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ul 30. 2019

천사문답과 사제문답

-자문자답, 수문수답과 더불어

- 이 원고는 2019년 7월 28일(일) 천도교중앙대교당의 설교 원고를 수정한 것임.


1.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무더위와 장마가 번갈아가며 심신을 괴롭히는 이 삼복더위 속에도 시일식에 참석하신 원로 숙덕 어르신과 동덕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하계수련 기간입니다. 우리가 천도교에 입교하고, 천도교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와 내력이 있겠지만, 결국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직장에서 일하는 것, 나아가 우리 삶 자체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생의 근본적인 물음의 답, 다시 말하면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하계수련 기간에, 여러분 모두 한울님 모심을 다시금 깨닫고, 나의 삶을 의미를 찾아 그것을 실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설교 주제와 관련해서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 천도교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또는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한 덕분에 이 세상에 나왔고, 또 그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개벽의 답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천도교를 신앙하는 방법, 동학을 공부하는 새로운 출발점은 바로 그 ‘질문과 대답’ ‘물음과 응답’의 원리를 잘 터득하고 활용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 것이 오늘은 벌써 낡은 것이 되어 버리고, 지난해까지는 정답이던 것이 올해에는 벌써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2, 30대 젊은이에게 물어봐도, 이 세상의 변화가 너무도 급속도로 진행된다고 느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때에 특히 하나의 정답이나 결론에 고착되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주어지는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때, 닥쳐오는 상황과 환경에 선입견을 들이대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질문하는 태도, 탐구하는 정신, 물어보는 마음이 중요합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천도교를 신앙하고 동학을 공부하는 좋은 화두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이고 실학[實用]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처럼 지금 여기에서 나와 천도교단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개인적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 그리고 천도교 차원 또는 국가나 시민사회 차원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의 답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그것은 결국 이 세상 사람들이 동학을 공부하고 천도교를 신앙하는 길로 돌아와, 함께 후천개벽의 큰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생각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교 제목은 ‘천사문답과 사제문답’입니다. 천사문답은 여러분들이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한울 천(天), 스승 사(師)를 써서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고 합니다. 즉 경신 사월 초오일부터 시작해서에 한울님과 수운 대신사께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은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천사문답 외에 ‘사제문답(師弟問答)’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제문답이란 스승 사(師), 제자 제(弟), 즉 스승님과 제자 사이의 문답이라는 뜻입니다. 이 천사문답과 사제문답을 들여다보면 동학 천도교 창도의 과정과 의미, 그리고 천도교를 신앙하고 동학을 공부하는 의미, 다시 말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2.


천사문답의 의의를 다르게 표현해 보면, 천도교는 바로 질문과 대답 속에서 창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동학 천도교 공부와 신앙에서 질문의 첫 번째 의의는, 그것이 바로 천도교 창도의 원동력이요 원점이라는 사실입니다. 수운 대신사께서는 스스로에게 닥친 질문, 즉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해답과, 이 세상이 직면한 질문, 즉 보국안민과 제인질병을 할 도리를 찾아서 주유천하하였습니다. 그러다 기미년(1869) 10월에 경주 용담정으로 다시 돌아와 불출산외를 맹세하고 독공 수련을 하던 중에 경신사월 초오일에 갑자기 귀에 들려오는 한 신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유하선어 홀입이중(有何仙語 忽入耳中).


이때 수운 대신사님이 경기탐문(驚起探問), 즉 “크게 놀라서 벌떡 일어나면서 물어보았”는데(포덕문), 그 내용은 하위약연(何爲若然), 즉 “어찌하여 이렇습니까?”(논학문) 하고 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울님께서는 대신사님께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고 하는데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하고 반문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던 중 (경신년) 사월에 뜻하지 않게,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큰병 든 것 같으면서도 증상을 잡을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웠다. 이때 어떤 신선의 말씀이 문득 귀에 들리므로

(1-1) 놀라서 벌떡 일어나서 캐어물었더니

(1-2)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2-1)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2-2)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3-1) 다시 묻기를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3-2)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길이 살아 덕을 천하에 펴리라.” (이상, 포덕문)


(4-1) 이렇듯 (서학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게) 어긋나는 말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으므로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영이 접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말씀이 내려 가르치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마음을 집중하고 기운을 바르게 하며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4-2)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는 이제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길이 살아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이상, 논학문)


이것이 바로 한울님과 스승님 사이의 문답, 즉 천사문답의 시작입니다. 이 천사문답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는 한울님이 수운 대신사에게 주문과 영부를 주어서,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질병에서 건지라고 하였다는 것,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심법을 주었다는 것, 귀신자도오야(鬼神者吾也)라고 말씀하였다는 결론만 주로 주목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문과 영부 또는 그 밖의 이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한울님과 대신사님 사이에서 일어난 최초의 사건이 바로 ‘묻고 답하기’였다는 사실입니다.


특히나, 한울님은 스스로 대신사를 만나서 묻고 답하였다는 최초의 사건의 의미를 “개벽 후 내내 노이무공 하다가서 오만 년 만에 처음으로 너를 만나 성공하니”(용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울님은 스스로, 대신사를 만난 것은 ‘다시개벽’ 즉 ‘후천개벽’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고 정의하였으며, 그렇다면, 다시개벽은 바로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울님을 만났을 때, 대신사님은 “보았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었는데 들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볼 때, 만남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오직 한울님과 대신사님 사이의 묻고 답함, 그것이 핵심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최초의 천사문답 이후로도 대신사님과 한울님의 질문과 대답은 계속됩니다. 그것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그 질문과 대답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마는, 한울님과 대신사의 질문과 대답으로 동학 천도교 무극대도가 창도되고 정립되었다는 사실은 꼭 기억해야 할 거룩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 선천개벽은 천지개벽이라고 하여 하늘과 땅이 나뉘는 것을 말합니다. 과학적으로는 빅뱅이라고 하여, 태초에 대폭발이 일어나서 이 우주만물이 만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에 비하여 보면, 후천개벽은 다시개벽이요, 인심개벽이며, 특히 의암성사께서는 후천개벽은 곧 인문개벽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과학혁명의 시대에 더더욱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인데, 인문학의 핵심은 바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천개벽으로서의 인문개벽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확실한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질문과 대답은 스승님과 제자 사이에도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포덕문에서는 천사문답의 과정만 보이지만, 논학문에는 천사문답에 이어서 수운 대신사님과 제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문답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사님과 제자들 사이의 문답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저는 대신사님이 천사문답을 마친 이후에 ‘자문자답’하는 과정이 하나 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경신사월 초오일에서 신유년 유월에 이르는 사이 1년 2개월 동안 대신사님은 천사문답 과정에서 주문과 영부를 받고 “그 이치를 닦고 헤아려 본즉, 또한 자연한 이치가 없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대신사님이 자문자답하는 과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사문답과 자문자답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입니다. 이심치심의 이치가 여기에서 나오며, 이심치심으로부터 천사문답-자문자답의 유기적 통일이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천사문답을 재현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길도 여기에 있습니다.


4.


이렇게 천사문답과 자문자답의 과정을 거치면서 1년여가 흐르고, 신유년 6월에 이르자 원처근처의 어진 선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대신사께 수많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저는 ‘사제문답’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이때 제자들이 대신사님께 한 최초의 질문은, “지금 한울님의 영이 선생께 강림하였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였습니다. 대신사님은 “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도를 받았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또 “그러면 무슨 도라고 이름합니까?”라고 물었고, 대신사님은 “천도라고 말한다”고 대답하십니다. 논학문에서 사제문답은 이 이후로도 계속됩니다. 특히 이 사제문답의 과정에서 주문 21자(실제로는 20자, ‘天’자는 설명하지 않음)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는 것은 사제문답의 백미라고 할 것입니다.


이 사제문답도 동경대전, 용담유사 전편에 걸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도교단 최초의 역사 기록인 도원기서에 보면, 경전에서보다 더 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수운 대신사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질문과 대답이 오고갔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질문과 대답의 과정이 얼마나 아름답고 만족스러웠던지 논학문 마지막 대목에서 대신사님은 “아! 참으로 감탄할 일이로다. 그대들의 도를 물음이 어찌 이같이 밝고 밝은가!” 하고 기뻐하시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수덕문에는 이 질문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자세히 밝혀 주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믿는 것과 정성에 대한 풀이 부분입니다. 우리 도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 정성이 된다”고 하시고, 사람의 말은 “왈가왈부(曰可曰否)를 취가퇴부(取可退否)하여 재사심정(再思心定)”하라 하신 다음, “한번 작정한 뒤에는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니 이와 같이 닦아야 마침내 그 정성을 이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과 정성의 방법과 태도야말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모습이며, 그것이 천도교를 신앙하고 동학을 공부하는 기본자세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명덕명도 성경외심이라는 여덟 글자로서 한울과 사람이 형상을 이룬 근본과, 형상을 이룬 뒤에 다시 갓난아이의 마음을 회복하는 과정 절차를 밝혀 주신 전팔절 후팔절도 ‘밝음은 어디에 있는가’하는 질문과 ‘멀리 구하지 말고 나를 닦으라’라고 하는 해답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도원기서를 보면, 앞부분은 수운 대신사님이 제자들에게 질문으로 낸 질문에 해당하고, 제자들은 그 질문에 답 써서 제출하도록 한 기록이 보입니다. 말하자면 팔절은 서면을 통해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은 사례인 것입니다. 이런 서면 질문-대답은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5.


또한 해월신사법설 편이나 의암성사법설 편에서도 스승님이 묻고 제자들이 답하는 형식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해월신사께서 ‘후천개벽의 운수’를 설법하신 <개벽운수>편 끝부분을 보면 제자들이 “어느 때에 도가 세상에 드러나겠습니까?”하고 묻자 해월 신사께서 “산이 다 검게 변하고 길에 다 비단을 펼 때요, 만국과 교역할 때이니라.”라고 대답하시고,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어느 때에 이같이 되겠습니까?”하고 묻고 해월신사께서 “때는 그 때가 있으니 마음을 급히 하지 말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오리니, 만국 병마가 우리나라 땅에 왔다가 후퇴하는 때이니라.”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개벽운수의 전편 나아가서 해월신사법설이나 의암성사법설의 많은 기록들은 사실 이렇게 묻고 답하는 과정을 훗날에 서술형으로 고쳐 기록한 것이 많다고 봅니다.


제자들만 물은 것이 아닙니다. 해월신사도 제자들에게 묻고 답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향아설위의 제사법을 정하실 때도“제사 지낼 때에 벽을 향하여 위를 베푸는 것이 옳으냐 나를 향하여 위를 베푸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묻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사제문답이 이루어지며, 식고의 이치나, 포태의 이치를 말씀하시는 것도 사제문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


스승님과 제자들 사이에서만 문답이 오간 것이 아니라, 제자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문답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문수답(授問受答)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본래 수운 대신사님이 동학 창도 전에 무극대도를 찾아서 방방곡곡을 주유천하 할 때, 어진 사람을 만나서 수문수답하여 당당정리를 밝혀냈다고 회고하실 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수문수답은 수운 대신사가 ‘구도자’로서, 혹은 공부하는 이로서 ‘어진 사람’과 일대일로 하는 대화라는 점에서, 제자들끼리의 대화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적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질문과 대답이라는 것이 우리가 천도교를 신앙하고 동학을 공부하는 데서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


그렇다면, 세 번째로,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짚어 보겠습니다.


보통 질문은 무엇인가 알지 못하는 바를 물어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학창시절 떠올려 보면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즉, 수업시간에 수업을 마친 선생님이 수업이 끝나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질문 있는 사람?”

그러면 대개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면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또는 수업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서 질문을 안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돌대가리들! 뭘 알아야지 질문을 하지! 이상 수업 끝!”

어찌 보면 이상한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안다면 질문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선생님은 꼭 “뭘 알아야 질문을 하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질문의 중대한 의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사실은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앎이 축적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알지 못하면 질문조차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질문과 대답 이전에 이미 다른 질문과 대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얻는 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하기는 단지 천도교 신앙, 동학 공부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오늘 천사문답, 사제문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에 임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시기에 한 개인에게나 한 종단, 나아가 세상사람 모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질문하는 능력, 질문하는 지혜, 질문하는 용기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대전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시간관계상 길게 설명 드리지는 않겠지만, 예를 들어서 최근에 일본 정부가 한국에 부품소재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사실,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대전환의 국면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것을 막아 보려고 하는 일본 아베정부의 고육지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일은 우리가 국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나아가 통일 한국의 국력이 일본에 위협이 되는 정도로 성장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한일 관계의 대전환, 재정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최근의 한일 긴장 관계는 일찍이 수운 대신사께서 직면하셨던 서세동점의 시기에 형성된 상황의 재연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일본은 일본일 뿐만이 아니라, 서세(제국주의, 침략주의, 강권주의)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한일 관계의 대전환, 재정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혹은 그 시간을 관통해 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한번 ‘서세동점과 동학창도’ ‘선천문명에 대응하는 후천문명’ ‘물질문명의 극성에 따른 질병을 치유하는 정신문명/도덕문명의 개벽적 전개’라는 ‘다시 개벽’의 국면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측면에서 오늘날 기상이변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구온난화 문제는 단순히 이상기후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상의 생물 대멸종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사람과 자연만물의 관계, 우리 인류의 삶의 방식에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이라든지 로봇의 발달로 인하여 일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문제,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 생명의 개념이나 범위에 대한 근본적인 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8.


우리 천도교인들은 이러한 세계의 대 전환의 기운이 바로 선천과 후천이 갈아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흙먼지와도 같은 현상, 다시 말해서 후천개벽, 다시개벽의 과정이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천도교는 교세가 예전에 비하여 미약하고, 사회적인 활동이 전만 같지 못하며, 수도원의 수련 열기, 하다못해 대교당의 시일식에 참석하는 교인들의 숫자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희망을 가질 만한 대목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그만 우리 천도교, 후천개벽의 무극대도의 근본 이치와 기운을 잠시나마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재사심정하고, 정좌존심하여 지성으로 심고하는 순간에, 우리가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참회가 일어나고, 우리는 다시금 다시 개벽의 대 전환의 높은 파두(波頭) 위에 서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금상첨화 격으로 최근 들어 천도교 바깥에서 천도교의 이 후천개벽 사상과 정신을 주목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사문답과 사제문답을 통해서 형성되고 우리에게 전해진 천도교의 개벽사상이야말로 지금 세상이 크나큰 위기에 빠진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질문을 올바르게 던진 것이고, 그 해답도 올바르게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더 깊이, 더 제대로 알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질문을 가슴에 품고서 천도교 주변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가슴에 품은 질문과 우리가 준비해 두었던 질문 사이에 괴리가 일정 정도 발생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경전에 이미 주어진 대답은 우리가 그 대답을 접하는 순간에 이미 낡은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질문만이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개벽적이며, 언제나 용시용활합니다. 우리는 경전과 교사에 나타나 있는 천사문답, 사제문답의 교리와 원리와 진리를 기반으로 해서 우리의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질문을 찾고,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천도교를 신앙하고 동학을 공부하는 근본 목적이자 방법이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우리 천도교인들은 동학 천도교 창도 당시에 한울님과 대신사님 사이에 오고간 천사문답의 정신 그리고 스승님들과 제자들 사이에서 오고간 사제문답의 정신, 다시 말해 질문하는 태도를 되찾아서 지금 세상이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 이 세계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문답으로서의 동학 천도교 개벽사상을 펼쳐 나가야 합니다.


저는 당분간, 우리가 일동일정, 출입기거에 하는 심고의 핵심 화두가 지금 여기에서 나와 우리 천도교의 질문을 찾는 것이 되도록 하면 어떨까 합니다. 천사문답과 사제문답을 염념불망하면서, 지금 여기의 나는 어떤 질문을 하고서, 그 해답을 찾아갈 것인지 재사심정하기를 바라며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