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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17. 2018

나이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벽신문 제73호, 2018년 4월호] 청년포럼③

녹취 : 최다울 / 정리 : 성민교


○일시: 2017년 12월 30일(토) 

○장소: 독존학당(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녹취: 최다울, 유일환, 김용한, 신소향 정리: 성민교

○참석자 : 유일환(서강대 철학과 3년) 김용한(서강대 신학대학원 석사과정, 동학 연구)

                 성민교 히토미 아오(人이見葵) 김세진 신소향(서강대 중국문학과 2년)

                 장희욱 최다(토울호쿠대 4년, 일본사상사 전공) 서지원 강동재

                 안상욱(영동고 3년, 일본 유학 준비 중) 이형래(경기고 3년) 권재민 김예린

                 텐 웨냐(민교토대학 박사과정, 한국계 러시아인, 서울대 어학 연수중 ) 김유리



새해의 시작은 ‘나이’ 먹기


다울 제3회 청년포럼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어떤 주제를 다루어 볼까요?


민교 오늘이 12월 30일이고,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도 있어서요, 또 끝나고 송년회가 예정되어 있고 곧 새해를 맞이하기 때문에, ‘나이’라는 주제로 대화해 보고 싶습니다. 해가 바뀌면서 나이를 한 살 더 먹잖아요? 나이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다른 문화권에서의 ‘나이’ 차이에 의한 위계질서 문화 같은 부분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물학적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울: 감사합니다! 확실히 ‘나이’는 중요하면서도 평소에 잘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네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른에게 존댓말을 하고, 행동을 조심하고 공손히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모두 동의하시는 것 같으니 오늘의 포럼 주제는 ‘나이’로 하고자 합니다! ‘나이’ 차이 때문에, 또는 동갑이어서 행동이 바뀌거나 불편하였던 경험이나 생각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를들면, 나이가 더 많다고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지 않나? 혹은 동갑이어도 생일이 11개월 차이가 나면 거의 1년 차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반말을 쓰나? 같은 거지요. 


아니면 ‘성인’의 나이에 대한 말씀도 좋겠습니다. 18세 또는 20세의 나이는 왜 담배와 술이 허락되고 선거권이 주어지는 나이인가? 나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곳에서 관건이 되고, 많은 사람의 인식이 두루뭉술하면서도, 어떤 부분은 법률로도 정해져 있기도 합니다. 생각해볼 여지가 많네요.



‘나이’란 생물학적으로 얻는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것


예린: ‘나이’ 하면 선거연령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현재 만20세부터 투표할 수 있는데, 작년 촛불집회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중고등학생들도 충분히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자기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유교 문화 영향이 강력해서, 어른들 앞에서 존댓말을 하고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이 창의성이나 도전정신과 같은 것을 가로막는 부정적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부하직원과 상사, 또는 부자지간에도 맞담배를 필 수도 있다고 듣고 놀랐습니다. 한국에서는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일본은 한국보다 더 빠르게 혁신을 이룬 부분도 있고,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배출되는 점을 봐서 문화적으로 앞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배울 점이 많아요. 반면 한국은 높은 선거 연령이나 장유유서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동재: 인간이 동물이랑 다른 점의 하나가 나이를 한 살씩 먹는다고 인식하는 거잖아요?

생리적인 느낌이 아니라 1년씩 나이가 들어간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이에 따라서 해야 할 행동이나 규범이 다 정해져 있고, 어떻게 보면 삶을 ‘나이’라는 틀에 끼어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다울: 그렇죠. ‘그 나이가 됐으면 그 나이답게 살아라’라는 것이죠. 30대가 됐으면 30대답게. 40대가 됐으면 40대답게 이런 식으로요.


동재: 예, 죽는 시기는 각각 다른데 모두 같은 나‘ 이’로 틀에 끼우는 느낌이 듭니다.


다울: 예리하게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도 예린 선배가 말씀하셨듯이 창의성이나 도전정신을 억누르는 요소가 될 수도 있겠네요.


민교: 동재군이 제가 ‘나이’라는 주제를 제안한 이유에 가장 근접한 말씀을 해주셨어요. 

저는 현재 25살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25살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제 주민등록번호 말고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 세포의 나이를 분석하더라도요. 만약에 제가 갑자기 객사를 해서 한참이 지난 뒤에 제 신원을 알아본다고 해도, 제가 여성이라는 것과 대략적인 연령대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한 사람의 나이를 알아볼 방법은 육체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재미있는 상상을 하나 해 본다면, 나이의 숫자가 사회적으로 부여된 것이므로, 만약 1년을 365일이라고 하지 않고 100일로 정했다면 우리는 지금의 3배가 되는 나이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앞에서 선거 말씀 하셨듯이 나이가 사회적 권리를 부여하는 기준이 돼요. 이런 것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 참 재미있는 부분 같아요.


다울: 예, 방금 지적하신 것처럼 나이는 사회적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기에 ‘나이’란 수많은 경우 판단 기준이 되면서 법률로도, 예절로도 스스로 기준이 생기고 정말로 ‘나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되네요.


‘나이’란 사회적인 것이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이 됩니다. 이처럼 이 나이라는 것이 두루뭉술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른에게 존댓말을 하고, 담배를 필 나이가 되어야 필 수 있고, 대한민국의 남자는 특정 나이가 되면 병역의무를 지게 됩니다. 동물에게는 없는 1년이라는 인식이 사람에 있어서 실제로 우리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죠.





‘나이’와 사회적 안정성


형래: 지금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나 선후배 관계와 같은 유교적인 면을 다들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는 긍정적인 면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린 선배가 일본에서는 부자지간에 맞담배가 가능하다고는 하셨는데, 일본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 내 선후배 관계의 경우에는 한국보다 더 위계질서가 엄격하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은 공통적으로 유교적인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을 공경하고 존중해 주는 문화 덕분에, 오히려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문화권보다 한국과 일본이 더 치안이 잘 되어 안전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일단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반면에 유교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나라들을 보면 대체로 치안도 안좋고, 존댓말 문화와 상대방을 존중하는 문화가 없고 안전성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이에 의한 위계질서가 꼭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일본의 경우 위계질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 것을 보면 충분히 장점을 끌어안고 갈 여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울: 유교가 꼭 억압이나 인위적인 틀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군요. 그런데 질문을 해보자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존중하는 것도 잘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형래: 제가 알기로는 위아래의 다름이 있을 뿐 윗사람도 아랫사람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이 둘의 조화가 중요한 것 같아요.


다울: 조화를 중요시하는 부분에서 본받을 점이 있다는 것이군요. 그리고 조금 더 설명하자면, 형래군이 말한, 학교에서 선후배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한 것은 일본 중고등학교 클럽 활동(부카츠, 部活)이야기인 것 같아요. 특히 운동부 활동이죠. 거기서는 위계질서가 매우 엄격한 편입니다. 그런데 그 외의 곳에서는 한국 중고등학교

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맞담배에 대해서도 확실히 허용되는 것은 맞는데, 또 한편으로 부모자식 간에는 거리를 두는 경향이 보입니다. 자식이 성인이 되면 ‘너는 네가 알아서 살아라’거나 ‘학비를 대준 것은 나중에 돈 벌어서 갚아라’와 같은 관계가 되다 보니까 한국인의 관점으로 보면 조금 따뜻함이 없지 않나?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측면도 많습니다.



‘나이’로 정해지는 존댓말과 반말 하기


일환: 저는 최근에 존댓말과 반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어요. 특히 나이가 비슷한 관계에서의 높임 표현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같은 학교 선배에게든 동네 형에게든 반말을 썼는데, 이상하게도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형과 선배에게는 무조건 존댓말을 쓰는 질서가 있었어요. 대학교에 와서는 중고등학교에 반말 사용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선배들에게 존댓말을 하고 반대로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반말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저는 그게 한편으로 우습게 느껴졌어요. 어찌 보면 모두 고만고만한 대학생인데 한두 해 선배라고 존댓말을 쓸 필요가 있을까? 친구처럼 편해질 수 있는 관계를 존댓말과 반말이 가로막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 역시 이런 문화에 젖어 있다고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저와 친한 형이 이제는 자기를 친구처럼 대하고 ‘너’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그것은 제게 더 불편하더라고요. 왠지 형은 형이라 불러줘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저보다 한두 살 어린 후배가 저를 ‘너’라고 부르면 저도 역시 불편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이 거부감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다울: 머릿속으로는 ‘나이라는 것을 따지지 않아도 되겠지?’ 하고 생각해도, 실제로 말을 해 보면 존댓말을 사용해야 하고 이를 어길 시 불편해 하는군요. 여기서 잠시 존댓말을 안 쓰는 문화권에서 오신 텐 씨와 소향 씨, 그리고 존댓말을 덜 쓰는 일본에서 온 아오이 씨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네요. 물론 엄마를 어머니, 어머님, 모친 등으로 표현하듯이 존중 표현은 있겠지만 어떤가요? 존댓말을 쓰고 안 쓰고 하는 데 따른 거부감이나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지나요?


텐: 러시아에서는 높임말이나 존댓말이 없어요. 다만 선생님과 대화할 때 목소리나 억양을 조심할 때는 있어요. 하지만 친구 사이에서는 존댓말을 거의 하지 않아요. 보통 친구라도 서너 살 차이 나는 경우가 흔하게 있는데 그런 경우에도 그냥 격식 안차리고 대화를 해요.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건네곤 해요.


다울: 그런 문화에서 살다가 일본이나 한국으로 왔을 땐 많은 차이를 느꼈나요?


텐: 맞아요. 한국에서는 나이 차이를 의식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서울대 어학당에서도 제가 대학원생이고 나이도 수강생 중에는 연장자여서 교실에 가면 항상 제 이름표가 제일 위에 있었어요. 이게 나이 기준으로 순서를 배열하는 것이더라고요.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어요.


다울: 나이나 존댓말의 구분에 위화감이 있겠군요.


텐: 특히 일본에 유학 갔을 때, 연령이 비슷한 사람에게는 언제부터 반말을 써도 되는지 고민된 적이 많았습니다.


민교: 텐 씨는 아예 반말 존댓말의 구분이 없던 사회에서 살다 오신 거잖아요? 그럼 그때는 ‘자신이 쓰고 있는 말이 반말이다’ 라는 의식 조차도 없었던 거죠?


텐: 네.


민교: 그럼 한국어나 일본어를 배우시면서 그 구분을 의식하게 되신 건가요?


텐: 예를 들면 높임말은 없지만, ‘주세요’를 붙이면 존중 표현이 되듯이 끝에 플리즈(Please)를 붙여서 존중 표현을 쓰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이름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이름과 아버지 이름을 함께 부르는 것으로 존중의 표현으로 쓰곤 합니다. 또한 2인칭, ‘당신’에는 두 가지 종류의 존중 표현이 있어요. 한국어로 ‘너’와 ’당신’이 있듯이요. 다만 한국어처럼 문법적으로 높임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나이’에 대해서 연장자는 경험이 많다는 인식은 있지만, ‘나이’만으로 존중을 해야 한다는 의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울: 일본에서 오신 아오이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오이: 일본에서는 관계에 따라 존댓말과 반말 사용의 구별이 있습니다만, ‘반말을 쓰다 보니까 친해졌다’라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우리 오늘부터 반말 쓰자?’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반말을 쓰는지 존댓말을 쓰는지에 따라서 사회적 관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다울: 제가 일본 한국 양쪽에서 살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초면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반말을 할 때 실례가 되고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한국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보통 존댓말을 쓰지만, 부모님이나 친척끼리 존댓말을 안 쓰는 경우가 한국보다 많은 것 같고, 시골에서 공사현장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종종 보는데, 같이 일하는 20대 청년이 60대 동료직원에게 작업 중에 반말을 하거나 농담 식으로 장난을 치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서로 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이’ 차이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끼리는 반말을 써도 무례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한국보다 덜한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소향 씨도 중국에서 생활하셨다 하셨는데, 어떻게 느꼈는지요?


소향: 저는 중국어가 모국어는 아니고, 중국어를 처음부터 배우는 입장이었어요. 그래서 존댓말이 없는 중국어 문화가 처음에는 굉장히 버릇없어 보이는 편견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그 문화권에서 중국어를 사용하다 보니, 오히려 억압받지 않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보통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과 자기소개를 할 때 항상 ‘몇 살이세요?’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하잖아요? 하지만 중국에서는 전혀 그런 질문이 없다 보니까, 그냥 편하게 먼저 대화를 나누고, 인간관계를 형성하다 보면 나중에 서로 나이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형식적인 질문같은 틀이 없다 보니 오히려 인간관계 형성에 제약이 적어져 관계 형성에 더 많은 다양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개성 있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이런 면에서 언어나 사상은 참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곤 합니다.


다울: 중국은 한국에 비해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덜하군요.


소향: 예. 중국에 비해서 한국사회는 ‘나이’에 대한 질서가 과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다만 꼭 그것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위계질서의 유지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에게 ‘너’라고 부르는 것을 좋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니까요. 존댓말 문화에도 좋은 면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울: 예린 선배가 말씀하셨듯이 ‘나이 따지기’나 ‘존댓말 문화’가 다양성이나 개성 발휘를 가로막고 있다고 볼 수 있겠군요. 한편으로 이게 너무 풀어져 버리면 부모님에게 반말도 하고,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유리: 우리가 ‘나이’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서, 사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유교적 질서’ 문제인 것 같아요.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이로 위계질서의 기준을 삼는 문화잖아요? 한 사람의 모습을 하나로 규정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것을 ‘나이’라는 기준만으로 그 위치를 설명하려고 하는 데서 많은 폐해가 생긴다고 말씀해 주신 것 같아요. 저도 많이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물론 이렇게 ‘나이’를 따지는 게 많은 폐해가 있지만, 가치가 전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산물이라고도 생각해요. 


오늘 참석자들의 다양한 경험이나 생각을 들으면서 유독 한국이 나이에 따른 차별이나 구분이 심하다고 느끼는 것 같은데, 이것은 우리 문화가 열등한 것이 아니라, 유교적인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나라가 우리나라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유교문화가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시기도 한국보다 늦고, 또 유교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린 적도 없었으니, 일본에서 한국보다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덜한 것 같습니다. 중국도 유교의 본고장이긴 하지만 유교뿐만 아니라 도교나 불교와 같은 다양한 학문들이 경연을 펼쳤던 곳이기 때문에, 그만큼 다양성이 존중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와 관련한 우리나라 문화의 특징은 이런 역사적, 사회적, 철학적 배경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앞에서 동재 씨가 동물에 대해서 말씀하였는데, 저는 사실 동물이 오히려 더 나이에 묶여 산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나이’라는 것도 아예 무형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늙어가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것을 어떤 기준에 따라 수치화한 것이 ‘나이’이고, 반면에 인간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탈피할 여지라든가, 다르게 규정할 여지가 많은데 비해, 동물의 일생이라는 것은 태어나서 성체로 자라나서 번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요. 그래서 ‘나이’를 헤아리는 것이 자연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서 생겨난, 인간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 저는 존댓말 문화가 아예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이에 따른 존댓말-반말 구분은 완전히 반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리 70대 어르신을 만나도 처음 본 사람도 반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왜냐하면 지금 같은 나이 중심의 구분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잘 들어맞고 성립을 했어요. 왜냐하면 나이에 따라 경험의 정도가 정비례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그렇지 않고, 저보다 어린 열 살짜리 어린 아이가 어떤 분야에서는 오히려 저보다 더 많은 통찰을 갖고 있을 수 있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이’ 구분이 해 왔던 역할을 이제는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와 관련된 문화를, 시대가 바뀜에 따라 좀 다르게 해보자 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존댓말이나 반말은 존중의 표현인데, 국어시간에 배웠듯이 존댓말을 쓴다는 것은 존중의 표현이기도 하면서 거리감의 표현이기도 해요. 즉 처음 본 사람한테 아직까지는 내 영역 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존댓말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존댓말을 반대합니다. 


예전에는 ‘나이많음’이 곧 현명한 사람임을 보증해 줬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까 조금 더 개인 대 개인으로서 만날 여지를 주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이’문화는 일단 나이가 많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존중해라, 라는 것이잖아요? 그런 것을 탈피해서, 그 사람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한 점에서는 현재의 나이 문화라가 그것을 막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울: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는 요소까지 무작정 버리거나 열등한 것으로 묶어봐서는 안 되지만 일률적으로 나이로만 사람의 모든 부분을 판단해 버리는 데 문제가 있다는 거군요. 어떤 사람을 존중할지 말지를 나이를 기준으로가 아니라, 자신이 고유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네요. 다만 한편으로는 나이에 의한 위계질서라는 것이 동물계에도 엄연히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오히려 이 나이에 의한 위계질서에 위화감이나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인위적이고 특별한 감정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또 다른 발언 있으신 분 계신가요?





어른이란 무엇일까? 어른이 꼭 되어야만 할까?



세진: 나이 얘기라면, 몇 년 전부터 제가 고민하던 것이 있는데요. 바로 이 땅에 진짜 어른이 있을까, 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장교 생활을 하다가 전역했습니다. 군에서는 저보다 계급 높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장군들과도 같이 일을 했어요, 이 과정에서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또 지휘하는 것을 보면서, 이 모습은 정말 어른의 모습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작년에 전역을 하고 사회 나와서도 과연 이 사회에 정말 어른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두 가지 단어가 떠오르더라고요. 그것은 ‘어른’, ‘어른이’ 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다 ‘어른’이 되고 싶어하면서, 실제로는 ‘어른이’이지 않을까? 어째서 다들 ‘어른’이 되고 싶어할까? 그리고 왜 다들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자신의 논리와 생각을 강요하고 할까? 라는 질문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 고민하는 문제예요. 


첫째, 어른이란 무엇일까? 둘째, 꼭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이 생각을 하면서 ‘나부터 어른이 되어야 하겠구나’라고 저는 계속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두 질문에 대해서 저 혼자서는 답을 내릴 수 없는 것 같아서 나이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나이를 얘기할 때 그 자체가 뭔가 어른이 되어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싶으니까 나이를 내세우고 강요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저 두 물음에 대해 얘기해봤으면 합니다.


일환: 어른이라는 말의 어감에는 ‘어디 어른한테 감히’와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잖아요?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 ‘성숙하다’라는 의미만 갖는다면 저도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성숙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인데,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에서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다울: 일환 씨가 생각하는 ‘성숙한’, ‘훌륭한’ 어른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어른인지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일환: 저는 단순하게 생각을 했는데요, 제가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심이 많다보니까, 그런 의미에서 넓게 어른을 정의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어른으로 대접받기 위한 어른이 아니라, 내 과거와 비교해 봤을 때 더 어른이 되어 있고 싶다는 의미에서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딱 이거다. 라는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다울: 저도 공감합니다. 이런 고민을 하면 할수록, 이런 대화를 많이 하면 할수록 뭔가 더 성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으면서도,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숙해 나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많은 관점을 알고, 이해심과 시야를 넓힌다 정도가 ‘성숙해지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은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어른’ ‘성숙한 사람’ ‘존중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서도 명확하지 않고, 그만큼 각자의 생각이 다를 것 같습니다.


세진: ‘끊임없는 상승욕구’가 그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뭔가 더 지금보다 나아지려고 하는 욕구요. 그게 성숙함에 대한 욕구가 아닐까 해요. 더 많이 해 보고 싶은, 큰 영향을 발휘해 보고 싶은 욕구요.


유리: ‘그 욕구를 가진 것이 어른이다’ 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세진: 아니요. 그러니까, 어른이 되고자 하는 바람의 근간에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봤을 때, 저는 ‘상승욕구’가 있지 않을까 했던 겁니다.


예린: 저는 어른이, 물론 보편적인 어른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50살이 된 사람이, 예를 들어 우리 엄마도 할머니 앞에 가면 상대적으로 ‘아이’가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생각했을 때 ‘어른’이란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는 집에서 걸레질 청소를 열심히 하면서도, 할머니 앞에 가면 다 그냥 내팽개쳐도 되는, 저희도 나중에 결혼을 하고 친정엄마한테 가면 일 안 할 거 아니예요? 그래서 ‘어른’이란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들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하시던데, 저는 어른이 되기 정말 싫거든요. 왜냐하면, 어른이 되면 무엇인가 해야 할 것 같고, 그리고 요즘 ‘꼰대’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저는 대학교 다니는 내내 영어과목 학원 선생님을 했었는데,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라 부르지 말고 영어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어권 문화에서는 선생님도 그냥 이름으로 부르잖아요? 그래서 그냥 선생님이라는 대명사로 부르는 것보다는 제 이름이나 고유명사로 부르게 했어요. 그렇게 불릴 수 있게 되니까 더 좋은 것 같았고요. 


저는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도, 손녀나 손자들한테 그냥 할머니가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려고 해요. ‘꼰대’라고 여겨지고 싶지도 않고, 어른이 되고 싶지도 않아요.


다울: 확실히 ‘어른’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는군요. 지금 꼬마아이, 유치원생 아이들에게 여기 참석하신 분 다 어른일 것이니까요.


일환: ‘꼰대’라는 말을 들으면서, 아까 말씀 나왔던 ‘상승욕구’와 연관되는 부분이 있어서 말씀드릴까 해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노력을 한다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 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저는 이게 굉장히 잘못됐다는 것을 느껴서, 그때마다 혼자 깜짝 놀라기도 하는데,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러지 못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자기도 모르게 낮춰 보게 되고, 이를 절제하기가 많이 어려웠었습니다. ‘자신한테는 엄하게 하고 타인에게는 관용적으로 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자신한테 엄하게 되면 타인에게도 엄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 더 와 닿았던 것 같아요.


민교: 그런데 보통의 ‘어른’의 이미지는 자기에게는 엄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사람을 보고 ‘정말 저 사람은 어른답다’ 라고 하잖아요? 아마 세진 선배나 일환 씨가 되고 싶은 ‘어른’은 그런 ‘어른’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게 어려운 것이구요. ‘어른’이 되려다가 ‘꼰대’가 되 버리는 그런 어려움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일환: 맞아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다울: ‘성숙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게 되어 버리는, 어떻게 보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군요. 또 그런 강요를 하지 않는 ‘어른’, ‘스스로에게는 엄하고 타인에게는 관용적인 모습’이 쉽지 않지만 그것이 지향하고픈 ‘어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한편, 개인적으로는 아까 예린 선배가 말씀하셨던 ‘책임’과 ‘의무’ 부분도 많이 공감이 갔는데, 어른이 된 다음에 해야 될 일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육과 같은 것이 해당 될 거에요. 예를 들면 자식 교육이나, 직장 부하, 후배 등등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는 앞에서 이끌어 주고, 책임을 져 주고, 의무를 다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독존학당 후배들의 유학 준비를 도우면서, 아이들의 논술을 봐주곤 하는데, 관용적으로, 부드럽게만 해서는 아이들 글쓰기 실력이 바뀌질 않더라고요. 교육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자신이 해 왔던 사고방식, 방법, 기준들을 어쩔 수 없이 따르게 하도록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라고 일정의 틀, 가이드라인을 잡아주는 것, 어느 정도 타이르고 혼도 내는 것, 개인적으로는 사실 하기 싫지만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이게 일환 군이 말했던 ‘자기 기준의 강요’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친절하게만 가르치면 실력이 안 늘더라고요. 그래서 ‘강요’는 문제가 있지만, ‘나이’가 아니더라도 ‘경험’, ‘지혜’, ‘지식’과 같은 것들을 전할 때, ‘어른’의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필요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동재: 저도 ‘의무’와 ‘책임’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듣고 생각을 해봤는데, 동물이 성체가 된다는 것은 먹이활동을 독립한다는 의미에서 해석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사람도 어느 정도 동물이기도 하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한다’는 의미로 보면, 아까 말씀하신 ‘의무’와 ‘책임’이란 스스로에게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는 의미인가 싶었어요. 예린 선배 어떤 뜻으로 그 말씀을 하신 건가요?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 같은 의미인가요?


예린: ‘어른’이라는 말이 명사로 쓰이기도 하는데, 또 말하면서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어른다움’이라는 것도 자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른답다’는 것과 반대로, ‘왜 저렇게 어른답지 못할까’ 하는 표현도 많이 쓰곤 합니다. 아까 ‘어른’은 상대적인 것이라 말을 했는데, 만약 내가 학생들하고 있을 때는 상대적으로 내가 어른

이니까 지켜야 할 행동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친구들하고 장난칠 때는 욕설을 막 쓰면서도, 아이들 앞에서면 욕설을 하지 않는다든지, 엄마가 자식들한테 어른이니까 집안 정리정돈을 해준다든지, 때와 상황에 따라서 그에 맞는 ‘의무’와 ‘책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동재: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다울: 제 생각에도 ‘누군가가 나를 본보기로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식 때문에, 사실은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쓸데없는 대화도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대화모임에 있을 때는 친구들 대하듯이 대화하지는 못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 것들이 ‘의무’와 ‘책임’이 아닐까요?


세진: 제 생각에는 스스로 독립심이 있어서, 독립된 존재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의 정신력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어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혹은 물질이나 학문적으로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교: 제 생각에는, 만약에 내가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누가 나한테 의지하게 되면 그 사람은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게 되어 버리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내가 어른이 되어도 그 사람은 어른이 될 수 없고요. 그런데 저는 그게 꼭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다는 야망(?)이나 마음이 너무 존경스럽고 멋지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 ‘어른’이 두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떠해서, 존경 받는 사람’ 특히 여기서는 ‘성숙해서 존경 받는 사람’이 ‘어른’이라 여겨졌는데요. 뭔가 완전해 보이고, 자기의 할 일을 다 하고, 모든 면에서 정도를 벗어남이 없이 성숙하고 그 자체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떠해서 존경 받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저는 ‘성숙해서 존경 받는 사람’이 있다면 ‘미숙해도 존경 받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열 살짜리 아이한테도 통찰을 얻을 때가 있잖아요? 모든 사람이 다 어른이기만 하면 이 세상은 정말 재미가 없을 거예요. 누군가 어른이면 그 어른한테 의지할 약간의 나약한 존재도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세상이 그렇게 다양할 때 더 아름답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성숙해서 존경 받을 수도 있고, 미숙해도 존경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저는 개인적으로 모두를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떠해서 존경 받는다’는 것은 그냥 ‘인간이어서 존경 받는다’라고 생각해요. 앞에서, 존댓말이 없는 문화가 좋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존댓말만 쓰고 싶습니다. 아이한테도 존댓말을 쓰고요.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이, 보통 영어의 기본은 반말이라고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고어(古語)에는 존댓말과 반말이 나뉘어 있었는데, 반말이 사라지고 존댓말이 지금의 영어로 정립된 것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영어가 기본적으로는 존댓말이라는 거에요. 


우리말은 너무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하게 조직이 되어 있고 문법도 세세하게 구분되어 있어 존댓말과 반말도 명확하게 나뉘다 보니, 그것에 따라 언어가 사람을 만들고 언어가 또 철학을 만들듯이, 나이의 문제도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저는 ‘어떠해서 존경 받는다’에는 ‘인간이라서 존경 받는다’라고 채워 넣고 싶고, 또 아까 유리씨가 누구를 존중하는지의 기준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동학에서 ‘양반과 천민이 서로 맞절했다, 서로 존대를 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이 또한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형래: 저는 ‘어른’은 기본적으로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의 반대말은 ‘어린이’ 잖아요? 어린이 또는 청소년 이렇게 일컬어지는데, ‘어린 사람이 존경할 만한 사람’이 ‘어른’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꼭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하셨는데, 저는 이 사회 자체가 아이들을 전부 다 어른으로 만들

고자 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어른답지 못하다’라는 말을 고등학생이나 중학생한테 쓰지는 않잖아요? ‘어른답지 못하다’는 것은 ‘이 사람 어른인데 왜 어른답지 못한 거지?’라는 뜻으로 말을 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이게 나라에서 기본적으로 해놓은 초중 의무교육 9년에 더해 대부분이 받는 고등학교 교육 3년까지 해서 12년 교육을 모두 받으면, 교육을 받았으니 사회적으로 이제부터 본받을 점이 있어야 하는 ‘어른’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이미 여기 계신 분들도 어른이 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를 포함해 중고등학생들이 “나 ‘어른’ 되고 싶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걸리는 사회적 제약을 빨리 풀고 싶다는 것이거든요. 빨리 술 마시고 싶고, 밤 늦게도 PC방 가고 싶고, 저는 아직 고등학교 졸업 안 했으니까요. 그래서 아까 일환이 형이나 몇몇 분들이 ‘어른이 되고 싶다’라고 했을 때 좀 당황했어요. ‘이미 어른인데…? 왜 그런가?’ 하고요. 내가 보기에는 이미 어른인데.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어른’이라는 것이 다 따로 있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어른’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면서도 사회에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다울: ‘어른’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르다는 것을 저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른답지 못하다’는 말이 우리에게, 자신에게 씌워지는 프레임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관점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60-70 연세 되시는 분이 과음을 하고 행패를 부리고 있으면 ‘저 사람 어른답지 못하게

왜 저러냐’라며 ‘어른’의 기준으로, 우리의 잣대로 연장자들을 바라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까 민교 씨가 ‘인간이라서 존중한다’ 라고 하셨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신기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정작 자신의 친척이나 주변 어르신 중에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는 많이 안 좋게 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이 어른다워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정작 나도 타인을 ‘어른다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른의 기준은 ‘나이’가 아니다



세진: 일본어에서 ‘오토나(大人(おとな)、어른)’라는 말이 있는데, 그게 한국에서 말하는 ‘어른’의 이미지를 갖고 있을까요?


다울: 예, 단독으로 쓰인다면 한국에서 말하는 ‘어른’의 이미지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다만 실제 쓰일 때, ‘어른스럽다’와 같이 형용사 오토나시이(大人(おとな)しい)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이게 어른스럽다는 의미보다는 ‘얌전하다’, ‘사리분별 할 줄 안다’, ‘나서거나 나대지 않는다’ ‘활발하지 않다’ 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세진: 그 외로도 어른을 나타내는 말이 있을까요?


다울: ‘성인’이 있긴 합니다만 한국하고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세진: ‘어른’이라는 말이 한국에서 특히 강요되는 개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민교: 그러면 우리말에서 쓰이는 ‘어른스럽다’ ‘존경할 만하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은 없는 걸까요?


아오이, 텐: 이치닌마에(一人前(いちにんまえ))가 아닐까요?


다울: 이치닌마에라는 것은 ‘한 사람 몫을 한다’는 뜻인데, ‘자기 앞가림은 한다’, ‘어른 다됐다’ 이런 의미로 쓰입니다. 이렇게 보면 언어에 대한 인식이나 생각은 문화나 언어마다 다 다른 것 같네요.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보니, ‘나이’에 대해 대화할 때에 비해 ‘어른’은 다들 숫자적인 ‘나이’와 다른 어떤 기준으로 ‘어른’을 판단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경험이든 성숙함이든 자기 몫을 하는 사람이든 의지할 만한 사람이든요. ‘나이’가 제일 간단명료하고 또 사회적으로도 많은 영향, 제약을 실제 우리 삶 속 행동에도 끼치고 있기도 하죠. 다만 실제로는 ‘어른’을 그 밖의 많은 기준들로 판단하고 있군요.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는 ‘나이’로 공경 대상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로 할 수 있게 되어야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유리: 저는 이것도 유교적인 영향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일본에는 그런 표현을 찾기가 힘들었던 것, 또 영어로도 딱히 없는 것 같아서요. 있어봐야 머츄어(mature; 성숙한)처럼 어른이라는 사람이 가진 속성을 나타내는 형용사는 있어도, 그것을 ‘어른’이라는 말로 퉁 쳐서 나타내지는 않는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 이유가 유교 자체가 성인(聖人)을 위한 학문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유교의 목적은 군자 혹은 성인이 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상적으로 설정하는 어떤 하나의 특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몸으로 익힌 인간상을 바라보는 것이 유학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 집중한 것이 유학이라서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일환: 텐형 혹시 러시아에도 ‘어른’과 같은 표현이 없나요?


텐: 러시아어로 ‘어른’이라고 하면 ‘성숙한 사람’ 이라는 의미로 쓰여요. 다만 어른스럽다거나 어른답다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민교: 그럼 중국어로는 있을까요?


소향: 중국어로는 있어요. 대인(大人) 소인(小人)이라고 하는데, 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말 자체로 어떤 사람의 마음의 기량으로 구분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소인이라 하면 속이 좁고 철이 없는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텐: 한국에서는 ‘나이를 먹다’라는 표현이 있죠? 이것은 다른 언어에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나이 많이 먹었어’같이요. 마치 음식인 것처럼요.


세진: 예전에 이어령 선생님께서 그 ‘먹다’에 대해서 풀어 해설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단히 한국적인 표현이라 생각해요.


아오이: 일본에도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으로 토시오쿠우(歳(とし)を食(く)う)라는 말을 쓰긴 합니다. 의미로는 같아요. 다만 조금 예를 갖춘 표현이라고 보기는 힘든 어감을 갖고 있습니다. 경어는 아니예요.


텐: ‘나이를 먹다’에는 부정적인 뜻이 포함되나요?


예린: 중립적이라고 생각해요.


재민: 나쁘게도 쓸 수는 있죠.


예린: 보통 그럴 땐 ‘나이를 쳐먹는다’라고 쓸 거에요.


텐: 한국말이 정말 재미있는 것 같아요.


다울: 30분 남았네요. 이제 오늘 나왔던 생각이나 발언, 그리고 이 대화의 방식에 대해서든 느낀 점이나 개선안, 의견 등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가두지 않고 깨부수며 나아가는 것이 어른



동재: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어른에 대한 생각을 듣고 생각한 것이, 하나로 딱 정의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세 가지 면으로 나눠서 제 나름의 어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봤는데,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른 어른’과, ‘나 자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어른’, ‘사회적인 어른’을 각각 생

각을 정리해보다 보면 ‘어른’에 대한 생각이 잘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민교: 동재 씨 얘기가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것을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되고 싶은 어른’, ‘남들이 나한테 바라는 어른’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인의 나이가 됐을 때의 어른’ 이렇게 세 가지가 있는데, 이 세 가지 모습을 스스로 각각 생각해 보고, 그 사이에 대립되거나 충돌되는 부분이 있는지 찾아보면 좋을 것 같습

니다. 그 세가지가 충돌되지 않고 조화롭게 해 나가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 길로 가면 되는 것이고, 무엇인가 충돌이 발생한다면 그때 두 가지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내가 바라고자 하는 어른이 잘못된 것인지, 또는 내가 어른이 되기가 싫은 것인지. 그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내가 바라고자 하는 어른이 맞구나 생각할 수도,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어른이 맞구나 생각할 수도, 또는 나는 어른이랑은 안 어울리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인데,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유리: 저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자기 자신은 부족하고, 평생 그 답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정말 알 때, 진짜 어른이 된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끊임없이 열려 나가는 것이 어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세상과 내 생각이 얼마나 좁은지를 깨닫고, 계속 겸손하게 무게감을 덜어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진: 맞아요. 이런 주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공통된 결론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자기 자신 안에서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삶에서 계속 부딪히면서 그것을 수정해 나가고, 넓혀 나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

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행동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말과 생각이 많은 사람은 많지만, 말보다 생각을, 생각보다 행동을, 특히 말과 생각을 합친 것보다 큰 비중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만 이는 제 나름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 부딪히며 수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책을 읽으면서, 현장에서 일하면서 자기 자신을 깨부수고, 자신을 죽이고 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대화 방식에 대해서도 결론을 내기보다 서로 자유롭게 발언하는 대화모임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다울: 지금의 철학카페 방식으로 괜찮을까요?


세진: 새로운 시도니까요. 우리가 사실 어르신이나 교수님하고 같이 했던 포럼은 갔다오면 진만 빠질 때가 많거든요. 다들 그러시지 않나요?


예린: 이미 답을 정해놓고 얘기를 할 때가 많으니까요.


세진: ‘내가 옳다’, 자신의 얘기를 펼치시면 우리는 듣고만 있다가, 젊은 세대가 얘기하면 ‘어린 친구들이 얘기하니 신선하네’로 끝나는 경우가 있어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다울: 아까 일환 씨가 말했던 것처럼 그분들도 자신의 기준과 관점이 생겨져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세진: 그래서 아까 유리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를 깨 부수는 자세가 필요한 게 아닐까요?


다울: 그래요. 그리고 평생 끊임없이 하는 것. 열려있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굉장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재민: 저는 역사나 정치나 사회에 관심이 많은데, 왜 이렇게 불합리한가를 언제나 생각하고, 이 불합리함을 부수려면 어떻게 부수고, 어떻게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욕망 같은 것들을 실현시킬 수 있고, 너무 과하면 얼마나 그것을 제어시킬 수 있고, 하는 것들을 엄청 고민을 했었는데, 고민만 하다가 저도 사람을 만나게 되고, 어느새 나 자신이 불합리해져 가는 것을 스스로 목격했거든요. 내가 남을 억압하기 시작하고, 남의 말을 끊기 시작하고…. 


나도 한 사람이면 그 사람도 사람인데, 그러면 제가 먼저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정답은 없고, 결론도 지으면 안 되지만,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정답도 결론도 듣고 다같이 생각할 수 있으면 우리가 그것을 막지 않고, 그게 어른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어른’과 ‘나이 듦’과 ‘성숙함’이란 것은 남이 내린 결론도 받아 줄 수 있고, 그렇게 하지말라고 얘기도 할 수 있지만, 어떻게든 우리는 소통, 서로 통해야 하니까요.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니까, 내가 먼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계속 생각하고 삽니다. 다만 언제나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가 어느 분야에서 유능하고, 거기에 어느 분야에서 어떤 무능한 사람이 들어 왔을 때, 제가 유능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가르칠 수는 있죠. 그런데 그 사람의 무능함 속에도 유

능함이 있고, 원석이 있고 빛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언제나 봐주면서 노력하기에는, ‘나는 왜 또 남 생각만 하면서 살지’라고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도 많은 것 같아서. 저도 제 자신이 너무 힘든 것 같습니다. 근데 우리가 다같이 만나서 대화하고 많이 하다 보면, 그게 생각이 되고 행동으로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울: 행동뿐만 아니라 말도 중요하다는 것이군요!


재민: 그렇죠. 저는 말하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다울: 아하하, 맞아요. 저도 대화가 많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다른 분들 중에 의견있으신 분은 계신가요?

청년포럼에는 정답이 없다


희욱: 대화 방식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철학카페 대화방식은 토론을 경계하

고 지양하는 방식인 것인가요?


다울: 예, 맞습니다. 어떤 해결책이나 결론, 합의를 목표로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행복’, ‘교육’에 대해서 대화했고, 나눠드린 프린트 예시로는 ‘돈’에 대해서 다뤘는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보다는 각자가 정해진 주제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도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요? 등의 물음을 던지면서 공유해 보고 인식의 근원을 찾아가려고 하는 대화입니다.  


다만 그 답은 때로는 찾을 수도 있고, 못 찾을 수도 있는 것이에요. 정답이나 합의, 결론이 없다는 점에서 답답함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억지로 정답이나 합의를 낸다는 것의 위험성을 고려해서, 토론과 같은 방식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세진: 토론은 WHY와 WHAT을 같이 얘기하고 HOW는 각자 삶에서 해결해야 하는 데 반해, 이 대화는 각자 삶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공유하는 자리가 아닐까 합니다.


희욱: 다만, 철학카페 대화방식을 소개하신 참고문헌에 보면 “소크라테스 카페”(크리스토퍼 필립스 지음)라는 책을 참고하라고 올려주셨잖아요?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대화방식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만 난립하는 것을 경계하고, 어떤 사람이 의견을 말했을 때, 그냥 ‘그렇구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의견이

나오는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근거를 캐묻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따져 묻고 그러잖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는 대화방식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때, 그 의견의 근거는 무엇인지 따져 묻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일까요?


다울: 아닙니다. 원래는 철저하게 소크라테스처럼 따지고 물어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진행자나 참가자에 따라 대화는 변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그렇게 된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인 물음을 던지는 방식도 의미 있다고 생각이 되면, 그렇게 해도 좋겠어요. 차후 방식을 바꿔나가 보도록 합시다.


일환: 제 생각에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고 한 이유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가장 지혜롭다고 일컬어지잖아요? 희욱씨가 얘기하신 것처럼 근거를 캐물을 때, 자신이 알고 있다고 자각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데 같이 찾아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질문하고 캐묻는다면 충분히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울: 말씀럼 그런 질문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차후에는 조금 더 대화를 자세하게 파고들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세진: 소크라테스는 정말 용감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목숨을 잃었잖아요?


다울: 여기는 그렇게 해도 죽진 않습니다. 걱정 마세요(하하). 또 발언 안 하신 분들 중에 혹시 느낀 점은 없으신가요?


지원: 늦게 참가하게 되어 앞부분을 듣지 못했네요. 저는 ‘어른스럽고 싶다’, ‘어른이 되고자 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어른이 되는 출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대화를 참가하게 되어 의미 있는 시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용한: 대화하면서 유교적인 것에 대해 많이 발언이 나왔었는데요, 유교가 있고 유학이 있고 유가가 있는데, 전국시대에 사람들이 자꾸 싸움만 하고 서로 죽이고 하니까 공자가 내세운 예(禮)는 그것에 대한 솔루션이었다고 생각해요. 지난 번에 다룬 과거제나 학벌 같은 경우도 귀족 중심 사회에 대한 솔루션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해요. 다만 당시에는 솔루션이었던 것들이 오랜 세월에 거쳐 지금은 어떤 적폐가 되어서 문제지만. 제자백가 백가쟁명이라고 하잖아요? 여러 역사나 문화, 사상에서 나오는 다양한 솔루션을 보면, 그 시대의 문제를 풀기 위해 제시를 해도 결국 그게 후에 적폐가 되어 버리는 이 역사의 흐름이 정말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까 유교적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유교적인 것을 뭐라고 인식하고 계신 것인지 많이 궁금했었습니다.


다울: 그렇네요. 중간에 당연시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많았군요. 다음 대화부터는 조금 더 세세하게 물어보고 말하면서 대화해 나가야겠습니다. 유교에 대한 인식도 다른 내용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다뤄 보도록 합시다.


동재: 저는 옛날부터 약간 확실한 답이 있는 것을 찾아가려고만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는 이런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확실한 답이 없고, 생각만 많이 하게 됐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인문학을 접하고 계시는 많은 참가자 분들의 말씀을 듣다 보면, 굉장히 멋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어요. 남들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생각을 통해서 우리한테 어떤 새로운 관점을 주고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의미인 것 같아요. 저도 이제 원래 갖고 있던 고정관념, 저는 항상 확실한 답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잘못된 것이구나, 그것도 언제든지 깨질 수 있고, 이런 대화를 하면서 나 자신도 깨질 준비가 되어가고 바뀌어 나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고, 뭔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다울: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방향점, 하나뿐만이 아닌 해결법, 이런 것들을 느끼고 싶어서, 또 살아가는 데 맛있는 것 먹고 예쁜 옷 입고 좋은 집 사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 생각할 수 있는 게 즐거워서 인문학을 배우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동재 학생은 약학부 진학을 준

비하고 있겠지만, 인문학에 대한 흥미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면 감사하네요. 제3회 청년포럼은 이것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청년포럼 2> 

<청년포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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