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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24. 2019

세종에게 국가의 길을 묻다

- 자기 문화를 가진 독립국가를 만들자

[편집실 주] 이 글은 2017년 6월 19일 저녁 7시에서 8시 40분까지 서울시청 청사에 있는  ‘시민청 바스락홀’에서 있었던 박창희(85) 선생의 강연 ‘대왕 세종의 길’을 녹취한 것이다. 이날 강연에는 외국어대 철학과 박치완 교수를 비롯한 박창희 교수의 옛 제자들과 한글학자 김슬옹 교수, 문화예술단체 ‘여민’의 김영옥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특히 이날 강연을 들은 한국사상연구자 조성환 박사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사상사 분석 방법론에 입각한 독창적인 세종 해석이라고 생각되어 강연 내용을 조성환 박사가 기록·정리하여 본지에 투고하였다. “세종=유학군주”라는 기존의 상투적인 이해를 벗어나서, 세종의 내면세계에까지 파고들어간 깊이 있는 분석은 ‘사상사’가 부재한 우리 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박창희__ 일본 히토츠바시대학에서 경제학 학사를, 도쿄도립대학에서 동양사 석사를, 그리고 다시 히토츠바시대학에서 사회학 박사를 취득하고, 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와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세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역임하였다. 대학원에서는 고려 시대의 문신 이규보를 연구하였고, 귀국해서는 고려 사회는 귀족제가 아니라 관료제라는 학설을 주장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7천 명의 한국인 징용자들이 강제노동을 하다 죽어간 ‘마쓰시로 지하대본영’(나가노현 소재)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35년 동안 세종을 연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15년에『역주 용비어천가(상·하)』를 출간하였다.


박영미 :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강의를 준비한 박영미라고 합니다. 이 강의는 페이스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박창희 교수님 따님이 교수님께서 밥상머리에서 세종대왕 강의를 하시는 것을 페이스북에 중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의가 반응이 좋아서 교수님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는 요청이 여기저기에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개 강의를 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저는 외국어대학 1학년 때 교수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벌써 33년이나 지났네요. 그리고 10여 년 뒤에 교수님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외국어대학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는 22년 만에 교수님의 강의를 다시 듣는 역사적인 순간이 됩니다. 여기 모인 많은 분들도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타임머신을 타고 22년 전으로 돌아가서 박창희 교수님을 모셔 볼까요?


세종대왕 어진

박창희 :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시골에 파묻혀서 혼자 연구하고 혼자 생각해 왔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비판을 받거나 피드백을 얻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일종의 두려움도 있습니다. 워낙 혼자 생활을 오래 해서 제 얘기가 잘 전달될지도 걱정입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세종(1397~1450)은 53년을 살면서 32년(1418~1450) 동안 재위하였는데, 이 기간을 저는 크게 3기로 나누어 봅니다. 세종 원년(1418)에서 14~15년까지가 제1기, 세종16년부터 25년까지가 제2기, 세종26년부터 32년까지가 제3기입니다. 이렇게 나누는 기준은 ‘책봉 체제’에 대한 세종의 태도 변화입니다. 이 강의의 “세종에게 국가의 길을 묻다”는 그 3기에서 세종의 정치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살펴보는 것과 조응하는데, 오늘은 그중에 1기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1기 : 재위 원년 ~ 15년 / 서기 1418~1433

제2기 : 16년 ~ 25년 / 1434~1443

제3기 : 26년 ~ 32년 / 1444~1450


명나라와 조선의 책봉 체제


아시다시피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그때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처음에 내세운 명분은 고려를 원의 속박으로부터 이탈시켜서 독립 왕국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조 자신은 불교를 믿고 있었지만, 새로운 국가는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태조 말기에 명나라는 조선과 대등한 관계로 국교를 맺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태종(이방원)이 태조의 명에 따라 명나라에 들어가서 책봉 체제를 받아들입니다. ‘책봉 체제’란 중국 황제가 “너를 조선 국왕으로 임명한다. 대신 우리에게

조공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약속 체계입니다. 정치적으로 국왕으로 인정하는 대신에 경제적으로 조공을 바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태종 시대에 책봉 체제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조선 처녀를 황제에게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 처녀들을 ‘공녀(貢女)’라고 합니다. 고려 말에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이 원나라에 관리로 있으면서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여자를 바치는 것만큼은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고려의 백성들도 다 같은 천자의 적자이니까, 그만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되자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입니다.


당시 명나라 황제인 성조(영락제)는 무인 기질이 강한 군주였습니다. 북으로 만주를 공략하고 남으로 베트남까지 정벌하러 가고, 몽골과도 다섯 번이나 싸울 만큼 무력과 정복을 선호한 인물입니다. 조선은 이 영락제에게 조공을 한 것이지요. 책봉 체제의 특징은 조선을 직속령으로 만들지 않고 별개의 나라로 인정하면서 제후 관계, 일종의 군신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해마다 정월이 되면 임금과 백관이 서울에서 북경을 향해 절을 합니다. 동짓날에도 똑같이 합니다. 명나라에 황제에게 ‘표(表)’라는 편지를 보내는데, 이때에도 책상 위에 ‘표’를 올려놓고 절을 한 뒤에 사신을 통해서 표를 보냅니다. 중국에서 황제의 칙서가 와도 절을 하고서 맞이합니다. 그러니까 책봉 체제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와서 감독을 하지 않아도 조선 자신이 마음속으로 황제를 받들고 모시는 것이지요. 이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주 큰 죄에 해당합니다. 황제와 임금을 배신하는 행위가 되니까요.


책봉 체제에 모순을 느낀 세종


이와 같은 책봉 체제는 조선의 국왕으로서는 자기 모순적인 일이 됩니다. 나라를 세우긴 세웠는데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아니라, 책봉 체제가 개재(介在)된 통치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성격이 괄괄하고 강단이 있었던 세종의 부왕인 태종은 이런 의문을 품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독립된 영토를 갖고 있는데, 왜 내가 세종을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리고는 마음대로 임명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태종이 중국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결정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태종은 무조건적으로 중국 황제를 모시는 임금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태종의 생각을 세종은 이어받았습니다. 세종은 32년 동안 ‘순일(純一)’하게, 즉 거짓말이나 속임수 하나 없이 중국 황제를 깍듯이 모셨다고 평가됩니다. 그래서 명나라의 성조(聖祖)와 인종(仁宗), 그리고 선종(宣宗)의 3대에 걸쳐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뭐 하나 어김없이 성실하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상으로 비단이나 예복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종에게 있어 통치란 명 황제가 세종을 아끼게끔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이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분명히 세종은 재위 초반에는 책봉 체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합니다. 이 기간이 바로 제1기에 해당하는 세종15년까지입니다.


그런데 세종은 책봉 체제를 시행하는 가운데 모순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공녀를 바치라는 명령이 결정적인 대목이었습니다. 세종은 공녀로 보낼 처녀를 15번이나 직접 고릅니다. 국왕이 직접 골라서 보내라고 황제가 명령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세종6년 무렵에 명나라 황제 성조가 죽습니다. 그때 조선에서 데려간 공녀 30명을 순장시킵니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처녀들을 자그마한 상자 위에 올려 세워 놓고 목에 줄을 건 뒤에 상자를 발로 차서 죽였다고 합니다. 이 죽은 처녀들을 황제와 같이 묻는 것이지요. 이것이 ‘순장’입니다. 이듬해에 그다음 황제 인종이 또 죽습니다. 이때도 15명을 순장시킵니다.


힘이 없는 국왕


그러자 신하들 사이에서 명나라에는 본받을 게 없다는 불만이 나옵니다. 명나라 황제는 야만적이고 부도덕하고 횡포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종은 즉위할 때부터 도덕성이 강한 나라, 요순이나 탕왕, 문왕이나 무왕과 같은 유교적 성왕을 꿈꾸었습니다. 이런 세종이기에 황제의 명령에 순수하게 따를 수만은 없었던 것이지요. 뭔가 착잡한 심정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유교적 윤리관에서는 제후는 천자를 받들어야 합니다. ‘이소사대(以小事大)’, 즉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모셔야 한다”는 유교의 정치 원리는 어길 수 없습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인자하게 대하고, 아랫사람은 의리를 가지고 예의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 유교의 기본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중국의 성조와 인조의 장례에서 진행된 순장 문제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겁니다. 외형상으로는 책봉 체제니까 황제를 모시지만, 내면적으로는 세종과 의식적 관료들에게는 모순이 느껴진 것이지요.


그러던 중에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중국 사신들의 횡포입니다. 세종 12년 8월 중국 사신들을 이끌고 창성윤봉이 조선으로 옵니다. 창성과 윤봉은 중국의 사신 중에서도 탐욕스럽기로 이름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황제가 요구하는 것만 가져가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이것저것을 많이 요구합니다. 그러면 세종은 요구하는 대로 다 주라고 합니다. 윤봉의 경우에는 3백 상자 분량의 공물을 가져갈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그 상자가 어떻게나 큰지 한 상자를 8명이 짊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우연히 황제의 귀에 들어가자, 황제는 칙서에 쓰인 것 이외에는 사신에게 주지 말고, 해동청매 등을 잡는 족족 자기에게 바치라는 칙서를 보냅니다.


그래서 세종12년 8월에 사신 대표로 온 창성이 또 개인적인 요구를 하자, “우리가 그 요구에 응한다면 황제 명령을 어기는 일이 됩니다. 제후로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거절합니다. 또 한번은 창성이 조선에서 잡은 해동청매를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자기가 공을 세우려고 한 것이지요. 이때도 세종은 매를 잡은 족족 보내라는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완곡하게 거절합니다. 그러자 화가 난 창성은 감히 자기를 배신할 거냐면서 호통을 칩니다. 그 이전에도 중국 사신들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조선 관리를 매질하고 꿇어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더 심한 일도 있었습니다. 세종이 창성을 연회에 초대했는데, 연회가 끝나고 창성이 궁궐에 들어와서 일본에서 건너온 ‘왜도’(倭刀)를 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종이 보여 주자 이번에는 ‘용검’(龍劍)을 보자고 합니다. ‘용검’은 상징적인 임금의 호신검입니다. 이번에도 보여 주었더니 창성이 고맙다며 용검을 가지고 가 버립니다.


용검을 일개 사신에게 빼앗긴 사실이 알려지자 신하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납니다. 

“용검을 호신하고 있던 자를 처벌해야 합니다.” 

“옆에서 통역하였던 자도 문제가 있습니다.”

“임금께서는 왜 보고만 있으셨습니까?” 

등등. 나라의 체면을 구겼다는 비난이지요.

이에 세종은 창성에게 주지 않았으면 분위기가 어색했을 것이라는 군색한 변명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힘없는 군주라는 자각을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신하들에게 “나는 아무 힘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국왕의 지위, 왕의 권위가 참으로 미약하구나.’라는 자기 인식을 한 것이지요.


세종의 실존적 각성


다음해인 13년(1431) 8월에는 더 큰일이 벌어집니다. 이전에 창성이 이런 협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 군사를 동원해서 함경도나 산골짜기에 파견해서 직접 매를 잡고 개를 몰겠다.” 그때는 그저 단순한 협박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것이 이번에는 칙서에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150명 군사를 보낼 테니 창성과 윤봉 등 4명의 사신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잘 인솔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라. 현지에서 백성들이 감당할 수 있도록 국왕이 잘 배려하라. 잡은 동물들을 국경에까지 잘 운반하라.”는 칙서가 온 것입니다.


이 칙서를 본 세종은 황제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교 이념에 따라 마지막으로 믿었던 황제마저도 세종을 저버린 것이지요. 이때의 심정을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마치 애비 없는 어린애를 희롱하듯이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좌대언 김종서를 불러서 

“나는 참 가슴이 아프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는가?”

라고 상의합니다. 실록에는 이 대화가 밤 10시(2경)까지 계속됐다고 나옵니다.


저는 이 사건이 세종의 실존적 자아의 각성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종은 ‘궁극적으로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을 것이고, 이 물음에 대해 ‘그것은 결국 내 몸이다. 그렇다면 내 몸은 어디에 있는가? 내 몸은 책봉 체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조상에게서 온 것이다.’라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고 봅니다. ‘책봉 체제 이전의 조상인 태조야말로 내가 이어가야 할 근원이다.’라는 자각을 한 것이지요. 이것은 저의 추론입니다.


세종14년의 변화


훈민정음


저의 이런 추론을 뒷받침하는 것은 14년부터 나타나는 세종의 변화입니다. 13년까지의 국정 운영과 제반 사실들이 14년 이후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다릅니다.


가령 14년 정초에 세종의 친형 효녕대군이 불교행사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는데, 세종이 직접 참여합니다. 수륙재는 천여 명의 승려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불교 행사입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반발합니다. 백성들이 본받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종은 불교를 ‘이념’이 아닌 ‘정감’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고 못나고 버림받은 짐승들을 위령하는 의례이니까 정감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가 유언으로 <<법화경>>을 금박 글씨로 새겨달라고 하니까, 세종은 불교신자가 아닌데도 어머니의 유언에 따릅니다. 

한번은 신하가 죽자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며칠을 굶습니다. 그러면서 “난들 굶고 싶겠느냐? 승려들은 남은 밥을 먹고 사는데 낸들 왜 그것을 못하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처럼 세종은 유교의 원리나 국왕의 규범보다는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자기 정감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정감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죠. 애도를 하려 하니까 고기 먹을 마음이 안 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서도 ‘불교는 왜 안 되는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예로부터 불교를 믿어 왔고 백성들도 따르고 있지 않느냐?’는 입장을 취하지, 불교의 ‘이치’가 이러이러하니까 안 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세종 1기 때의 인물로 기화(己和. 1376~1433)라는 고승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현정론(顯正論)>을 썼는데, 유교도 불교에서 받아들일 많은 좋은 점을 갖고 있고, 불교 역시 마찬가지라는 내용입니다. 일종의 ‘공생공존론’인데, 세종 역시 이와 유사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주권의 시행과 천문기기의 발명


세종은 14년 초에 수륙재에 참여하고 9월에는 군사훈련을 합니다. 군사훈련은 세종이 대단히 중시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요 몇 해 동안 사신을 맞이하느라 못했으니까 이제 제대로 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군사훈련을 하면 백성들이 힘들어집니다. 가뭄까지 들어 백성들이 어려우니까 연기해야 합니다.”라고 반대합니다. 이에 세종은 “이것을 지금 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진짜 어려울 때 구해주지 못한다.”며 군사훈련을 강행합니다.


이에 앞서,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세종1년, 즉 태종18년의 일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주적 판단과 역량, 통수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군사주권은 책봉 체제 하에서도 일관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화포까지 발명했으니까요. 또 유사눌이라는 신하가 문관무관 춤을 가사로 만들어서 노래하자고 제안합니다. 이 가사는 태조와 태종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이 춤을 세종14년에 대단히 활성화시킵니다.


아울러 14년에는 천문기기를 발명합니다. 원래 천문기기를 만드는 것은 제왕의 일입니다. 그래서 책봉 체제에 충실했던 세종13년까지만 해도 천문기기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천문에 관한 일은 황제의 몫이기 때문에, 제후는 우주나 해, 달, 시간에 관한 일을 독립적으로 생각해서도 논의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참람한 일입니다. 명분이 설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런 일을 세종14년에 합니다.


한편 이 해에 압록강 중류에 있는 파저강의 여진족들이 강을 건너와서 우리나라 사람을 60여 명이나 죽이거나 붙잡아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들은 명나라의 지배를 받지만 명이 직접 통제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틈만 나면 조선에 침입해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달아나는 무리들입니다. 그래서 세종은 이들을 도저히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이익만 취하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이들은 정벌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의 군사행동에 관여를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로부터 정벌의 구실을 얻어내기 위해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마침내 관여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종15년(1433) 2월에서 5월 사이에 파저강 일대를 정벌하게 됩니다. 최윤덕을 총사령관으로 해서 2만여 명을 출병시켜 대승을 거둡니다. 세종은 “저들은 미워해야 한다. 대신 여자나 어린애는 죽여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거나, 저들과 내통하는 자는 몰래 죽이라고 최윤덕에게 비밀 명령을 내리는 등, 시종일관 작전에 관여하여 큰 전과를 거둡니다. 이처럼 세종13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통치가 14년부터 전개됩니다.


중국의 상대화와 한글의 창제


파저강 정벌에 대해 허조라는 고관(高官)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이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대마도 정벌 때보다 더 큰일을 해 냈습니다.”라고 높게 평가합니다.


파저강 대정벌 때에 세종이 대연회를 열었는데, 부사령관 김효석이 일을 하다 말고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신발이나 복장이 연회복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본 세종은 자기 옷과 신발을 내주며 연회에 참가하라고 맞이합니다. 이 정도로 세종은 파저강 정벌을 중시했습니다. 세종에게 있어 파저강 정벌이란 하나의 작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파저강 정벌은 백성들, 군인들, 관료들을 통합시키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세종은 작전 계획을 짤 때에도 군인회의는 물론이고 군민공동회의까지 개최했습니다. 이것은 “나는 정치하는 데 있어서 혼자 일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세종의 말과도 상통합니다. 실제로 세종은 농민들의 공법(貢法)을 시행할 때에도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해서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세종에게 있어서는 모든 백성이 자신이 책임져야 할 대상이었으며, 함께 지혜를 모아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할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종의 ‘대천리물(代天理物)’, 즉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린다’는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백성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다. 백성이 이 사회를 있게 하는 근원이다.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은 백성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이 근본이 쇠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사상으로, 단순한 애민사상과는 다릅니다.


이처럼 제2기의 세종의 변화는 군사주권 행사, 백성을 대하는 태도, 불교의 상대화 등의 일련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배경 하에 추진된 것이 세종17~18년의 흥천사 사리탑 건립입니다. 태조는 죽기 전에 “흥천사는 나의 원당인데 다 짓지 못하고 있으니 꼭 완성해 달라”는 유언을 태종에게 남깁니다. 이 유언을 세종이 이 시기에 실행에 옮깁니다. 관료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20년에 마침내 완공합니다. 그리고 경찬회(기념법회)를 열려고 하자 관료들은 또 맹렬하게 반대하고 나섭니다. 우여곡절 끝에 세종23년에 경찬회를 여는데, 이때 세종은 “나는 간언을 듣지 않는 임금이다.”라고 선언합니다. 경찬회에서 발표하는 글의 말미에는 ‘부처의 제자 임금 아무개’라고 씁니다. 그래도 관료들이 하도 경찬회에 참가 못하게 하니까 온천에 가서 이름만 써 놓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때쯤 되면 세종이 이미 훈민정음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다. 세종이 만약에 유교사상에 투철했다면 한글은 못 나왔을 것입니다. 한글창제를 반대한 최만리는 전형적인 유교 관리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학의 원리에 입각해서 한글(언문)을 반대합니다. “중국에서 한글을 만든 것을 알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한글이 글입니까? 한자만이 진짜 문자입니다. 한글은 단순한 유희에 지나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나쁜 짓에 이용할 것입니다. 따라서 문화적인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나라 망하는 일입니다.”라는 것이지요.


조선에 수용된 유학은 ‘책봉 체제’라는 정치성을 떠난 유학이 아닙니다. 정치성을 포함하는 유학입니다. 세종이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였다면 한자와 다른 문자를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를 아예 할 수 없습니다. 한글 창제는 한자를 상대화시키겠다는 발상입니다. 중국과 다른 조선의 말소리에 따르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지요. 따라서 유학과는 전혀 상반되는 행위입니다.


반면에 불교에서는 가치의 기준이 부처입니다. 부처의 세계에는 상하 관계가 없고 단지 진리만 있을 뿐입니다. 불교의 중생과 세종의 백성은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부처를 모시는 불교는 황제를 모시는 유교와는 상반됩니다. 따라서 세종으로서는 불교를 택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이 있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보고 있습니다. 흥천사 경찬회는 무려 10,818명의 승려가 참가했습니다. 수많은 백성이 운집했습니다. 세종에게 있어 백성과 승려는 곧 나라의 실체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동기가 생긴 것이지요.


세종의 민족국가 구상


보통 훈민정음 창제 동기는 애민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계기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종은 ‘국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나라의 글자’를 생각한 것이지요. 이것이 훈민정음을 창작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세종은 한문은 남의 나라 글자라는 의식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한자 이용법도 사람마다 다 달랐습니다. 읽는 법이 제각각 다 달랐습니다. 한마디로 일반화가 안 되었습니다. 한자를 읽는 표준이 없어서 보급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정음자’를 만들어서 한자음을 고정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금운회거요>라는 중국 사전을, 훈민정음을 만들고 나서 2개월 만에 만듭니다. 이것은『 동국정운』의 앞 단계에 해당합니다. 이어서 나온 <<동국정운>>은 한자를 우리화하는 작업입니다. 우리나라[東國] 글자를 만드는 작업이지요. <<용비어천가>>는 한자와 한글이 혼용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자를 자기 식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세종에게 있어서는 태조 이래의 자주 독립 왕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이념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 훈민정음을 수단으로 나와 주어야만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드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백성들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만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이 나온 2년 뒤인 세종27년 봄에 <<용비어천가>>가 나옵니다. <훈민정음> <<용비어천가>><<동국정음>> 이 삼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통일된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세종은 정인지로 하여금 26년 말까지 전국적으로 공법(토지 수익 산출법)을 계속해서 정확하게 만들도록 시킵니다. 이렇게 나라의 틀을 만들자 정인지·안지·권재를 시켜 <<용비어천가>>를 만들게 합니다. <<용비어천가>>는 정음으로 부른 ‘나라 노래’였습니다. 세종은 정음으로 ‘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태조가 중심입니다. 태조가 하늘의 명에 따라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주나라 성격상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조를 그 어느 나라의 국왕보다도 위대하다고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조가 위대한 이유는 책봉 체제 때문이 아니라 태조 자체로서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용비어천가>>는 ‘선사’(先詞)와 ‘차사’(次詞)로 나누어지는데, 선사에서는 주나라를 비롯하여 원나라, 요나라, 금나라, 그리고 고려의 제왕의 업적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사에서는 태조를 부각시킵니다. 태조가 백성들에게 얼마나 흠모 받고 있었는지를 81장에서는 총 4장에 걸쳐 순 한글로 서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용비어천가>>는 단순히 가사가 아니라 ‘악보’의 가사로 만든 것입니다. 즉 음악의 의미가 강합니다. 세종13년에도 박연이 ‘우리 음악’을 주창하자, 세종 14년에 ‘우리 음악’ 문제가 크게 대두됩니다. 이것이 <<용비어천가>>에도 반영됩니다. 그래서 <<용비어천가>>를 악보로 만든 것이지요.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단편이나 장송 등 여러 장르로 불렀으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에 부응하는 신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종의 요청은 불발로 끝나게 되지요. 세종은 이렇게 <<용비어천가>>에 커다란 의미를 두었습니다.


오늘 얘기를 정리해 보면, 세종이 군사주권을 행사하고 독자적인 문자를 창제하고 나라의 음악을 만들고 한 것은 모두 일종의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이 아니면 세종이 추구한 정치공동체, 역사공동체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세종이 처음부터 민족국가를 지향한 것은 아닙니다. 계속 변해 갑니다. 변해 간 요인은 내적인 정감과 더불어 세종의 사상이었습니다. 하나는 백성입니다. 세종은 백성이 굶는다는 소리를 들으면 연못에 빠져 있는 듯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백성이 잘 되면 기분이 좋고 못 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영토에 대한 애착입니다. 세종은 이 땅은 조상이 지켜준 영토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평화 외교입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가급적 탈 없이 지내려고 했습니다. 탈이 나면 나라에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세종은 나라가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세종의 정치를 가장 잘 나타내는 키워드는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정체성’ 같은 것이지요. 세종은 훈민정음 만들 때에도 절대 비밀에 부쳤습니다. 세종과 세자와 대군 몇 사람이 비밀리에 만들었습니다. 중국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발표를 합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는 백성을 위해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세종대왕릉 


<질문과 답변>


질문 : 오늘 강의를 듣고 그동안 제가 세종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에서 벗어나서 세종의 실체에 다가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선의 천재를 꼽으라면 대개 세종을 꼽는데,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세종은 어떻게 공부를 하였기에 당시의 최고의 리더가 될 수 있었는지요?


답변 : 세종은 사냥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 일정이 대단히 빡빡했습니다. 공무를 수행하느라. 20살에 즉위했는데 유교 관계 서적을 100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 기억력이 좋다고 자평도 하였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왜와 북방 침입을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세종은 시종일관 공적인 일에 집중했다고 보입니다.


질문 : 한글을 연구하는 김슬옹이라고 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보면 세종에대해서 “백왕을 초월했고 하늘이 내린 성인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중국 황제에게나 쓸 수 있는 말일 텐데, 당시 중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했을지요? <<해례본>>을 공식적으로 출판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알려졌을 텐데요.


답변 : 말년에 두세 번 나옵니다만, 세종 자신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순부터 무왕 에 이르는 성왕들이 지향했건 것도 결국은 백성을 사랑하는 일에 지나지 않구나.” 제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요순이 위대하다고 해도 세종만큼 창조적인 일을 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보아도 세종의 백성 사랑이 요순보다 못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세종은 “중국이 제일이다”는 생각도 사실적으로 생각할 때 문제가 있지 않느냐, 라고 생각했습니다. <<용비어천가>>에도 나옵니다만, 그 위대하다고 하는 당태종에 대해서도 많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나라 문왕이나 무왕도 짐승을 키웠고, 한나라 문제도 개를 키웠다고 하더라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 도덕성이나 애민정신에 있어서는 중국을 낮게 보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에 세종은 우리나라의 나쁜 습성도 관찰하고 있습니다. 가령 “처음에는 좋아도 끝이 없더라”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세종이 민족의 문제를 간절히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질문 : 저도 사회자로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면, 요즘 사드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세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답변 : 세종에게 있어서는 군사주권이 처음부터 확보되어 있었습니다. 태조도 대마도 정벌을 했습니다만, 세종의 경우에는 화살, 화포 등을 개발합니다. 그리고 말을 타다 활을 쏘고 이동하면 희생이 덜하지 않을까, 라는 제안도 합니다. 일종의 이동로켓 같은 아이디어이지요. 전법 서적을 만들면서 명나라에게는 보이지 말라고도 합니다. 반면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처음부터 우리 힘으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주적인 민족국가로 있고 싶어 하는가 아닌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바로 여기에서 민족국가 문제에 계속 부딪힙니다. 만약에 우리가 북한을 같은 민족이라고 보고, 같은 민족은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미국을 존중하면서도 한미군사동맹이 민족문제에 앞서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질문 : 한국 사상을 연구하는 조성환이라고 합니다. 감동적인 강의 대단히 감사합니다. 서두에서 교수님께서 제1기를 15년까지라고 하셨는데, 강의를 듣다 보니까 13년까지를 1기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답변 : 15년이 파저강 정벌인데, 그때는 중국 사신들이 거의 행세를 못합니다. 14년까지만 해도 중국 사신들이 조선의 관료들을 꿇어 앉히거나 합니다. 책봉 체제는 말년까지도 지속됩니다. 그러나 세종은 그것을 ‘형해화’시킵니다. 실체가 없는 허수아비가 된 셈이지요. 훈민정음을 만들어서 한자를 상대화시키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질문 : 2기가 책봉 체제가 형해화(形骸化)되고 민족국가로 나아간 단계라면, 3기의 특징은 무엇으로 보시는지요?


답변 : 문화적으로 꽃이 피는 시기입니다. 가령 내불전을 궁궐 안으로 가져옵니다. 한글을 시험과목에 넣고 불경을 한글로 언해합니다. 제1기에 중국과의 모순이 드러나는데, 그렇다고 해서 중국과 대립하지는 않고 제2기에 와서 그것을 형해화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부적으로 반불세력과의 모순이 생깁니다. 세종은 이들을 계속 설득시키면서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다가, 마침내 <<용비어천가>>나 내불전 등을 만듭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 작업이 계속 진행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질문 : 문화예술 감성단체 ‘여민’의 대표 김영옥이라고 합니다. 교수님의 박사학위논문 주제가 이규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세종을 연구하시게 되었는지요?


답변 : ‘민족’ 문제 때문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문제의식은 ‘민족’을 아우르는 사상을 어디에서 찾을까에 있었습니다. 저도 그것을 찾기 위해서 동학도 공부하고 실학도 찾아보다가 결국 훈민정음에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언어는 민족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민족이 성립하려면 공통의 언어를 갖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와 더불어 민족을 통합할 수 있는 리더가 있어야 합니다. 세종과 훈민정음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요.

<기록 및 정리 :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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