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개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Feb 21. 2019

바보 이반의 길

-내 마음 열리는 곳

심 규 한 | 성요셉상호문화고등학교 교사



최근 아이들과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을 같이 읽었다. 나로서는 30년 만에 다시 읽은 셈이다. 한 세대가 지났다. 그 만큼 두 번째 읽으며 30년 전과는 많이 다른 점을 느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이야기의 전개가 거칠고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민담의 특성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민중의 이야기는 개연성보다 메시지에 있다. 메시지가 민중의 삶을 격려하고 자극하는 것인 한에서 단순 명료할수록 좋다. 그래서 이야기에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비약해 버린다. 때문에거칠게 느껴진다. 


더불어 인물도 입체적이기보다 전형적이다. 바보 이반과 그 형제들은 계급을 대표하는 전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성격적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점이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더 편하다. 하지만 개연성의 문법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이 부족해지고, 이야기를 이야기로만 느끼게 하는 단점도 생긴다.


톨스토이가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오히려 민중에게 들려주기 위해 민중의 전통적 양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민화의 메시지에 특별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자신의 메시지를 민중의 이야기기 방식으로 투박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썼다.


그러나 내 눈에 더 거슬렸던 부분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톨스토이를 포함해 옛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가부장 중심적 사유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바보 이반’의 주인공은 물론 이반인 남자다. 그건 그렇다 쳐도 여기 등장하는 남자들의 아내들은 어린아이같이 자기중심적이다. 아이같이 채근하며 자기결정권이 없는 수동적 존재로 그려진다. 여성을 비하하는 편견이 담긴 것으로 읽혔다.


하지만 이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다. 당시 여성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이 그대로 드러났을 뿐이다. 가부장사회인 전통사회 안에서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보 이반, 악마를 땅 속에 묻어 버리다! - 뭐 또 파 묻을 거 없수?

최근 몇 년 사이 미투운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는 지금 페미니즘이 유행하고 있다. 그만큼 성적 차별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졌다. 독자 자체가 남녀의 성차에 따른 성역할 고정을 부당하다고 느끼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 민담류의 이야기들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전통적 이야기들이 가부장제 사회의 성역할 고정을 정형화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독서가 방해를 받게 된다. 나도 그랬다. 지금은 남자 여자의 성역할을 구분한 전통사회의 이야기 방식이 설득력을 잃는 시대인 것 같다. 나 자신이 성장기에 읽을 때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점이다.


그래도 변치 않는 주제의식은 여전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반이 아닌 이반의 편에 두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대안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영악한 세상에서 돈과 권력을 마다하고 자기 힘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바보 이반을 지지한다. 그것이 이반의 길이다.


우선 내용을 잠시 보자. 이반의 큰형 세몬은 귀족 장군이고, 작은형 타라스는 상인이다. 큰 악마는 형들의 욕심에도 불구하고 재산 분배 과정에 싸움이 없는 이들 삼형제의 화목을 깨기 위해 작은 악마들을 보낸다. 작은 악마들은 세몬과 타라스를 찾아가 각자의 욕망을 충동질한다. 형들을 쉽게 유혹에 넘어가고 곧 멸망의 길에 이르러 이반에게 의탁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우직한 바보 이반은 욕망도 요령도 없이 일만 열심히 한다.


작은 악마들은 이반의 일을 방해하다가 이반에게 차례로 붙잡혀 혼이 나고 용서의 대가로 군사를 만드는 보릿단

과 금화를 만드는 떡갈나무 잎을 선물한다. 하지만 소유와 지배에 대한 욕망이 없는 이반에게는 형들과 달리 이

것들도 단지 놀이의 수단에 불과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최후로 우두머리 악마가 나서게 된다. 우두머리 악마는 두 형을 유혹해 차례로 망하게 하고 이반의 나라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형들처럼 군대와 돈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했지만 이반과 같은 바보들이 사는 나라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우두머리 악마는 머리로 일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이반의 나라에서는 이 역시 통하지 않았다. 결국 우두머리 악마도 실패해 땅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무리 머리를 쓰는 삶으로 바보 이반과 바보나라의 백성을 유혹했지만, 그 백성은 그 내용 자체를 이해할 수 없

었으며 오직 우직하고 단순할 뿐이었다. 톨스토이는 마지막에 그 나라를 이렇게 설명하며 끝을 맺었다.


‘이 나라에는 단 한 가지의 중요한 관습이 있다. 손에 굳은살이 박인 자는 식탁에 앉게 되지만, 박이지 않은 자는 먹다 남은 찌꺼기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바보 이반’이라는 민화는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읽힌다. 바보 이반은 노자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사람이고, 바보의 나라는 노자가 말한 소국과민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중요한 관습인 ‘손의 굳은살’은 스스로의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자급자족하는 삶을 의미한다.


톨스토이가 비난했던 세 가지 대상을 보자. 군대, 자본, 지식이다. 톨스토이는 작은 악마와 큰형을 통해 정치권력의 극단인 군사적 힘을 비판하고, 작은 악마와 작은형을 통해 자본권력의 횡포를 비판하고, 큰 악마를 통해 지식 권력으로 남을 착취하는 지식인을 비판했다. 모두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남의 힘을 착취하거나 가로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대신 톨스토이는 남의 힘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반과 같은 사람들을 옹호한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 바로 러시아에서 직접 몸으로 일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민중 자체가 아니던가?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반의 길이 아니라 일반의 길 위에 서 있지 않은가? 주류의 삶에서 벗어날까 봐 조마조마하고 안달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 자신의 정직한 노동에 의해서 살지 않고, 국가 혹은 세계자본주의라는 정치, 경제, 지식이 창출한 거대 시스템에 의존해서 살고 있지 않은가? 구조의 악은 외면한 채 개인의 악에 대해서만 분노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진정한 용기는 이반의 용기가 아닐까 싶다. 일반의 삶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태화관과 3.1운동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