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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25. 2019

기생 걸인들도 함께한
진주3·1독립만세운동

-진주 ‘3·1독립선언서’는 어떻게 배포되었을까?

[이 글은 <개벽신문> 제84호(2019.5), 동학의 비결3-06으로 게재된 글입니다]


심국보 (본지 편집위원, 신인간 주간) 


이 글은 1919년 3월 진주지역에 배포된 독립선언서의 유래를 살펴보는 것이다. 100년 전, 진주지역의 중심지와 각 면 지역에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만세참여가 있었다. 또한 진주의 만세운동은 걸인, 기생들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그래서 오늘날 진주에서는 3·1운동은 걸인, 기생들의 만세시위도 기념하고 있다. 5월까지 3만 명이 넘는 인원이 만세에 참여하여 전국적인 성과를 자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기념하여 서울의 탑골공원에는 부조로 진주지역의만세운동을 새겨놓았다.1


한편, 1919년 3월 진주지역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의 존재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거나, 배포 과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진주시 홈페이지에서 3월 3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했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독립선언서를 확보한 주체 등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2 또한 개별적인 일화 형식으로 독립선언서가 진주에 전달되었다는 언론보도는 매우 소중한 자료로 충분히 존중하고 또 검토해야 한다.3


이 글에서는 1919년 3·1운동 무렵의 사실을 기록한 자료를 참고하여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경남지역의 3·1독립선언서는 ‘천도교진주대교구’에서 배포하였다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1919년 무렵의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의 동학, 천도교의 활동을 간략히 살펴본다. 이 지역의 동학 천도교 활동이 3·1운동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배포에 대해 서술한다.


서부경남지역의 동학 전파와 활동


서부경남 지역에 동학이 처음 전파된 것은 1862년이다. 고성 사람 성한서가 수운 최제우를 찾아 입도하면서 서부경남지역에 동학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1863년 12월에 최제우가 관에 체포되어 1864년에 순도하자 동학세력은 약해졌고, 서부경남에 동학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80년 후반기인 동학혁명 전후이다.4 


천도교진주대교구에 근무했었던 신용구(뒷날 천도교중앙총부 교령 역임)는 “임진년(1892)에 백낙도(白樂道, 산청군 삼장면 당산리 사람)씨가 전북 장수군에 있는 유해룡에게 도를 받고 포덕에 종사, 진주를 중심으로 점차 퍼져갔던 것이다”고 증언하였다.


1894년 4월초 접주 백도홍(白道弘, 白樂道)이 주도하여 동학혁명의 깃발을 들었다. 4월 13일경 진주영장 박희방의 공격을 받고 체포되었고 15일에 처형당하였다. 손은석을 비롯한 고만준·임정룡·임말룡 등 쟁쟁한 접주들은 재빨리 몸을 피해 살아남았다.


백도홍이 처형되자 대접주 손은석 등이 4월 24∼25일경 천여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진주로 쳐들어가 항의하였다. 영장 박희방은 도망쳤고, 우병사 민준호는 동학도와 타협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진주지역 동학도들은 항의시위로 경상우병사와 타협을 이끌어 내면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8월 30일, 순천의 김인배 대접주는 1만여 명 동학군을 모아 하동읍 건너편인 광양군 다압면으로 진군하여, 9월 1일 섬진강을 건너 하동접주 여장협의 동학군과 합류하여 9월 5일 하동읍을 점령한다. 영호대접주 김인배는 9월 10일 경부터전라도 동학군과 하동지역 동학군을 진주 쪽으로 옮겨 11일에는 남해를, 13일에는 사천을, 15일에는 곤양을 점거하였다.


진주 동학군은 9월 8일, 경상우병사 민준호의 묵인 아래 각지의 이임(里任)에게 항일전을 위한 동원령을 내리고 평거 광탄진(너우니)에서 일본군을 물리치자는 결의대회를 거행한다. 9월 11일에는 부흥 대우치(復興大牛峙)에 모여 또다시 항일전의 결의를 다진다.


9월 18일(양 10월 16일), 손은석과 김인배가 이끄는 천여 동학군이 진주성을 점령하고, 진주성 둘레에 오색 깃발을 휘날렸고 성루의 맨 앞 큰 깃대에는 붉은 바탕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 쓴 대형 깃발을 내걸었다. 동학군이 진주성을 떠난 뒤, 9월 말경 동학에 우호적이었던 경상우병사 민준호는 해임된다.


일본군은 서부경남이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확인하고 2백여 명의 군대를, 조정에서는 대구판관 지석영을 진주 일대로 파견했다. 동학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하동군 진교면 안심리 뒷산인 금오산 줄기의 봉우리 시루봉에서 시작되었고, 같은 날인 10월 10일 진주 남강 쪽 상평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세 번째 전투는 10월 14일(양 11월 11일) 하동 옥종면 고승당산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 날의 전투는 4∼5천에 이르는 동학군과 일본군의 결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동학군은 일본기록에는 185명이라 했다. 그러나《천도교회사초고》에는 3백여 명,《오하기문》에는 “4백여 급을 참했다”,《백곡지》에는 “죽은 자가 5∼6백인이라”하였다.


천도교진주대교구의 성립과 3·1운동의 준비5


1894년 동학혁명 실패 이후 동학세력은 1904년 갑진개혁운동을 전개하고, 1905년 동학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고 1906년 서울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설립하면서 전국에 72개 대교구를 설치되고 12월에 23개 대교구로 통합된다. 이때 서부경남지역의 동학군은 영남지방에는 유일하게 진주군 비봉동(지금의 계동 일대)에 대교구를 설립한다. 1914년 7월, 37개 대교구로 증설 개편할 때도 경남도청 소재지인 진주의 대교구(교구장 전희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14년 당시 진주군대교구는 진주군교구, 울산군교구, 합천군교구, 함양군교구, 마산부전교실, 사천군교구, 고성군교구, 통영군교구로 8개 지역을 관할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1912년 4월25일 서울 우이동에서 제1회 연성수련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14년 3월25일까지 3년 동안 7차에 걸쳐 전국의 두목들을 차례로 독공시켰는데 수련 총 일수가 343일이요, 참가두목이 총 483명이었다. 서부경남에서는 1회에 전희순, 5회에 김상정, 7회에 김학두가 참가하였다.


1918년 12월 1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천도교대교당 건축기공식이 있었다. 천도교에서는 이를 기회로 3·1운동 자금을 특별모금하였다. 당시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에서도 특별모금에 응하였다. 고성의 황태익은 “교인들에게 중앙 대교당 건립과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자금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여 자신이 논밭을 다 팔고 교인들로 하여금 돈이 될 만한 물건은 팔아서 헌납하게 하였다.6  진주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나 3·1운동 당시 진주지역의 독립성금 헌납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탑골공원 내 부조에 새겨진 진주지역 삼일운동


그리고 천도교중앙총부는 1919년 1월 5일부터 2월22일까지 전체교인에게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49일 기도를 봉행하도록 하였다. 이때 천도교는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의 아홉 곳에 대표기도처를 정하고 각 기도처마다 4명의 대표를 파견하여 기도식을 지도하고 3·1독립운동을 앞두고 전국의 교단조직을 결속해 나갔다. 경상도 지역의 경우 천도교경주교구에 특별기도처를 설치하였다.7


즉, 경상도 지역의 독립운동을 위해 진주를 대표한 신용구는 천도교경주교구에서 1919년 1월 8일부터 2월 25일까지 특별기도를 행하고, 이후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일대를 중심으로 배포하게 된다. 


진주지역의 독립선언서의 배포


기존의 진주지역 독립선언서 배포는 세 경로를 통하여 진주에 유입된 것으로 파악된다. 먼저, 진주 일대에 주로 전달된 선언서는 김재화, 박진환, 심두섭등이 고종의 ‘인산’에 참가했다가 입수한 것, 그리고 정촌면과 문산, 반성 일대에 배포된 선언서는 산청군 단성면에 거주하는 이병홍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은 강재순이 이종언과 함께 인쇄하여 배포한 것이다. 세 번째는 사천의 천도교인 장태영이 손병희로부터 직접 받아 진주의 친족 장덕익에게 전달했다. 


세 번째의 “사천의 천도교인 장태영이 손병희로부터 직접 받아 진주의 친족 장덕익에게 전달했다.”는 기록에 대해 검토한다. 이 기록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자료집에서는 “천도교 진주대교구는 1912년부터 전희순, 김상정, 김학두 등이 본부의 독립운동과 직접연관을 맺고 활동하고 있었다. 서울의 삼일운동 준비과정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이 있는데 사천을 통해서 독립선언서를 받을 이유가 있었는지 의문이다.”라고 하고 있다.8 


이와 관련된 사천시사(四川市史)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19년 2월 천도교 삼천포교구의 책임자로 있던 장태영이 천도교 중앙총부에 상경하여 독립선언서 1매를 버선 속에 숨겨갖고 내려와서 사천, 삼천포 지역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으며…”9


사천의 장태영을 통해 그 친족 장덕익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진주지역으로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천지역 천도교를 통해 천도교진주대교구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 배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지였고 천도교 입장에서는 진주대교구가 사천 지역 등을 관할하고 있었다. 또한 진주대교구는 천도교중앙총부와 직접적인 연락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2019, 100주년 진주 삼일만세의거 재현행사


앞서 언급한 신용구가 2월 25일 독립운동을 위한 특별기도를 경주에서 마치고, 이후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진주와 서부경남지역에 선언서를 배포했다는 사실에 대해 검토해 보자.


천도교중앙총부는 3·1만세운동 거사 전에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지에 배포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은 중앙총부-대교구-교구-전교실의 조직망과 연원제(淵源制)를 통하여 전국 각지로 전파되었다. 각 대교구, 교구에서는 교구에 비치된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다시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을 <천도교진양교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10


“1919년의 3·1운동 당시 진주대교구는 관내 대두목들이 서울 봉황각에서 연성수련을 하고 돌아와 손병희 의암성사의 지시로 교구에 비치해 두었던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등사 배포하고 각 군과 면의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천도교진양교구’는 1946년 진주대교구가 진주시내의 교당을 처분하고 진양군 문산면 속사리로 옮기면서 붙여진 명칭이며, <천도교진양교구>의 이 기록은《일반성향토사(2009)》에도 그대로 전재되어 있다. 3·1운동 당시 사용된 등사기에 대한 사실은 예전의 ‘일반성면지’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일반성면지 등의 기록을 진주의 모 학교 교장이 1980년대에 확인하고, 당시 문산읍에 소재했던 천도교 진양교구를 찾아 새 등사기를 사 주고, 3·1운동 당시 사용된 등사기를 가져가 학교박물관에 전시했다. 현재 천도교진주시교구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등사기와 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등의 행방을 관계자를 만나 찾고 있으나, 박물관이 폐쇄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등사기


천도교진양교구의 이러한 기록은 남해지역의 3·1운동을 주도했던 하준천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하준천은 “3·1독립운동 선언서 서부경남 분을 묵암 신용구 선생님이 진주까지 가져오셨다.”고 증언하였다.11 하준천은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에서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진주지역의 청년운동과도 관계하였던 인물이었다.12


결론적으로, 천도교진주대교구를 통한 독립선언서의 유입은 신용구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에 배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덧붙일 것은 1919년 3월 진주지역에 배포된 독립선언서 외 교유문, 격문 등은 천도교진주대교구의 등사기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즉, 1919년 3·1운동 당시 진주 등 서부경남지역에 배포된 3·1독립선언서는 일정부분 또는 많은 부분을 ‘천도교진주대교구’에서 조직적으로 배포하였고, 배포에는 전희순, 황태익, 신용구, 강달영, 고경인, 강영호, 박태홍, 김의진, 정준교 등의 천도교인들과 시민들이 역할을 분담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100년 전 3·1독립운동 당시 진주와 서부경남 천도교의 역할은 오늘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구체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는 까닭이다. 서부경남 지역의 동학혁명 상황, 진주천도교와 진주소년회의 활동, 3·1운동 전후 진주지역 주요 천도교인의 활동에 대한 연구 역시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100년 전 진주 3·1운동의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할 것이다. 더 많은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보다 나은 세밀한 연구결과를 기다려 본다. 한정된 자료를 통해 진주지역의 3·1독립선언서의 배포 과정을 살펴보았기에 한계가 많다. 진주지역 3·1운동을 연구함에 하나의 문제제기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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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탑골공원 부조에는 촉석루와 기생들을 새기고 “1919년 3월 23일경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기생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며 남강가를 행진했다. 일본경찰과 헌병들이 총검을 들고 찌르려 했으나 그들은 아우성치며 우리는 논개의 후신이라고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용감히 달려갔다”라고 설명을 달고 있다.

2 진주시홈페이지 : “진주는 서울과 거리가 먼데다가 도청소재지이므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 3월 3일에 독립선언문을 입수했으나 김천까지 기차로 온 뒤 버스 편으로 합천에 내려 걸어서 진주에 들어 왔기 때문에 3월 18일에야 거사를 했는데 주동자들은 이미 예비 구금되어 있었던 터여서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8일부터 21까지 4일간은 읍내, 22일은 수곡면 창촌리, 25일과 31일은 문산면 소문리, 4월 3일에는 반성면 창촌리, 4월 18일에는 또 읍내등 모두 4개소에서 9회에 걸쳐 일어났는데 특히 기생과 걸인들까지도 합세한 점이 진주 3·1운동의 특징이다.”

3 최근 정용길선생의 후손이 전하는 일화도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며 또한 검증할 필요가 있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9&no=124085)

4  이하의 동학관련 기록은 <경남남서부 동학혁명>(표영삼, 천도교홈페이지 자료실), <산청의 동학운동>(김준형 경상대교수, 2014, ‘산청동학혁명기념비 건립을 위한 자료집’), <진주동학군 항일군전투>《진주시사》《천도교백년약사(상)》등을 참고하였다. 

5 천도교의 3·1운동 관련 자료는《 천도교약사》(천도교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회, 2006) 등을 참고하였다.

6 향토사료연구회《, 눌암황태익선생실기》, 신한출판사(1980), 59쪽.

7 《천도교경주시교구연혁 제29권》: “49일간 3·1독립선언식을 앞두고 중앙총부에서 지명 특별기도를 본 교당에서 행하다. 진주 신용구, 경주 박인환, 언양 곽해진, 영천 이종원”

8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진주 기미년만세운동 길 걷기> 자료집(2013.3.16.)

9 사천시홈페이지

10 천도교진양교구는 1946년 진주대교구가 진주시내 비봉동에서 진양군 금산면으로 옮겨가면서 붙여진 이름.이후 천도교진양교구는 일반성면 원동(1960년), 문산면 삼곡리(1977년), 일반성면 창촌리(2006년)로 옮겼다가, 2014년 진주시 수정동의 천도교진주시교구와 통합하였다. ‘천도교진양교구연혁’은 1980년 9월 구성숙이 그동안 내려오던 기록과 구전을 바탕으로 다시 기록한 것이다. (http://cafe.daum.net/jinjuchondogyo/

DURy/133 천도교진주시교구 카페)

11 고정훈 편,《회암 하준천 천도강론》,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1, 322쪽

12 하준천(1896~1963). 남해군 고현면 출신. 진주농업학교졸업(1914.3). 1914년 5월 천도교 입교. 1918년천도교남해전교실 창립. 1919년 4월 이예모 등과 남해군의 3·1운동을 주도. 이후 구국운동에 활약하다 일경에노출되어 고문을 당하고 교사직을 박탈당함. 이후 남해 노량에서 양조장 사업. 진주교구 종무원(1922.3), 청년강습소수료(1920.3), 진주대교구 서계원(1924), 진주청년회지육부장(1926), 남해군포덕사(1928), 1932년 천도교청우당 남해군 대표, 1937년 천도교남해교구 초대교구장. 1940년 남해 덕신초등학교 건립. 해방 이후 식산계 창설 등 농촌계몽활동과 천도교포덕에 주력하여 1,200여 호를 포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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