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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16. 2019

신몽유도원도(新夢遊桃源圖)

-심종록의 시세상(4)

심 종 록



강 건너 언덕 복숭아나무 늘어선 마을에도 피자가게가 있다면

취직해서 피자를 구우리라 피자가게는

하릴없는 날갯짓의 천사와 눈빛이

살아있는 약쟁이들이 바삐 오가는

열락의 뒷골목이어도 좋아라

당신의 취향에 따라 토핑한 피자도우

가스오븐에 넣고 익기를 기다리리라 때로

인질극을 즐기리라 변심한 애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테이블 부수고 유리창을 깨고

고래고래 절규하는 당신

쓸쓸하고 황폐한 사월의 치정을 지켜보리라

좀 더 잘 보이라고 일제히 등을 내거는 꽃나무들




몽유도원도

이상향은 어디쯤에 있을까. 거칠고 험한 산봉우리를 하얀 구름이 여유롭게 감싸고 계곡을 휘감아 내리는 물소리는 거칠 것 없다는 듯 사나운데, 깎아지른 벼랑 사이로 뚫린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좁다란 길을 위태롭게 돌아나가면 그윽한 꽃향기와 더불어 바람에 흩날리는 복숭아꽃잎들 사이로 신비롭게 펼쳐지는 외딴 마을이 나타날 것인가.


사시사철 복숭아꽃 바람에 흩날리는 그곳은 쿤룬산맥 서쪽에 있을까? 헤일 밥(Hale Bopp) 혜성 뒤에 따라오는 우주선을 타야만 도달할 수 있는 태양계 너머일까. 샹그릴라, 유토피아, 이상향, 지상낙원, 천국, 극락, 또는 죽은 자들의 땅이라고도 불리는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그곳을 보았고, 도화원 화가 안견에게 그곳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는 익히 알다시피 둘째 형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상향을 바라던 사람들의 최후가 대부분 비극적이듯이.


몽유도원. 진위여부를 막론하고 고통스런 이생과는 정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는 복락의 땅이 저곳 어딘가에 존재하고 거기서 위로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람들은 곤고한 현실을 인내한다. 어떤 나라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고 체제유지를 위해 ‘그곳에서의 보상’을 약속하며 자국민을 순교자-테러리스트-로 만들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어서 간다는 ‘저곳’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바로 여기, ‘이곳’을 축복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피땀을 흘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성육범四聖六凡 십계호구十界互具의 세상이다. 지옥 속에도 천국이 존재하고 무량극락 속에도 지옥이 함께 깃든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라는 노랫말처럼 없으면 애타게 갈구하지만 손에 쥐면 기쁨도 잠시 금방 시들해지고 마는 인간들에게 영원불변의 천국-무릉도원-은 그 자체로 끔찍한 던전Dungeon이 분명하다.


오욕칠정의 모든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무화되어버리는 이상향이라면 없느니만 못하다. 몽유도원에도 눈물과 고통은 있을 것이다. 슬픔과 분노도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곳이 아름다운 이유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유무상자有無相資의 도리 때문이 아닐까. 그런 세상이 아름다워서 죽듯이 잠들었던 꽃나무들도 봄이 오면 일제히 깨어나 꽃 등불 환하게 밝히는 것이다. 설사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때문에 눈물 흘리더라도,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운 여기가 몽유도원이다. 바람이 불고, 그림처럼 복숭아꽃 흩날린다.


심종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쾌락의 분신 자살자들』등의 시집과 전자시집『 빛을 향해 간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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