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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16. 2019

우리는 우리를 레츠피스
그리고 벽청이라 부르기로 했다

- 아띠(황지은)


[편집실 주] 이 글은 2019년 3월 6일 개학한 '개벽학당'의 학생인 "벽청-개벽하는 청년"을 대표해서 아띠(황지은) 님이, 벽청들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진진하게 밝힌 글입니다. 

* 이 글은 <개벽신문> 83호(2019.4.) "청년철학(4)"에 실린 글입니다.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여행 중 철원 노동당사 앞에서 

때는 2017년 가을,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교사로 일하거나 로드스꼴라를 수료한 여덟 명의 청년들은 통일부장관상을 받았다. "공공(公共)하는청년"이라는 팀을 결성해 통일부에서 주최하는 <통일창업아이디어공모전>에서 <남·북한 교사를 위한 수학여행 로드맵>을 제안했고 운 좋게 수상을 한 것이다. 상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공공(公共)하는청년은 한반도 평화체제에 기여하였기에 이 상을 수여합니다.’


한반도 평화에 기여했다니. 좀 멋졌다. 때마침 포털에는 한반도 전쟁설이 실시간 검색어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과 동맹(한국)을 방어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며, 만약 김정은을 중단시키기 위해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전쟁은 한반도에서 벌어질 것이다, 수천명이 죽는다고 해도 그들은 거기서 죽을 것이고 여기서는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소식이었다.


전쟁이 터진다는 소문이야 까먹을 만하면 들려오곤 했다. 또 저러네,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있다고 전하는 아나운서의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옆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야, 전쟁난대 라고 말하곤 했다. 친구는 그래? 하고 다른 짓을 했다. 그 표정이 평온해보여서 우리는 미처 긴장한 어깨와 목덜미를 감지하지 못하곤 했다.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더라도 아직 전쟁은 터지지 않았고, 되도록 멀쩡한 정신으로 학교에 가야하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데이트도 해야 했으니까.


우리와는 다르게, 트럼프라는 사람은 전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의 삶은 전쟁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한반도 평화체제에 기여하든 말든 전쟁을 일으키고 끝내는 일 또한 우리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트럼프의 뻔뻔하고 명료한 말에 화가 났다. 그는 손쉽게 우리의 뿌듯한 기분을 망치려고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이 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산 우리야말로 전쟁이 무엇인지 체감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사실 우리는 알았다. ‘무엇’을 위한 전쟁은 없다는 것을. 다 같이 공멸하는 상상은 망상이 아니었으므로.


그럼에도 브라질 퍼커션을 연주하며 이 경사스러운 일을 자축하기로 했다.

곧장 테이블에 둘러 앉아 논의를 시작했다.


“축하보다 더 한 걸 하자.”


곳곳에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쉽게 오르내리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한반도에 살고 있고, 살아갈 청년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야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모두 조금 멍해졌다. 평화를, 평화를, 그러니까 평화를…? 하자! 평화를 바라거나 원하거나 희망하는 일은 어쩐지 답답한 구석이 있으니, 지금 여기에서 평화를 하자. 그렇게 우리의 이름은 청(소)년 평화퍼포먼스 그룹 ‘레츠피스’가 되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자리에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말을 하려니 조금 불안하고 신이 났다.


그 해 가을과 겨울, 레츠피스는 광장의 아이돌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하던 날,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사회자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자꾸 평화를 사랑하는 대학생들이라고 소개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니예요, 저희는 평화를 하는 청년들이라고요!”라고 항의하며 무대에 올라섰다. 

로드스꼴라 레츠피스의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기사( 중 사진에서...(<신안신문>)

대한민국 광장의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청년 그룹이 나타난 것이다. 어느 대학에도 속하지 앉은 채 자발적으로 조직된 청년 그룹이었으며, 그중 몇 명은 보라색 분홍색 파란색 무지개 색 머리칼을 휘날렸다. 드럼통처럼 커다란 북을 허리에 매고, 찰랑찰랑 슈깔루를 흔들고, 삐이익-호루라기를 불며, 걷고 뛰어 종로통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시민들과 행진을 했다. 피리 부는 소년처럼 시민들은 평화하는 청년들을 에워싸고 함께 걸었다. 두두두둥둥-세상이 뒤집어져라 한바탕 퍼커션을 치고 나면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당신을 생각합니다. 평화, 라는 말을 어떻게 써야 낡고 진부해 보이지 않을지 고민되지만 잠시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평화의 핵심은 일상성의 유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요일 아침 이불 속의 나른함, 비를 홀딱 맞고 나서 하는 따뜻한 샤워, 창이 큰 좌석에 앉아서 하는 기차여행, 망설이며 보내는 문자메세지…. 그게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라서가 아니라 그런 일상성이 확보돼야 다음 수순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어서, 우리는 평화를 이야기 합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하루, 연인끼리 밤새 말다툼하는 하루, 그냥 그래도 되는 하루.1 그게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일상성이 확보돼야 다음 수순의 삶을 생각할 수 있어서 더욱 간절한 하루. 그 하루를 지속시키키 위해 레츠피스는 북을 칩니다.


안녕하길요,

레츠피스의 첫이야기를 수신해 준 당신

언젠가 만날지도 모르는 당신

우리 서로

안녕하기로 해요.


레츠피스의 편지는 어쩐지 투쟁! 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선동적인 구호도 없었다. 일군의 사람들은 우리의 언어를 낯설어했다. 수천의 시민을 마주하며 그 편지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울렁였다. 등골이 저릿했다. 공연이 끝나면 다 같이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고운이 말했다.


지금까지 광장에서 내 그룹, 내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에 서서 어떤 목소리를 내야할지 헷갈렸거든. 진부하고 재미없어 보이기도 했고. 근데 레츠피스 하니까 너무 재밌는 거야. 이제야 몸에 피가 도는 기분이 든다니까. 한국에서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굉 장히 필요한 일이었구나, 싶었어.


하야티가 말했다.


엄청나게 에너지를 쓰는 일이지만 동시에 내 삶을 달구는 일이랄까. 같이 하는 사람들도 즐겁고.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문제가 내 삶으로 확 들어온 거 같아.


나니가 말했다.


스무 살이 된 이후에 가장 열심히 산 하루였어. 


밥을 먹고 나면 노래방에 갔다. 하야티와 노마가 마이크를 붙잡고 우리는 레츠피스다아아아-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흥을 돋궜다.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재밌게 놀 수 있다니. 그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우리는 다시 직장인과 알바생으로, 대학생은 아닌데 뭔가를 하고 있는 청년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조금 더 촘촘하게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레츠피스를 운영해나갈 열 명의 청년들은 스스로를 ‘피써’라 이름 붙였다. Peace Surfer, 명랑하게 평화의 파도를 타는 청년들이라는 뜻이었다. 함께 활동할 단원들은 ‘렛피’라 부르기로 했다. 발음해 보니 좀 웃기고 기분 좋은 단어였다. 

우리는 어떤 단체가 되고 싶은가. 질문했다. 

우리를 어떤 언어로 설명해낼 것인가. 고민했다.


레츠피스는 브라질 바투카다를 연주하는 퍼커션팀입니다. 남미의 리듬을 연마하고, 호흡을 맞추어 행진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지구생명과의 상생을 꿈꾸고 실천합니다.


그런 팀이 되기로 했다. 나아가 어떤 마음자리를 가지고 레츠피스를 해나갈 지 이야기 나눴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지금 슬프고

지금 아프고

지금 배고픈

너에게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너에게.

내 호흡을

내 리듬을

내 눈물을

경계를 넘어

분단을 넘어

너에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레츠 피스


국경이든 분단이든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마음자리 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만 코 박고 있지 않고, 전 세계의 억압받고 차별 받는 이들에게 마음의 연대를 전할 수 있는 사람, 함께 사는 이웃으로서 세계시민으로서 너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 어느 자리에서든, 어떤 이야기를 하든 레츠피스의 마음을 가지고 퍼커션을 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열 명의 피써들은 레츠피스를 지속적으로 운영해나가기 위해 몇 가지 약속을 했다. 시간이 지나 새로운 피써들이 들어오더라도 이 약속을 기억했으면 했다.


몸과 마음과 시간과 돈을 들여

레츠피스를 지속적으로 꾸려나가는데 기꺼이 헌신하고

새로운 렛피들을 성심성의껏 기르며

레츠피스가 품은 가치를 전승해나가기로 동의한

스무 살 이상의 청년들은 ‘피써’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의 청년들 입에서 ‘헌신’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다니. 어떤 어른은 우리들의 약속을 읽고 믿을 수 없는 일이라 말했다. 헌신이 뭐 어때서요? 하면 되죠.


헌신.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를 물개박수를 치고 깔깔깔 웃으며 정리했다. 스스로 이름을 정하고, 정체성을 만들고, 규약을 세우고, 회비를 정했다. 누구나 보고 기억할 수 있도록 아싼떼가 리플렛를 만들었다. 렛피들을 받기 위해 단원가입서도 만들었다. 스무 명의 렛피들을 만나게 됐다.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이들이었다. 우리들의 레츠피스였다.


올해에는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기로 했다. 

우리는 피스하는 서퍼 = 피셔 혹은 렛피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슬로건을 만들었다. 우리는 경계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보기로 했다.


그곳은 북방이었고 유라시아 대륙이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남북이 자유롭게 서로를 오갈 수 있게 된다면, 서울역이 다시 국제역이 된다면,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세계였다. 그런데 그곳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곳이었다.


1920년대에 서울역에서는 파리행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고? 그때 그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유라시아를 넘나들었다고? 광활한 대륙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연대하여 해방을 외치고, 새로운 공동체를 꿈꿨다고? 멋진 일 같았다. 분홍빛 안개가 자욱한, 닿을 수 없는 꿈같았다.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프로젝트, 호남선이 시작되는 목포역부터 북방을 향해 올라가기로 했다. 서울역을 지나 DMZ 남방한계선의 코앞까지 가는 것이다. 졸리, 노마, 아모르, 제제, 나니가 새로운 리듬을 만들었다. 하야티와 고운, 자리타가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와 안무도 창작했다.


기차 타고 떠나요 나와 함께 서울역에서 경의선 타고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해가 지는 곳까지 너와 함께 갈 거야

창밖에 보이는 지평선 바라보면 상상이 닿지 않는 곳으로

끝없이 펼쳐진 호수를 바라보며 말이 닿을 수 없는 곳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어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아주 멀리까지 달려보자


나는 목포역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레츠피스인데, 혹시 서울역이 국제역이었다는 거 아세요? 


역무원들은 되물었다. 


레츠…누구시라고요? 서울역이 뭐라고요? 


그러니까 선생님, 청소년과 청년의 비전이 거기에…. 


나는 허무맹랑한 말을 내뱉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했다. 레츠피스의 브로셔와 영상, 공문을 보내고 역무원을 만나 기차역의 협조를 구했다. 그렇게 목포역에서 첫 퍼포먼스를 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떼창하며 시선을 끌고, 퍼커션을 치고,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캠페인송에 맞춰 춤을 췄다. 여기 호남선의 종착역 목포역에서 유라시아로 향하는 기차가 다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천안아산역에 갔을 때는 주륵주륵 비가 오고, 우리 말고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번째 퍼포먼스를 했다. 서울역에서는 광장을 쓰려면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했다. 규모가 작아 집회신고를 하기에도, 발전차를 빌리기에도 난감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공연하려는 날, 서울역에는 철도노조의 집회가 잡혀 있었다. 철도노조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철도노조 집회의 오프닝 공연을 따내고, 대형 스피커와 마이크 서울역 광장을 함께 쓰기로 했다. 퍼포먼스 당일, 온종일 비바람이 쳤다. 레츠피스는 진정 비를 몰고 다녔다. 손을 모으고 소리쳤다. 비에도 지지 않고! 레츠피스! 광화문에서 공공운수노조와 행진할 때도 폭우가 쏟아졌다. 우비도 소용없는 빗줄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대한 빌딩을 등지고 미친 듯이 퍼커션을 쳤다. 이 도시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청년들 같았다.


밀양역에서는 햇빛이 얼마나 강했던지 렛피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수박 두 통을 쪼개 먹은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광주역에서는 삶디 센터 청소년들과 함께 플래시몹을 했다. 우리만큼 명랑한 친구들이었다. 서울은 공연 허가 받기가 만만찮은 도시였다. 더군다나 굉음을 일으키는 퍼커션 공연은 민원을 몰고 다녔다. 여의도 공원 광장, I SEOUL YOU 조형물 앞에서 딱 5분 퍼커션을 쳤더니, 삐용삐용 민원 트럭이 달려 나왔다. 우리는 작전을 바꿨다. 게릴라에게 허가는 필요하지 않았다. 광화문역 9번 출구통로에서 기습 플래시몹을 했다. 전경이 미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채기 전에 모든 일은 시작됐다가 끝이 났다. 짜릿했다.


그동안 우리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우리가 만듭니다. 한반도의 평화체제, 함께해요!”였다. 그렇게 외치고 다니니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봄에는 남쪽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쪽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 한반도 평화시대를 선언했고, 여름에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나 대화를 했다. 가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으로 날아가 15만 명의 평양 인민 앞에서 연설을 했다. 당신들이 얼마나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지 절실하게 확인했고,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노라고. 처음 보는 북녘 사람들의 얼굴은 밝고 따뜻해보였다. 우리의 얼굴도 그랬다.


북 한 번 쳤더니 세상이 바뀐 덕에 우리는 곧잘 너스레를 떨었다. 한반도 평화체제요? 저희가 만들었잖아요. 함께 하실래요? 기차역이나 광장으로 공연을 가지 않는 날에는 정기 연습을 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투명한 유리창에 하얀 김이 잔뜩 서릴 때까지. 연습이 끝나면 둥그렇게 둘러 앉아 2000년부터 지금까지 발표된 남북의 공동 선언문을 함께 읽었다. 평화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온 오랜 노력과 의지를 알게 됐다. 예멘 난민과 동물권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자 했다. 그리고 떠났다.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해가 지는 곳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상상이 닿지 않는 곳으로.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베를린까지 유라시아횡단열차를 타고 1만 4천 4백 킬로미터, 지구 둘레의 사분의 일을 여행했다. 긴긴 기찻길 위에서 베를린 장벽 앞에서 렛피들은 쾌활하게 노래하고 춤을 췄다. 날이 지날수록 거리 위의 플래시몹과 버스킹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시베리아의 찬란한 여름을 마주했다. 붉은 보름달을 보았다. 영험한 바이칼 호수에서 세계의 평화를 기도했다. 와이파이도 전화도 터지지 않는 침대 열차 안에서 실컷 낮잠을 잤다. 노래를 만들었다. 시를 외우고 썼다. 이야기도 썼다. 보드게임을 했다. 토론을 했다. 멍을 때렸다. 아주 오랜만에 유유자적했다. 행복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 노보시비리스크, 예카테린부르크, 모스크바, 옴스크, 벨라루스, 바르샤바, 베를린…. 시베리아의 밤, 덜컹이는 기차 칸, 주황빛 조명을 켜고 유라시아 지도를 펼쳐 기차역 이름을 짚었다. 조선말, 사는 게 어려워 가족을 이끌고 짐을 이고지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대륙으로 나갔던 이들을 떠올랐다. 나라를 빼앗기고 해방과 독립을 이뤄내기 위해 기차를 타고 대륙으로 향했던 이들도 생각났다. 온 생을 혁명에 바쳤던 이들을 기억했다.


우리는 매일같이 세상은 망했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말해주지 않아도 감지할 수 있었다. 더 나은 내일은 없다는 걸. 그래서 우리들은 소소小小한 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서, 나를 바로 행복할 수 있게 하는 것들, 내가 당장 움켜쥘 쥘 수 있는 것들, 더 이상 불안에 떨게 하지 않는 것들 말이다. 일 년에 몇번, 주변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들은 작은 원룸 안에서 이유 없이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빛나는 명분도 없이, 치열한 저항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래도 삼십년 전쯤엔 독재정권과 싸우다 죽기라도 했었는데, 그를 모두가 기억해줬었는데. 살아가려면, 나 또한 죽지 않을 이유가 필요했다.


백 년 전 한반도에서 기차를 타고 유라시아를 넘나들었던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도, 우리처럼 세상은 이미 망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속이 시원했을 것이다. 맘 속 깊이 ‘일본인’이라는 것이 될 수 없었던 이들은 이 광활한 대륙을 천천히 건너는 동안, 숱한 사람들을 만나며 ‘유라시아인’이 되리라 결심했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서늘한 바람을 쐬면 머릿속이 깨끗이 씻겨나갔을 것이다.


자신이 사는 시대를 받아 안을 마음자리가 생겨났을 것이다. 소소한 일신의 행복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새로운 것들이 움텄을 것이다. 물질적인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는, 빛나는 가치와 지향 같은 것들 말이다. 자신이 보고 싶고 만들고 싶은 세상의 단초 같은 것들 말이다. 아무것도 유예하지 않고 지금 당장 그것들을 실현해나가기로 결단했을 것이다. 설령 이루지 못할지라도 품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 뿌듯한 가치, 당장 죽어도 좋을 거 같은 마음, 광활한 대륙의 지평선을 가만히 굽어보는 긴 호흡, 서로를 신뢰하는 동지들…. 우리에겐 그런 감각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세상에서 가장 딱딱하게 굳은 것들을 돌파해나갈 뱃심이 필요했다. 그들의 얼굴은 진중했지만 낙천적이었고, 의연하고 담대해보였다. 우리도 그런 표정을 짓고 싶었다. 그러니 유라시아로 향하는 길이 뚫려야했다. 오랜 고립에서 벗어나야 했다. 기형적인 기억의 지형을 복원해야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했다. 서울역이 국제역이 되는 것이다.

11월, 레츠피스는 강원도 철원에서 평화퍼포먼스를 했다. 월정리역 철길에 섰다. 군사분계선이 지척이었다. 남북 군사 합의에 따라 대북방송이 멈춘 상황이라, 사방이 고요했다. 세게 치면 북까지 들릴지도 몰랐다. 왠지 떨렸다. 기차 놀이를 하며 신나게 퍼커션을 연주하고, 춤을 췄다. 우리가 내는 모든 평화의 소리들이 훌쩍 경계를 넘어갔다. 


해질녘에는 철원 노동당사로 향했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에는 전쟁 때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모두가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뭐든지 상상할 수 있던 시절, 철원에 살았던 이들의 희망으로 가득 찼을 공간이었다. 악기를 들고 포탄과 총알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나 금방이라도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테라스에 서서 퍼커션을 연주했다. 발밑이 아슬아슬하고, 칼바람이 불었다. 하늘로 팔을 쭉쭉 뻗으며 언제나처럼 리듬을 탔다. 보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활짝 웃고 말았다. 지나가던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번 더를 외쳤다. 그곳에서 레츠피스의 마지막 편지를 읽었다.


서울역이 국제역이 되고, 한반도에 종전이 선언되고, 동북아철도공동체의 구상이 현실이 되는 날까지, 우리는 모든 역사적인 나날을 지켜볼 것입니다. 지금 갖고 있는 마음이 변치 않을 것입니다. 바람 앞의 등불을 지키는 마음으로 끝까지, 흔들림 없이 담대하게,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가겠습니다.

2018년 11월 레츠피스


그리고 2019년이 되었다. 올해 첫 공연은 우연찮게도 한살림의 초대공연이었다. 때마침 몇몇 피써들은 겨울 동안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서화집과 산문집을 읽던 중이었다. 나를 살리고 내 이웃을 살리고 뭇생명을 살리자는 마음으로 레츠피스를 연 청년들에게 장일순 선생님의 말과 글이 던지는 울림은 꽤나 깊었던 거 같다. 기쁜 마음으로 공연 섭외에 응했다. 로드스꼴라에 다니는 청소년들은 원주를 여행하고, 장일순 선생님의 생명사상을 공부한 뒤 ‘일순씨의 얼’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드디어 일순씨의 얼이 21세기에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그대와 내가 저 들꽃과 쌀알

모두가 한울님이네

하늘과 땅 저 태양과 바람

모두가 한울님이네

혼자만 잘사는건 의미 없네

스스로를 낮추고 풀잎을 스승으로

그대가 나라는 걸 이제야 알았네

내 곁에 있던 우주를 찾았네

쌀 한톨에 농부가 있네

쌀 한톨에 우리가 있네

쌀 한톨에 우주가 있네

쌀 한톨에 만물이 있네

‘쌀 한톨에-’로 시작되는 부분은 랩으로 되어있었는데, 리듬을 타며 같이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타와 키보드, 카혼과 쉐이커, 멜로디언 등으로 연주하는 ‘일순씨의 얼’은 발랄하고 유쾌했으며, 티끌만치도 고리타분하지 않았다. 일순씨가 살아계셨더라면 쌀 한 톨에 우주가 있다며 같이 외쳤을 것이다.

우리는 한살림 생산자들이 모이는 총회에서 퍼커션 공연과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퍼포먼스 그리고 일순씨의 얼을 불렀고, 한살림 농부들은 탐스런 딸기와 호밧엿과 찰떡, 한살림표 과자들을 품에 한아름 안겨주었다.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곧바로 올해 두 번째 공연을 기획했다.


그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라 쓰고 우리는 ‘으니’라 부르는)과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회담이 진행되고 있었고, 오후 5-6시 즈음 발표하는 공동성명에는 종전선언이 담겨 있으리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었다. 사실 전날 밤, 레츠피스는 새해를 맞이하여 악기를 정비하며 북미회담 생중계를 함께 보았다. 종전선언을 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은 렛피들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번엔 정말 될지도 몰라, 하며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한반도의 종전이 선언된 날에 한살림의 공연을 하는 것 또한 묘한 타이밍이었다. 


다음날이 3월 1일이었고, 광화문에서는 3.1운동 백주년 기념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 틈을 타서 우리는 게릴라 공연을 해 보기로 했다. 세종대왕상 뒤 혹은 청계천, 광화문 8번 출구? 장소는 상황에 따라 선택하기로 했고, 별다른 허가도 받지 않았지만 종전이 선언되는 날에는 반드시 레츠피스가 퍼커션을 쳐야했다. 악기를 담은 트럭도 교통체중을 뚫고 서울로 올라갔다. 어디서 어떻게? 이런 저런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는데, 북미회담이 무산되었다는 속보가 떴다. 허탈했다. 속이 쓰렸다.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리고 열 받았다. 연휴를 맞이하여 도로는 꽉 막혀있었고, 제제는 악기와 함께 오후 7시에 터덜터덜 하자센터로 돌아왔다. 우리는 묵묵히 악기를 옮기고, 한살림 농부들이 주신 딸기를 씻어먹었다. 긴 하루가 잊혀질만큼 큼직하고 달디 단 딸기였다.


기운은 좀 빠지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봄이 되면 우리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개벽학당’을 열기로 한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백 년을 내다보는 호흡을 가다듬을 작정이었다. 지적으로, 실천적으로, 영적으로 ‘개벽하는 청년’ 줄여 ‘벽청’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벽청들에겐 다정하고 멋지고 삐딱한 스승, 로샤(이병한)와 새별(조성환), 어딘(김현아)이 있었다.

새로운 하늘의 탄생, 개벽학당

나라사람 국민(國民=개화우파)과

도시사람 시민(市民=개화좌파)을 지나

하늘사람 천민(天人=개벽파)이

모이는 날입니다.

학교와 학원 사이

새 길을 열어

스스로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뭇생명을 살리는 장을 여는

개벽학당 시작파티로

하늘사람, 당신을 초대합니다.

개벽학당 시작파티 날... 미세먼지가 배경이 되었다... 개벽이 시작되는 날답게 

개벽학당 시작파티가 다가오자 재앙 같은 미세먼지가 찾아왔다. 잿빛 하늘을 바라보며 개벽하는청년들은 포스터과 현수막을 제작하고, 정성껏 딸기주와 샹그리아를 담갔다. 드레스코드는 하와이, 꽃목걸이와 꽃셔츠를 입고 아프리카 댄스로 파티를 열고, 함께 훌라댄스를 추며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매우 나쁜’ 초미세먼지로 뒤덮인 하늘 아래, 대화당 야외테라스에서 개벽학당 시작파티가 열렸다. 시작파티보다는 ‘종말파티’라는 말이 어울리는 날이었다. 종말파티라니. 개벽학당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날이라는 농담을 하며, 벽청들은 화관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우리의 시작을 축하하러온 여러 어른들에게 덕담을 듣고 딸기주를 받아 마셨다.


개벽학당을 시작하는 마음을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맑은 날의 개벽학당 ... 대화당

언론에선 청년들에게 여러 별명을 붙여주는데, 우리는 3포세대였다가 N포세대였다가 이제는 유령인간으로 불리고 있더군요. 그래서인지 우리 모두는 어쩐지 발디딜 곳 하나 찾지 못하고 정말 유령처럼, 실체 없이 둥둥 떠다니며 살고 있는 거 같습니다. 서울시의 청년공간도 ‘무중력지대’라고 이름 붙이는 걸 보면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자조 섞인 농담으로 저와 제 친구들의 삶과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둥둥 떠다니는 건 지겹습니다. 유령인간으로 불리는 대신 개벽하는 청년으로 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물론 청년에겐 돈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직장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청년에게 정말 필요한 건 ‘사상’입니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세상,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발화할 수 있는 진짜 언어 말입니다. 그 사상과 언어를 가진 청년들은 종말이 오더라도 함께 뭐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하여 개벽하는청년 ‘벽청’들은 북악산 아래 대화당이라는 기운 좋은 한옥에서 요가하고 시 읽고, 훌라댄스를 추고 상자텃밭을 가꾸며, 한국사상사와 인류세를 공부하다 꽃이 피면 화전을 부쳐먹기로 했다. 개벽세의 시작이다.

개벽학당.. 하늘을 품다!!

주석

1 시사인526호 김세윤의 ‘비장의 무비’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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