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아사히신문》 특집
글 : 죠마루 요이치(上丸洋一) | 아사히신문 기자
번역: 조성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이 글은 <개벽신문> 제83호 (2019.4)에 게재된 글입니다.
이 글은《 아사히신문》의 죠마루 요이치 기자가 2018년 10월 13일부터 16일까지 <한일시민이 함께 가는, 동학 농민군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이하, ‘동학기행’으로 약칭)에 참가하고 나서 쓴 답사기 <<東學農民戦争をたどって>>의 전문 번역이다. 이 여행기는 올 해 1월에 《아사히신문》에 총 5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는데, 연재 기사의 제목과 날짜는 아래와 같다.
1.「민중저항의 땅, 첫 대면에서 눈물」, 2019년 1월 15일
2.「회한의 가슴에서 배운 불살생의 정신」, 2019년 1월 16일
3.「일본 병사의 일지, “고문한 뒤에 총살”」, 2019년 1월 17일
4.「자기 식 근대를 추구하여」, 2019년 1월 18일
5.「청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2019년 1월 21일
한국의 서해안, 충청남도 태안에 있는 백화산 기슭에 석조탑이 서있다. 맨 위에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청일전쟁이 한창인 1894년 가을, 일본군의 조선 침입에 저항하여 조선의 자주자립을 외치는 민간종교 ‘동학’에 공명하는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태안의 탑은 전투(동학농민전쟁)에서 스러져 간 선조를 추모하는 위령탑이다.
작년 가을, 탑 근처에서 처음 대면한 두 사람의 여성이 눈물을 지으면서 말없이 서로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한 사람은 동학농민전쟁의 유적지를 탐방하는 <동학기행>에 참가한 동경의 전 초등학교 교사 미토메 야요이씨(三留弥生, 72). 다이쇼(大正)~쇼와(昭和) 시기의 여성해방운동가인 ‘히라츠카 라이쵸(平塚らいてう)에게 배우는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동학농민혁명유족회’의 지역조직 회장인 문영식씨(64). “이 주위는 수많은 농민들의 시체가 널려 있어서 강물이 피로 물들었다고 들었습니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일어나서 일본군뿐만 아니라 그 지휘 하에 있던 조선정부군이나 농민에 압정을 가한 지방관리, 지주층과도 싸웠다. 이 때문에 농민군은 지배층에 대든 ‘폭민’, ‘난민’이라고 오랫동안 냉담한 대접을 받아 왔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동학당의 난’이라고 불린 데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문씨의 아버지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이 지역의 전몰자 명부(278인)를 작성하는 조사에 분주하는 한편, 위령탑 건립을 위해 가가호호를 돌면서 쌀이나 보리를 기증받았다. 문씨도 도왔다. 반대의견도 적지 않은 가운데 탑은 78년에 완성되었다.
문씨와의 만남을 미토메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민중의 저항의 역사는 잊혀지기 쉽습니다. 그것을 문씨는 현대에 다시 불러왔습니다.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런 생각이 북받쳐 올라와서….” 이번 동학기행의 리더로 근대 한일관계사를 연구하는 역사가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교수가 위령탑으로 이어지는 길 입구에서 인사를 했다: “동학농민전쟁은 저의 할아버지 세대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닙니다. 3만여 명의 조선 농민이 학살되었습니다. 일본인의 한사람으로써 마음속 깊이 사과드립니다.”
충청도, 전라도 등 각지에서 수천 명, 수만 명 규모로 봉기한 농민군은 화승총과 죽창을 무기로 수도 한성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투력에서 뛰어난 일본군에 압도되었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농민군이 승리했다고 하는 곳이 태안의 동쪽, 승전곡 전투이다. 전장지의 계곡에 투어버스가 도달한 순간 주위에는 어둠이 다가왔다.
이 지역의 중학교 교사이자 동학연구자인 장수덕씨(57)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은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고, 저도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닙니다. 똑같이 역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내셔널리즘을 넘어서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함께 앞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찾아간다.
이번 동학기행에서도 언제나처럼 한국의 동학연구 권위자인 박맹수 원광대학교 교수(현 원광대학교 총장)가 설명을 해 주셨다: “평화적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려고 한 동학의 정신은 1919년의 3.1독립운동에서 시작하여, 독재적인 이승만 정권을 학생과 시민의 데모로 무너뜨린 1960년의 4.19혁명, 80년의 광주민주화투쟁, 그리고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킨 2016년의 촛불집회로 계승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박씨는 가슴 속에 깊은 회한을 간직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군의 실권을 쥔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하여 일체의 집회와 데모를 금지하고,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연행하였다. 이에 저항하여 전라남도 광주의 학생과 시민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를 일으켰는데, 군은 이들을 힘으로 눌렀다.
당시 24세의 육군중위였던 박씨는 광주의 북방에서 약 180킬로, 충청북도 청주 근처의 지하벙커에 있는 사령부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상층부의 명령을 암호를 통해 전국의 부대에게 전달하고, 부대로부터의 정보를 군 간부에게 보고하였다. 광주의 계엄군은 데모대를 향해 용서 없이 발포하여 시민 1,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생겼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제대한 박씨는 광주의 참상을 찍은 비디오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간접적이긴 하였지만 시민의 살상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어떻게 자국의 시민을 학살했는가? 전두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사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반봉건·반침략을 추구한 동학농민운동이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좌절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박씨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실증적인 동학연구에 몰두하였다. 박씨는 말한다: “동학농민군은 가능한 한 적을 죽이지 않는 불살생의 정신으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1894년 2월, 농민군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다음과 같은 행동규범을 지시한다
(요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적을 이기는 것을 최상으로 한다.
부득이하게 싸울 때에는 가능한 한 인명을 해치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긴다.”
이들 농민군의 충청도 연산에서의 전투 상황을 일본의 ‘동학당토멸대대’(후비보병 독립제19대대)의 대장인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가 기록하고 있다: “정오, 병사들이 출발하려는 순간, 전면에 있는 산에 검은 옷을 몸에 걸친 수천 명의 적이 수백 개의 깃발을 나부끼며 나타났다. 얼마 안 있어 주위의 산은 일순 백의의 병사들로 가득 메워졌다. 농민군은 적어도 3만 명 이상에 달하리라 생각된다.”(南小四郞,「東學堂征討略記」) 농민군은 시각에 호소하여(위세를 과시하여-편집자 주) 일본군을 위협하고, 상대를 죽이지 않고 쫒아내려고 했던 것 같다.
약 660명의 병력이었던 동학당토멸대대는 1894년 11월의 파병에서 다음 해 2월의 작전 종료까지, 기록상으로 단 한 명의 전사자를 냈을 뿐이었다(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明治日本の植民地支配」, 전병자(戰病者)는 제외). 그렇다면 일본군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것을 말해주는 일지(日誌)가 최근에 확인되었다.
헌 신문에 둘둘 말린 인간의 두개골 6개가 종이박스에 넣어진 상태로 홋카이도 대학(北海道大學)의 연구실에서 발견된 것은 1995년 여름이었다. 그중 하나는 표면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한국동학당수괴(韓國東學党首魁).” 다음과 같은 취지의 메모도 첨부되어 있었다: “1894년에 조선 남서부 진도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로, 1906년에 ‘채집’되었다.”
이 두개골이 왜 여기에 있는가? 홋카이도대학은 문학부에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막말(幕末) 유신(惟新)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73, 현재 명예교수) 등이 사료수집과 현지조사를 실시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유골은 96년에 한국에 반환되었다.
이 유골조사로 동학농민전쟁 연구는 크게 진전된다. 97년 봄에 박맹수 교수가 홋카이도대학에 유학하여, 4년간을 일본에서 지내면서 한일공동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일본의 동학당토멸대대(후비보병 독립제19대)의 병사는 시코구(四國)의 4개현에서 소집되었다. 2012년에 이노우에씨는 도쿠시마현(德島縣) 출신의 병사가 쓴 종군일지의 존재를 알았다. 병사는 전투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서술해 나간다(요지).
“1894년 12월 3일.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6개 마을 사이에서, 앞에 가는 다른 부대에 의해 민간 수백호가 불에 탔다. 수많은 시체가 길바닥에 나뒹굴어 개나 새에게 먹히고 있었다.
1895년 1월 2일. 밤이 되자 동학농민 5명을 체포하였다. 고문을 한 다음에 총살하고 시체는 불태워 버렸다.
12일. 해안을 따라 전진. 적의 잔당 11명을 체포하여 죽였다. 이 외에도 3명이 몸이나 옷에 불이 붙은 채 도망가다 결국에는 바다에 뛰어 들어 죽었다.
31일. 농민군의 잔당 7명을 체포하여 밭에 일렬로 세워놓고 총에 검을 장착하여 일제히 돌격하여 죽였다. 보고 있던 조선 정부군 병사는 경악하였다.”
토멸대대의 파견에 즈음하여 육군참모차장 가와카미 이소로쿠(川上操六)는 전선을 향해 이렇게 명령하였다: “동학당에 대한 처치는 엄격함을 요한다. 앞으로는 모두 학살해야 한다….”(朴宗根,「日清戦争と朝鮮」) 포로에 대해서는 당시 이미 다음과 같은 원칙이 확정되어 있었다. “포로는 죄인이 아니다. 적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그 자유를 빼앗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有賀長雄,「日清戦役国際法論」, 1896년)
이노우에씨는 이렇게 말한다: “조직적인 포로의 학살은 중일전쟁 이후라고 여겨져 왔는데,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일본군은 최대 사거리 1,800미터의 라이플총으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일본의 한 병사는 고향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발백중, 실로 유쾌한 느낌이었다.”(95년 1월 18일자,《宇和島新聞》)
화승총이나 죽창으로 싸우는 농민군의 전사자는 3만에서 5만으로 추정되고 있다(조경달,『이단의 민중반란』). 고치대학(高知大學)의 오바타 히사시(小幡尙) 교수(50)는 전몰자 위령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고치현(高知県) 내의 묘지를 조사해 왔다. 그러던 중에 2015년에 동학당토멸대대의 제3중대장의 묘를 고치 시내에서 확인하였다. 오바타씨의 안내로 이 묘를 보았다. 묘지명에 “渡韓 擊東學党賊”(한국에 건너가 동학당 적을 격퇴)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1894년 7월,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습격, 점령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일본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선전(宣戰)의 조서(詔書)에서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를 배제시켜 조선의 독립을 돕고, 그것으로 동양의 평화를 구축한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각 신문사는 청일전쟁이 ‘의전(義戰)’(도의적으로 올바른 전쟁)임을 강조했다. 일본에 있어 동학농민군은 의전을 방해하는 폭민(暴民)이자적도(賊徒)였다.
한편,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일본의 진의는 다른 곳에 있다고 보았다. 패전 후에 있었던 재판에서 전봉준은 봉기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요지): “일본군이 왕궁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병탄(併呑)하려 한다고 생각해서,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봉기했다.”(1895년 5월 7일자《도쿄아사히신문》) 조선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이야말로 ‘적도(賊徒)’였다. 모든 것이 예견했던 대로 일본은 15년 후에 한국을 병합한다.
동학농민전쟁이 한창이던 1894년 12월 3일《카가와신보(香川新報)》(《시코쿠신문(四国新聞)》의 전신)은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토벌해서는 안 된다. 일반농민을 토벌하거나 다치게 하면 후세에 원한이 남는다. 백 명이 죽으면 천 명이 원망하고, 천 명이 죽으면 만 명이 원망한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의 덕을 오래도록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시에 이런 비판적인 논조는 드물었다.
동학농민의 사상과 행동을 높게 평가한 일본인도 있었다. 아시오광독(足尾鑛毒) 반대운동의 지도자인 다나카 쇼조(田中正造)이다. 다나카는 이렇게 말했다: “동학은 문명적이다. 덕의를 엄격하게 지키고 인민의 재산을 빼앗지 않으며 부녀자를 욕보이지 않는다. 조선 100년의 대계는 정신으로부터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군이 이 새로운 싹을 짓밟았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1896년「 조선잡기」)
이후에 다나카는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화해서는 안 되고…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일기에 쓰고 있다.
이번 동학기행에 참가한 동학사상연구자 조성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나카 쇼조도 동학농민도 서구 근대를 모방하는 것도 아니고 전(前)근대에 머무르는 것도 아닌, ‘자기식 근대’(自前の近代)를 추구했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평등한 세계를 민중이 주체적으로 연다는 이념에 있어서는 양자가 공통되고 있습니다.”
일본군은 1895년 1월, 농민군을 조선 남서부의 진도까지 추격하여 ‘토멸(討滅)’했다. 그런데 공식 전사(戰史)인『 메이지 28년 일청전사(日清戰史)』(전8권)에는 3만 명 이상의 조선민중이 전사했다고 하는 동학농민전쟁에 대해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다. 제8권에 약 3쪽 분량의 ‘폭주진정(暴徒鎭定)’의 경과가 쓰여져 있을 뿐이다(井上勝生,「明治日本の植民地支配」).
2001년에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동학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동학정신은) 이 나라의 자주독립과 민주화의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 그리고 지금도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개혁이라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으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을 알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89세의 역사가 나카츠카 아키라씨는 동학기행에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기행은 2006년부터 13년간 매년 실시되었고, 참가자는 총 300명이 넘는다.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 이 어구가 나카츠카씨의 눈에 들어온 것은 1994년 봄, 후쿠시마현립(福島県立) 도서관에서 청일전쟁의 공식 전사(戰史)의 ‘초고’를 열람했을 때였다. 그때부터 꼭 100년 전인 1894년 7월, 일본군이 조선왕궁을 어떻게 습격하고 점령하여 국왕을 포로로 삼았는지 그 경위가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공식 전사에서는 왕궁 옆을 통과한 일본병사가 왕궁내로부터 조선병사에게 총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응전했다고 서술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고의 기술은 실제로는 일본군이 먼저 왕궁에 공격을 가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카츠카씨는 계속해서 연구를 거듭하여 『歴史の偽造をただす』(박맹수 역,『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로 정리했다. 나카츠카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말이 있다. 한국의 유력 일간지《동아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던 저널리스트 고 권오기가 1995년에《아사히신문》 주최의 심포지엄「전쟁과 신문」에서 한 말이다. “(일본의 여러분은) 왜 한국의 동학당봉기에서 시작되는 100년 전의 청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지금까지 일본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려고 하지 않는가?”(今津弘,「ジャーナリスト, その優しさと靭さ」)
실은 이 글을 쓰고 있는 기자도 권씨가 2003년에 일본에 왔을 때에 같은 취지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청일전쟁에 대해서 막상 무엇을 알고 있을까 스스로 자문했다가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일본의 전쟁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많은 경우에 쇼와(昭和) 초기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조선이나 대만에 파병하여 식민지로 삼은 역사가 탈락된다.
동학농민전쟁의 연구는 최근 20년간 크게 진전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청일전쟁 관련서들을 펼쳐보면 청일전쟁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는, 그것도 3만 명 이상의 농민이 전사한 동학농민전쟁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책들이 적지 않다.
동학기행 중에 들른 충청남도 공주에서 동학농민군을 기념하는 사업에 종사하는 지역 시민단체와 교류를 하였다. 그 자리에는 식민지시대에 학교에서 일본어 사용을 강요당한 김성순씨(89)의 모습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시대에는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나카츠카씨의 저서를 읽은 것을 계기로 교류를 거듭해 왔다.
“역사는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움직였다가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어져서 비로소 세계가 움직이고 역사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동학기행의 일정을 마치고 버스가 서울의 호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카츠카 씨는 마이크를 손에 잡았다: “13차례나 지속해 왔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년에도 지속해 나갈 생각이니까 그때에도 참가해 주십시오.” 온화한 웃음과 박수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