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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25. 2019

내가 겪은 3.1운동

- -기미년의 회고 (4) 

*이 글은 3.1운동 50주년이던 1969년, 천도교의 기관지 <<신인간>>에 게재된 글입니다.

* 박응삼, <내가 겪은 3.1운동>, <<신인간>> 통권262호, 포덕 110(1969).3.1[2·3합병호], 224쪽.

* 동학 연구자로 비교적 널리 알려진 '표영삼(表暎三)' 선생의 본명은 표응삼(表應三)이다. 그런데, 이분이 월남해서 보니, 박응삼 선생이 중앙총부의 중요 지도자로 활동하고 계시므로, 후배된 입장에서 본인의 이름을 '표영삼'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 볼드체+밑줄은 하단에 각주 형태로 주석을 달았다.



- 박응삼 (1906년생) 

3·1운동이 일어나기는 내가 열네 살 나던 해였다. 나의 고향은 평북 태천이었는데, 읍내에서 동쪽으로 약1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검바우(劍岩)란 부락이었다. 


아버지(朴淇燮)는 면 전교사[傳敎師, 전교실의 지도자]였고, 할아버지(朴牛一) 연원계 교훈이시었다. 어느 날 밤들 무렵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곁에 사람도 잘 알아들을 수 없을 만치 무슨 비밀한 의논을 하시다가 그 이튿날 새벽 일찍이 또 무어라고 수군거리신다. 아버지께서 교구 직원들과 교당 뜰 뒤꼍에서 또 수군거리신다. 몇 날 후에는 아버지께서 밤을 새워 새벽에 돌아오시며 종이 뭉치를 한 보따리 들고 오신다. 그 뒤에 알고 보니 그것은 태극기였다.


어느 으슥한 집에 가서 밤을 새워 가며 기를 그리신 모양이다. 나는 그때 동리 서당에 다니면서 ‘공자왈 맹자왈’을 찾던 때이다.


음력 2월 중순경부터 아버지는 독감에 걸려 자리에 누우셨다. 그때 사방에서는 이런 소문이 들려왔다. “서울 한강 백사장에서 밤중에 만세 부르는 소리가 나서 순사들이 달려가 보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한다. 애국선열의 영혼이 불렀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공중에서 만세 소리가 들렸고, 어시서는 산골짜기에서 만세소리가 나서 순사들이 급히 따라가 보니 돌부처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소문을 듣고 신기함을 금치 못하였다. 할머니께서는 “안심가에 있는 대신사의 말씀이 이제 맞힐 때가 되었다”고 하신다. “개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소멸한다”고...


서울에서 비밀 지령이 내리기를 “아직 만세를 부르지 못한 지방은 음력 3월 1일에 일제히 다 부르라”고 하였다 한다. 태천교구에서는 비밀회의를 열고 거사할 준비를 하였다. 그때 교구 임원은 교구장 이병학, 금융원 강자선, 공선원 김기복, 각면 전교사는 읍내면 박기섭(필자의 부친), 서읍내면 문기형, 강동백 배득룡, 강서면 박창화 등 (기타 미상)이었다.


비밀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1) 사전에 기독교측과 연락할 것

(2) 각 면 전교사는 미리 교인을 동원하여 그날 정오 이전에 읍내 부근에 잠복케 하였다가 정오가 되면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 중심지로 모여들 것

(3) 읍내에서는 씩씩한 청년 한 사람을 큰 기를 들려 선두에 세우고 첫 소리를 치게 할 것 (고신봉 씨를 선정)

(4) 교구 임원과 각면 전교사는 왜경에게 체포될 각오를 하고 교무에 지장이 없도록 후임을 내정할 것 등등이었다.


제1일!

음력 3월 1일이었다. 나는 전과 같이 책을 끼고 글방으로 갔다. 정오가 되지 고을 일판은 사방으로 밀려드는 군중과 만세소리에 잠기었다. 태천 고을이 생긴 뒤에 처음 있는 장관이었다.


와글 와글 와글 와글

와! 와! 와! 와!


나는 공책장을 뜯어 먹으로 태극기를 그려 가지고 서당 뒷산(용호대)에 올라가서 우선 독립만세를 몇 마디 부르고 고들로 달려 내려가 어른들과 같이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어떤 할머지는 너무 감격하여 울면서 무릎을 치며 만세를 부르고, 어떤 이는 너무 기뻐서 한 길씩이나 뛰었다 내리며 춤을 덩실덩실 추다가는 만세를 부르기도 한다.


백종성이란 조선 사람 순사는 흰줄 두른 모자를 벗어들고 교구로 달려 와서 여러 교인 앞에서 엎디어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놈은 구복이 원수가 되어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습니다. 살려주십시오.”라고 하고는 큰소리로 만세를 불렀다.(그다음에 그는 파면을 당하였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겨우 병석에서 몸을 일으켜 집 앞 행길 가에 나가시어 작은 수기를 들고 기운 없이 만세를 부르시었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투전꾼으로 이름이 나서 누구나 신임하지 않던 방용범 씨가 태극기를 한아름 그려가지고 행길 가에 서서 오고 가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를 부르라고 선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때가 되니 박천 경찰서에서 (그때까지도 태천은 박천 경찰서 관내의 주재소였다.) 순사 아홉 명이 자전거를 타고 부리나케 올라오는 것이었다.


제2일!

각면 통로에는 아침 일찍부터 만세 부르러 모여드는 군중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순사들은 길목(9개 면)마다 지켜 서서 군중을 고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지하였으나 ‘인중승천’이라고, 하도 사람이 많으니까 감히 그 많은 군중을 막아 내지 못하였다.


군중들은 첫날보다 더 긴장하고 용감하였다. 그날은 학교 운동장으로 몰려들어 만세를 부르고, 교실마다 문을 두드리며 학생을 동원하였다. 그때 태천 남면에 있는 김상호라는 우람한 천도교인이 있었다. 교실마다 문을 두드리며 학생들을 호령하는 한편, 태극기를 왜경의 코밑 바싹 들이대고 흔들면서 만세를 불렀다. 왜놈은 골이 나서 즉시 칼을 빼어 김상호의 목을 향하고 후려쳤다. 그 찰나에 김상호는 슬쩍 목을 돌리며 칼을 피하는 것이 얼굴을 맞아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진 것을 재차 다리를 쳤다. 


군중들은 흥분하여 와! 하고 왜경에게로 달려들려 할 즈음에 옆에서 이 광경을 보던 다른 순사가 공포를 쏘며 위협하는 바람에 왜놈은 위기를 면하였다. 그러나 흥분할 대로 흥분한 군중은 사자같이 날뛰었다. 놈들은 실탄을 넣어 쏘기 시작하였다. 장림면 천도교인 김병천이 발뒤꿈치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서면 교인 박병춘은 머리에 경상을 입었다. 김상호, 김병천 두 동덕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 유혈이 낭자하여 들 것에 들리어 교구 사무실로 돌아왔다.(그들은 두 달 간이나 치료를 받았으나 다같이 불구자가 되었음)


그날 오후부터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만세 첫 소리를 외친 고신봉을 위시하여 금융원 강자선, 공선원 김기복, 전교사 배득룡, 박창화 등이 놈들의 손에 체포되어 마침내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밖에 몇 사람은 박천 경찰서에 붙들려 가서 태형 90도 혹은 60도씩을 맞고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겨우 병석에서 일어나 대소변 출입이나 하셨는데, 제2일 오후에 주동자로 지목되고 놈들에게 피체되어 박천 경찰서에서 태형 90도를 맞고 한 주일 만에 60리를 도보로 걸어왔었다. 손등에도 검은 멍이 들고 자리에 편치 앉지를 못하시는데, 어린 나의 가슴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기독교인 박용학, 김윤보, 김지련 등도 태형 60도씩을 맞았다.


학생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

그 이듬해의 일이다. 8월 00일은 천장절(일제 대정의 생일)이었다. 14세 이성건의 발론으로 이날에 학생들끼리 독립만세를 부르기고 하였다. 박창수, 오인택, 변명경, 이영준(?), 필자 등이 주동이 되어 비밀리에 학생 백여 명을 동원하여 그날(음 7월 23=태천장날) 오후에 시가 한복판으로 행진하며 큰 기와 적은 기를 들고 용감하게 독립 만세를 불렀다.


왜경들은 14세 이하는 불문에 부치고 이상 4명을 신의주 지방법원으로 압송하였는데, 전기 4명은 6개월 언도로 복역을 하였고, 필자는 개월 구형을 받았다가 1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일 몇 가지가 있다. 20여 일간 태천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신의주로 압송이 될 때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데, 그때 수갑은 늘리고 줄이고 하는 것이아니요 수쇠로 만든 오동수갑인데 크고 적은 것은 있으나 한번 채이면 늘리고 줄이고는 못하는 고정된 수갑이었다. 나는 일행 중에도 나이가 제일 어렸으므로 손목이 가늘어서 아무리 수갑을 채워도 수갑 구멍 주먹까지 나오는 것이었다. 왜놈도 그것을 보고는 빙그레 웃고 가느다란 박승줄로 엄지손가락을 묶어 가지고 신의주 감오까지 압송을 하였다.


감옥 문을 썩 들어서는 실로 딴세상이다. 세 길이 넘는 높은 담을 둘러쳤는데, 붉은 옷 푸른 옷을 입은 죄수들이 쇠사슬을 차고 쩔럭거리면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붉은 옷 입은 죄수 한 사람이 내 곁을 지나다가 징글맞게 내 얼을 밑에 바싹 대고 “무얼 채고 왔니?” 한다. 나는 화가 벌컨 나서 입바른 소리로 “당신은 무엇을 채고 왔소. 우리는 만세 부르고 왔소.” 하니까 그는 흠칫 하면서 “이크 정치범이시로군!” 한다. 나는 정치범이란 소리에 속으로 혼자 우쭐하였다. 


맞은편에서 식사를 나르든 한 죄수는 빈정대는 말로 “고것들 금방 젖 떨어진 것들이 무슨 죄를 짓고 들어왔노? 오늘 저녁에 양젖을 몇 통 사와야겠는걸!” 한다. 감방에 들어간 강계서 독립운동을 하고 붙들려 왔다는 나이 40세가량이나 되어 보이는 분이 가슴에 ‘88’이란 번호를 차고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해 주신다. 그 어른 성함은 김대호라고 하는 생각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매일 간수 모르게 동화 한 마디씩을 들려 주시며 우리를 위로하였다. 


몇 날 만에 간수는 우리에게도 가슴에 부칠 명찰을 준다. 그때 나는 706호, 박창수는 707호, 이영준은 708호, 오인택은 669호였다. 매일 저녁을 먹고 나면 간수가 감방 밖에서 번호를 부른다.

간수는 친절하게 일러준다. “이제부터는 이 번호가 이름과 같은 것이니, 부르면 빨리 대답을 해야 한다.”고 . 나는 저녁마다 “나나하꾸 록꾸고”하면 “하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검사가 구형할 때에, 박, 오, 이, 변 네 동무는 6개월 구형을 하고 나는 5개월 구형을 하는데, 옆에 있는 순사를 보고 나는 묻기를 “나도 6개월로 같이할 수는 없느냐?”고 하였다. 재판하는 날 나는 1년 집행 유예로 출감하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동무들을 남겨 두고 나만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안 되어서 울었다. 나는 간수를 보고 “같이 있다가 나가게 될 수는 없는가” 물으니 "그것은 안 된다. 먼저 나가면 좋을 텐데, 왜 더 있고 싶으냐"고 한다. 감옥 문 밖을 나서니 역시 딴세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제멋대로 규칙 없이 사는 것 같았다.


내가 신의주로부터 고향 태천으로 돌아올 때에 할아버지께서는당나귀를 빌려가지고 40리나 마중을 나오시었다. (그때만 해도 영미-태천 간에 자동차가 없었고, 나는 신의주에 가서 처음으로 전깃불을 보았다.) 평소에 그렇게 엄하시던 할아버지가 어쩌면 그렇게 유순하신지 알 수 없었다.


태천읍에서 남쪽으로 약 4킬로미터 지점에는 구성으로부터 흘러내려 안드레 30리 들을 휘감고 도는 남강이 있었다. 태천읍내에 유지 수십 명은 맑게 개인 가을 하늘에 어린 정치범의 출감을 환영한다고 사탕, 과자, 엿, 떡과 어른들이 잡수실 술과 안주를 장만해 가지고 남강 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위로하여 주시던 일은 어린 나로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다음부터 어른들은 나를 보면 ‘어, 국사범!’ 하면서 손을 만져 주었다. 그해 11월에는 할아버지께서 독립단 사건으로 평양 감옥에서 수개월간 옥고를 당하시고, 증거 불충분으로부터 무죄 방면이 되시었다. (묻기에 거쳐 독립단원 길인도 한 혐의인데, 어떤 행인이 길을 묻기에 가르쳐 주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3부자가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이다.


내가 태천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을 때에 아버지께서는 (당시 태천교구 공서원) 경찰 서장을 방문하고 말씀하시기를 

“어린 것들이 장난삼아 한 일이니 서장님 권한으로 무사하게 처리해 주실 수 없는가.”

고 하였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아무리 아이들이 한 짓이라도 정치범이기 때문에 서장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15세 이상은 죄가 구성된다.”

고 말하였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아동은 가정지반영(家庭之反影)인데, 당신은 가정에서부터 어른들이 불온한 사상이 있기 때문이 아이들도 이런 짓을 한 것이라고.”

고 도리어 못마땅하게 말하였다 한다.


그 후부터 제정 말기까지 우리 3부자는 고을에서 10리 밖에만 나가도 형사들이 뒤를 따랐고, 어떤 때는 그 지방에 가기도 전에 그 지방 순사들이 벌써 “아무개가 오지 않았느냐”고 조사하였다.


3.1운동 비하 몇 가지

사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오세창, 다섯 번째가 최린


끝으로 3·1운동에 대한 비화 몇 마디가 생각난다.


2월 28일 밤 서울 가회동 의암성사님 댁 사랑방에는 이완용의 조카(李會九)가 전일과 같이 놀로 와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마침 벽에 걸린 괘종이 열 시를 당땅 치니 그는 장기판을 밀어 놓으며 

“벌써 열 시가 되었나. 인제 가 보아야겠군.”

하고 일어서더니 성사님을 항하여 

“선생님, 일간 별일이나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천도교회 일이나 성사님의 일거일동을 매일 직접 조사하여 삼촌 이완용에게 보고하면 이완용은 그것을 추리어 다시 경무청에 보고하는 책임이 있었다. 성사님도 그 인물과 직책을 잘 알고 계시지만 태연하게 말씀하시기를 

“왜 없어! 내일은 내가 독립선언을 한다고 삼촌께 알려!” 

하시었다.

그때 좌우에 있던 제자들은 깜짝 놀래었다. 

그가 문 밖에 나서자 옆에 있던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님, 이때까지 비밀을 지키시다가 어쩌시려고 그놈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니 성사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괜찮으리라. 내가 하는 일에 조선 사람 치고는 그 비밀을 왜놈에게 일러바칠 놈은 없느니라.” 

하시었다 한다.

그날 밤에 이완용은 조카에게 들은 대로 경무청에 전화를 걸었다.

“내일은 손의암이 독립 선언을 한답니다.”

하니 경무청감은 말하기를

“그 주정뱅이가 또 어리석은 교인들을 데리고 무슨 연극을 꾸미는 게지.”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 이튿날 정말 만세 소리가 나니 경무청감은 땅을 치면서 후회했다고 한다.

제1차 49일 기도를 마치고(1912) 앉은 사람 앞줄 왼쪽 4-의암 손병희, 5-춘암 박인호


성사님께서 공판정에 나가시어 검사와 문답하신 가운데,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 한 마디를 나는 어릴 떼에 할아버지한테 들었다.

검사가 주소 성명을 물은 다음

“당신이 조선민족 대표요?”

하니까 성사께서 곧 대답하시기를

“민족대표라면 하필 조선민족대표뿐이겠소. 세계민족대표지요!”

하셨다 한다.

그리고 나는 해방 직후 10월 27일 밤에 3·1운동 당시 총참모로 일하시던 여암 최린 선생에게 직접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해방이 되니 가두에는 전에 볼 수 없던 서적이 많이 나는데, 그중에는 3·1운동에 관한 서적이나 조선 역사에 관한 서적이 많이 눈에 뜨이더군. 그러니 3·1운동에 관해서는 몇 해 있어야 바른 기록이 나올 걸. 누구나 모르는 비화 한 마디를 하지.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아닌 밤중에 간수가 불러내기에 따라간즉 어딘지 알 수 없는 지하실인데 검사와 단둘이 문답한 이야기야. 검사가 묻기를

'선생께서 독립운동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오?”

하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세 가지고 있소.”

“말해 보시오!”

“첫째는 조선민족의 생존권 확보요, 둘째는 내가 천도교인이기 때문에 천도교의 계단적 목적, 즉 보국안민의 달성이요. 셋째는 조선 총독 정치의 모순이었소.”

“그것은 조선 사람이나 천도교인이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특히 선생께서 직접적인 동기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두 가지였소!”

“말해 보시오.”

“내가 어떤 날 남대문 역전을 나가니 만주로 가는 이민 열차에 우리 동포들이 늙은 부모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깨어진 바가지 쪽을 들고 남부여대(男負女戴) 하여 가는 것을 보고 나는 피눈물을 났소. 어느 누가 정든 고국 땅을 이별하고 쓸쓸한 만주 벌판으로 가기를 좋아하랴. 3천리 강산은 일본 사람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일본 사람 한 명이 우리 땅에 건너오면 우리 민족은 열 사람씩이나 고국을 떠나게 될 터이니, 하루바삐 독립을 해서 내 민족이 내 땅에서 잘 살 수 있게 해야겠다는 것, 다음은 동척(東拓) 회사 앞을 지나는데 일본으로 건너갈 볏더미가 산같이 쌓인 것을 보았소. 저 벼는 우리 민족이 피땀을 흘려 가며 맨발을 벗고 번 것인데 쌀 대신에 호좁쌀을 먹고 저 벼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 사람의 창자로 들어가겠구나 생각을 하니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소. 이것이 내가 독립운동을 하게 된 직접적 동기요!”

하니 검사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돌려보낸 일이 있었지요.




○박응삼(朴應三)-철암喆菴, 1906년 7월 17일  태천군 서면 덕흥리 출신으로 1906년 입교, 천도교쌍수학원 초등과(1911), 태천교리강습소고등과(1921), 종학원 수료(1926), 신인간사 태천군 주재기자(1927.7), 서면시일학교 간사(1928.4.15), 청년당태천부 부무과위원(1929.8), 당부유소년부위원(1930.3), 낙원포 신정(1933), 태천종리원 경도집 및 신도집(1933.4), 청년회태천군연합회 위원(1933.3), 청년회중앙 홍보위원(1933.12), 청년당태천부 조직위원(1934.4), 태천종리원 지도집(1935.4), 청년당태천군 대표(1936), 태천군종리원 지도집(1936.7), 신인간사태천주재 기자(1937.3), 태천종리원 순회교사(1937.6), 청년당태천부 대표(1937.7), 세원포 도훈(1946), 북조선종무원 지도부장(1947), 청우당당 강사(1948), 한국동란으로 월남하여 김포비행장 노력대 근무(1952). 총부교화관 부장(1955.1), 서울교구 순회교사(1957.8), 수도원 간사(1960.6), 교화관장(1961.4), 도정(1963.1), 교화관장(1963.4), 서대문교구 감사장 및 선도사(1971.4), 교사편찬위원(1972.1)등으로 활동하였다. 1973년 11월 18일 김해교구를 순방하는 중 교통사고로 환원하였다. <신인간/제312호>1973.12.10 ※부-眞菴 朴淇燮, 조부-朴午一(敎長), <신인간/제3집>1952.12.15 <성금록>서대문교구.1964.3 <당성/제21호>1933.5 <교역자명부/이력서>총부 <신인간>1971.05.01 ○묘비건립 <신인간>1975.12.10 

○박오일(朴午一)-1860년 태천군 태천면 왕정동 출신으로 1902년 입교, 진보회가 일진회로 전환할 때 공헌(1904.10), 접주, 수접주, 봉훈, 태천면 전교사(1907-1923), 태천교구 초대교구장(1907.7), 봉훈 및 금융원(1916.6-1917.4), 전제원(1916.6-1917.4),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태천교구장을 역임하고 진법포 포덕사(1926)로 활동하였다. 1927년 7월 68세로 환원하다. ※妻-金一嬅, 子-朴淇燮, 孫-朴應三 <천민보록> <신인간/제2권제7호>1927.8.13 <교회월보>1924.11.15/태천교구연혁 <창건록>p539 

○박기섭(朴淇燮)-진암眞菴, 1879년 3월 26일 태천군 태천면 왕정리 출신, 1902년에 입교, 접주, 봉훈, 태천군 제120강습소 수료(1912), 태천교구 공선원 및 강도원(1919), 홍병원 고신봉 등과 청년회태천지회 설립(1920.3), 전제원 및 공선원(1921), 眞法布 포덕사 및 서무원(1922.10), 태천종리원 전교사(1923.5.1),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면종리사(1924.1-1925.1), 종덕사, 부령, 도사, 종법사 등의 원주직을 역임하였으며 박천, 태천, 삭주 등지 교육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8년 12월 3일 60세로 환원하였다. ※父-朴午一, 妻-李淇嬅, 子-朴應三, 朴應實, 朴應天 <태천군교보>1930 <신인간/제131호>1939.2.15 ※「대신사출세백년기념에 일반의 대한 감상」<교회월보/제169호>1924.10.15 <교역자명부/이력서>중앙총부 

○이병학(李炳學)-자암橴菴, 1867년 6월 12일 태천군 장림면 환현동 출신, 1895년 입교, 교회확장금 출연(1902), 진보회가 일진회로 전환할 때 공헌(1904.10), 접주, 교장, 교수, 봉훈, 태천군 동면전교사(1907), 태천교구장(1917),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등 역임하다. ※妻-邊炳嬅, 子-李永憲, 李永浩, 李永三 <천민보록>1915 <창건록>p527 <교회월보>1924.11.15/태천교구 연혁

○강자선(康子善)-예암禮菴, 1864년 2월 17일 태천군 원면 원풍동 출신으로 1899년 갑오에 입교, 접주, 수접주, 봉훈, 교훈, 교령, 태천교구 금융원(1909.7), 3등신포덕 포장(1910.12), 태천군교구장(1910.7-1911.4), 태천교구 금융원 및 전제원(1918.2), 1919년 4월 2일 태천군(泰川郡)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성도집 등의 교직을 역임하였으며 1936년 2월 17일에 환원하였다. 정부는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妻-李善嬅, 子-康一德, 康鎭欽, 康正德 康鎭泳, 康鎭濟 ※妻-元鎭嬅, 子-金弘植 <천민보록> <태천군교보> <창건록>p534 <신인간/제124호>1938.7.15 <공훈자료> ☜姜子善

○김기복(金基福)-태천군 원면 신풍리 출신으로 1909년 입교, 종학강습소 고등과제1회 졸업(1912.6), 태천교구 전제원(1917), 태천교구 선발로 경성중학 입학(1919.12), 태천교구 공선원과 강사를 역임하였고 1921년 12월 28세로 환원하였다. <교회월보/제140호>1922.4.15 ※잡조「李一得씨 普濟的 思想에 대하여」외다수 <교회월보/제59호>1915.6.15 

○문기형(文箕衡)-1880년 태천군 서읍내면 송귀동 출신으로 1901년 입교, 접주, 봉교, 전교사, 태천교구 서읍내면 전교사(1907), 태천교구 전교사(1918.2),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등을 역임하다. ※妻-趙衡嬅 <천민보록>1915 <창건록>p542

○배득룡(裵得龍)-득암得菴, 1874년 6월 17일 태천군 강동면 풍림동 출신으로 1903년 입교, 봉훈, 도사, 전교사,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태천군종리원 종리사(1924.6)등을 역임하다.※妻-姜得嬅 小家-鄭得嬅, 子-裵京鶴, 裵德權, 培鶴俊 <천민보록>1915 <태천군교보>1930 <창건록>p533

○박창화(朴昌化)-승암昇菴, 1882년 2월 20일 태천군 강서면 은창동 출신으로 1900년 입교, 봉훈, 교훈, 태천교구 강서면 전교사(1907), 신포덕 3등포장(1910.12), 태천군 제120교리강습소 수료(1910), 태천군교구 전교사(1918.2), 1919년 3월 태천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어 징역 10월(1919),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태천군종리원 강서면 종리사(1928), 태천종리원 종리사(1930.4)등 역임하다. ※건국포장(2011) ※妻-李化嬅, 교호-朴成獜 <천민보록>1915 <창건록>p541<공훈자료> 

○고신봉(高信鳳)-1888년 태천군 읍내면 산성동 출신, 태천군교구 제120강습소 수업(1911-1914), 박기섭 홍병원 등과 청년회태천지회 창립회장(1920.3-1921.4), 태천교구 선발로 보성전문학교 입학(1920.12),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등을 역임하였다.

○김상호(金尙浩)-1891년 태천군 남면 대흥동 출신으로 태천군 남면 전교사(1907),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김병천(金炳天)-창암蒼菴, 태천군 장림면 참동 출신으로 1900년 입교, 도사, 태천교구 장림면 東端전교사(1907), 태천종리원 장림면종리사(1923.5.1), 태천군종리원 종리사(1939.4)등을 역임하다. ※妻-鄭在允 <창건록>p528 

○박병춘(朴炳春)-학암學菴, 태천군 출신으로 1900년 입교, 태천군제642강습소 수료(1912), 태천군 서면시일학교 강사(1928.4.15), 태천군종리원 지도집(1929.1) ※妻-金義浩 <창건록>p539 

○박창수(朴昌洙)-연암連菴, 1904년 2월 13일 태천군 태천면 왕정공 출신으로 1919년 입교,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妻-徐昌嬅 <창건록>p532

○이영준(李永俊-확인필요/연령대 상위)-일암一菴, 1886년 5월 19일 태천군 원면 신흥동 출신으로 1902년 7월 입교,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妻-洪永嬅, 교호-이순선, 이순화, 이용호, 이용래, 이용관, 이용환 <태천군교보>1930 <창건록>p607



<태천군과 천도교>

1871년에 편찬된 『태천읍지』에 따르면 8면으로 늘었고 호구는 2,215호, 1만 1933명이었다. 1895년의주부 태천군으로, 1896년평안북도 태천군으로 개편되었다. 1904년 동학당이 정부의 비정을 개혁하고자 진보회를 조직하고, 모두 단발할 때 이 군에서는 9월 3일 당시 개천대접주 문학수(文學洙)가 회원을 인솔하고 이 군으로 들어오던 중 관군의 사격으로 태천면 왕정동 검암노상(檢巖路上)에서 크게 패하였다. 그 뒤 이 참상을 잊지 못하는 천도교인들이 검암노상에 순도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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