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3 (천도교중앙대교당) - 설교원고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 시일식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겨울에 시작되었던 코로나19 팬데믹이 봄을 지나고 여름을 지나 이제 가을로 접어드는 이 시점까지 조금도 수그러들 줄 모르고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모쪼록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춘삼월 호시절 좋은 때를 다시 만나서, 이 대교당에서 동덕님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인사 나누고, 천덕송도 크게 합창할 수 있는 날이 하루속히 돌아오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지구의 꿈 - 천지부모”입니다. ‘천지부모’라는 말씀 앞에, “지구의 꿈”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어서,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지구의 꿈 - 천지부모’라는, 다소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제목을 굳이 붙인 까닭은 지금 우리 천도교인들에게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들을 다르게, 새롭게,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지구의 꿈이라는 말 뒤에 ‘천지부모’라는 말이 붙어 있는 데서 짐작하시겠지만,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은 내용적으로 보면 결국 “천지부모” 법설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는 천지부모 편이나 천지부모 한울님에 관한 말씀보다는 요즘 세상 사람들이 주로 쓰는 말로 풀어 나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직면한 사태에 대응하는 힘을 기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제목을 새롭게 하여, 생각을 새롭게 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우리는 지금 너무도 새로운 것, 새로워지고 있는 것 때문에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지구 전체가 너무도 빨리 새로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가 생겨난 이래로 지구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새로워져 왔겠지만, 최근에는 우리 인간이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느끼고, 냄새 맡을 수 있게 속도가 빨라지고 규모가 커졌으며, 그것도 비정상적으로 빨라지고 커졌다는 것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구가 새로워진다”라는 것이, 새로운 것이 우리 인간에게 반드시 유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겪으셨지만, 올해 여러 가지 기상이변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크고 작은 기상이변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작년에도 사상 최대의 기상이변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고, 재작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과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기상이변이, 지금 한창 진행중인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팬데믹 상황과 따로 떨어진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 그 뿌리가 같은 데서 비롯된 현상이라는 문제라는 점입니다. 자연적 재해는 앞으로 더욱 규모가 커지고 범위가 넓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또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괴질도 앞으로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자연 현상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가 겪고 있는 사회적 격리 같은 회적 현상도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서부터 대학생, 대학원생들까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친구들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한 학기가 지나가고, 회사의 직원들도 각자의 집에서 일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자체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예전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사회가 새로워지고 있으며, 당연하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또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지구적 차원, 자연 생태계 차원에서나 사회경제문화적인 차원에서나 그 전에 절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색하게도, 그 새로운 것이 우리 인간을 기쁘게 하고, 만족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류 사회는 “새로워지는 것”은 늘 좋은 것이라는 인식하도록 길들여져 왔습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발전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풍요로운 현대 문명이라는 것은 바로 새로워지는 것, 그 자체였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면 언제나 새로운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 어마어마하게 많은 새로운 것들 중에서도 더 새롭고 더 좋고, 더 내 몸에 맞는 것, 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구입할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새 차를 사고, 새 집에 들어가서 살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 발전, 성공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전에 없던 기상현상, 다시 말해 새로워지는 지구 환경, 그리고 새로워지는 사회환경, 코로나19라고 하는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병을 경험하면서 이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새로운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늘어만 가던 국민의 숫자가 줄어드는 새로운 현상, 15세 이하의 어린이와 청년학생들보다 60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더 많은 새로운 사회구조, 대학교의 입학정원보다 입학할 학생 숫자가 더 적은 새로운 사회 구조 등등 지금 나타나는 새로운 것들은 모두가 우울함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사실은 ‘새로운 핸드폰’이나 ‘새로운 아파트’처럼 새롭기 때문에 좋아보이는 것도, 그 새로움을 만들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결코 근본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 어지럽게 하는 것은 그 새로워짐의 속도입니다. 너무도 빠른 변화의 속도에 인류 사회가 휘청거리고, 브레이크 없는 차가 결국 사고를 일으키는 것처럼, 이 지구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인 것입니다. 사실, 기상이변이나 코로나19 팬데믹이 나타나기 전에도, 우리 사회가 너무도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것을 우려하고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점점 빠르게 변해가는 지구촌 문명이 어느 순간 초대형 사고를 일으킬 것이라는 경고도 그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 눈앞의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화 속에서나 보던 ‘지구적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지구의 꿈’이라는 말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구의 꿈’이라는 말은 토마스 베리라고 하는 한 생태-신학자가 지금부터 30년 전에 쓴 책 제목으로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토마스 베리는 이 책에서, 우리 인간이 ‘지구’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 체계의 일부로서 살아가며, 또한 그 지구와 교감하면서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담은 책의 제목을 ‘지구의 꿈’이라는 붙였습니다. ‘지구의 꿈’이라는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지구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의 아주 독특한 결정체로서, 지구 전체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꽃나무에 꽃이 열리고 열매가 맺히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나무 전체는 지구요, 인간은 그 나무에 맺히는 꽃이자 열매로서 나무 전체가 지향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 열매는 이 세상을 살리는 양식이 되고, 그 열매 속의 씨앗은 미래에 다시 나무로 자라나게 될 나무의 부모와 같은 존재라는 의미에서, 이 지구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생명 체계라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때 지구라는 말 대신에 ‘우주’라는 말을 써서, ‘우주의 꿈’이라고 해도 그 뜻은 같습니다. ‘나무의 꿈’이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겠지요.
토머스 베리만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종류의 생각, 다시 말해 지구와 인간이 서로 이어진 존재라는 것, 그러므로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상호 동등한 존재, 서로 의존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그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많은 사상가나 철학자, 종교가들이 설파하여 왔고, 국가 단위에서도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나라가 생겨날 정도입니다. 바로 2017년에 뉴질랜드에 황거누이라는 강은 뉴질랜드 법상 인간과 똑 같은 권리를 갖는 것으로 법제화되었습니다. 또 아예 헌법 조문에 동물은 물론이고 나무나 풀, 벌레 같은 생명체는 물론이고 돌멩이 같은 무생물까지도 원칙적으로 이 지구상에서 인간과 똑 같은 가치를 갖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는 나라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천도교인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사실 매우 익숙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천도교의 진리에 따르면 그러한 조치들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부모 사상이나 경천, 경인, 경물의 삼경사상, 대인접물의 윤리 등이 모두 그러한 태도들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지구의 꿈”에 관하여 가장 먼저 말씀하신 분은 수운 대신사님이고, 또 그것을 천지부모설과 삼경설, 물오동포 인오동포 법설로 다양하고도 구체적으로 표현하신 분이 해월 신사님이고, 또 그것을 인여물개벽설이라고 하는 개벽사상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주신 분이 의암 성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의 꿈을 천도교식으로 말하자면 한울님의 뜻이며 천지부모의 마음이며, 다시개벽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는 천도교에서는 그러한 가치들을 종교적 진리, 윤리적 덕목으로서 얘기해 왔던 데 비해, 지구의 꿈 차원에서 지금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법체계 안에서, 사회적인 규범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지금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고, 긴박하고, 급박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겪으면서, 전 세계의 철학자들이나 영성가들은 물론이고 과학자들까지도 이번 사태는 우리 인간이 지구 위에서 지구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물질적인 성장 위주로 경제 발전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결과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난 몇 백 년 동안 우리 인간이 살아온 삶이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반성적 고찰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성을 토대로 우리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양식을 새로운 것으로 전환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주 강력한 경고의 형태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련에 임하기에 앞서,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는 은혜를 비로소 깨닫고, 일체의 선에 따르기를 원하여 수련에 임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저는 조금전에 “인간의 삶의 양식을 새로운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앞에서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이 혼란과 위기와 고통은 인간이 ‘새로운 것’만을 추구해 온 결과라고 하였는데, 지금 다시 새로운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고통을 낳는 새로움, 전 지구적인 위기를 불러온 새로움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추구하는 새로운 것,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이라는 의미의 새로움입니다. 그리고 지난 몇 백 년 동안 인류가 내달려온 삶의 양식, 아니 사실은 선천 오만 년 동안 인류가 추구해 온 삶의 양식을 전면적으로 반성하고, 앞으로 새롭게 살아가겠다고 할 때의 새로움은 전연 다른 것입니다.
그 새로움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던 우리의 본래 모습, 즉 우리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우리는 이 지구 안에서 태어나서 지구 위에서 살아가 지구 속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 혹은 참회하는 것에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새로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암성사법설 인여물개벽설에서 “하늘이 새로워지고 땅이 새로워지니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의 가장 직접적인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인여물개벽의 시대, 다시개벽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구의 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시개벽의 시대는 다름 아닌 지구화시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유행하던 말이 있습니다.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여기서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우리가 지구 안에서 태어나, 지구 위에서 살고, 지구 속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천도교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천지부모 안에서 태어나 천지부모의 은덕으로 성장하고, 환원하여 천지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새로워지라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천도교인들은 시일식을 온라인으로 모실 뿐만 아니라, 49일 기도 또한 온라인을 통해, 카톡이라는 매체를 이용해서 온라인으로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만이 아니라,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진행하는 49일 기도가 지금까지의 기도와 다르게, 새로워져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지구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염념불망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시대의 지구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천지부모와 같은 존재라는 점을 깨달으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꿈이라는 말에는 비전,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라고 부르는 공동체는 다름 아니라 우리 삶의 꿈과 미래에 대한 비전, 그리고 새 세상의 희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천도교인들은 이 공통의 꿈, 공동의 비전, 공공의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구의 꿈이라는 말이 우리들의 일상으로 파고드는 이 새로운 시대에, 천도교인들도 한울님과 스승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돌이켜 보면서 공통의 꿈, 공동의 비전, 공공의 희망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자리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지구에 기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지구의 꿈, 지구의 꽃, 지구의 열매, 다음 지구의 씨앗이라는 점, 그것이 이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우리 인간의 새로운 이름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