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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20. 2019

보국안민운동의 맥

-보국안민운동, 다시 개벽운동으로서 3.1혁명이 있기까지 

[이 글은 '개벽신문' 제79호 (2018.11) '개벽의 창'입니다]


3.1혁명과 다시개벽, 그리고 보국안민


1.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5월 11일로 정해졌다. 진통에 진통을 거듭해 오던 국가기념일 제정 문제가 올해 2월 구성된 선정위원회에서의 몇 차례 회의와 발표 등을 거쳐 11월 9일에 ‘황토현 전승기념일’인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정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문체부가 이를 공표함으로써 실질적인 확정 단계에 들어갔다. 이제 법령 개정 절차를 통해 행정안전부의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반영 공포되는 절차만 거치면, 동학하는 사람들의 숙원 중의 숙원이던 매듭 하나가 풀리게 되는 것이다.


그간의 구구절절한 과정을 이 지면에서 되풀이해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국가기념일 제정이 어느 특정 지역에서의 ‘사건’ 또는 어느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가 정리되고 기념되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이 진통을 거듭했던 이유가 지역 간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한 데 따른 것이었음을 상기해 볼 때, 이러한 우려가 단순한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이제야말로 ‘동학농민혁명’을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한다는 핵심 과제를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데에 직접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이를 위해서는 동학농민혁명의 보국안민이라는 과제가 단지 반봉건 반외세라는 한 시대의 과제만이 아니라, 동학 창도의 본질적인 과제인 ‘다시 개벽’의 구체적인 슬로건으로서 주어진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을 단지 갑오년(1894) 한 해에 시작되고 마무리된 사건으로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2.


보국안민이라고 하면 보통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보국안민은 천도교(동학)를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 창도의 과정과 그 의의(목적)를 밝힌 글[布德文(天道와 天德을 펴는 뜻을 밝힌 글)]에 이미 명시되어 있다.


“이러므로 우리나라는 악질이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언제나 편안할 때가 없으니 이 또한 상해의 운수요,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다 멸망하면 또한 순망지탄이 없지 않을 것이라.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동경대전, 포덕문)


나아가 이때 보국안민에서 ‘국(國)’은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치국-평천하’의 계기, 즉 평화 세계의 기점(起點·基點)으로서의 ‘나라’이다. 보국안민은 이 세계의 다시 개벽의 한 계기인 것이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太平聖世)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 개탄지심(慨歎之心)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용담유사, 몽중노소문답가) 


다시 말해 천도교는 창도 당시부터 한 나라의 평화로서 그 인민을 평안(平安)하게 하고, 나아가 온 세계[十二諸國]의 괴질(怪疾=帝國主義, 侵略主義, 强權主義)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세계를 열고자 한 ‘다시-개벽’운동이었다.


보국안민운동으로 건설할 새로운 평화 세계를 동학(천도교)에서는 ‘다시개벽’의 세계로 지칭하였고, 따라서 동학(천도교) 입장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창도 목적인 보국안민 운동의 일환이며, 다시개벽[後天開闢] 운동의 한 계기로서의 제폭구민, 척왜양창의운동이다. 다시개벽 운동으로써 이룩되는 새로운 세계를 동학은 ‘지상신선(地上神仙)’의 나라로 지칭하였고, 따라서 동학(천도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이 땅에 한울님 세상(나라)을 세우는 ‘지상천국 건설운동’이었다. 이 보국안민-다시개벽-지상천국 건설운동은 천도교 창도(1860.4.5.) 이래 지금까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오는 운동이다.


3.


첫째,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창의운동으로서의 민회(民會=敎祖伸冤運動)운동이다.


1860년 4월 5일 동학(천도교)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 순도(殉道)하였다. 이후 동학(천도교)은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이끌었다. 해월의 지도력을 기반으로 1860, 1870년대의 어려운 시절을 견뎌 내고, 1880년대 들어서면서 동학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가 폭발적으로 점증하며 세력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동학은 1890년대 접어들면서 수운 최제우의 신원(伸冤; 억울한 원한을 풀어 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동학(천도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동학도인들에게 가해지는 탄압을 제거하며, 동학이 지향하는 새 국가 건설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최초의 대규모 민회(民會)운동이었다. 2000년대 들어 우리가 일궈낸 ‘촛불혁명’은 동학의 이 ‘민회’운동이 면면히 계승되어 온 것으로 본다. 


“이 겨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래 처참한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끝끝내 꺾이지 않고 역사의 저류(底流)로 면면히 지속돼 온 풀뿌리 저항정신이 다시 전면으로 분출하고 있는 장면임이 분명하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금 우리는 심히 긴장된 흥분 속에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김종철, <촛불시위와 ‘시민권력’>, <<녹색평론>> 제152호, 2017년 1·2월호.) 이러한 초기 교조신원운동-신앙의 자유 획득 운동에서 보국안민의 과제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구호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민회(民會)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운동은 훗날 3·1운동의 성과로 등장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화정을 채택할 수 있는 사상적, 역사적(전통적) 연원이 된다.


4.


둘째, 신(新)존왕주의 국가 기틀 강화운동으로서의 동학혁명(필자는 현재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통칭되는 역사적 사건의 올바른 명칭은 ‘동학혁명’이라고 본다.)이다. 


동학혁명이 혁명이냐 아니냐, 동학혁명에서 동학(천도교)교단 또는 동학의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역할은 무엇이냐를 두고 아직도 역사적인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서로 입장의 대립을 보이는 ‘각 지역’도 ‘동학교단-천도교’에 대한 입장에서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동학’과 ‘동학교단-천도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이거나 마지 못해 인정하는 수준 이상이 아닌 것이다. 그나마 120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 행사를 공동으로 주최한 이래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그리고 천도교중앙총부가 매년 공동 기념식을 거행해 오는 것은 이 문제에 관한 숙원(宿怨)을 대승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기본 토대가 될 수 있다.


한편 동학혁명의 성격을 두고 그 ‘혁명’성을 의심하는 학자들은 동학군이 조선 왕조를 전복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건설할 명확한 의지와 로드맵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점을 거론한다. 이들은 동학혁명의 핵심 지도자인 전봉준의 공초 등에서 오히려 군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근왕주의(勤王主義)를 읽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동학군이 지향한 것은 근대적 민주국가 건설―선거에 의한 정부의 구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학군들은 ‘신(新)존왕주의’를 기반으로, 권귀(權貴=부패 관료)를 배제한 가운데, 민권(民權)을 군권(君權)과 직결(直結)하여 국권(國權)을 강화하고, 이로써 서구적 근대(=帝國主義)의 쓰나미에 대항하는 자주로운 신(新)조선을 만들어가자는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1 다시 말해, 동학혁명은 자생적(자주적), 토착적 근대화 운동이었다.


5.


셋째, 입헌군주국(立憲君主國) 건설운동으로서의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이다.


동학혁명 좌절 이후 10여 년이 경과하는 동안 동학(천도교)교단 내에서는 서구의 역사와 세계 정치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조선의 자주적 근대를 어떻게 주도하여 보국안민-다시개벽의 과제를 성취할 것인가 하는 전략적 모색이 진행되었다. 1900년 초부터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더 거치며 동학(천도교)은 진보회(進步會)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대한제국을 입헌군주국2으로 전환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서구적 근대화의 길을 통해 보국안민의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는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 20만 명의 일시적인 단발(斷髮)과 흑의 착용 운동 등으로 전개된 이 운동은 내부적인 혼선으로 좌절되었고, 당시의 동학교주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에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라는 근대적 제도종교의 명칭으로 선포(宣布)하면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천도교가 취한 보국안민 운동 전략이 교정쌍전(敎政雙全)이다. 다시 말해 동학에서 천도교로의 개신(改新)은 동학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틀로 폐칩(閉蟄)하는 운동이 아니라, 변화된 정세(동학혁명의 좌절과 일진회)에 대응하여 장기적으로 보국안민 운동을 전개하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 교정쌍전은 동학혁명이 ‘국(國)’과 ‘민(民)’을 우위로 한 운동이었던 데서 ‘교(敎=宗敎)와 정(政=國家)을 겸전(兼全=雙全)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이는 천도교(東學) 중심의 근대국가 건설운동이 영성운동(靈性運動)과도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할 때 의암 손병희는 근대 국가의 헌법 체계를 그대로 반영하여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채택하였다. 이 천도교대헌은 그 구조상 입헌군주국 ‘헌법(憲法)’으로서도 손색이 없다.4 실제로 갑진개화운동 전후로 천도교가 내세우던 주요 주장 가운데 하나가 국교(國敎)의 필요성이었다.5


6.


넷째,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측면에서의 교육운동과 언론출판을 통한 계몽운동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개화혁신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도 있으나. 독립적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의암 손병희는 일본 망명(1900~1905) 시절 국내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켰으며 귀국 후에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포함하는 보성학교, 동덕여자의숙(현 동덕여대) 등 전국적으로 십여 개의 각급 학교를 직접 경영하거나 정기적인 보조를 하였다. 또한 보문관(普文館)이라는 출판사를 세워 각종 교서(敎書)와 더불어 <만세보(萬歲報)>라는 일간신문을 간행하여 신문물과 사상을 소개하고, 일진회 등과 사상 노선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천도교가 명시적으로 앞장서고, 그 이념을 뚜렷이 한 이러한 운동 이외에도 1895년의 을미의병,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운동 등에서도 근대적 자주 독립 국가를 향한 모색은 계속되었다. 크게 보아 이러한 네 단계의 보국안민-다시개벽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의 열망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 기미년의 3·1운동이다.6 실로 3·1운동은 조선 후기 이래 민족, 민중운동의 여러 갈래들이 흘러들어 이루어진 한바다였고, 이후 오늘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는 민족민주운동의 연원(淵源)이 되는 운동이었다.7


7.


여기서 다시개벽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더불어 새로워지는 것으로, 하늘과 땅이 나뉘는 선천개벽이 물리적 개벽인 데 비하여 인문개벽이며, 영성개벽이며, 생명개벽이다.8 그 면면한 운동에서 동학(천도교)의 위치는 명시적이며 선두적일 때도 있었고, 암시적이고 추수(追隨)적일 때도 많았다. 그러나 최소한 3·1운동에서 천도교는 전 민족적 역량을 총결집한 대열을 형성하고, 선도하는 데 주도적이며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바, 창도년(1860) 이래 면면히 이어 온 보국안민운동의 전통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을 기반으로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운동을 일시적인 기분이나 일회적인 기회(이 운동으로 즉각적인 독립을 성취하겠다는)가 아니라, 영구적인 혁명,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을 전파하는 운동으로 기획하고 준비해 나아갔다.


3·1운동에서의 ‘주도적이고 선구적인 역할’에 값하기 위하여 천도교는 ‘전심전력(全心全力)’―시쳇말로 올인(all-in)―하였다.


첫째,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한일합병조약’이 선포되는 날 의암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중앙총부의 교역자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국권회복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고 천명하였다.9


둘째, 독립운동을 지도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학숙(學塾)으로서 봉황각(鳳凰閣)을 지금의 강북구 우이동, 당시로서는 인가가 거의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 건립하였다. 이곳에서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3개년(만 2개년)에 걸쳐 전국 각지의 두목(頭目, 敎區 또는 淵源의 지도자) 483명을 7차에 걸쳐(21-49-49-49-105-105-105) 49일간의 특별 연성(煉性=性靈 修煉)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훗날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각 지역의 3·1운동을 기획하고 선도하였다.10


셋째,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전국의 천도교인들에게 일제히 49일기도를 실시할 것을 지시하였다.11 이 49일 기도에서 핵심적으로 강조된 덕목이이신환성(以身煥性)이다.


넷째,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가 경영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그대로 두라”고 하면서, 거듭된 손실을 보전해 주며계속 경영하게 하였다.


다섯째, 천도교중앙대교당을 건립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의 천도교인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하여 일부 자금으로 대교당을 짓고 대부분의 자금은 만세운동 준비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방면의 독립운동 자금, 상해 방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제공하였다. 그 결과로 3·1운동 후에 천도교단은 재정적인 면으로나 인적(조직)인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나 동덕여학교(현 동덕여대) 등 천도교단에서 운영하던 각급학교를 차례로 다른 사람(단체)에게 넘겨주었고, 북촌과 종로 일대에 수십 채에 달하던 교회 소유의 주택(당시 주요 천도교 두목들이 기거했다)들도 채무 변제나 기부(그때까지 지원하던 학교 운영 자금) 등의 형태로 넘겨주고 말았다.12


여섯째,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3·1운동의 이념과 이상과 이론을 동학(천도교)이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이념과 이상과 이론이 ‘기미독립선언서’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이념의 핵심은 ‘생명, 평화, 자주, 자존의 신문명 건설’ 다시 말해, 다시 개벽을 통한 ‘후천 새 문명’의 건설이었다.13

이렇게 1892년~1919년까지만 놓고 보아도, 동학의 보국안민 운동의 흐름은 다시개벽의 큰 틀에서 일관되게 추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호 <개벽의창>은 지난 11월 22일, 종교개혁연대에서 발표한 ‘3·1운동과 다시개벽의꿈’의 원고중 일부를 발췌, 편집 수정한 것입니다.



 이영재, <<근대와 민-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이 만든 민주공화국>>(2018.5.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은 이런 관점에서 조선조 말기의 동학운동을 재조명하였다.

 동학혁명 당시의 존왕주의와 갑진개혁운동에서의 입헌군주국 추진운동은 ‘근대’ 운동의 제1기의 전기-후기로 구분하여 명명할 수 있겠다.

 오문환, <천도교의 이상정치론: ‘교정쌍전(敎政雙全)’을 중심으로>,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16호, 2008, 125-144쪽 참조.

 다만, <천도교대헌>에서 국가의 君主 자리에는 ‘대도주(大道主)’라는 종교 수장이 자리매김되어 있다. 이동초, <천도교제도변천사>(미간행) 서문, “1906년 2월 10일 종령 제5로 발표한 대헌의 체재는 12장(대도주, 원직, 주직, 중앙총부직원, 대교구직원, 중교구직원, 소교구직원, 장실, 중앙총부, 대교구, 중교구, 소교구)으로 편제되고 부칙으로 총칙 36장과 총칙목차 및 의회(제1장 제9조)로 구성되어 있다. (중략) 대도주가 종령을 발포하고 공안을 인준하며 모든 중요 교직을 선임하는 권한을 쥐고 있어 국가의 입헌군주제의 헌정 체제와 흡사한 교회 조직이라 하겠다.”

 오상준,『 初等敎書』 참조.『 初等敎書』는 1907년 천도교중앙총부의 오상준이 간행한 국민계몽 교과서. 근대문명국가의 건설이념과 노선 등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시되는 것이 오교(吾敎-천도교 또는 국가의 정신을 대표하는 ‘國敎’)와 오국(吾國)의 관계이다.

 천도교단 내에서는 1914년, 훗날 3·1운동 때에 독립선언서 인쇄를 책임졌던 이종일(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기도 함) 보성사 사장을 중심으로 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종일은 보성사를 근거로

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기획하여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교단적 차원의 독립운동 전개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때 의암 선생은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고 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나 1917년부터는 이종일이 중심이

된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이 기획되고 있었다(c『f.묵암비망록』) 갑오년(1894)의 동학혁명, 갑진년(1904)년의 개혁운동, 갑인년(1914)의 독립운동을 통칭하여 삼갑운동(三甲運動)이라고 호명하기도 한다.(이현희, <<3·1혁명 그 진실을 밝힌다>>, 신인간사, 1999)

 제1기 = (개화파·위정척사파) - 개벽파 - 동학혁명 - (의병운동) - 자주적 (서구형) 근대화(애국계몽운동, 민회

운동) ; 제2기 = 3·1운동 ; 제3기 = 문화운동·무장투쟁·임시정부 ; 제4기 = 통일운동/민주화운동/근대화(산

업화)운동/생명운동(한살림)·민족(종교)운동(반서구화·반기독교화) ; 제5기 = 3·1운동 100주년 이후의 운동

 『천도교경전』<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開闢運數)'; <의암성사법설> '인여물개벽설(人與物開闢說)'.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 <<천도교와 3·1운동>>,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포덕155(2014).12. 2쪽.

10 이 밖에도 서울 시내 곳곳에는 3·1운동과 관련된 천도교 사적(史蹟)들이 수십 곳에 달한다. 박길수, <<서울, 3·1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포덕152(2011)년 12월 24일; 이동초, <<보국안민의 발길로 서울을 걷다>>,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7. 참조.

11  <33인심문조서>, 

문 ; 천도교는 본년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회를 열 것을 각 교도에게 시달하고 실행한 일이있는가.

답 ; 나는 해마다 기도를 올리는데, 천도교에서는 협의상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문 ; 그 일을 각 교구에 문서로 배포 전달하였는가, 교구장을 모아서 시달하였는가.

답 ; 그것은 교주가 문서로 발표하였다.

문 ; 그 기도는 어느 때부터 조선독립을 성취할 시기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12 이것이 훗날(일제강점기 - 해방과 분단 - 산업화시기) 천도교 쇠퇴의 원인(遠因)이자 근인(根因) 중의 하나가 된다. 이상 <<의암손병희선생전기>> 등 참조.

13 이 항에 대해서는 각 종교가 ‘자기’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소명(疏明)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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