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0. 중앙대교당 설교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3개월 가까이 인터넷 방송으로 시일식을 봉행하다가 오늘 이렇게 여러 동덕님들을 뵙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시일식을 볼 때는 겨울 기운이 한참 남아 있었는데, 어느덧 봄이 거의 지나고 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플 때에 새삼스럽게 건강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늘 함께하던 사람이 곁에 없을 때 그 사람의 고마움을 잘 알게 되는 것처럼, 동덕님들을 대교당에서 뵙지 못하는 동안, 우리가 한자리에 모여서 시일식을 함께 봉행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가 극심한 피해를 겪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나마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모범적인 방역의 성과를 거두어서, 세계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또 본받고자 한다는 소식은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주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춰서, 설교 제목을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로 정해 보았습니다. 이 제목에 대해서는 좀 성급하다거나 또 과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지난주에도 수십 명의 인명이 살상되는 대형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불가피한 사고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후진국형 재난이 분명합니다. 또 우리나라는 여전히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고, 또 노인 빈곤율도 세계 최상입니다. 한마디로 아직도 한국사회는 개선해야 할 점이 많은 사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바로 어제 또다시 집담감염이 발생해서 코로나19라는 이 질병이 완전히 종식되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코로나19 극복의 과제, 2차 확산에 대한 대응을 철저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원인을 파악해 보고,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정확하게 진단하여 그 긍정적인 의미는 살려 나가야 합니다. 게다가 제가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이번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서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천도교와도 깊이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인들이 한국에 주목한 까닭은 당연히 한국이 세계적인 감염병에 가장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또 잘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이유들보다, 대한민국이 이처럼 성공적으로 방역을 할 수 있도록 한 근본적인 동력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국내 전문가는 물론이고 세계 언론이나 각국에서 대한민국의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로 손꼽은 것이 바로 ‘투명성’입니다. 이번 사태 초기부터 우리 정부와 방역 당국은 코로나19 발병 상황을 하루 두 차례씩 공식적으로 온 국민에게 알리고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부정확하고 불필요한 소문을 조기에 차단하고,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처는 정부와 당국에 신뢰를 낳았습니다. 첫 단추를 잘 꿰자 그다음 단계의 조처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척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정부와 방역 당국이 이번 사태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투명성’을 제1의 원칙으로 삼았던 배경이 있습니다. 직접적인 배경은 지난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관련 정보를 은폐한 결과로 감염이 확산되고 피해가 커졌던 경험을 잊지 않고 그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한 해 전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의 대처 방식에서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우리 국민 모두가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들이 ‘투명한 정부’로 가는 출발점이었지만, 정부가 투명성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 더 중요한 배경은 바로 우리 국민들이 정부에 대해서 끊임없이 투명하고 도덕적인 대응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국민들이 국가 정치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항상 참여하며 정의의 원칙이 지켜지도록 요구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국민들의 높은 도덕적 기준’에 대해서는 최근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세계 주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명확하게 밝힌 내용입니다. 국민이 정부에 대해서 언제나 높은 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한다는 것입니다.
국민이 국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이번에 우리나라와 비교의 대상이 된 일본, 중국과 비교해 보면, 일본은 무기력한 국민성이 아베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을 낳고 있고,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강력한 통제와 봉쇄를 통해서 사태를 진정시킨 반면에 우리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 전면적인 통제 없는 정부의 주도 속에서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열린 민주주의 그리고 참여하는 시민의식 덕분에 전 세계 사람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이 한편으로는 정부에 높은 수준의 대응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정부의 정책에 순응하는 이런 모습은 서양 사람들이 보기에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은 사례로서, 연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천도교인들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수운 대신사께서 천명하신 보국안민의 전통이 우리 천도교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심성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보국안민이 천도교인뿐 아니라 우리 국민들에게 내면화될 수 있었던 까닭은 동학 천도교 창도와 동학혁명 이래의 우리 한국 근현대사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관민 협치 전통은 동학혁명 당시 집강소 통치 체제라는 것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동학을 창도하신 수운 대신사와 해월신사는 조정에 쫓기면서 포덕 활동을 하셨고, 동학혁명은 비록 그 당시에는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학의 사상적 맥락과 동학혁명의 강렬한 경험과 정신은 천도교로 계승되어 3.1운동으로 꽃피었고, 해방 이후의 민주화 운동과, 가장 최근에는 촛불혁명이라고 하는 사건으로 계승되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 동학과 개벽을 새롭게 공부하는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하고 또 그 가치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역사 인식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 갈 것이 있습니다. 그동안 동학혁명은 반봉건 반외세라고 하여 봉건체제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요, 3.1운동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반대하는 독립운동이요, 민주화운동은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운동이요, 촛불혁명은 부조리한 정치지도자를 반대하는 운동이라는, 다시 말해서 ‘반대하는 운동’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에서 세계가 한국에 주목하는 이유를 생각하면서 돌이켜본 바로는 그 모든 운동은 바로 ‘개벽운동’ ‘다시개벽’ 운동의 일환으로서,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고 평화지향적인 운동으로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코로나19를 계기로 해서, 동학-천도교를 공부하는 사람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우리 근현대사를 새로운 태도로 인식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한 태도의 변화는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지난 160년 동안 꾸준히 우리 역사와 우리의 정신 속에 내면화되어 왔으며, 이번 코로나19에 대한 세계인의 평가를 통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과가 바로 한국인이 스스로 우리나라를 선진국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65% 이상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해 가고 있는 현재 상황, 그리고 거기에 대하여 전 세계 주요 선진국들이 부러워하고 서로 배우려고 하는 모습들이, 우리 스스로를 선진국이라고 평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도교 입장에서 이 선진국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진국이 기존의 선진국으로 불리던 서구 사회나 유럽 사회를 뒤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대한민국이 “동학 천도교” 보유국으로서 코로나19 이후 시대의 새로운 사상적 표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표준을 제시하는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선진국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역사적인 문제이며, 천도교로서는 지난 160년 동안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천도교인들이 오늘날 곤경에 처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동학혁명 이래 천도교의 위대한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동학혁명은 조선조정에 의해 동학란으로 불렸고, 3.1운동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 당국에 의해서 왜곡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외래종교가 장악한 정치권이나 서양사상 중심의 학문 풍토 속에서 왜곡되고 축소되어 왔기 때문에, 동학-천도교의 진리와 사상 역시 축소-왜곡되어 왔고, 결국 실질적인 교단 세력의 축소로 이어진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한국인은 알게 모르게 선진국의 기준에 우리 스스로를 맞추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는 근대화를 자주적으로 하지 못하고 식민 지배를 받았고, 또 분단이 되어서 온전한 통일국가를 수립하지 못했다는 경험이 깊은 상처로 남아서 마음 한구석에 우울증과도 같은 패배주의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만든 표준이 세계화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더욱 존중하고 중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자기만족이나 자기위안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확인해 줍니다. 지금 당장 모든 방면에서 세계인들의 모범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일을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의 성공 사례는 또 다른 성공으로 금방 이어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는 것은 다음 단계와 이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국에 나가서 휘호를 쓸 때 ‘사인여천’이라는 말을 가장 즐겨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사인여천으로 대표되는 동학사상이 그 자체로 위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학사상이야말로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사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유가철학도, 불교사상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시대, 세계인들이 바야흐로 한국에 주목하는 이 국면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동학-천도교가 160년 동안 염원해 왔던 보국안민의 전통과 정신이 그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편으로는 기쁘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19에 즈음하여 우리 대통령이나 방역 당국의 책임자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은 우리 인류가 다시는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야흐로 문명 전환의 시기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며, 또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명의 전환기에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은 그동안 “남의 것을 배우고 따라가기에 급급하던” 국가, 국민에서 “스스로 창조한 것을 자신 있게 드러내고, 또 새롭게 재창조함으로써 전 세계, 온 온류를 선도하는 국가와 국민으로 탈바꿈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이것은 일찍이 수운대신사께서 다시개벽을 선언하신 것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정확하게 바로 선천과 후천이 갈아드는 그 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앞에 금방 지상천국이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19를 완전히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정기적으로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병이 수시로 찾아올 것이며, 그보다 기상이변, 기후위기, 생물대멸종이라고 하는, 이 감염병 팬데믹보다 훨씬 더 큰 위기도 코앞에 다가와서 우리를 직접 위협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가 “한국에 주목하는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실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앞에 닥쳐온 인류 생명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과 기술을 이번 사례를 통해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길이 아직은 동학-천도교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국에 주목하는 시선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그 근원이 되는 동학-천도교의 사상과 역사에까지 관심을 갖고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지금 우리 천도교, 천도교인의 과제가 분명해집니다. 지금 우리 교단 현실을 돌아보면,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와 같은 주제를 논의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장애, 큰 숙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당연하게도,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역량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단지 시운이 돌아와서 모든 일이 잘 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결코 신뢰를 얻을 수 없고, 신뢰를 얻지 못하면 어떤 일도 우리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앞에서 말했던 신뢰의 문제, 믿음의 문제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신뢰를 얻는 천리길을 어디에서 어떻게 출발할 것인가가 마지막 질문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이후, 코로나19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가 관건이 됩니다.
다시 말해 천도교인이나 천도교단 차원에서 오늘, 코로나 19 이후를 준비하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전 세계에 어떤 사상적 지혜를 메시지를 발신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그것은 바로 무위이화의 사상과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의 무위이화의 뜻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조금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코로나 19 때문에 전 세계 30억 명의 인구가 자가 격리를 하고 도시 봉쇄, 이동 통제를 하게 되자, 야생동물돌이 돌아오고, 대기가 사상 유례없이 깨끗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요즘의 서울 하늘을 보면 이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위’, 즉 하지 않음의 위력입니다.
무위이화는 그동안 “함이 없이 이루어진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한편에 정성을 들이는 행위가 있지만, 여전히 그 결과로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진다”는 쪽에 무게중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시대에 이 말을 생각해 보면, 무위이화의 해석을 “하지 말아야, 이루어진다.”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물질문명과 각자위심의 문명의 가동을 멈추어야만” 기화가 되고 심화가 되고 마침내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시대 무위이화는 문자 그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에 무게중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무위이화의 사상에 기반한 무위이화의 문명이야말로 코로나 이후 인류가 지향해야 할 핵심 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현대 문명은 해야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더 많은 문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나치게 많이, 너무 빨리 그리고 욕심껏 하고 또 하는 바람에 오늘날 지구 전체가 탈이 난 셈입니다. 그 꼭대기에 코로나19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병들어 가는 지구 그리고 감염병에 신음하는 전 세계 인류가 살아갈 뉴노멀의 세계는 무위이화의 원리가 종지가 되는 세계가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코로나 시대 무위이화의 의미를 중앙총부나 교구 같은 단체에 적용하면, 인위적으로 일을 벌이거나 개인의 사심이 개입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을 제거하면 교헌과 규정을 포함한 <제도>가 남습니다. 이번 코로나19사태에서도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제도나 질병관리본부 같은 제도나 기관이 제 기능을 발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무위이화를 우리들 교인 개개인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해월신사의 말씀을 생각하면 됩니다. 해월신사는 대인접물 편에서 “일이 있으면 이치에 따라 일에 응하고, 일이 없으면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리에 앉아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일이 없으면’이라는 말을 좀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쓸데없는 일을 만들지 말고, 웬만한 일들은 가급적 하지 말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 즉, ‘억지로 일을 만들어 하지 않음’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에 무위이화, 정좌존심이야 말로 새로운 시대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 그것은 한국이 위기에 처한 세계와 인류를 구할 위대한 해법, 바로 동학-천도교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무위이화”의 “신문명”의 원리를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가 한국을 주목할 때” “한국이 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지혜”로서, 이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 믿음을 회복하는 길이자, 용시용활하는 동학-천도교 사상의 진수가 된다는 생각을 말씀 드리면서 설교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