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개벽신문> 제84호 '내 마음 열리는 곳'에 게재된 글입니다.
심규한 (성요셉상호문화고등학교 교사)
내 머릿속에 지우기 어려운 생각이 하나 있다. 수동적 교육보다 능동적 공부가 백배 중요하다는 것이다. 좋은 선생이란 잘 가르치는 사람이기보다 공부를 시작하도록 자극하는 사람이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지식의 권위와 복종 관계를 재생산한다. 그러나 공부 하는 사람은 지식의 권위에 복종하기 보다는 필요한 지식을 찾아 생산하고 나누는 사람이다. 그에게 지식은 철저히 지금의 필요에 맞춰져 있다. 권위와 무관하다.
학생들을 볼 때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학생들이 교육받는 학생이라는 옷을 결코 벗지 못하는 것이다. 학생이라는 신분은 제도적으로 강제된 옷이다. 어떤 학생은 반항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제도적으로 강제된 관습을 극복하지 못한다. 이탈자가 있을 뿐이다. 부모와 교사도 마찬가지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가르쳐야만 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식을 교육받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은 교육받아야 할 학생이 되고 만다. 학생이 아닌 아이는 비정상인 아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사회적 강제 안에서 아이들도 학교를 마땅히 가야만 하는 곳으로 알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익히는 것을 공부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전도된 공부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입시제도와 주입식 강의식 교수법을 비판할 뿐이다.
하지만 공부를 해보니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차라리 상급학교를 가기 위한 시험공부라고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정직한 표현인 것 같다. 국민이 마땅히 지녀야 할 공통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학교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국가주의적 관점은 국가가 스스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과하는 요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인간 본연의 공통 자질과 소위 시민의 자질을 학교에서 학습시킬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자크 랑시에르가 강조한 인간의 ‘보편적인 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에 우리가 지나치게 가르쳐야 할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는 가르쳐야 할 그 무엇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아닐까? 그러한 보편적 능력에 의해 우리는 모두 공부할 수 있다.
나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보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 좋다. 대신 공부하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마블영화 시리즈 중 엑스맨이 있다. 엑스맨 시리즈는 2000년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제작한 영화「엑스맨」으로부터 시작한다. 짐작하다시피 ‘×’는 ‘○’에서 배제된 자들을 뜻한다. 영화는 돌연변이로 일반과 다르게 태어나 배척받고 숨어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특이함과 콤플렉스 때문에 숨어살며 자기혐오와 정체성 혼란을 경험하지만 같은 처지의 동료를 만나 우정을 느끼고 변화하게 된다. 또한 돌연변이들만 다니는 영재학교에서 자신의 특이함을 능력으로 변화시키고 컨트롤 하며 올바른 정체성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나는 엑스맨이 미운오리 새끼가 백조로 거듭나는 동화나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차용해 현대의 쟁점인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 문제까지 건드리며 SF신화로 각색한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부르주아에서 대중으로 다시 대중에서 소수자로 정체성과 주체 문제를 확장해 온 것이 시대의 흐름인 것 같다. 엑스맨 시리즈는 시의를 반영해 차이와 다름의 문제를 정체성 문제와 함께 다루고 있다.
엑스맨의 학교에서는 이렇게 신입생을 맞아들인다. ‘너희들이 아는 모든 것을 잊어라.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든 간에 부모에게서 무엇을 배웠든 간에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 너희는 아이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다. 너희는 엑스맨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문제로부터 돌연변이들은 공부를 시작한다. 엑스맨의 영재학교는 기존의 학교와 다른 상징적 공간으로 해석해도 된다. 기존의 학교와 세상이라는 학교에서 교육받은 잘못된 관념(편견)을 버리고, 자기의 그림자를 긍정하고 그것을 다시 통합하면서 개성화 공부를 시작하는 공부의 공동체이자 우정의 공간으로 읽을 수 있다. 스스로가 엑스맨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부정을 포용하고 종합하는 성숙의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흑인이 흑인임을 받아들이고, 미혼모가 미혼모임을 받아들이고, 장애인이 장애인
임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큰 통합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각자는 각자로서 커밍아웃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엑스맨은 이야기와 메시지가 적절히 결합된 대중문화의 훌륭한 사례다. 물론 나는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엑스맨의 메시지를 빌려왔다. 최근 유행하는 마블영화 어벤저스의 흥행도 비슷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유를 생각해 보면, 20편이 넘는 어벤저스 시리즈를 통해 마블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신화와 같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가상의 세계를 창출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수많은 신과 영웅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공간에서 서로 연관을 맺듯, 마블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마블이 개별적으로 창조한 다양한 영웅들이 어벤저스라는 시리즈물을 통해 하나의 공간에 결합하며 만들어진 세계다. 다소 억지스런 구석이 있지만 세계의 대중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가상세계처럼 기꺼이 마블 유니버스를 받아들였다. 때문에 마블의 영웅들과 유니버스는 그리스로마신화와 같은 위상과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왜 세계 대중들은 마블의 영웅물에 빠졌는가? 황당하지만 CG기술로 핍진성이 넘친다. 초현실적인 공간이지만 현실을 압도할 만큼 사실적이며 엄청난 시청각적 자극과 빠르게 진행되는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대중의 억압된 자아를 영웅의 모습에 투사할 수 있도록 초대한다. 한마디로 마블의 영웅물들은 대중문화상품으로서의 현대 영화의 위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소비자 본주의시대의 대극장에서 영웅들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를 관람하며 감정이입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그리스 로마시대에 고대극장에서 대중들이 느꼈던 감정과 일치하는 바가 있다.
고대에든 현대에든 대중은 교육받는 대상이다. 그들에게 영웅은 스스로 자기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내면의 원형인간이 투사된 존재다. 하지만 대중이 스스로 각성하지 않는다면 대중은 여전히 영웅물을 소비하는 소비자로 주저앉게 된다. 슈퍼맨이 남긴 마지막 말처럼 ‘여러분이 슈퍼맨입니다’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는 저마다의 모험을 통해 경험하며 스스로 영웅이 되는 과정을 밝을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극장에서 팝콘을 먹으며 가상의 마블 유니버스에 들어가 영웅물을 소비하며 대리만족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BTS와 엑스맨이 보여주는 이야기와 메시지에 주목해 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학교와 제도에 순종하는 아이가 되고 학생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 고통스런 모험의 여행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의 내적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고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면서 우리는 저마다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심규한 저작선> (전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