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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24. 2019

자급자족 생태경제에 대해

-내 마음 열리는 곳에 

1.


소위 녹색경제니 지속가능한 발전이니 하는 말에 대해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말들에서 마케팅 이상의 의미를 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녹색과 지속가능의 경제 수사도 이윤창출이라는 서양 자본주의 문명의 큰 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중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발전사관도 결국 서양 제국주의가 내세운 선진/후진(문명/야만) 도식을 내면화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 등이 모두 발전이 아니란 말인가? 글쎄, 발전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오히려 초기 자본주의 시스템이 필요로 했던 임금에 의존하는 자유로운 생산력을 지닌 인간에서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필요로 하는 모든 세대의 자유로운 소비력을 지닌 인간 양산의 방향으로 인권이라는 것이 소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르크스의 명제처럼 물적 토대가 상부구조와 의식을 결정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현대 민주주의의 한계는 자본주의 생산 체계의 하부구조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천부인권의 수사학조차 유별나게 보지 않는다.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비록 군부 개발독재 시기의 전국민 동원령 같은 근대화를 이루고 피 흘리는 민주화 쟁취의 과정을 겪었지만, 우리는 빅맨의 지배와 새롭게 등장하는 세습 신분사회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북반구 산업국의 위상으로 세계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재화의 이득을 누리고, 비용은 외부화 하는 공식을 생활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소위 세계제국의 제국민으로 살아가며 과연 제대로 인류의 발전 따위를 비교할 기준이라는 걸 가지고 있을까?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2.


내가 생각하는 인권은 무산자들이 세계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장소에 대한 권리를 국가가 부여하고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천부인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권이 법적 대상인 한에서 그것은 천부인권이 아니다. 국부인권이며, 국부인권은 외부자에 대한 인권 박탈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즉 변경과 다양성의 말살이 가려져 있다는 말이다.


다양성 권리를 침해하고 발전을 말하는 것은 근대 제국주의의 동화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 이데올로기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생각이다. 아마존의 소수부족이든 아프리카의 소수부족이든 방글라데시의 인민이든 살아 있는 한 땅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국민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하지만 지금 세계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편입되지 않고 그렇게 예외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변경은 인식의 영역에서 밀려났다. 우리는 당연히 있어야 할 이질성과 예외성을 더 이상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단적인 예로 이슬람의 인권문제를 과연 문화 다양성의 시각에서 볼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몹시도 복잡한 분석과정을 거쳐야 가능할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환경오염과 환경파괴에 직면해 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지구 생명은 물론 인류 멸종의 위기가 다가오더라도. 우리 문명 은 죽음과 불안의 위기감에 깊이 침륜되어 있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도시에 거주하고 세계자본주의시스템에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현대인은 어항 속 물고기와 인큐베이터 속 아기처럼 무력하다. 우리의 비관주의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3.


왜 우리는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까? 자본의 탐욕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만인의 무한한 탐욕을 긍정한다. 개인의 이기심과 경쟁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다는 시장자유주의적 발상을 자유로 오해하도록 주입해 왔다. 그래서 소유의 제한을 이야기하고 독점을 반대하면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라고―좀 심하게 말하면 빨갱이라고―비난한다. 그러다보니 경제도 다분히 돈 많이 버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경제를 오해해버렸다. 우리가 아는 경제가 사실은 오해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을 망각하고 산다.


하지만 경제가 근현대 자본주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는 인류 전체가 지속해온 생존의 방식이다. 우리는 경제 없이 못 산다. 경제가 곧 살림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양이든 서양이든 경제는 살림살이를 의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소위 시민의 권리를 가지기 위한 조건으로 경제적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농장 경영을 내세우고 있다. 상업이나 공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동으로 농장에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자급자족력이 시민권의 전제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남에게 굴종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힘이 곧 시민의 권리가 발생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살림살이의 경제가 중요했고, 경제의 기본이 자급자족이 되는 것이다.

맹자가 항산(恒産)을 내세우는 것도 같은 이유다. 공동체의 정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평등한 물질적 토대가 전제되어야 하고 그것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상식 내지 도덕으로 바탕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래야 정의로운 공동체가 가능하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통해 사랑의 교회공동체를 구현한 것이나, 동학의 수운과 해월이 유무상자(有無相資)를 통해 부를 나눈 것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평등의 공동체를 기본으로 삼아야만 건강한 공동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4.


자급자족 경제의 기본은 분명 생태경제다. 개체 내지 공동체가 살아가고 있는 생태적 관계와 순환 안에 유기적으로 짜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 때 종족이 안전하고 안정되게 종족을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래의 인류 문화는 이렇게 생태적 문화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명은 전혀 달랐다. 알다시피 문명은 도시와 지배계급의 발생으로 만들어진다. 원래 자연 상태에서 잉여란 없다. 생계를 보장할 만큼 안정된 상황에서 잉여를 창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급에 의한 지배가 발생하면 착취가 발생하고 착취

분의 잉여를 과잉생산해야 한다. 과도한 노동을 투여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고역은 지배의 산물이다. 원시 상태에 고역과 착취, 잉여 따위는 애초 의미 없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인류는 문명의 길을 걷지 않고 세련되고 심화된 문화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독점과 폭력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5.


자본주의 문명의 가치는 오직 돈이기 때문에 생명이든 비생명이든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것만이 의미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의미하게 된다. 우리 환경이 이토록 파괴되고 생명이 멸종되고 생태계가 위험에 빠진 이유는 지구의 모든 것이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상품의 원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금성 상품을 벗어난 자연(환경)은 황폐와 무의미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의 상상 자체를 초월하는 엄청난 규모의 복잡성과 다차원 생태계가 아닌가? 그 생명을 우리는 백안으로만 대하고 있다.

일각에서 소농을 강조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자급자족형 생태농업을 한다는 말이다. 결코 소농이 도시의 상품이 되는 작물 재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소농이든 유기농이든 농산품이 중심이 될 때는 지금 관행농업이 따르는 산업농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유기농이라고 해도 산업농의 시스템을 따르는 한 세계자본주의 시스템의 부속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유기농이 아니라 자급자족농이 더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자급자족이 반문명 반문화의 선언 같이 자극적으로 들릴 지라도, 자급자족은 건강한 생태, 건강한 문화, 건강의 문명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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