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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17. 2018

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길에 서서

[개벽신문 제73호, 2018년 4월호] 

동학을 묻다, 물음으로 동학하다 (4)

박 길 수 |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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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개벽> 창간호는 본래 세 번째 표지로 인쇄하였으나 발행금지가 되어 호외(왼쪽)로 재인쇄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발행금지가 되어 부득이 "임시호"라는 호번호를 달고 간행하였다. 불행중 다행히, 창간호용 표지는 1주년 기념호(1921년 7월호)의 표지로 세상에 빛을 보이게 되었다. 


본래 <개벽>>은 1920년 6월 25일자로 창간호(7월호)를 발행한 이래, 1926년 8월 폐간되기까지 발매 금지, 정간, 벌금 등 총독부의 온갖 압박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발간되어 통권 72호를 기록한 잡지이다. <개벽>은 당시 전체 신문 잡지 구독자 수가 10만이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매호 평균 8천부가 판매될 정도로, 놀랄 만한 대중성을 갖고 있었다.


<개벽>지는 ‘천도교청년회’에서 설립한 <개벽사>에서 발행하였다. 천도교 청년단체 산하에서 발간하였지만, 기관지가 아니라 일반 시사문예 잡지로서 정체성은 분명했다.

<개벽>은 ‘광무신문지법’(1907, 통감부)에 의해 허가되었다. 당시 고등경찰과장 전중무웅(田中武雄)은 “원래 <개벽> 잡지는 종교잡지로 출현되었으나 ... 논조가 항상 불온하므로 주의도 여러 번 시키고 발매금지도 여러 번 시켰다.”고 했다. 이를 보면 <개벽>이 종교잡지로 출발했으나, 실제로는 학술 · 문예에 관련된 기사들을 실었고, 시사와 학술적인 내용의 글들도 많았다.


이후 1922년 9월 15일 <개벽>은 <신천지> <신생활><조선지광>과 함께 보증금 300원을 내고 시사문제를 다룰 수 있는 잡지로 허가를 받았다. <개벽> 편집진은 이에 대해 “<개벽>은 이제부터 정치 시사를 해금케 되어 다음 호부터는 금상첨화로 새로운 기사와 새로운 면목으로 독자의 앞에 신운명을 말하게 되었나이다. 우리들은 이것으로써 스스로 <개벽>의 신기원이라 하여 모든 것을 신기원답게 활동하려 하나이다.”라고 그 변모의 의미를 스스로 천명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개벽(開闢)항 참조)


72호 발간 때까지 ‘발행금지’를 34회나 당하였고, ‘삭제’ 처분은 부지기수였으며, 전호가 압수되어 다음호가 먼저 출시되는 등의 수난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72호를 끝으로 강제로 폐간되고 말았다. 그 이후 ‘신간개벽(편집국장이던 차상찬이 1934년 11월부터 속간하여 4호 발행)’과 ‘속간개벽(개벽사 편집주간이던 김기전 선생 중심으로 해방 이후에 속간하여 9호까지 발행)’이 나왔으나, 시대 환경 속에서 그 명성을 되찾거나, 지속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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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73호를 발행하는 <개벽신문>은 이 <개벽>지를 계승하여 복원/복간하고자. 2011년 4월 5일 자로 창간호(복간호)를 발행하고, 대체로 매달 1회씩 발행해왔다(현재 한 증산계열 종단 기관지로서 ‘월간 개벽’이라는 제호의 잡지가 발행되고 있어서, 정기간행물 등록상 제호를 ‘개벽신문’으로 함). <개벽신문>은 본래의『 개벽』지가 ‘개벽’이라는 제호로 담아내고자 했던 동학의 “다시 개벽”의 정신과 비전과 의지를 계승하는 것이 중심 목표이다.


『개벽』을 처음 발행하던 일제강점기에는『 개벽』지를 발행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었다. 이 시대에 <개벽신문>을 발행하는 것도 그 자체로 하나의 ‘운동’이다. 당시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민족적 역량의 구축)”이 운동의 1차 목표였다면 이 시대에 <개벽신문>을 만드는 운동의 1차 목표는 <생존>하

는 것이었다; “개벽세상을 꿈꾸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것이다.”


당시『 개벽』지는 “종합잡지의 효시”로서 당대의 신(新)이론과 식민치하에서 민감한 시사문제를 두려움 없이 다루어 나갔다. 이 시대 <개벽신문>도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사람, 정의로운 연대”라는 슬로건이 표방하는 바처럼 필연적으로 ‘이 시대의 전위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혹은 ‘서고 싶다’는 것과 ‘설 수 있다’ 또는 ‘선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당위’나 ‘바람(望)’이요, 후자는 ‘현실’이다.


<개벽신문>의 현실은 <개벽>의 ‘계승’ 내지 ‘복원’을 운운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1926년경『 개벽』지가 폐간되던 당시라고 해도 개벽사 직원/기자는 10명 안팎이었다(『개벽』지 외에『 어린이』『 여성』『 조선농민』 등 다수의 잡지들을 동시에 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벽』의 강제 폐간은 사실, <개벽사>가 처한 어려움이 외부의 환경에 노출되어 드러난 문제의 일단에 불과했다. 1926년 전후로 <개벽사>는 주축 멤버들의 잇따른 죽음(아마도 과로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과 재정의 문제 등으로 급전직하의 쇠운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0년대 말이 되었을 때 <개벽사>는 몇몇 직원들이『 개벽』지 전성기를 재현하고야 말겠다는 결기로 버텨나가던 ‘고난의 행군’을 거듭하고 있었다. 언제 문을 닫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려움을 극한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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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개벽신문>은 아마도, 적어도 재정의 차원에서는, 당시의 <개벽사>가 이제 곧 사무실마저 내주고, 문을 닫아야 했던 1820년대 말~1930년대 초반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당시는 일제의 외압이 십여 년째 계속되는 암흑의 시대였다. <개벽사>의 후원 기관이던 천도교청년회(청년당)과 천도교단은 오랜 내전(신구파 싸움)과 일제의 분열 책동에 시달려 역시 도움이 되기는커녕 외려 걸림돌이 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동학’과 ‘개벽’에 관한한, 뚜렷한 ‘하강기’에 직면해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점에서 그때에 비하여, ‘개벽’과 ‘동학’에 대한 여론은 ‘상승기’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 개벽』지와 <개벽사>의 주체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 내지 편집 역량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였고『 개벽』『, 어린이』 등 개벽사에서 발행되는 잡지들의 경쟁 대상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신문사와『 삼천리』 등을 비롯한 일부 잡지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경쟁 대상’을 손으로나 머리로는 꼽을 수조차 없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그리고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미디어운동’의 흐름 속에서 <개벽신문>과 개벽신문 주체(개벽하는 사람들)들의 역량은 그 존재감조차 없는 미미한 매체에 불과하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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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 <개벽신문> 73호를 발행하면서[73호는, 72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던 원(元)『개벽』지가 밟지 못했던 전인미답의 경지이다. 물론 신간개벽과 속간개벽이 그 뒤를 이었지만, ‘73호’에는 나름의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심정을 밝히고자 한다.


<개벽신문>은 73호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그 다음 행보를 계속하면서, 이제, 잊혀졌던 “개벽의 꿈”, 끊어졌던 “동학 세상으로의 길”을 좀더 힘 있게 해 보려고 한다. ‘생존’이라는 1차 목표를 넘어서서, ‘존재의 이유’와 ‘존재의 가치’를 “발언”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벽의 꿈!’ <개벽신문>만이 ‘개벽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천도교라는 종교적 관점, ‘동학실천시민행동’ 같은 시민운동 단체, ‘한울연대’ 같은 또 다른 단체들-원불교사상연구원이나 동학학회 같은 학술 기관도, 전국 각지의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들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한 실천과 행동, 담론과 연대들을 교합하고 있다. 그 속에서 <개벽신문>의 위치와 위상을 제대로 잡는 것이 1차적인 목표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개벽의 꿈’을 실현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사람, 정의로운 연대로 나아가는 소중한 길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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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것은 2년 앞으로 다가온『 “ 개벽』 창간 100년”을 기약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은 “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길”이다.


수운 선생이 경신년(1860) 4월 5일에 한울님과의 문답을 시작하여 거의 1년 동안 동학하는 절차와 도법을 갈고 닦는 사이에, 수운 선생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이듬해(신유년, 1861)가 되자 원처근처에서 어진선비(賢士)들이 찾아와서 입도하고 동학의 이치에 관하여 물었다. 기록상으로 볼 때, 수운 선생이 제자(어진 선비)들과 나눈 첫 번째 문답은 이러하다.


신유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나(수운)에게 와서 묻기를, 


“지금 천령이 선생님께 강림하였다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수운이) 대답하기를, 


“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를 받은 것이니라.” 


(선비들이) 묻기를, 


“그러면 무슨 도라고 이름합니까?” 


대답하기를, 


“천도이니라.” 

(轉至辛酉 四方賢士 進我而問曰 今天靈降臨先生何爲其然也 曰受其無往不復之理 曰然則何道以名之 曰天道也)


다시 겨우 출발선에 섰지만, 갈 수 있을 때까지는 갈 것이다.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할 것 없다. 두렵더라도 부끄러워할 것 없다. 마침, 최근 “개벽파(開闢派)”라는 화두(話頭)가 신생(新生)의 기운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반도에 불어오는 춘삼월 호시절의 봄기운도 예사롭지 않다. 다시『개벽』의 시대를 이렇게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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