 것이다.

필연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해하는 체계 속에서는 필연화되고 있다. 한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바다"라는 글자를 보거나 /bada/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거기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의 근저는 기본적으로 같다. 또 "바다"가 왜 /bada/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고틀로프 프레게가 지적했듯, 기의, 즉 "의미 내용" 또는 "개념"은 "지시 대상"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지시 대상"은 레페렌트(referent)라 하며, 기의와는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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