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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3. 2019

폭설

- 심종록의 시세상 (3)

폭설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들이 휘몰아치는 골목이다

어슬렁거리는 개처럼 살아온 것들이

모처럼 제 세상 만난 듯 호기롭게 날아든다

보도블록 꺼진 적 있다

사람 셋을 집어삼켰던 구멍

행인 1은 다리가 골절되었고

행인 2는 갈비뼈가 부러졌는데

행인 3은 말짱했다

갈비뼈 부러진 사람의 가슴이 완충 역할을 한 탓이다

전봇대 옆에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 누던 어린 개는

무사하다 재난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신속한 상황대처반이 나타나 모래 두 차 쏟아 붓고

보도블록 다시 깔고 사라진 자리

화장발 고운 처자의 얼굴처럼 매끈하다

어둠은 주머니 넉넉한 사채업자

매번 깍듯한 외모로 상냥하지만

오늘은 표정이 녹슨 중국제 문틀용 철봉 같다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들로 질척해진 골목길 들어선다

무슨 심통이 났는지 흉기를 휘두르며

뿌려놓은 종자돈을 모조리 거둬들일 기세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셔터 문이 괄약근처럼 벌어진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내려놓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한 번도 잎을 떨군 적 없는 열대림의 실내식물 배경삼아

닭발을 씹고 콩나물 대가리를 씹고

상추쌈에 싼 세상을 씹으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동안

재활용 상자에 담겨 출하를 기다리는 육계에는 플라스틱 조각이 박히고

얼고 주린 창자를 깡소주로 달래던 삼촌은

신문지 석 장 두께의 낡은 외투를 걸치고 시린 잠을 청하고

퇴임 위기에 몰린 아버지가 연임 로비를 위해

모처에서 판돈 크게 걸고 담판 지을 때

오, 놀라워라 진눈깨비는 치부를 가려주시는 하느님처럼

크고 부드러운 폭설로 변해 세상을 덮는다



무한천공의 하늘에서 이뤄지는 차갑고 부드러운 음소들의 이합집산. 형태가 다른 각각의 음소들이 부딪치고 구부러지고 흩어지고 모이면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하나 둘 다섯 일곱 백 천 만의 무구하고 가벼운 음소들. 어떤 음소는 웃음소리처럼 가볍고 어떤 것은 물먹은 습자지로 무겁다. 용의 비늘만한 크기가 있는가 하면 미세먼지처럼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크기와 무게는 제각각이지만 지상에 근접할수록 육방정형의 독특한 결정을 가지면서하나의 음절로 몸을 입는다.


눈(雪).


말(言)이 몸을 입어 한 때나마 평화롭기를 기대했던 곳이 세상이었듯, 규정할 수 없는 몸짓이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의미를 획득해서 참람하고 아득한 곳도 세상이다.


세상에,

눈 내린다!


눈발들. 보이지 않는 낙하산을 매단 듯 가볍게 흔들리며 내려온다. 작고 보드라운 눈발 하나가 이마에 닿아 물큰하게 녹는다.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사실이 남긴 흔적처럼 눈이 쌓인다. 정처 없어 가볍고 대책 없어 무거운 눈들의 수다. 폭설의 전조를 알리는 에스키스다. 점차 부피를 더하며 점령지를 넓힌다.


설국(雪國).


음절과 음절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눈의 나라. 외려 시틋해서 오해를 사고 유혹을 거부하다 얼음으로 굳는다. 냉기로 무장한 바람이 바리케이드를 넘을 때마다 몸이 가볍다 싶은 몇몇이 따라붙으려 하지만 제 무게에 주저앉고 만다.


습설의 업을 가진 눈덩이가 나목의 팔을 잡아 비튼다. 얼었던 가지가 소리를 내며 부러진다. 나지막한 오후의 풍경이 놀란 듯 진저리 치다 가뭇해진다. 모양이며 표정이 제각각인 나무들이 설국의 조차지역에 붙박여 사위어가는 일몰의 반대편으로 일제히 그림자를 돌린다. 말을 잃어버린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발밑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사위어가는 일몰을 바라보고 있다.


심종록 :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후 <모리티우스를 찾아서>라는 장편소설과 <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 <쾌락의 분신자살자들>이라는 시집을 냈다, 최근에는 <빛을 향해 간다>라는 제목의 전자시집을 발간했다. 누구도 관심두지 않는 이 땅의 버섯들을 찍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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