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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21. 2018

욕망과 도덕, 그리고 한국 사회

[개벽신문 제75호, 2018년 6월호] 청년포럼④


녹취 최다울, 정리 조성환 


○참가자 : 김보름, 신소향, 유일환, 최다울, 텐 웨냐민, 히토미 아오이(人見葵)

○시간 : 2018년 1월 27일(토) 17:00~19:00

○장소 : 독존학당




다울: 제4회 청년포럼 시작합니다. 오늘은 ‘욕망과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제 생각에 ‘욕망’은 사람의 인식을 거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생물학적인 욕구, 내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하는 생각과 행동이 아닐까 해요. 그리고 윤리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이러한 욕망을 제어하도록 하는 규칙이나 생각들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이러한 규칙이나 생각이 우리 머릿속에 어떤 종교처럼 스며들어 작용하는 것처럼도 느낍니다. 지금 당장 갈증을 느낀다고 해서 사회자 역할을 내팽개치고 물을 마시러 가면 안 된다거나, 타인의 것을 뺏어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이미 내 몸에 배어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욕망’보다도 먼저 작용하는 것을 보면, 욕망을 억제한다기보다는 이미 마땅히 그러한 믿음처럼 되어 있어 어디까지가 자연스러움이고 어디부터가 윤리를 신경 쓴 행동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여러분은 ‘ 욕망과 윤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텐: 제 생각에는 역시 욕망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아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데, 부정적으로 보면 자기중심, 에고이즘에 빠질 수도 있는 것, 그래서 균형을 잡기 힘든 것이라 생각해요. 실제로 욕망에 순응하는 사람을 보면 에고이즘적인 선택으로 균형을 못 맞추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욕망을 벗어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행동할 때 성숙한 개인주의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난 지금 이게 먹고 싶어’ ‘마시고 싶어’와 같은 욕망은 출발점으로서는 괜찮을지 모르나, 거기에 머무르면 이것이 남을 무시하게 되는 위험성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 욕망의 출발점은 개인이지만, 이것이 균형을 잃게 되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시말해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해를 끼치는 상태를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식인이 자기 학설이 옳다 생각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강요이고 자기만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을 절제하는 방법은 ‘타자를 생각하는 것’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울: 텐 형이 생각하는 ‘타자를 생각하는 것’이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란 ‘윤리’가 포함되는 것일까요?


텐: 윤리는 어떤 아름다운(추하지 않은) 요소를 포함하고, 또한 보편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오히려 ‘타자를 생각하는 것’이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보편적이고 포괄적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순수한 욕망과 오염된 욕망


일환: 저는 ‘욕망’을 제 경험담을 통해 생각해 봤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윤리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정 분위기도 도덕적이었고, 아까 다울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종교처럼 윤리적인 것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고교 3년을 지나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런 것에 반항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접하게 됐습니다. 거기에서 ‘선과 악’을 해체시키는, 그리고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들어라’라는 메시지를 읽게 됐는데, 저한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고, 그 내용에 열광하였습니다. 한동안『 데미안』을 마치 경전처럼 읽고 다녔는데, 그 책의 영향이 상당히 커서 ‘나는 이제 선과 악에 얽매이지 말아야겠다’,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태도일지 모르겠지만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안 웃으려고 하고, 도덕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반년 정도를 지냈어요. 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했어도 결국에는 나는 여전히 도덕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도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시기도 그것은 결국에는 내 생각이었을 뿐 실제 생활에서는 윤리적인 태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윤리 자체를 부정적으로 또는 고정불변하거나 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충분히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고, 또한 사람과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욕망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생명력이나 큰 추동력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다울 씨가 말한 것처럼 욕망에는 ‘순수한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는 ‘더럽혀진 욕망’이 다른 한편으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필요 이상의 돈을 갖고 싶다거나, 외적으로 잘 보이고 싶다거나, 그 외에도 단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치스러운 카페에 가서 비싼 음식 먹으면서 정신적으로 만족을 느끼고자 하는 욕망은 순수한 욕망과 달리 부정적이고 더럽혀진 것이라 느껴지곤 합니다. 


저는 순수한 욕망만 추구하면서 살고 싶은데, 내가 원하는 욕망은 뭔가 더럽혀진 욕망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제 욕망을 완전히 긍정할 수는 없게 되고, 또 다시 윤리를 추구하게 되곤 합니다. 이렇게 욕망과 윤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듯 지금도 고민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욕망과 욕구


소향: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제 생각에 저는 굉장히 욕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오히려 안 시키면 불안해하는 편이었습니다. 욕망이랑 욕구가 약간 다르면서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욕망’이 꼭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욕망은 항상 단계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욕망, 사회적 욕망, 또 사회 안에서도 계층에 따른 욕망을 다 나눠서요. 그리고 그것이 윤리를 통해 판단되는 것 같습니다. 그 각각의 욕망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윤리가 검토해 주고 걸러주는 역할을 하지 않나 싶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단위가 작고 순수한 욕망은 굉장히 긍정적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한국이 자살률이 높은 이유도 사람들이 이러한 작고 순수한 욕구조차도 못 느끼고 허무함만 자꾸 느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욕망이라는 단어 자체도 이미 부정적으로 들리기도 하니, 차라리 ‘욕구’라고 칭하고, 그런 작고 순수한 욕구는 허용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한편 욕망의 단계를 나눴을 때, 가장 큰 욕망으로 분류되는 것은 종교가 사람을 억압하는 욕망의 경우가 상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욕망은 ‘윤리’가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여 제어, 수정,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욕망에도 단계가 있으므로, 그것을 모두 부정적인 ‘욕망’이라 부르기보다, 언어 선택의 단계부터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욕망’과 ‘윤리’를 그릇되고 올바른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조화를 이루고 또 견제하는 상호작용 관계로 보는 것이죠.


다울: ‘욕망’은 욕망과 욕구와 같이 언어 선택의 단계부터 구분이 필요하고, 그 각각을 ‘윤리’가 조절하고 판단하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군요.


소향: 네. 생명력과 같은 것은 ‘욕구’라고 부르고, 필요 이상의 돈에 대한 욕심과 같은 것은 ‘욕망’이라 불러 구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윤리는 욕망을 긍정하는 것


아오이: 저는 먼저 ‘윤리’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요. 저는 ‘윤리’를 여러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욕망대로 무엇인가를 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 그런 것을 막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윤리라는 말을 듣고서 저는 먼저 일본 고등학교 윤리교과서가 떠올랐는데요. 그 윤리교과서에는 도덕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나쁜 짓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실려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는 것 또한 인간이고,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하나의 전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를 고민하기보다는, 욕망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고, 그후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이 윤‘ 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울: 욕망을 가지는 것 자체를 우선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군요. 그 말씀을 듣고보니, 우리는 ‘인간’을 너무 이상화해서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두고 ‘인간도 아니야’라거나 ‘짐승 같은 놈’이라는 지칭하곤 합니다만,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또한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것이 인상적이네요.



윤리와 도덕의 차이


일환: 제가 배운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는 각종 윤리사상 이론들이 소개되어 있어서, 배웠던 것으로 기억해요. 일본의 고교 윤리교과서도 그런가요?


아오이: 일본 교과서에서도 윤리 사상과 이론이나 철학자에 대해 다루긴 합니다!


일환: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 윤리교과서는 인간이 악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건 한국 정치인이나 연예인, 공인을 뉴스, SNS에서 ‘윤리적이지 않다’는 잣대로 비판할 때도 ‘사람이 원래 악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당연히 선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기준이 출발점이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울: 한국의 윤리관/도덕관과 일본의 윤리관/도덕관에 차이가 있는 것 같네요!


텐: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도덕과 윤리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윤리의 경우는 욕망이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도덕은 욕망을 배제시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Ethica)』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거기서는 윤리를 인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욕망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감정에는 욕망이 원래 포함이 되어 있는데 이 욕망이 더 높은 경지로 향하면 그것이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개인으로부터 나온 욕망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사랑’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써 사람을 대할 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욕망으로 시작된 것이 더 높은 경지의 무엇이 되는 것, 저는 이것이 윤리라고 생각해요. 반면에 도덕은 조금 더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해야 해’와 같이 범위 자체가 윤리와 비교해서 더 작고 구체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보름: 그럼 사랑은 욕망이 아닌 걸까요?


텐: 출발점은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욕망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보편적 도덕과 상대적 윤리


보름: 아까 소향 씨가 욕망에 여러 단계가 있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욕망, 사회적인 욕망 등으로 분류할 수 있고, 소유적 욕망과 이것을 뛰어 넘는 존재적 욕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을 실현시키고 싶은 욕망이 있는가 하면 그것과는 무관하게 무언가를 자꾸 갖고 싶은 욕망도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이것을 가져야 더 확장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그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욕망이라는 것이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성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예를들어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상당 부분 욕망에서부터 출발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합리적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도덕적 판단 또한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해요. 도덕이나 윤리적 판단 모두요. 그렇다면 그러한 윤리 혹은 도덕은 누가 근거 짓고 누가 만든 것인가, 누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일까 하는 당위적 문제로 넘어가지요. 


윤리는 아까 텐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잖아요? 이것은 사회적 습속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누구나 따라야 하는 것’으로 굳어져서 생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덕에 비해서 훨씬 광범위하고 세밀하기도 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술 마실 때 고개를 돌리느냐 마느냐, 눈을 똑바로 뜨느냐 마느냐 등도 그렇죠. 반면에 도덕은 사실 그것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아요. 


도덕은 철학적으로 정교화되면서 보편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매우 합리적으로 구축된 것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다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덕’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특수한 문화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같은 것이 도덕의 눈으로 볼 때, 근대사회를 살고 있고 합리적인 선에서 모두가 동의할 만한 개인의 자유를 인정한다면, 도덕적 차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를 가지고 본다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이 사회의 윤리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비판하게 될 텐데, 문제는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들의 세계 안에만 있는 윤리가 있다는 것이죠.


소향: 그렇다면 도덕이 윤리보다 더 보편적인 것일까요?


보름: 네 보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근대 이후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됐어요. 그러나 이것이 과연 문제가 없느냐 하면 저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은 보편적인가?


소향: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윤리의식으로 비판되어 마땅한 일도, 타 문화권에서는 ‘그것은 너의 문화권 윤리의식일 뿐이다’라고 반론할 수 있잖아요? 그럴 때, 윤리를 도덕으로 바꿔서 ‘인간이면 그러면 안 된다’라고 고쳐서 지적하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과연 납득을 할까요?


보름: 소향 씨는 어떠실 것 같아요?


소향: 도덕이나 윤리나 학문적으로 접근하면 조금은 구분이 되는데,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추상적이고 비슷한 말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언어를 통해서 지적하는 것과, 그 사람들이 몸으로 행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생각해요. 보편적인 도덕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고, 반대로 타 문화의 윤리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윤리와 도덕의 정의를 구분하는 것은 좋은데,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행동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름: 굉장히 좋은 지적을 해 주셨다고 생각해요. ‘도덕은 이러한 것이야’라고 누가 정의를 했다면, 그것을 과연 누구나 다 따라야 하는 것일까요? 그게 항상 옳은 것일까요?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도덕은 보편적이라고 칸트와 같은 철학자가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 보편을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왜 그게 보편이어야 할까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다 그렇다고 하는데, 뭐가 어떻게 합리적이라는 것일까요? 과거에는 그것을 ‘신’이 담보해 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담보할 수 없잖아요? 그것이 굉장히 큰 문제이고, 동일한 문제가 도덕에서도 늘 발생합니다. 


도덕적으로 ‘전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라고 한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사람이 안죽을까요? 그런데 이것이 정말 보편적이고, 인간이 모두 아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왜 전쟁이나 살인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일까요? 다르게 이야기하면 ‘보편적인 윤리를 인간은 꼭 지켜야 돼’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을 지켰을 때 누군가가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닌가, 라는 부분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특정한 개인의 소유적 욕구가 사회적으로 확대된 것, 그리고 그것을 지키도록 주입시킨 것이 어떻게 보면 ‘윤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 윤리에서도 ‘어떻게 해라’, ‘복종해라’, ‘윗사람 섬겨라’라고 하면 결국 누가 좋으냐 하면 왕이 좋은 것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욕망과 윤리의 문제는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요. 조선시대 500년 내내 끊임없이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조선사회는 윤리적으로 되지 않았고, 성인(聖人)의 사회가 되지 못했잖아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라서 아무리 윤리를 가지고 잣대를 가지고 이야기해도 그렇게 되지 않아요(웃음). 욕망을 없애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욕망이 없어지느냐 하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리고 또 여기서 그냥 단순히 ‘어떻게 해야 좋을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누구한테 좋을까?’ ‘왜 우리가 이것을 좋다고 생각하게 됐을까?’ ‘왜 이것을 우리가 해야하지?’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완전한 인간


소향: 아까 아오이 씨가 하신 말씀 중에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좋은 의미로 충격적이었는데요, 도덕적으로 엄하게 자란 저는 ‘나쁜 짓’은 ‘당연히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만 배워 왔어요. 그런 입장에서 보면, 만약에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좋은 쪽으로 시야가 넓어질 수도 있겠지만, 과연 인간의 모든 행위를 허용하고, 받아들이고, 인간을 이해하는 것을 갑작스럽게 변경할 수는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아오이 씨가 말씀하신 일본의 고등학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어떻게 나아가도록 배우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이다’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해요. 여기서 ‘나쁜 짓’이라는 것이 ‘부족한 것도 인간이다’라는 의미에서인지, ‘나쁜 행위를 하는 것도 인간이다’라는 의미에서인지도 구분할 수 있다면 ‘욕망’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울: 인간은 나쁜 짓도 할 수 있으니 더 윤리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식의 교육방침이 었을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아오이: 제가 고등학교에서 윤리 책을 보고 느꼈던 것인데요. ‘인간은 나쁜 짓도 하는 생물이라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남의 물건을 갖고 싶어졌다’는 상황, 마음을 가지게 된 자기 자신을 너무 추궁하거나, 자책하거나, 혐오에 빠지지 말고, 그런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사회규범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일환: 제가 생각하기에도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결국 나를 사랑하고 또한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난 제3회 청년포럼에서 ‘어른’을 주제로 대화할 때도 이야기했었는데,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도덕의 잣대만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에 그쳐 버리는 것 같아요. 또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하는 사람도 ‘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는 자기혐오와 자책에 빠져 타인도 싫어하게 되어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는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게 된다면, 자기 자신도 타인도 더 관용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막상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때 최대한 이상화해서 보고 싶기 마련인데, 자신의 진짜 모습에 직면한다는 것이 눈물겹도록 힘든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그 지점에서 출발했을 때 더 성숙한 윤리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 또는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무시한 채, 또는 자기 자신을 이상화한 채 ‘ 누구나 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 모습이나 타인을 관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고민으로부터 나오는 윤리가 더 현실에 맞는 것이 아닐까요?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이라는 출발점은 그래서 필요한 것 같아요.



지나치게 이상적인 인간관


다울: 저도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생각은 한국 사회에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러한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는 일본사회라고 하더라도 꼭 좋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부분이 있어요. ‘너는 그럴 수 있지’ ‘너의 취향을 존중해’ 하는 생각에서 나아가 ‘룰만 잘 지키면 내가 무엇을 하건 상관없잖아?’ 하며 서로 간섭을 너무 하지 않는 것도 위험해 보이긴 합니다. 최근에는 어린 아이들 캐릭터를 성적인 대상으로 묘사한 듯한 게임들이 일본에서 유행하는데, 하나의 취향으로 인정받는 분위기를 보고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도 했어요. 한국 같았으면 절대 저런 게임이 안 나오거나, 나오더라도 사람 앞에서 얘기하고 다닐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경우에는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관용이 너무 지나친 면이 있고, 한국의 경우에는 그런 관용이 너무 없어 오히려 경직된 면이 있지 않나 합니다. 양국 다 적절한 상태를 찾아야 할 거예요.


텐: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어보니 상당히 현실적인 것 같아요. 반면에 한국에서 살다 보면 인간에 대해서 너무 ‘이상적’이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정통 유교 영향이 강하다고 한다면 역시 ‘성선(性善)’의 영향이 큰 것일까요? 러시아의 경우에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소설을 보면 라스콜니코프라는 주인공이 할머니를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물론 이런 짓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만,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 저질러 버린 죄를 반성하고 감옥에 가는 과정을 보면서 독자도 공감을 하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인간은 모순덩어리라서, 좋은 일뿐만 아니라 나쁜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복잡해서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처럼 단순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행동이나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조금 이상적이라서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보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조선시대에 그토록 이상적이고 합리적이던 주자학 아래 욕망이 다 없어졌냐 하면,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커지고 깊어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기술자나 장인에 대한 차별도 그에 해당됩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기술자가 기술을 갈고 닦을수록 학문하고는 멀어져 버리기 때문에,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점점 성스러운 것에서 멀어져 차별을 받게 되는 구조였지 않나 싶어요. 지금도 그런 특징이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요?



도덕과 욕망이 넘치는 한국


다울: 이제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정리를 하면서 마무리를 할까요?


보름: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처럼 완벽한 인간으로 자라기를 원하고 주입을 받는 윤리나 도덕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지 않다는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이렇게 발달된 21세기에 선진국에 속해 있는 나라에 산다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동반하는 것이거든요. 


지구촌 어딘가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도 있는데 외면하고 마치 그들은 세상에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노력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옷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개인적으로 강아지를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인간이 개를 애완으로 키우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서, 또한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어요.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면 정작 윤리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점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그런 질문과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소향: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무엇인가가 뻥 뚫린 느낌입니다. 항상 주변에서 ‘착하게 살아라’ ‘열심히 살아라’ 이런 말만 듣고 살았는데, ‘나쁜 짓 하는 것’이나 ‘부정적인 욕망’도 인간에게 포함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간 일이라 할지라도 학교 성적에 대해 계속 생각도 들고, 스트레스도 받고, 자꾸 후회도 하게 되는데, 그것으로 너무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타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의 ‘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은 것 같습니다.


아오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인간이다’라는 것이 일본사회에 깔려 있기도 합니다만, 반대로 거기서 생기는 관용의 남용을 제어할 도덕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받고는 했는데, 그 문화권 안에서 살면서는 못 느끼던 것들이었던 것 같아요. 한국이라는 다른 문화권에 와서 살고 이런 대화를 하면서 시야가 넓어지는 계기가 되어 너무 좋았고 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환: 이상과 현실이라는 고민을 늘 하고는 있는데, 보름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윤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문제제기를 해 봐야 한다는 말씀이 정말 와 닿았고, 현실을 마주보는 기회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텐: 아오이 씨가 말씀하셨듯이 한국에서 살면서 느낀 것들은 정말 많아요. 한국이 도덕의 강요가 심한 편이라고 하긴 하더라도, 좋은 점도 많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시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기 사회를 개선할 수도 있는 것이죠. 러시아에서는 시위가 일어나면 항상 폭력 문제가 동반되곤 합니다. 반면에 한국의 시위, 특히 지난 촛불시위 같은 경우에는 평화롭고 편안한 시위로 정권을 교체했다는 점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작년 동양포럼에서 김태창 선생님께서 ‘왜 요즘 젊은이는 희망이 없을까?’ 하는 질문에 제 지도교수님이신 오구라 선생님께서는 ‘반대로 희망이 젊은이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일본의 젊은이는 오히려 희망이 없는 게 더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어요. 또 거기서 ‘한국의 희망은 욕망의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장래희망처럼요. 그런 점에서 좋고 나쁨을 떠나 한국은 욕망이 많은 사회 같다고 느꼈습니다.


다울: 이것으로 제4회 청년포럼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년포럼3>

<청년포럼2>

<청년포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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