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하는사람들 - 6회차 독서공방이 잘 진행되었습니다. 주선원(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님이 "동경대전 필법과 영부에 대한 소고"라는 발제를 해 주셨고, 이를 두고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동경대전의 필법 전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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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而成於筆法하니 其理在於一心이라
닦아서 필법을 이루니 그 이치가 한 마음에 있도다.
象吾國之木局하니 數不失於三絶이라
우리나라는 나무의 판국을 상징하니 삼절의 수를 잃지 말아라.
生於斯得於斯 故以爲先東方이라
여기서 나서 여기서 얻었는 고로 동방부터 먼저 하느니라.
愛人心之不同하여 無裏表於作制하라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니 글을 쓰는 데도 안팎이 없게 하라.
安心正氣始畫하니 萬法在於一點이라
마음을 편안히 하고 기운을 바르게 하여 획을 시작하니 모든 법이 한 점에 있느니라.
前期柔於筆毫하고 磨墨數斗可也니라
먼저 붓 끝을 부드럽게 할 것이요, 먹은 여러 말을 가는 것이 좋으니라.
擇紙厚而成字하니 法有違於大小라
종이는 두터운 것을 택해서 글자를 쓰니, 법은 크고 작음에 다름이 있도다.
先始威而主正하니 形如泰山層巖이라
먼저 위엄으로 시작하여 바르기를 주로 하니 형상이 태산의 층암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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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이 필법은 수운 선생이 동학을 창도한 직후 제자들에게 "수양(수행)으로서의 글씨 쓰기"를 가르쳤던 맥락과 연결하여 "글씨 쓰는 법"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주선원 님은 이번 발제에서 이 필법이 단순히 글씨 쓰는 법이 아니라 필법의 세 가지 뜻, 즉 (1) 붓으로 문장을 짓는 법 (2) 붓으로 글씨를 쓰는 법 (3)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 가운데, <그림 그리는 법>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시작하여, 천도교경전(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필법>이 "영부 그리기"의 천리와 도리와 교리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상당히 일리 있고, 흥미진진한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필법'이 오롯이 '영부 그리기'만을 지칭한다는 것은 아니고, '글씨 쓰기'의 맥락도 분명히 있다는 걸 전제하되, 강조점은 '영부 그리기'에 있다는 것이 주선원 님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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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시간에 주선원 님은 해박하게 천도교 근대사(1900년 전후 +/- 10년 안팎)를 이야기하면서, 천도교 신앙과 수행의 본령인 '영부 그리기'의 전통이 어떻게 소멸되거나 터부시되어 갔는가를 상세히 소개해 주었습니다(녹취).
수운 대신사가 (한때?) '영부-물약자효'의 가르침을 금지하게 된 사연, 해월신사가 의암 손병희 성사에게 도통을 전수하던 현장에서 영부 그리기법이 전수되었다는 이야기, 천도교회월보 초기(190-1915)에 각종 '영적실기'가 실렸던 문제 등을 의암(천도교)-구암(시천교/상제교)의 관계 양한묵-권병덕의 관계 등과 함께 이야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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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부 그리기'의 전면화/공론화가 여전히 조심스러운 이유도 차고 넘칩니다. 수운대신사가 "흉장불사지약"이라고 했던 말씀, '해월신사가 의암성사에게 전수'하였다는 영부의 원본이 존재하지 않으며(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전수의 의미도 재음미해야 하며), 영부에 대한 교단 내 여러 갈래의 이견들 사이의 골이 너무도 깊은 문제, 시천교의 문헌(시의경교)에 들어 있는 영부도와의 관계 문제도 그러하고, 수운 대신사나 의암성사(시대)에 영부를 금지시킨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의 천도교단에서 수련을 할 때 '영부 받기'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던 여러 가지 잡음 등을 모두 극복하더라도, 대사회저으로 영부 그리기가 현대의 대중들에게 다가갈 때의 문제 등등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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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동학)에서 수행(수양)이 중요하다는 점,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동학을 창도할 때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바로 '주문'과 '영부'라는 점, '주문수련'은 현재 여전히 핵심 수행법으로 공식적으로 수행되고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영부에 대한 입장과 그 계승 방법은 천도교(교단)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동학이 세계화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정리/정돈/정착시켜야 할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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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독서공방에 몸으로 참석하지 못한 허채봉 동덕님은 멀리 부산에서 발제문에 대한 소감을 보내오셨습니다. 독서공방을 통한 공부가 천도교 입교 이래 공부 과정에서 가장 밀도 있게 진행되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부 그리기나 나아가 시천주(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음) 교리가 자칫 대중들로부터 샤먼적인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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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부 그리기' 전통의 부활과 부흥은 간과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과제라는 전제하여 이를 위하여 <개벽하는사람들>이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 이에 대한 충분한 실험적(수행과 공부) 심화 확산을 시도해 보자며 몇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앞으로 지속적인 논의를 거듭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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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님이 애초에 수운 대신사에게 영부를 내려 주시면서 영부의 효용은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건지는 것" 혹은 "이 사회의 질병 상태를 개선/개혁/개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경우든 영부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고, 이 사회의 질병을 제거하는 효용성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병을 인지하거나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치유란 오히려 독이 될 뿐이며, 사회적인 효용성에 값하지 못한다면, 그 치유란 한낱 기복 행위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현대의 시간과 공간은 순차적으로 흘러가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고 병렬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부 그리기는 스스로에 대한 참회와 일상에서의 수양적 삶의 태도와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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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이날 독서공방에서는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논의되었습니다. 특히 9월 2일 있을 '개벽살롱'의 장소 사용 문제나, 동학천도교사전연구회 주관의 '천도교경전결집' 사업에 참여하는 문제 등 의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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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하는사람들-독서공방은 다음 달에도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