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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3. 2019

모과 를 따며

- 심종록의 시 세상 (1) 

[필자 주] 작고 초라하고 덧없어서 더없이 소중한 것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맑고 바람 없는 날 밤에 내리는 서리처럼.


모과를 따며 


지금 모과를 따며

네 태어나던 날의 새벽을 듣고 있다

서리 가득한

아침 첫 바다 노을이 붉고

누군가 다시 인연의 자궁을 밟는 소리

나 또한 가지 하나를 꺾고 있다

오래잖아 사막으로부터 겨울이 오고

꽃이 피고

별빛은 가지 끝을 아무릴 것이다

그렇게 인연의 가지 하나

네게로 뻗어나

눈물은 멀고 험해서

햇살이 눈부실 때


깊은 적막. 창밖을 본다. 어둠 속 어디선가 가을을 재촉하는 풀벌레가 울고 있다. 짝짓기에 나선 것일까,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일까? 잠시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울음소리가 이번에는 단선율의 성가만 같다. 야심한 시각 어느 누가 있어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걸까? 귀뚜라미 울음소리의 심사를 가늠하다가 놀란다. 새벽 네 시. 9월의 마지막 날이 열리고 있다.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자전은 여전히 멈추지 않을 것이고, 아침이 밝았다 다시 저물어 밤이 오고, 그리하여 하루가 또 지나면 이번에는 달이 바뀌어서 10월이 시작된다.


10월은 갈무리의 달이다. 길다 생각하면 길고 짧다 생각하면 더없이 짧은 인생사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갈무리다. 생을 지속하고 또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뿌린 씨앗을 거둬들이고 비축하는 일이니까. 내일은 그러니까 하늘이와 선영이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첫 달 첫날이다. 아이들은 얼마나 큰 설렘과 두려움으로 내일을 맞이할까? 그들도 나처럼 지금 이 순간 잠 못 이루고 있을까?


경전에 의하면 이 세상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맹귀우목(盲龜遇木)처럼 어렵다 했다. 그러니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온 것만으로도 기적일진데, 소중한 인연까지 맺게 되었으니 이보다 귀한 기적이 또 어디 있을까? 한세상 처처곳곳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에 감사한다. 기적을 축복으로 만들거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몫. 하지만 고통이나 슬픔마저도 사람의 몫이어서 소중하다. 변독위약(變毒爲藥)의 밑불이 되니까.


기쁨이라는 날실과 슬픔의 씨실로 직조하며 만들어가는 게 생일진대, 앞날에 기쁨만 행복만 웃음만 있어라 바라는 건 도리 모르는 욕심이다. 고통과 슬픔이 닥치더라도 용기와 지혜를 모아 함께 헤쳐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생의 기쁨이 아닐까? 일출의 장관도 광휘롭지만 풍랑의 바다를 헤치고 돌아와 마주하는 일몰의 잔광마저도 눈부신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심종록 :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후 <모리티우스를 찾아서>라는 장편소설과 <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 <쾌락의 분신자살자들>이라는 시집을 냈다, 최근에는 <빛을 향해 간다>라는 제목의 전자시집을 발간했다. 누구도 관심두지 않는 이 땅의 버섯들을 찍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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