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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Dec 29. 2017

보국안민의 계책은 제인질병

-동학으로 묻다, 물음으로 동학하다. 4-1

지난 글에서 "동학 창도 이후"의 최초의 질문은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라고 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천착하고, 그에 대한 '한울님'과 '수운 선생'의 대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이 글은 '동학, 괴질을 물리치는 큰 처방을 제시하다'라는 필자의 다른 글을 '동학으로 묻다, 물음으로 동학하다'라는 체제에 맞춰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게재합니다)


육신과 정신의 질병, 그리고 사회적 질병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0년에 동학을 창건할 때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사명(mission)은 두 가지였다. 첫째,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주는 주문(=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을 가르쳐서 나(=한울님)를 위하게 하라, 둘째, 내가 주는 신령한 부적(靈符)으로 세상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건지라. 


(한울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형상은 태극(太極)이요 또 형상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포덕문).


이때, 한울님=신(神)이 괜스레 영부를 주어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건지라고 한 것은 아니다. 수운 선생이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나쁜 병이 가득 찬 것을 염려하면서 그 치유법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병의 의미가 새롭게 조명된다. 동학에서 말하는 질병은 첫째로는 인간에게 엄습하는 질병이다. 

수운 선생은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영부를 우선 자신의 몸에 써 본다. 스스로를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셈이다. 


나도 또한 그 말씀에 느끼어 그 영부를 받아써서 물에 타서 마셔 본즉 몸이 윤택해지고 병이 낫는지라, 바야흐로 선약인 줄 알았더니…(포덕문).


여기서 질병은 분명히 ‘육신’과 직접 관련된, 일반적인, 좁의 의미의 질병이다. 

그러나 동학(수운)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인 병폐까지를 ‘질병’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치유할 방법으로 동학의 영부를 제시하였다. 영부의 작용과 관련하여 보면, 그 질병은 반드시 ‘육신’적인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위 대목에 이어)이것을 병에 써 봄에 이르른즉 혹 낫기도 하고 낫지 않기도 하므로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그러한 이유를 살펴본즉 정성 드리고 또 정성을 드리어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사람은 매번 효험이 있고 도덕을 순종치 않는 사람은 하나도 효험이 없었으니 이것은 받는 사람의 정성과 공경이 아니겠는가(포덕문).


여기서 ‘정성과 공경’이 영부의 효험에 영향을 끼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질병은 육체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다. 또 정성을 들여서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사람’에게는 매번 효험이 있다는 것은 앞서서 ‘한울님을 위하게 하는 도법’인 삼칠자 주문과도 연계가 된다. 사실, 주문과 영부는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다. 


이처럼 동학에서 ‘질병’은 육신과 정신을 포함하고, 나아가 사회적인 것까지 아울러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위의 인용문에 이어서, 지난글에서 우리가 발견한 동학 창도 이후의 최초의 물음 - 보국안민 - 이 등장한다.


이러므로 우리나라는 악질이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언제나 편안할 때가 없으니 이 또한 상해의 운수요,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다 멸망하면 또한 순망지탄이 없지 않을 것이라.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포덕문).


동학 창도 단계의 입구가 ‘주문’과 ‘영부’라면 그 출구가 이처럼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보국안민에서 '안민'을 위한 길이 '개인적인 제인질병'이라면, 보국을 위한 길은 '국가적인 제인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보국안민의 길이 곧 '제인질병'이라는 말이다. 


동학을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보국안민이라는 말을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지어 지극히 정치적, 역사적으로만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보국안민의 계책은 백성들이 봉기하여 반봉건 반외세 투쟁을 벌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은 국가와 관의 가혹하고 심지어 불법 부당한 수탈 때문이기는 하지만, ‘부유해진다’고 해서 편안한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와 해답은 단초는 다음과 같다. 


당초에 수운 선생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세상을 구제할 방도를 찾아서 세상을 떠돌았다. 그것은 “도를 구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그렇게 해야만 내(=수운=세상 사람)가 살 수 있기에, “살 길을 찾아 헤매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수운은 그 무렵 이 땅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살 길 찾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 권세가도 마음 한쪽(一心)에서는 궁궁(弓弓=삼재팔난을 면할 처방)이요, 창고에 돈과 곡식을 가득 쌓아 둔 부자도 일심은 궁궁이요, 하던 일을 망해먹고 노숙하며 걸식하는 사람들도 일심은 궁궁이라. 풍편에 뜨인 자도 혹은 궁궁촌(弓弓村) 찾아가고 혹은 만첩산중 들어가고 혹은 서학에 입도해서 각자위심各自爲心 하는 말이 내 옳고 네 그르지…(몽중노소문답가).


여기서 ‘각자위심’을 주목해야 한다(이 문제는 지금까지 필자의 글에서 누누이 얘기했고, 앞으로도 되풀이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자세한 언급을 줄인다.)


괴이한 질병을 고치는 다시 개벽 운수


수운 선생이 나서 자라고,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떠돌던 그 무렵에는 한번 유행하면 몇 만 명에서 몇 십만 명이 죽어 나가는 전염병이 드물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我東方)에 해마다 유행하는 괴질(年年怪疾)은 사람과 가축들에게 해를 끼치는구나(人物傷害, 권학가).


그중 대표적인 것이 콜레라다. 콜레라는 1800년대 초 인도 대륙에서 처음 유행한 이래 한편으로는 서쪽으로 번져가서 유럽에 유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대륙을 거쳐 1820년대부터는 한반도 전역에서 한두 해 걸러 한 번씩 대유행하였다. 콜레라는 이후 1900년대 초까지 조선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는 ‘괴질’로 위력을 떨쳤다. 


수운 선생의 동학 창도는 우선 이 괴질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비방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메르스 사태에서 보듯이 질병 그 자체의 위력에 더하여 사람들의 준비 부족이나 미숙한 대처 때문에 피해를 키우거나 악화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수운 선생이 볼 때, 예방하고 제거해야 할 이 세상의 질병은 이러한 괴질(콜레라)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목국을 상징하니 삼절의 수를 잃지 말아라(象吾國之木局 數不失於三絶, 필법).


이 말씀의 뜻은 해월 선생이 좀더 구체적으로 풀어 주셨다. 


우리 도는 삼절운에 창립하였으므로 나라와 백성이 다 이 삼절운을 면치 못하리라. 우리 도는 우리나라에서 나서 장차 우리나라 운수를 좋게 할 것이라. 우리 도의 운수로 인하여 우리나라 안에 영웅호걸이 많이 날 것이니, 세계 각국에 파송하여 활동하면 형상 있는 한울님이요, 사람 살리는 부처라는 칭송을 얻을 것이니라(해월, 개벽운수).


어쩌면 수운 선생이 염려하고 대안을 모색한 괴질은 직접적인 괴질(콜레라 따위)이 아니라 세상인심과 정세의 변화와 그것이 초래하는 위기라 할 수 있다. 


나도 또한 이 세상을 두루 떠돌아다내면서(遍踏周流) 어진 사람 만나거든 세상의 운수와 변화상(時運時變)을 함께 얘기해 보고, 이 세상을 위해 살겠다는 의지(=백년 신세)를 말하거든 이 글 주고 결의해서 붕우유신朋友有信 하여 보세(권학가).


아무튼, 수운 선생은 바로 이러한 생물학적 괴질(콜레라)와 사회학적 괴질(상해운수)에 양면 협공을 당하고 있는 가련한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백성을 구제하고 치유할 방책으로 동학을 내놓았다.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 가련하다. 전세 임진 몇 해런고 이백사십 아닐런가. 십이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되지마는 기험하다 기험하다 아국 운수 기험하다(안심가).


여기서 새롭게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우리나라를 살릴 이 ‘다시 개벽’의 성운(盛運)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십이제국)을 살릴 것이며, 둘째, 그러한 다시 개벽이 종착점에 이를 때까지 우리나라의 운수는 ‘기이하고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점은 우리 역사가 실증적으로 증명하고 있으니, 부연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망하는 세상에서도 일시적으로나마 흥하는 사람이 있고, 흥하는 세상에서도 멸망과 패가망신을 면치 못하는 사람이 있다. 큰 틀에서 볼 때 이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이고, 그렇게 살아야만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개인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동시적인 과정일 수도 있다. 


한울님께 받은 재주 만병회춘(萬病回春) 되지마는 이내 몸 발천(發闡되면 한울님이 주실런가. 주시기만 줄작시면 편작(전설적인 명의)이 다시 와도 이내 선약仙藥 당할소냐…(안심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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