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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28. 2019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 [논어]

[이 글은 <개벽신문> 제84호(2019.5)에 "청년철학(5)"에 게재된 글입니다.]


배 원 정 | 서강대학교

[필자주] 이 글은 2019년도 1학기에 서강대학교에 개설된 <동아시아철학고전읽기> 수업에 제출한 과제물이다. 이 과제물의 내용은 이남곡의 <논어: 삶에서 실천하는 고전의 지혜>(휴, 2017)를 읽고 감상문을 쓰는 것이다.

Ⅰ. 들어가며


나는 이번에 읽은 이남곡의 [논어] 해석을 통해[논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논어]는 중국 최초의 어록으로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문헌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동양고 전의 어머니로 불리는 [논어]를 이제서야 읽어보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는 [논어]의 구절들과 이남곡 선생이 [논어]를 자신의 견해로 해석한 내용들이 함께 나타나 있다. 이를 통해서 공자의 견해뿐만 아니라 이를 해석한 이남곡 선생의 삶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논어]는 공자의 사상을 잘 나타낸 책이다. 공자는 2500년 전부터 사람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고 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에게 영감을 주고자 하였다. 경쟁과 이기주의로 물들어 정작 인간 그 자체가 지니는 가치를 잊고 살아가기 쉬운 세상에서 [논어]는 사람들에게 사람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가치를 일깨워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나는 아직 인문학에 대한 견해가 깊지 않기에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도, 깊게 논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아직은 얕은 수준이지만 [논어]에서 다루는 내용들 중 세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그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나의 견해들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또한 이를 통해서 내가 얻게 된 가르침에 대해서도 서술해 보고자 한다.

Ⅱ. 본 론


Ⅱ-1. 무지를 인정하여 진리로 나아가는 길


현 시대에는 ‘모르는 것,’ 즉 무지를 부끄럽다고 여기는 기류가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앞서나가야 하는 경쟁사회에서 남들보다 좀 더 많이 아는 것이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해 왔다.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럴듯하게 ‘아는 척’을 하였고, 부끄러운 마음에 나의 무지를 외면하고 숨기려 하였다. 그런데 정말 몰랐던 것인지 모르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정말 자신 있게 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최근 들어 정말 확실하게 깨닫고 있다. 내가 안다고 여겨왔던 것들은 타인의 말 몇 마디에 금방 휘둘릴 수 있는 표면적이고 사소한 것들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나에게 [논어]는 큰 가르침을 주었다.


이남곡의 [논어] 해석에서는 무지를 자각하고 여기에서부터 배움을 시작하는 것이 진정한 진리 탐구의 출발이라고 본다. [논어]에서는 무지의 자각을 지(知)의 시작으로 본다. 나는 이남곡의 [논어] 해석을 통해 [논어]에서 왜 무지의 자각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지, 이것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와 가르침을 주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공자는 모른다는 인식에서부터 진리탐구가 시작된다고 보는데, 이는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비우는 태도를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태도가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중요한가? 인간은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것을 쉽게 단정하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한번 무언가를 안다고 판단하면 근거 없이 그것이 확실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이런 태도를 가진 상태에서는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지 분별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가 받아들인 것에 지배당하기 쉽다. 이는 타인과의 소통을 어렵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양면을 보지 못하고 한 면만 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극단과 단정 속에서는 진리를 올바로 추구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나는 이 무지를 자각하는 자세가 현대사회에서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는 너무나도 많은 정보들을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보다도 많은 정보들과 타인의 생각들을 쉽게 접함에 따라 스스로가 직접 탐구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내려는 자세가 흐트러지기 쉽다. 무언가를 한 번 잘못 받아들이면 다른 옳은 지식을 배우는 데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는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 어려운 상당히 많은 요소들이 있다. 그렇기에 이런 자세의 의미와 가치는 현대사회에서 더욱 빛을 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배움은 어릴 때만, 인생의 어떠한 순간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자세를 내면화해야 할 것이다.


공자가 강조하는 무지의 자각, ‘모른다’는 자세를 갖추라는 것은 처음에는 나에게 다소 낯설고 역설적으로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열린 자세가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어야 할 시대가 아닌가 싶다. 인간은 정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만,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정보와 선입견을 다 비우고 새로운 시각으로 무언가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무지를 외면하고 배움에 소극적이었던 내 자신을 반성하면서 순수하게 열린 자세를 갖출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진정한 배움이 시작되리라 기대한다.

Ⅱ-2.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


공자는 자공이 무엇을 미워하느냐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남의 나쁜 점을 떠들어대는 것을 미워하고,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을 비방하는 것을 미워하며, 용맹스러우면서 무례한 것을 미워하고, 과감하면서 막힌 것을 미워한다.” 그리고 악을 미워하는 것 또한 자기 안에 악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 말은 나로 하여금 내가 지난 날 미워했던 일들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하였다. 나 또한 허위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 어떻게 그 마음을 조절할 수 있을지, 미워하는 일 자체를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나는 이 책을 통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공자는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미워함이 없다고 하였다. 나라는 ‘소아(小我)’를 넘어서 인자(仁者)만이 감정을 주체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사람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공자는 인자만이 사람을 좋아하거나 미워할 수 있고 진정한 인자라면 미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누군가를 미워했던 일에 대하여 떠올려 보았다. 성격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을 미워하였고, 이유가 있다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스스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논어]를 읽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자격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타인을 미워하게 만들었던 허물들은 모두 나에게도 있는 허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부터가 결점과 악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를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을 탓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겨온 행위도 나를 속이는 행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먼저 인자(仁者)가 되는 길에 대하여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이 필요한데 이때 그 운동은 미움과 분노에서 해방된 운동이어야 한다. 저자는 진보운동가와 군자가 정말 잘 어울리는 조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겉보기에는 그렇게 조화되는 조합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는 상당히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진보로 나아갈 때 내면이 남을 미워하는 분노와 아집으로 차있다면, 이는 더 큰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진보로 나아갔다고 말하기 힘들다.


이처럼 나는 [논어]를 통해서 내가 타인을 미워했던 과거의 경험을 성찰해 보고, 미움과 관련하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타인을 미워할 때에 내가 미워하는 근거에 대한 타당성 그 자체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악도 성찰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진정한 인자는 스스로의 화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이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는 무언가에 대한 분노에서 움직임이 촉발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진정한 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현대인들이 『논어』를 통하여 미움과 분노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인’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Ⅱ-3. 어떻게 하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일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나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에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찾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음은 확정된 일이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필연이기에 우리는 죽음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바꿀 수 없는 결말에 집착하며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남기지 못한 채 우리를 허무주의로 몰고 갈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가가 과제로 남는다. 그런데 공자는 죽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이하에서는 이 말을 단서로 공자가 지닌 삶과 죽음에 대한 자세를 알아보고, 이를 통해 내가 지닌,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이 지닌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죽음을 살아있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알 수 없는 죽음에 얽매여 있기보다는 살아있는 동안 삶을 더 잘 살아가는 것이 공자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것이다. 그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할 정도로 도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공자는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그 누구도 결론을 도출해낼 수 없는 뜬구름 같은 일들은 삶에서 중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공자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와 닿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공자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더 찾아보니 공자도 기본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자도 결국 인간이기에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 사실 하나로도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삶이나 잘 살라!”고 던진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자각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논어]에서는 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도 언급을 한다. 인간들은 죽음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믿음을 통해 마음의 안식처를 갖기 위해 종교를 찾기도 한다. 그런데 공자는 이에 대해서도 신을 섬기기보다는 인간을 섬기는 것을 우선시하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서 공자가 얼마나 현실적인 삶을 중시하였는지 알 수 있다. 사실 나 또한 무교이기는 하지만 종교에 대한 믿음을 통해 평안을 찾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종교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허나 이는 사회적 존재로서가 아닌 내 자신만을 위한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떠한 가치도 창출해내지 못하고 아집에 사로잡힌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웃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서 오직 개인만을 위한 종교행위에 집중하기보다는, 올바른 삶에 진정으로 집중하고 공동체를 중시하여 ‘나’라는 존재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죽음을 초월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논어]를 통해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고통과 두려움이었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물론 [논어]의 말을 내 사고에 바로 적용하기란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또다시 죽음의 두려움에 떨면서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힘든 시간이 올 때 [논어]의 구절을 떠올리고 약간의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Ⅲ. 마치며


지금까지 내가 [논어]를 읽으면서 가장 관심 있었던, 혹은 와 닿았던 세 가지 주제에 대해 소개해 보았다. 사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은 책이었지만 읽으면서 내 생각보다도 내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또한 공자의 언행과 이를 해석한 이남곡 선생의 견해를 함께 읽으면서 마냥 먼 과거의 고전이 아닌 좀 더 내가 살아가는 현실과 접목해서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이 시대는 과학 기술의 성장과 함께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문학의 가치라고 본다. 사실 오늘날 인문학을 중시하는 경향이 다소 약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쟁사회가 심화되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정작 함께 살아가는 이웃,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진정으로 다스리는 법은 잊은 듯하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위기가 도래하는 순간이 올 것이고, 그때 인류는 인문학의 가치를 다시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사실 나 또한 예전에는 [논어]와 같은 철학 고전들을 현시대와는 동떨어지고 다소 보수적인 경향이 있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인류에게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나를 그렇게 사고하도록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도움보다도 직접적으로 건드릴 수 없는 인간의 내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대단한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회에는 규율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표면적인 규제는 가능할지 몰라도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의식은 사회에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개인이 자발적으로 의식을 변화하고 고양시키는 일은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문학의 가치를, 이와 같은 동양철학 고전들의 가치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하고 겸양의 미덕을 갖출 때 이 사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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