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신문 3.1운동 100주년 특집 : 기미년의 회관 (3-3)
- 이난향 씀
* 이 글은 중앙일보사에서 1973년 간행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명월관'에 관한 글 중 3.1운동과 관련된 대목이다.
** 이난향은 대표적인 당대 기생이었으며, 당시 태화관에 근무하는 기생의 수장이었다. 주옥경은 이때 이미 손병희의 부인이 되어 있었고, 이난향은 '주옥경' 여사를 '선배'라고 불렀다.
<태화관과 3.1운동> 1, 2회분에서는 연재에서는 명월관 소실 - 태화관 개점 이야기, 주옥경 여사의 시점으로 본 3.1운동의 준비과정까지를 실었다.
고종 황제의 인산 날을 2일 앞둔 1919년 3월 1일 손병희 선생께서는 명월관 별관인 태화관으로 가기 전에 재동 자택에서 점심을 들었다. 이날 아침부터 여러 군데서 전화가 요란스럽게 걸려왔다. 그때마다 손 선생께서는 짧게 지시를 내리고 아무 말씀이 없었다. 오랫동안 손 선생 옆에 있어 온 주옥경 선배도 이날처럼 근엄하신 손 선생님은 일찍이 뵈온 일이 없었다고 하며, 태산 같이 무겁게 앉아 계신 위풍에 눌려 아무 말도 걸지 못했다는 것이다.
손선생께서는 위장병이 있었기 때문에 단단한 음식을 못 들어 주 여사는 곧잘 무를 썰어 넣은 곰국을 끓였다고 한다. 거사를 눈치챈 주 선배는 솜을 두둑하게 넣은 한복을 내놓았다. 외출복을 갈아 입은 손 선생님께서는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에 마루에 나와 서 있는 온가족에게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를 안심하고 있길 바란다. 집에서 열심히 수도에 힘쓰라"는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자가용을 탔다. 손 선생님은 이때 자가용을 갖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일반 한국 사람은 아무도 갖지 못한 자가용을 의암 손병희 선생은 갖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한국사람 운전사는 수가 많지 않아 대만 출신을 썼는데 이름은 '하라삼'이라고 했다.
이날 아침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점심 손님 30여 명이 간다는 연락을 받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 씨는 손수 나와 아랫사람들을 지휘하며 태화관 안팎을 말끔히 치우느라고 바빴다. 하오 1시가 되었을 무렵 손님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 선생이 오신다는 좌석에 기독교·불교 등 다른 종교에의 인사들이 모여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불교 대표 한용운 스님이 들어서는가 하면 기독교 대표 오화영 목사도 들어 섰고 오세창·최린·권동진 씨 등 보기 드문 손님이 한 방에 모이는 바람에 일하는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손병희 선생이 도착하자 좌중은 거의 찼고 어느 틈엔가 태화정 동쪽 처마에는 태극기가 힘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33인 중에서 가장 하소한 분이었던 이갑성 씨의 설명에 의하면 태화정 대청은 남쪽으로 나 있었으나 동쪽은 해 돋는 새 아침을 뜻하기 때문에 태극기를 동쪽 처마에 걸었다고 한다.
이윽고 손병희 선생을 위시한 민족 대표 33인 중 이날 참석한 29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동쪽을 향해 태극기에 경례한 다음 육당 최남선 선생이 지으신 독립선언문을 낭독해 내려갔다. 독립선언문 낭독이 끝난 다음 대한독립만세 3창이 우렁차게 터져 나왔고 이미 독립선언 축하연이 베풀어졌다.
한편 손병희 선생께서는 주인 안순환 씨를 불러 통감부에 진화를 걸어 독립선언을 했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고 한다. 곧 헌병과 순사들이 인력거를 가지고 태화관에 들이닥쳤으나 민족대표들은 태연자약하게 자동차를 갖고 오라고 호령했고 7대의 '택시'에 분승한 민족대표는 필동 자리에 있었던 경무총감부로 갔다.
이날 하오 5시 지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주옥경 선배는 올것이 왔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았지만 제일 먼저 걱정되는 것은 위장이 나쁜데다 치아가 없는 손선생님께 어떻게 하면 죽밥을 드리느냐는 것이었다. 손선생이 미결수로 서대문 감옥에 계실 때 주 선배께서는 형무소 주위에 방을 구할 수 없어 형무소 담 밑에 있는 초가에 방 한칸을 부탁했다.
집 주인은 감옥에서 죽은 죄수들의 송장을 갖다 놓은 무서운 방이라고 빌려 주지 않는 것을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얻어 겨우 죽밥을 차입할 수 있었다. 하루는 일본 사람이 주 선배에게 찾아와 손병희 선생이 졸도했으니 보석으로 손 선생을 모셔가라고 전해 달려갔으나 조금 의식을 회복하는 바람에 도로 감방에 수감했다고 주 선배는 그 당시 일인들의 악독했던 사실을 말해주었다.
주 선배에 의하면 이때 왜놈들은 손 선생께서 바깥과 연락을 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독방에 가두고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 사람을 옥지기로 썼다는 것이다. 하루는 손 선생 일행이 재판을 받으러 법정에 갔을 때 주 선배는 버선발로 뒤쫓아 갔고 재판소 뜰에 죄수목에 용수를 눈아래까지 눌려 쓰고 대기하고 계시던 손 선생님께서는 멀리 서 있는 주선배를 용수 틈으로 알아보시고 뜰에 무심히 피어 있는 꽃한송이를 꺾어 흔들어 보이셨다는 것이다.
년 남짓 옥고를 치른 손 선생님께서는 인사불성이 되어 출감, 상춘원에 계시면서 주 선배의 따뜻한 간호를 받았으나 이의 보람도 없이 4개월 후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손선생께서는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주위에 계신 사람들에게 주 선배를 잘 보호하라는 뜻으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겨우 '보호'하며 외마디를 남기셨다고 한다.
그후 천도교 인사들은 주 여사를 일본으로 보내 주 선배는 미국 갈 생각으로 동경앵정영어학교에 다녔으나 곧 손 선생님이 잠들어 계신 곁으로 돌아왔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손 선생님이 눈을 감았을 때 주 선배 나이 29세, 그때부터 오늘까지 평소 손 선생님이 계셨고 손 선생님의 묘소가 있는 서울 우이동 154 별장 봉황각을 떠나지 않고 있다. 비록 손 선생님은 오래 전에 가셨으나 주옥경 선배의 가슴 속엔 항상 그분이 살아 계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