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으로 동학하다, 동학으로 묻다 3
1.
우여곡절 끝에 수능이 끝났다. (이 글은 수능이 끝나던 날 쓴 것입니다.)
필자가 학력고사를 끝내던 날을 떠올려 보면, 고사장에서 돌아오자마자 교과서와 참고서 등을 챙겨서 문앞에 내다 놓은 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학력고사만 끝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처럼 생각되었다.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었던 고3 1년이었다. 필자는 다행히(?) 대학에 운좋게 합격을 하고, 85년이라는 80년대의 가장 치열한 연대기 한가운데로 '내던져졌다.'
그때는 사실 어떻게든 대학에만 들어가면 되었고, 대학만 졸업하면(심지어 대학에서 중퇴를 하거나 심지어 '짤리더라도'), 웬만큼은 취직이 되었다. 게다가 나처럼 철없는 사람도 적지 않아서, 나의 경우는 대학 졸업반 때도 별다른 취직 걱정을 하는 대신 뭔가 일을 벌이는 데 더 몰두해 있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때 벌인 일이 지금까지 내가 하고 있는 직업(출판)이 되어 그럭저럭 나이를 먹어 왔다.
지금, 2017년의 대한민국 입시생이나 대학 졸업생들에게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기도 어려워졌거니와, 들어가서 어학연수를 포함한 다종다양한 스펙을 쌓더라도, 대학 졸업 이후의 취직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묘사 자체가 문제가 있다. 대학 이야기를 학문과 관련지어 말하지 않고, '취직'과 관련지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적 특수상황 = 세계의 보편적 기준에 의거할 때는 비정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2.
내친 김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렇게 해서 취직을 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 30대든 40대든, 취준생이든, 대기업 사원이든 임원이든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질문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각자의 처지에 따라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필자가 의도하는 이 질문의 의미는 이렇다; 지금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기술혁명이 일어나며, 혹은 ICBM(사물인터넷 Iot, 클라우드Cloud, 빅데이터Big Data, 모바일Mobile)으로 무장하고 인공지능을 장착한 '신인류(생물학적 인류가 핵심 주체가 아닐 수도 있는 존재)'와 '네오-자본'(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필자가 의도한 바는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알리바바, 애플 같은 플랫폼 기업 내지 초지구적 규모의, 새로운 유형의 기업)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현재의 일자리는 언제까지 존속될 것이며, 그 일자리에 '나(혹은 인간)'는 언제까지 필요한 존재(노동이나 기술, 창의성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가 될 것인지를 물어보는 말이다.
향후 10~20년 내에 현재의 일자리(종류) 가운데 50~60%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치한 견해를 보인다. 낙관론자들은 그 지워진 일자리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일자리'가 채워줄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비관론자들은 없어지는 일자리의 대부분이 로봇을 비롯한 자동화된 기계적 시스템이 채워 나갈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인간들이 '일 없이' 살아가야 하는 디스토피아의 도래를 예견하는 데에 무게를 둔다는 차이가 있다.
'기본소득-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액수의 소득을 지급하는 것'이라는 것도 초기에는 '극빈의 해소'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요즈음은 머지않은 미래에, 비자발적인 실업상태에 놓이게 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초극소수의 '네오-자본' 등에게 집중된 부의 일부를 골고루 나눠 주어 '소비'를 지속시킨다는 개념으로 진전되어 가는 느낌이 든다. 말하자면 이때의 '기본소득'은, 예를 들면, 기계식 초대규모 양계장에서 최소한--혹은 가장 효율적인 수준--의 먹이만을 공급받으며, 계란을 '생산'하는 '기계'로 사육되는 '닭'에게 주어지는 '모이'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3.
"일하는 한울님"이라는 용어는 아마도 '김지하' 씨가 해월 최시형 신사의 일화에 등장하는 '베짜는 며느리가 한울님'이라는 말을 응용하여 빚어낸 개념이 그 시초가 아닌가 한다.(아마도 [남녘땅 뱃노래]라는 책에 수록된 글이었을 듯 싶다.)
인간의 노동은 생존의 필수조건인 '식량'을 구득하는 일체의 행위이지만, 그에 앞서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인간과 노동은 존재론적으로 상호 의존적인, 일종의 체용관계에 있는 실존인 작용이라는 것이 더 본질적인 '노동'의 의의일 것이다. 그런데 동학(東學)에서는 그 노동을 '한울님의 일'로 재해석하고, 한울님이 스스로를 나투는 방식이 바로 '일'이라고 넌지시 지시한다. '일하는 한울님'의 원전이라 할 '베짜는 며느리' 얘기가 나오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청주를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묻기를 「저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 하는지라,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 하니, 서군이 나의 말을 분간치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랴.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 ([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대인접물(對人接物)>은 해월 선생의 가르침 중에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사람을 만나고 일상에서 사물들을 접하면서 깨달을 수 있는 이치,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하늘의 도[天道]에 관한 것을 모아 놓은 경편(經篇)이다.
이 대목에서 핵심 내용은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것, 베를 짜는 며느리 우리 집에 찾아오는 도인을 예를 들어 말했지만, 그뿐이 아니라 이 세상 어떤 하류인생(노비나 천민)일지라도 모두가 한울님이라는 점에서는 고귀한 존재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지하 선생은 그중에서도 '베 짜는' 며느리에 주목하여, '며느리의 노동' 속에서 '한울님의 노동'을 읽어 냄으로써, '일하는 한울님'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재구한 탁월한 해석력을 보여 주었다(그때는 분명 그랬다).
다시 오늘의 상황으로 돌아오자면, 인간은 '일'을 함으로써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은 '생존의 위협'으로 직결되고, 설령 '생존'이 보장된다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리는 '생활'은 가능하지 않게 되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인간-노동의 관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런 점에서 3포-5포-N포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 취업 전선에서 이를 악물고 결전을 치르는 취준생들의 치열한 고투는 어쩌면, 개개인으로서는 '아마겟돈-인간이 되느냐 노예가 되느냐'와 같은 의미로 주어지는 상황이 아닌가 한다.
하나의 질문은 그에 따르는 수많은 질문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질문에는 그 질문을 접하는 사람 숫자만큼의 해답이 달릴 수 있다. 각각의 해답은 그러나 결코 닫혀지지 않는다. 그 해답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는 창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4.
동학을 질문으로 읽고 공부하는 이 작업을 시작하며, 지난 호에서는 동학이 한울님과 수운 최제우 선생 사이의 질문과 대답으로 ‘창도’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동학의 공식적인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역시 포덕문에 등장하는 그 질문은 이러하다.
(한울님과 문답을 통해 동학의 깨달아 창도하고나서, 한울님의 뜻에 따라 주문과 영부를 받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써 보았다는 얘기에 이어) "우리나라는 악질이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언제나 편안할 때가 없으니 이 또한 상해의 운수요,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다 멸망하면 또한 순망지탄이 없지 않을 것이라.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동경대전, 포덕문)
이 질문이 동학의 역사를 구성하는 두 번째 질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