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의 양기수련법 - 검무 이야기
1) 검무와 수련
수운 선생은 문(文)에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무(武)에도 관심이 높았다. 이러한 관심은 개인의 기질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집안의 전통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수운 선생에게 선친 근암공(최옥) 못지 않게 자랑스러운 대상이 6대조인 잠와공 최진립 장군이다. 잠와공은 병자호란 당시 나라에 공을 세운 무장(武將)이었으며, 수운 선생은 이러한 선조의 음덕으로 오늘 동학 천도를 창도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문무 겸전의 가풍이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전승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즉, 수운 선생이 어지러운 세상을 건질 도를 찾기 위해 주유천하를 떠나기에 앞서 집을 나서면서 ‘장궁귀상(藏弓歸商)’했다고 한 것은 일정 기간 동안 무예 수련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무예 수련이 훗날 종교적 희열을 ‘검무’로 표출할 수 있게 한 밑바탕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검무는 수련이 아니라 ‘(주문) 수련을 통한 득도’의 결과 나타나는 희열의 춤이므로 ‘수련’의 일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검무와 관련된 수운대신사의 전생애(全生涯)를 거시적으로 살펴볼 때 재고되어야 한다.
일찍이 백세명 선생은 검무를 ‘강령검무’로 표현하고, 이를 ‘양기수련’의 일환으로 이해하면서 우리 도에 ‘양기수련’이 부족하여 도의 기운이 유약(柔弱)해졌음을 지적하였다.(백세명, <양기수련과 강령수련>, 『신인간』226호, 1962.3)
2) 검무의 성립
검무와 검가는 수운대신사의 창작이면서 또한 한울님이 주신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검가와 검무는 ‘주문’과 ‘영부’와 같은 반열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하루는 한울님이 가르침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근래에 바다를 왕래하는 배는 모두 서양인의 배이니 검무가 아니고서는 제압할 수가 없나니, 그러므로 칼노래 1편을 주며 글로 짓게 하고 부(賦)로 부르게 한다.'고 한 일이 과연 있었다. 서양 오랑캐가 출몰하면 주문과 칼춤으로써 적을 막고자 하며…”(<고종실록>)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들은 첫째 검가는 ‘강화’를 통해 지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동학의 수행 과정을 묘사한 기록(고종실록 등)에 따르면 수운대신사 외에 제자들도 수도와 수행 과정에서 나무칼을 들고 칼춤을 추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러 명이 모여 도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최가(수운대신사)가 글을 외워 귀신(한울님)을 내리게 하고 나서 손에 나무칼을 쥔 채로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일어나고, 나중에는 칼춤을 추면서 공중으로 한 길도 넘게 뛰어 올랐다가 한참만에야 내려오는 것을 제 눈으로 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고종실록)
“동몽 최인득은 검무를 추었는데 본심이 아닌 광기가 발동되어 나무칼로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고 합니다. 그 노래인즉 ‘좋을시고 좋을시고’라는 곡이며 이것을 익히려면 먼저 천제를 올려야 한다고 합니다.”(비변사등록)
같은 내용들이 그것이다. 이들 기록에 공통적으로 ‘광증(狂症)’ 상태에서 검무를 추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검가와 검무가 강령 체험과 같은 종교 체험의 일종이며, 수련의 한 종류임을 명백하게 하는 내용이다. 앞서 언급한 백세명 선생은 같은 글에서 본인 스스로 강령 체험을 하는 과정에서 검무 수련을 재현해 보았다는 언급도 있다.
검무가 수련의 일환이라는 점은 그 밖의 기록들로 보아도 뚜렷하다.
대신사(수운 최제우: 필자 주) 은적암에 유(留)하신 지 8개월 간에 도력이 더욱 서시고 도리가 더욱 밝아 감에 스스로 희열을 금치 못하며 또한 지기의 강화(降化) 성왕(聖旺)함에 스스로 검가를 지으시고 목검을 집고 월명풍청(月明風淸)한 밤을 타서 묘고봉(妙高峰) 상에 독상(獨上)하여 검가(劒歌)를 노래하시니…(『천도교창건사』제1편 제7장 <은적암>)
전라도 남원의 은적암*은 수운 선생이 '동학론(東學論=論學文)' 등의 주요 경전을 지은 곳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검무를 추었던 곳으로도 길이 기억되어야 한다.
* 또한 은적암이 자리하고 있는 교룡산성은 훗날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의 웅거지이기도 했다.
** 최근 은적암 복원 움직임이 있다. 수운 선생이 은적암에서 은거하던 당시 은적암(선국사)의 주지 스님은 '해월화상'이라는 분이었고, 이분은 훗날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 되는 '용성조사'의 은사이다. 용성조사는 본래 은적암(선국사)에서 출가하였으나, 해월화상이 수운 선생을 숨겨준 죄목으로 '제자를 둘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므로, 해인사에서 정식으로 출가하게 된다.
*** 최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법륜 스님은 용성조사 문하의 스님으로 알려지고 있다.
3) 검가의 미학
검가와 검무 중에서 남아 있는 부분인 검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검무의 흥과 가락 그리고 춤사위를 수운대신사는 종교적인 의식으로 수용하였다.
검무는 춤사위가 지니는 율동, 부드러움의 측면과 칼이 드러내는 혁명적 상징성을 한데 융합하여 동학이 지향하는 후천 개벽 시대를 향한 ‘변혁의 의지’를 고취시켜 준다. 더불어 후천 개벽의 ‘문화적’ 형식을 통해 정신적 고양에 접근하고 있다. 춤이라는 역동적인 매개를 통해 ‘우주와 내가 하나 되는’, ‘신과 내가 하나 되는’ 종교적 극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검가는 ‘검결’이라고도 하는데, ‘결’이란 ‘비밀스런 예언’을 담은 글이라는 뜻이다. 즉, 검결은 선천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후천 개벽이 열어갈 대동세상을 예견하는 수운대신사와 한울님의 교감이 빚어낸 걸작이다. 이 검결에서 동학을 동학답게 하는 영성을 감지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검가에는 우주의 선후천을 가르며 넘나드는 호방한 춤사위(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에서부터 풀잎의 이슬 한 방울까지 세심히 배려하는 발걸음(일신으로 비껴서서)까지 크기와 깊이를 쉬이 가늠할 수 있는 미학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미학적 감수성을 복원하고 계승하는 것이 수련으로서의 검무를 계승하는 중요한 축이 된다.
4) 검무의 복원과 전승을 위한 시론
그러나 오늘날 ‘검무’는 전승되지 못하고 있다. 창도 초창기의 많은 의례들이 좀더 진전된 새로운 의례로 대체되거나 최종적으로 ‘청수일기(淸水一器)’로 표준화되기에 이르렀지만, 검무와 검가의 경우 타의에 의해 전승이 단절된 것이다. 이는 수운대신사를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로 참형에 처하는 과정에서, ‘검무’로써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가 가장 큰 것이었던 까닭에 검무 수련, 의례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게 되었고 끝내는 그 전통이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100여 년 동안 간헐적으로 검무의 복원이 거론되었으나 여전히 검무의 복원은 요원한 과제가 되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 수운대신사의 검무를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용담검무보존회’가 검무 복원을 공론화하고 있으나 아직은 교단의 공식적인 기구(교헌 또는 규정에 의한)는 되지 못하고 있다. 또 보존회가 주관하여 시행하는 ‘용담검무’는 주로 공연의 형태를 띠는 것으로 ‘수련’을 위한 검무 본연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과 어떻게 연관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검가와 검무를 오늘날 복원하고 계승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할 사항이 필요하다. 우선 수운대신사 당시 이 검무 의식이 널리 행해졌던 이유는 기록에 나타난 바를 토대로 유추할 때(물론 이 기록들이 관변기록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대 민중들은 수운대신사께서 말씀하신 바 ‘검무를 통해 장차 도래할 양이(洋夷)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고, 또한 동학(검무)의 그러한 ‘현실 적용성’에 깊이 이끌렸다는 사실이다.
검무를 출 때 쓰는 칼은 ‘목검(木劒)’이었는데 이는 “나무의 날카로움은 쇠보다 강하고, 동학에서 사용하는 나무칼은 서양 오랑캐의 눈에는 보검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서양 오랑캐는 화공을 잘하며, 갑병(甲兵)으로는 대적할 수 없고 오직 동학만이 그 무리들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양이’는 당시 국가적·민족적으로나 민중의 실제 생활면에서 가장 절실한 극복의 과제였다. 천도교 창도의 목적 자체가 ‘보국안민’하는 데 있으므로 검무가 ‘양이’를 제압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였음에 틀림없다. 다음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검무가 가지는 ‘문화’로서의 역동성이 민중들의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때 ‘문화’는 사람들이 의식이 풍족한 이후에야 찾는 유희적이고 소모적인 놀이로서의 문화가 아니라 쇠잔해진 기운을 흥기(興起)시킴으로써 우리 앞에 가로놓인 과제를 타파(打破)할 힘을 주는 무기로서의 ‘문화’이며, 나와 너를 ‘우리’로 묶어세우는 삶의 틀로서의 ‘문화’이다. 검무는 이처럼 ‘당대의 현실적인 과제’에 대응하는 ‘문화적 실천’이자 ‘실천적 종교 문화’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검무를 계승하여 오늘날의 수련 행태로 정립하기 위한 과제는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다양한 형태의 검무를 시행(試行)하는 일이다. 검무는 수운대신사나 그 제자들이 강령을 받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오로지 강령만으로 검무를 추어야 한다는 것은 단절된 문화를 복원하면서 계승해야 하는 현실에서, 지나치게 ‘원리주의’적인 편견에 치우친 견해라고 본다. 표준적인 ‘검무’의 형태가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검무를 복원하고 이를 ‘수련’으로 적용해 보는 노력을 하는 한편으로, 그 성과들을 기록하고 축적하며, 주문 수련과의 결합·교류를 통해 ‘검무’의 ‘원형’을 재구(再構)해 나가야 한다.
둘째는 ‘응용’ 형태를 도입하여 확산시키는 일이다. 현재 교단 내 청년(대학생) 가운데 일부에서 몇 년 전부터 이러한 시도를 해 오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시행 내용은 13자 주문의 한자어를 보법(步法)의 기본으로 삼아, 어린 아이에서부터 청년·학생은 물론 연로하신 분들도 힘들지 않게 따라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강습을 하고 있는 중이다.
셋째는 교단 차원에서 검무를 공식적으로 연구하고 제도화하는 일이다. 오랫동안 ‘동학’은 교단 차원이 아니라 일반 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어 왔고, 천도교인들은 그것을 ‘동학 사상’의 우수성의 한 증좌로 여기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그 연구 성과들이 ‘천도교’ 위하는 것이 되는 데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데까지(‘동학’이라는 배꼽이 ‘천도교’라는 배보다 커져 버린)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검무’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매우 소략하여 앞으로 더욱 많은 학자들이‘검무’를 연구의 주제로 삼아 주기를 바라는 상황이지만, 한편으로 검무가 ‘연구대상’으로만 전락해 버리지 않도록 하려면, 교단 차원에서 검무의 ‘화석화(化石化)’를 방지할 실질적인 연구와 계승을 아울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