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말 20
[이 글은 20년도 더 전, 21세기를 앞두고 있을 때 <천도교청년회회보>의 '경운동돋보기'라는 칼럼란에 5회에 걸쳐 연재하였던 글이다. 문득 그때 글이 떠올라, 어렵사리 '청년회보를 구해다가' 올린다. 그때의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는 의미'도 있고, 돌이켜 성찰하는 의미도 있다. 그때의 글발과 지금의 글발이 백지 한 장 차이인 것도, 나에게는 '충격'이다. 20년 동안의 횡보(橫步)가 이와 같아서, 두렵고 눈물난다. 개벽신문 80호(2018.12)에 올린 글을 수정보완하여 '말의 신성'을 돌아보는 글로 재구성하였다.]
21! 천도교인이라면 누구나 3·7자 주문을 떠올리는 숫자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21세기’라는 말을 떠올릴 것이다[이 글을 쓰던 때는 21세기를 3년 앞둔 때였다-필자 주]. 이제 몇 년 있으면 21세기다. 이러한 구분(21세기)을 가능하게 하는 ‘서력기원'은 서구적인 개념으로, 천도교에서는 '21세기’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외국에 나가서는 부득불 영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지금으로서는 '1997년'이니 '21세기를 앞두고 있다’는 식의 표현을 무조건 도외시할 수는 없다.
앞으로 4년 후(2001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백년(세기)이 시작되는 해일 뿐 아니라 새로운 ‘천년(밀레니엄)’이 시작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는 벌써 '2000년까지 몇일이 남았다(엄밀하게 따지면 200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카운트다운을 하고, 국가적으로 1999년 12월 31일에서 2000년 1월 1일 사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연구하고 계획을 수립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훨씬 이전부터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21세기준비위원회' 같은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에 대비해 오고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그와 유사한 위원회가 없지 않다. 한편으로 소위 ‘세기말적 징후'도 비등하여 몇년 전 우리 나라에 풍미했던 ‘말세론', '종말론’이 2000년을 앞두고는 더욱 기승을 부리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리는 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세계가 처해 있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대한 성찰을 앞세워 미래를 전망한다.
20세기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지난 1900년간의 변화보다 더 다양하고 거대한 변화와 부의 축적이 있었던 세기로 기록하기도 하겠지만, 또한 제국주의 침략의 시대였으며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잔혹한 전쟁이 계속된 시기로 기록할 것이다. 또 19세기 이래로 계속된 과학문명의 발달은 인류의 삶의 질을 ‘유토피아적’ 수준으로 향상시켰으나 다른 한편으로 지구 생태계가 수천년 혹은 수십만, 수백만년 동안 갈고 다듬어온 질서를 파괴하여 인류에게 ‘멸망'의 위협을 가시화한 세기로 기록하리라는 것이 그들이 정리해 낸 참회(微海)의 줄거리이다[이런 류의 '위기 담론'이 이 글을 쓴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 조금씩의 단어만 달리하며,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온 것일 수도 있고, 그나물에 그밥인 이야기여서일 수도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지난 20세기의 세계(19세기까지의 세계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를 이끌고 온 서구의 합리주의 , 실용주의 또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등의 철학, 사상, 사조는 새로운 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을 전망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철학자들은 항상 실제의 것을 과장하고 미화하여 당위적인 수준에서 이야기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전망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도 쉽사리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분위기를 천도교 안으로 끌어들여 보면 한편으로 천도교는 지난 백여 년 동안 초지일관 선천의 운수가 다했음을 이야기하고 후천개벽을 ‘선언'해 왔으므로 지금의 ‘세기 논쟁’이 새삼스러울 것 없다고 얘기함직하다. 나아가 그 모든 것들이 ‘산하대운 진귀차도(山河大運 盡歸此道)’의 징후가 아니겠느냐며 회심의 미소를 지음직도 하다. 이제 뚜렷한 사회 운동의 흐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생명운동'이나 각종의 ‘환경운동', 여러 형태의 ‘자연회귀 운동' 등이 얘깃거리가 될 때마다 ‘동학’이나 ‘해월(신사)’이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그 증거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가 어떻든 간에 이 천하(우주)의 운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한울님께서 정하실 일이므로 지금 이 변혁의 시기를 살아가는 천도교인으로서 살피고 임해야 할 인사(人事)는 그것대로 우리 앞에 놓여 있으리라는 것도 조금만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헤아릴 수 있을 만한 사실이다[세계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흘러가고 싶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 필자주: 이 말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쪽으로 생각의 전환이 있었다].
천도교의 21자 주문과 앞으로의 세기가 21세기라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 이 시점의 천도교의 형편과 세상 돌아가는 형편으로서는 그렇다고 본다. 천도교 안의 형편을 보자면 지금 우리는 당장 한 해 앞의 사정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서 염려하고 준비할 여유도 갖고 있지 못하며, 지난 수십년 동안 교리와 교사 ‘공부’를 하다간 말고, 다시 처음부터 하다간 말고 하여 아직도 ‘야뢰' 선생의 ‘틀’ 안에 갇혀 있고[필자 주 : 필자가 야뢰의 '신인철학'을 처음 공부하겠다고 달려들었던 것이 1987년이다. 그때 3학년이던 나, 2학년이던 후배, 1학년이던 후배가 함께 독회 모임을 시작했다가 몇 번 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아직까지 민족종교의 틀을 완전히 깨내지 못하고 거대담론(보국안민, 포덕천하 혹은 인내천, 시천주 동)의 틀에 매몰된 채 인간 세상의 위위세세(危危細細)한 구체성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한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천도교가 지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에 했던 ‘민족적’ 행위들 ‘쯤'은 ‘역사 속의 거사(擧事) ’로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혹 남은 ‘꺼리'들은 제각기 필요한 대로 가져다 유효적절히 쓰고, 먹고, 마시고, 소화해내고 있는 중이어서 천도교의 장래에 대해서는 입바른 걱정 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당연하고 논쟁거리 되지 않는 이 사실은 다시 한번 지적하는 것은 단순한 숫자상의 유사함 이외에 우리가 21세기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결코 당연한 사실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때 문이다. 그것은 우리 천도교로 보아서도 그러하거니와 지금 세계 각처에서 모색하고 있는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을 위한 패러다임의 구축'이라는 작업의 성공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서양에서 발달해 온 논리학에서 ‘나는 나고, 내가 아닌 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형식논리’라고 하고 ‘내가 곧 너고 너가 곧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변증논리'의 연장선상에서는 그러하다. 일반적으로는 변증논리는 형식논리보다 한차원 높은 인식의 방법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 우선 소용되는 것은 차원 높은 변증논리보다 형식논리이다.
‘내 돈은 내 돈이고 남의 돈은 남의 돈'이라고 인식해야만 정상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내 돈이 곧 내 돈이고 남의 돈도 곧 내 돈이다'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 생각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면 큰 도둑이거나 혹은 이미 모든 세상사에 초연한 ‘신선’일 터. 정신병자는 정신병원데 , 큰 도둑은 감옥에, 신선은 ‘신선나라’에서 살아야지 보통 세상사람에 무원칙하게 섞여 살면 세상이 어지럽고 복잡해진다.
현세에 신선과 비슷하게 세상을 살다 간 사람으로 얼마 전 입적[1993.11.04]하신 성철 스님을 떠올리면서 ‘네 돈은 네 돈이고 내 돈도 네 돈이다’[ft.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일반 사회생활을 하신 분이 아니라 산사에 의탁(依託)해 사시면서 그 맑고 청정함을 세상사람에게 베풀며 살았던 수도승이다. 수도승의 논법으로 저잣거리를 횡행하다가는 비명횡사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현세는 '내 돈은 내 돈이고, 네 돈도 내돈이다'가 판치는 세상이고 보면, 최소한 '내 돈은 내 돈이고, 네 돈은 네 돈이다'라는 형식논리만이라도 통용된다면, 지금에 비해서 지상천국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우리 어렸을 때 하던 놀이 중에는 놀이들 중에는 땅바닥에 금을 그어 놓고 하는 것이 많았다. '비석치기'도 그렇거니와 ‘오징어', '땅따먹기', '고누' 등이 모두 그렇다. 그 놀이의 규칙은 대부분 땅바닥에 그어진 금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금의 이쪽은 우리 편, 저쪽은 재네 편, 금 이쪽은 우리 땅 저쪽은 재네 땅…. 그 놀이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금 밟으면 죽는다'는 규칙이다.
"금을 밟으면 죽는다!"
금을 밟는다는 것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살이로 말하면 나와 나 아닌 것,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을 구분하는 형식논리를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 구분이 모호해질 때 우리는 정체성(正體性)의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곧 파멸로 이어진다. '나'와 ‘남’을 구분할 수 있는 ‘형식논리'가 ‘이 풍진 세상’ 을 살아가는 보통사람의 삶의 기본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차원높은 변증논리는 이러한 형식논리를 충분히 익힌 다음에 받아들여야 할 논리이다.
천도교의 지금을 이런 틀로 들여다 보면 할 말이 많다.
'사람이 곧 한울'이라고 말하는 것을 ‘서(구)학(문)'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변증논리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고 신은 언제나 신이어서 사람과 신의 구분이 절대적이고 엄격한 서양종교에 비해 보면 확실히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서 적잖은 문제가 생겨난 것 같다.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고 하는 변증논리를 기본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일반인은 물론 천도교인들마저 나와 한울님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사람)의 정체성도 상실할 뿐 아니라 한울님의 정체성도 상실하였고, 그것이 곧 신앙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신앙의 혼란은 곧 태도의 혼란으로 나타난다. 말로는, 머리 속에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고 얘기하거나 또 그렇게 생각하면서, 실제 삶은 그런 진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상에서 지은 죄을 천상의 여호와에게 빌어 사면받는 서양의 종교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어기는 자체가 죄이기는 하지만 때로 그럴 수도 있다는 점이 이해된다. 인간은 어차피 불완전한 존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사람이 곧 한울'이라고 해 놓고 출발을 하면 지상에서 벌이는 인간의 행태들은 참으로 해명하기 어렵다. 천도교인이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말씀에 따라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사실은 기독교인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인 셈이다.
천도교단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이 천도교적인 것이고 무엇이 천도교인으로 삼가야 할 것인지가 모호하다. 천도교인은 천도교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천도교의 실체를 알아듣기 쉽게,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 이러저러한 말로 설명해서는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여주거나 손에 쥐어 주어야만 확실히 알아 듣고 믿게 되는 것이다. 천도교 정체성의 혼란 또한 부재는 눈에 보이는 신앙 곧 ‘천도교 철학(천도교학)의 부재'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지금 천도교의 어려움은 금이 어디에 그어져 있는지 모르거나 혹은 금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겪는 일이다. 천도교인은 지금 한마디로 금올 무수히 많이 밟고 다니는 형국이다. 어디가 금이고 어디가 내(사람) 땅이고 어디가 한울님 땅인지 모르는 채 좌충우돌,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사이 교단은 쇠락을 거듭하고 용시용활은 커녕 세상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난 보수적인 교단으로 지목(指目)을 받게 된 것이다.
글의 출전
1. 이십일(21) 자 - <천도교청년회회보> 제20호, 포덕138(1997).7.2. 11-13쪽.
2. 금 밟으면 죽는다 - <천도교청년회보> 제21호, 138(1997).8.2. 8-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