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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27. 2019

동학혁명과 시민혁명

개벽통문 - 013

[이 글은 개벽통문 - 013호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시민혁명이어야 하는가?


여전히 ‘동학’에 대한 담론 가운데 ‘동학농민혁명’(이후 ‘동학혁명’)의 성격과 평가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듯하다. 오늘 읽은 페북 글 가운데 동학혁명은 전봉준 등이 흥선대원군의 책략에 호응하여 한양으로 진격하여 흥선대원군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변을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그 견해에 따르면 동학‘혁명’이라는 용어(평가)는 어불성설이고, 그들에게서 혁명적 지향은커녕 근대적 지향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전봉준은 - 정치적 희생양인가?

가급적 그 본지를 훼손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 글을 발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 (01) 이이화 선생은 동학이 최초의 근대 시민혁명이라고 이야기하셨다. 

(02) 아마도 이 설명은 동학 초기보다는 그 이후 독립운동사에서 천도교가 기여했던 일들을 염두에 둔 평가일 것 같다. 

(03) 안타깝게도 최시형과 전봉준이 이끌던 1890년대의 동학도는 조선 땅에서 만들어진 사상으로 요순우의 시대로 돌아가 보려던 시도에 가까웠다. 

(04) 당시 동학은 조선 전제군주의 타파를 결코 원하지 않았고, 전봉준이 패전 후 붙잡히고 나서 왕실에 복무하는 ‘충신’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것도 시민혁명이라고 보기 힘든 한 가지 원인이다. 

(05) 동학이 시민혁명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대원군과의 연계성 때문이다. 1890년대의 대원군은 청나라 연금 생활 이후 권력 획득을 위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정치 중독자로 변질되어 (...)  판돈을 크게 키울 수 있는 ‘더 큰 한탕’을 원했다. (...) 이때 스치듯 지나간 것이 전봉준과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쟁이’들이었다. (...) 동학교주 탄압의 주범이었던 대원군이, 약 30년 뒤에는 전봉준을 뒤에서 부추기는 배후로 입장을 바꾸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주된 목적은 고종과 민씨의 정권운영을 끝내고 손자 이준용을 등극시켜 다시 한 번 복고주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야심이었다. 

(06) 동학교도들은 폭정을 일삼는 민씨 척족의 말단 수하쯤 되는 지방관들을 몰아내기 위해 지난날의 학살자와 타협하는 모순을 떠안게 되었다. 이 카드로 대원군은 또 한 사람의 ‘정도령’이 되어 ‘새 시대를 열어갈 구시대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 동학교도들에게는 이런 상황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만한 객관적인 시각이 부족했다. 애당초 나랏님네들의 일과 별개로 지역의 탐관오리만 때려잡으면 폐정이 개혁될 것이라는 순수한 열망을 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운현궁(=대원군-인용자)은 모든 동학 군중을 결집시키는 하나의 동인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준용의 집사들이 수시로 남접과 북접을 접촉하며 관군의 동향 등을 파악했던 것도 대원군 개입설에 힘을 더한다. (...) 

(07) 민씨들과 일본 측에서도 (동학혁명-인용자) 집행부에 대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 일본에서는 외무경 이노우에 카오루의 지시를 받은 이들이 동학 내부로 침투해 농민봉기세력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들을 이용하면 조선을 통으로 접수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08) 1894년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이 패배한 이후 대원군은 이들과의 연계성을 일체 부정했다. (...) (일본공사-인용자) 이노우에는 (...) 동학 지도부들을 신문하면서 대원군과의 연계성을 포착해 내려 했다. 그러나 충성심이 강한 전봉준은 대원군이 옹립의 대상은 되었을지언정 민란의 기획주체는 절대 아니라고 강조할 뿐이었다. (...) 

(09) 동학은 근대 시민혁명의 시발점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슬프고 부족한 정치적 희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인용 끝 / 본문 중의 번호는 인용자가 / 본래 분량의 57%) 

...

경주 황오동 황성공원에 있는 해월 선생 동상 뒷면 부조

위의 글은 이렇게 요약 정리할 수 있다 


위의 글의 화소(話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01) 최근 이이화 선생은 동학혁명을 ‘최초의 근대 시민혁명’이라고 정의했다.

(02) 이이화의 정의는 동학혁명 자체보다 천도교의 삼일운동을 지칭하는 듯하다.

(03) 내가(위 글 필자) 보기에 동학혁명은 시민혁명이라기보다 복고주의 운동이다.

(04) 전봉준은 혁명 당시 전제군주 타파를 내세우지 않았고, ‘충신’이기를 자처했다.

(05) (시민혁명이라고 보기 어려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원군과의 연계성 때문이다.   

(06) 무지한 전봉준 등은 대원군을 정도령으로 여기고, 그의 꾐에 빠져 손을 잡았다. 

(07) 민씨 척족과 일본 측에서도 전봉준의 동학 세력과 손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08) 전봉준은 대원군을 보호하기 위해 그 관계를 부인하고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했다. 

(09) 동학은 시민혁명에 못 미칠 뿐 아니라, 대원군의 정치적 음모의 희생자일 뿐이다. 


위의 정리를 기반으로 다시 중요한 논점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1] 동학혁명은 ‘근대적 시민혁명’이 아니다. 

[2] 동학혁명은 대원군의 정치적 음모에 동원된 농민봉기일 뿐이다. [대원군사주설] 


여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반론을 제기하자면, 이러하다.


동학혁명은 시민혁명 너머, 개벽운동이다 


[1] 동학혁명은 근대적 시민혁명이 아니라는 논리에 대해서 


위 글에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리 전개에 따르면, 동학혁명이 근대적 시민혁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동학혁명 당시에는 근대적 의미의 시민(자본주의적인 마인드, 개인주의로 계몽된)이 존재하지 않았고, 동학혁명의 주체들이 ‘민주공화국’을 구체적으로 지향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민주공화국’ 혹은 그 밖의 ‘이른바’ 근대적인 정체(政體)가 ‘근대화’를 향한 대안의 전부는 아니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그들에 대해 저항적인 혁명봉기를 전개한 동학혁명군들의 행위를 그 적(敵)들이 구축한 세계상에 기반한 ‘(서구적) 근대 지향성’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이러한 기준에 따른 ‘시민’이라면,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의 한국(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대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서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전근대적인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오늘날 서구적 근대는 돌이킬 수 없는 세계적 현상이며, 서구적 근대의 결과로 인류 사회는 125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발전(?)과 발달(?)을 이룩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인권의 신장과 물질적 풍요 등이 대표적인 지표로 제시될 수 있다고 해서, 그에 반하는, 혹은 그 기준에 미달하는 동학혁명의 지향과 비전을 도외시하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그야말로 ‘근대시기’에 매몰된 서구 편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은 ‘탈근대’를 이야기한 지 오래되었고(근대화의 결과로 초래된 현대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상황, 특히 기후 온난화나 양극화 등) 근대 이후를 모색하는 것이 보편적인 흐름이 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셋째, 동학혁명을 추동했던 세력이 지향한 세계상, 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혁명의 경로가 다소 불분명하였지만 그날 이후 오늘까지 그 혁명은 계속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동학혁명을 ‘개벽운동’의 관점으로 재조명하는 노력은 이제야 비로소 본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일제강점기, 분단시대를 거치면서 은폐되고 억압되고 폐기되었던 개벽운동으로서의 동학혁명 혹은 그 근본으로서의 ‘동학’은 문자 그대로 “오래된 미래”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대원군사주설은 허구이다!


[2] “대원군 사주설”에 대하여 


이 글의 주된 논지는 동학혁명이란, 대원권의 권력욕에 휘둘려, 시국의 흐름을 잘 알지도 못하고 부화뇌동한 전봉준 등이 무지한 농민들을 동원하여 일으킨 ‘농민란’이라는 데 있다. ‘대원군 사주설’로 일컬어지는 이 사실은 이 글 필자가 짧은 글 속에서 여러 가지로 제시한 논거들로 여러 연구자들이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전봉준 사주설에 대해서는, 동학혁명이 좌절된 이후 이를 대원군과 얽어서 책임을 묻고자 했던 일본 측의 집요한 추궁에 의한 ‘가설’이라는 견해도 수많은 논거를 통해 주장되고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학술적인 반대 논리(‘대원군 사주설’을 반박하는 학술적인 논거들)를 일일이 제시하는 대신에, 몇 가지 정황들을 제시함으로써 그에 답하고자 한다.


첫째,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고부봉기 이후 무장에서의 기포, 백산에서의 결진, 전주성 점령 이후의 집강소 통치(자치)의 추진, 해월을 정점으로 하는 충청도 동학군들과의 연결과 소통 등의 경로에서 대원군 사주설은 거의 설 자리가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대원군 측에서 전봉준 등 동학 지도부(집행부)와 연결하려 한 시도는 마찬가지로 전봉준 등과 연결하려 한 민비 측이나 일본 측과 더불어 여러 유사 사례의 한 경로로서 이해하는 편이 훨씬 더 개연성이 있다.(위 (07) 참조)  


둘째, 1894년의 동학혁명은 1892-1893년의 민회(교조신원운동)와 척왜양창의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를 통해 동학의 신앙자유 쟁취운동, 그것을 매개로 하는 보국안민운동, 그리고 보국안민운동을 일부분으로 하는 후천개벽운동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대원군이든 민비든, 나아가 일본이라 할지라도 눈앞의 적으로서는 타도의 대상이지만, 더 큰 맥락에서는 포용하면서 극복하는[包越] 대상일 뿐이다. 동학군이 본격적인 혁명전쟁을 시작하면서 내걸었던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라는 조항을 필두로 한 사대명의(四大名義)나 창의문, 격문 등의 내용은 ‘대원군 사주설’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혁명성”(개벽성)을 보여준다. “오로지 서구적 기준의 ‘(시민)혁명’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혁명”이라는 식으로 편향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동학혁명의 전모를 좀더 풍부하게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끝으로, 이러한 필자의 반론이, 동학혁명이 그 자체로 완벽하고 완전한 형태의 혁명전쟁, 개벽운동이었음을 강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근대사의 기점으로서 동학혁명을 돌아보는 자세는 근대화 시기 어느 특정 시점, 특정 정파의 관점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의 잣대로서, 우리 스스로의 역사와 운명을 개척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할 것이다. 세계사의 보편성(인간의 역사라는 점에서)과 더불어 지역적/민족적 특수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열린 시각이 오늘과 내일에 필요한 역사관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개벽의 시대다 


무엇보다, 동학혁명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미래의 역사로 자리매김될 것으로 기대한다. 긴 길을 돌고돌아 왔지만, 이 땅의 민중들은 외세의 휘두름에 더하여, 위정척사 / 개화좌파 / 개화우파의 휘둘림에 한편으로는 (마치 지랄탄 터지는 현장에서처럼) 정신을 못차리고 이리저리 쫓기며정당방위적인 항쟁을 계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동학혁명에서 뿌려진 개벽의 씨앗을 온전히 꽃피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민중/인민/시민/국민들의 노력과 희생(순국 의사/열사)이 눈물로 물을 주고 피로써 거름이 되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촛불혁명"을 이룩해 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섰다는 것이, 개벽파의 시각이다. 한편으로는 뒤돌아 역사 위에 덧씌어진 더께를 씻어내며, 한편으로는 내다 보아 나아갈 길을 넓히고 밝히며 나아가는 일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믿는다.


다시, 개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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