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의 회고 (3-4)
- 이난향 씀
* 이 글은 중앙일보사에서 1973년 간행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명월관'에 관한 글 중 3.1운동과 관련된 대목이다.
** 이난향은 대표적인 당대 기생이었으며, 당시 태화관에 근무하는 기생의 수장이었다. 주옥경은 이때 이미 손병희의 부인이 되어 있었고, 이난향은 '주옥경' 여사를 '선배'라고 불렀다.
<태화관과 3.1운동> 1, 2, 3회분에서는 연재에서는 명월관 소실 - 태화관 개점 이야기, 주옥경 여사의 시점으로 본 3.1운동의 준비과정, 그리고 3월 1일 당일의 태화관 광경 묘사와 주옥경 여사의 의암 손병희 선생 옥바라지 이야기까지를 실었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는 눈도 달라졌지만 기생들이 세상을 보는 눈도 하루 하루 변해 갔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일본 유학생들이 사각모자를 쓰고 돌아왔고, 상해를 거점으로 한 애국지사들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돈을 물쓰듯 한다던가 전직이 높았다는 것만으로 기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목이 터져라 외치던 기미대한독립만세에서 애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 기생들의 귀에 아직도 만세의 여운이 감겨 있어 애국지사나 우국 청년을 따르는 이른바 사상기생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기미독립선언을 한 태화관은 일인들의 압력으로 문을 닫고 주인 안순환 씨는 지금 조흥은행 본점 자리에 식도원이란 요릿집을 새로 냈다. 그러므로 명월관 이름은 그전 장춘관 자리에서 명맥을 보전하면서 새 시대의 손님을 맞게 되었다. 기미독립선언 이후 일인들은 한국 사람이 3인만 모여 있어도 감시하기 일쑤였다. 비교적 요릿집은 자유로운 상태이어서 애국지사들은 요릿집에 잠입하게 되고 명월관은 우국지사들의 숨막히는 연락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
어느날 명월관에 나가던 남도 기생 현산옥 집에는 상해에서 잠입한 애국지사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명월관 인력거꾼이 한밤중에 산옥의 집에 쪽지를 전했다. 뒤따라 온 일인 형사의 무슨 쪽지냐는 질문에 인력거꾼과 산옥의 대답은 "문밖 놀이에 나오라는 기별쪽지"라고 똑같은 대답을 했으나 믿지 않았다. 일인 형사는 산옥의 어머니 방문을 열었지만 가발을 하고 산옥 어머니와 같은 이불 속에 누운 애국지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한다.
이 무렵 인력거꾼 중에는 고학생들이 많았고 이들은 애국지사의 연락역을 맡은 사람이 많았다. 인력거를 타고 가던 기생이 인력거꾼이 고학생인 줄을 눈치채고 그 자리에서 내려 돈을 주고 걸어갔다는 이야기는 달라진 기생들의 마음을 엿보이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한번은 식도원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과 친일파 박춘금과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화가 난 박춘금이 육혈포를 꺼내 인촌 선생을 겨누는 바람에 방안은 초긴장 상태였다 한다. 이때 기생들은 재빠르게 인촌 선생 주위에 둘러서며 "쏘려면 우리를 쏘라"고 막아서는 바람에 박춘금은 총을 거두었다. 이날 인촌 선생께서는 많은 기생 중에서 대표격인 이연행을 자택으로불러 부인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셨다고 하니 인촌 선생의 덕과 인자하신 모습을 보는 듯 선하다.
이와 같은 사상기생들의 활동은 곳곳에서 절개와 지조를 생명으로 알던 초기 명기들의 후배답게 찬란한 빛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는 검은색 강동치마에 흰저고리를 입고 뾰족구두에 양산을 든 신여성 흉내를 내는가 하면 일부는 돈과 협박에 끌려 밀정기생이 된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 무렵 서울에는 요릿집이 많았지만 명월관·국일관·식도원 등이 큰 것으로 손꼽혔다. 명월관은 점잖은 손님, 국일관은 장사하는 신흥부호, 식도원은 일본 사람과 관공리들로 각각 손님이 대강 구별되었다. 그러나 1929년 이른바 일본이 한국을 점령통치한 20주년 시정기념을 위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열리게 되자 이와 같은 구분은 사라지고 한마디로 명월관을 휘져어 놓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일인들은 1915년에도 시정 5주년기념 공진회를 서울에서 연 바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미독립선언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 소위 문화정책이란 것을 펴고 제법 치적을 자랑하고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박람회를 벌였던 것이다.
시골에서 논깨나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박람회 구경에 나섰고, 서울에 온김에 말로만 듣던 명월관을 찾아 기생들과 함께 술을 마셔 보리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명월관을 찾아드니 점잖은 손님은 끊어지고 시골부자들 판이 되고 말았다. 이 바람에 명월관 기생 중에는 공부해서 가정을 꾸미거나 신여성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도 출신 정금죽, 서도 출신 김금도 등이 제일 처음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또한 사각모자를 쓴 유학생과 연애에 빠져 이루지 못할 사랑에 청춘을 불태우다 정사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몇 년 전의 인기 <라디오·드라마>로 방송되고 또 영화화되기도 한 장 모와 기생 강명화와의 사랑과 정사도 이와 같은 시대 변천이 낳은 '로맨스'였고, 명기라 불리던 한남권번의 김모 기생의 자살 소동도 같은 것이었다.
양장차림에 양산을 오똑하게 받쳐 들고 인력거 위에 올라앉은 기생의 모습 속에는 이미 서화와 기예를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워 조심하게 처신하던 옛 명기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너희 희망은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중에 또다시 꿈같구나
기미3·1 만세 이후 퍼지고, 이 무렵 유행된 희망가는 뜻있는 사람에게는 물론, 옛 추억을 더듬는 명기의 마음을 더욱 사무치게 하기만 했다.
세상이 온통 흐려지고 명월관이 난장판이 되었지만 뒤늦게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언론인과 문인들의 존재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신학문을 닦고 시대의 첨단을 걷는 이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명월관은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기생들은 이들의 재치 있는 이야기에 솔깃해졌다.
대충 1930년대의 전후라고 할까. 하루는 양복장이 신사들이 그득한 연석에 모르는 사람이 한 분 나타났다. 옥양목 두루마기에 '도리우찌'[조타모(鳥打帽)의 준말. 사냥 모자로 운두가 없고 둥글넓적한 모자] 모자를 썼고 신발은 자동차 '타이어' 속으로 만든 경제화를 신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좌석의 손님들과는 어울릴 옷차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손님은 방을 잘못들어 온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좌중에 계신 손님들이 모두 일어나 정중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분이 바로 육당 최남선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육당 선생께선는 별로 말씀이 없었으나 백운선의 영변가를 좋아하셨고, 음성은 쇳소리였다.
내가 육당 선생을 처음 본 인상은 '복덕방 목침' 같다고 손님들에게 말했더니 그 후 이 말은 육당 선생님의 별명처럼 돼버렸다. 춘원 이광수 선생은 얼굴색이 유난히 빨간 것이 인상에 남아 있으며 수주 변영로 선생은 그때부터 술은 많이 들었는데 김금련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1930년 께는 춘해 방인근 씨가 주동이 된 동부인회가 가끔 명월관에서 베풀어졌다. 이 모임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였다. 춘원·박인덕·의사 백인제 씨·세브란스의 전 학장 오긍선 씨·음악가 백명곤 씨·숭실전문 교수이며 테너 가수였던 차재일 씨·변호사 등 재제다사였다.
김억·김동인·윤백남·안석영씨 등 문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택상 씨는 거액의 수표책을 들고 다니던 영국 신사 모습이었고, 청전 이상범·심산 노수현 씨 등 화백도 더러 오셨는데 청전 화백은 술이 취하면 그림을 즉석에서 그리기도 했고 명필로 이름 높았던 송영기 씨는 붓을 입에 물고 기생치마 폭에 시를 쓰기도 했다. 월탄 박종화 선생은 원래 천향원이 단골집이었지만 가끔 명월관에 오셨고 최독견 씨 김억 씨 등과 함께 주로 정담을 즐기는 분들이었다. 또한 수주 변영로 씨는 술을 많이 드셨고 우리들에게 그의 시 논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한편 이 무렵 언론계에 있는 분들도 자주 명월관에 들러 모임을 갖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하며 고담준론에 밤깊은 줄 몰랐다.
1932년 중외일보 사회부장이시던 김팔봉 선생께서는 뜻밖의 빈객을 맞게 되었다. 그때 동남아 순회 특별취재를 맡았던 미국 "뉴요크타임즈 특파원 일행 4명이 우리나라에 온다는 소식이었다. 팔봉 선생께서는 곧 명월관에 1인당 15원짜리 최고급 요릿상을 주문했다. 그러나 명월관측 대답은 그와 같은 고급상은 일찍이 만들어 본 일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10원짜리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으나 명월관이 갖고 있는 산해진미와 기술을 총동원 해도 10원짜리 상을 만들 수 없다는 대답에 최고급 요리는 결국 7원짜리로 낙착되었다는 것이다. 팔봉 선생은 당시 동아일보의 주요한 씨, 조선일보의 이관구 씨 등과 함께 이들 특파원 4명을 명월관에서 맞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장사하는 사람들은 요즘처럼 요리값을 먹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바가지 씌우는 일은 없었다.
언론인 중에서 납북돤 정인익 씨는 육자배기를 멋들어지게 불렀고 그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서범석 씨는 댄스를 잘 추었다. 김팔봉 선생은 술만 취하면 그 자리에 잠드는 습관이 있었는데, 친구분들이 깨우지 않으면 다음 날 아침 그 자리에서 깨어나 출근하기도 했다.
언론계 인사치고 명월관에 드나들지 않는 분이 거의 없었는데 이것은 명월관에 장춘각이라는 그윽한 특실이 있었고 2층은 피로연을 할 수 있는 홀이 있기 때문이며, 그보다는 외상이 후하고 외상값 독촉을 심하게 하지 않는 때문도 있었던 것 같다.
이 무렵 술마시는 풍습은 주로 요릿집에서 1차를 하고 '에인젤' '낙원회관', '퀸' 등 카페와 '바'에서 2차를 하는 것이었다. 카페와 바에는 지금처럼 호스테스가 흔하지 않았다. 여흥이 도도한 일부는 콜택시를 불러 1~2원만 주면 한강변이나 근처의 절간에 드라이브 하기도 했다. 주로 찾는 곳은 동대문 밖 개운사·우이동·화계사·청량리 청량사·탑골승방 등이었다.
이중에서 청량사로 가는, 지금 입업시험장 근처에는 '오줌고개'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약간 가파로운 언덕으로 언덕마루를 넘을 때 덜컹하고 받는 충격을 받고 이어 내리막 길을 내려갈 때 갑자기 스르르 미끄러지는 바람에 온몸이 짜릿짜릿해 온다고 해서 '오줌고개'라는 별명이 붙어 명소 아닌 명소로 꼽혔다. (… 후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