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an 27. 2018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음

동학으로 묻다, 물음으로 동학하다 6

-「논학문(論學文)」 속의 문답② / [개벽신문] 제71호(2018.1)에 게재되는 글입니다.


인용문으로 글을 시작한다.


전라도 땅 어느 암자에서 마당을 하루 세 번씩 정갈하게 쓸며 살았다는 어떤 늙은 보살 이야기를 나는 잊지 못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점심, 해질녘이면 그녀는 싸리비로 정성스레 암자 마당을 쓸곤 했다고 한다. (중략) 내가 싸리비 보살 얘기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빗자루질 때문만은 아니다. 빗자루 얘기 말고도 “누구시더라?”의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암자에 하루이틀 머문 사람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라며 인사라도 할라치면 보살은 빗자루질 하다 말고 틀니를 덜그럭거리며 생전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처럼 “누구시더라?”로 인사를 받곤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아침에 만난 사람도 낮에 보면 “누구시더라?”, 낮에 이름을 댄 사람을을 저녁에 만나면 또 “누구시더라?”다. “낮에 인사드렸잖아요. 저 아무개 아무개요.” 그러면 보살은 아이처럼 웃으며 “아, 그랬나요?” 했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마당 쓸던 손 멈추고 틀니 덜그럭거리며 또 어김없이 되묻기를 “누구시더라?” 

나는 내게 끊임없이  “너는 누구냐?”고 되묻는 책을 좋아한다. (중략) 너는 누구인가? 그러나 네가 누구인가는 마침내는 중요하지 않다. 너는 너보다 더 큰 것, 너를 연결할 더 큰 어떤 것을 찾았는가? 싸리비 보살의 법문대로다. 누구시더라. 자기를 자기라고 조석으로 우기는 당신은?(도정일, 『쓸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문학동네. 13-14쪽 / 강조는 인용자)


이야기(인용문) 속의 그 보살님은 아마도 부처님의 현신이거나 최소한 환생한 소크라테스쯤은 되시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인가? ‘너’는 내가 생각하는 그 ‘너’인가?”가 아닌가. 여럿으로 나뉜 질문이지만, 본질은 하나다. 여기서 ‘나’의 존재의 정체와 역사를 묻는 이에게 ‘나’는 단지 육체적 존재로서의 나뿐만이 아니라 나를 비롯하게 하는 사회적, 역사적, 생태적 환경 전체와 인물(人物-생명계와 물리세계, 즉 우주만물)의 궁극적 의미와 유래와 지향을 묻는 것이라고 봄이 옳다.


수운 선생은 ‘나’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고의 만물이여, 각각 이룸이 있고 각각 형상이 있도다. 보는 바로 말하면 그렇고 그런 듯 하나 그 부터 온 바를 헤아리면 멀고도 심히 멀도다. 이 또한 아득한 일이요 헤아리기 어려운 말이로다.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하면 부모가 이에 계시고, 뒤에 뒤 될 것을 생각하면 자손이 저기 있도다. 오는 세상에 견주면 이치가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함에 다름이 없고, 지난 세상에서 찾으면 의심컨대 사람으로서 사람 된 것을 분간키 어렵도다[동경대전, 불연기연(不然其然)].”


부처님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하셨던 말씀의 유아독존은 ‘유아독존(唯我獨存)’이기도 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내가 나 된 이치를 투득(透得; 막힘없이 환하게 깨달음)할 길이 얼핏 보이는 것도 같다.  


그 말씀의 맥락에서 해월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은 다 부모가 있으리니 부모로부터 처음 할아버지에게 거슬러 올라가면 첫 할아버지는 누가 능히 낳았겠느냐. 예로부터 한울이 만백성을 낳았다 말하나니, 첫 할아버지의 부모는 한울님이시니라[해월신사법설, 향아설위(向我設位; 나를 향하여 제사상을 차림)].”


이에 따르면, 사람(나)의 존재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곧 ‘한울님’에 이르는 길이 된다.


또 의암 손병희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운용의 맨 처음 기점을 나라고 말하는 것이니 나의 기점은 성천의 기인한 바요, 성천의 근본은 천지가 갈리기 전에 시작하여 이때에 억억만년이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나로부터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이때에 억억만년이 또한 나에게 이르러 끝나는 것이니라[의암성사법설, 무체법경(無體法經), 성심을 말하다(性心辯)]).”


여기서는 마침내 직설적으로 ‘나’는 ‘천지’와 더불어 그 시작과 끝을 같이하고, 포함하는 관계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궁극(窮極)의 유일실재가 된다.


한편, 일찍이 공자님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말씀하셨다. 이때 ‘도’는 형이상학적인 ‘도’가 아니라 “천하에(가) 정도(正道)가(로) 행(行)해지고 있다”는 뜻으로 주해된다. 이런 말씀을 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윤리적/도덕적 질문을 포함하며, “이 세상의 정의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며, 왜 구현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정치적, 철학적 질문을 당연히 포함한다. 기타 등등.


지난 호에 언급한 「논학문(論學文)」 속의 질문(10問10答) 가운데서도 네 번째 질문으로 동학의 21자 주문(강령의 글)의 의미를 수운 선생 스스로 해설하는 대목은 과히 동경대전의 압권이요, 동학 역사의 ‘정점(頂點)’이라 할 만하다[주문 스물한 자는 이러하다 -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주화정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대답하기를

「지」라는 것은 지극한 것이요,

「기」라는 것은 허령이 창창하여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으나, 그러나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듯하나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 한 기운이요,

「금지」라는 것은 도에 들어 처음으로 지기에 접함을 안다는 것이요,

「원위」라는 것은 청하여 비는 뜻이요,

「대강」이라는 것은 기화를 원하는 것이니라.

「시」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주」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

「정」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요,

「영세」라는 것은 사람의 평생이요,

「불망」이라는 것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요,

「만사」라는 것은 수가 많은 것이요,

「지」라는 것은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에 이르느니라.(동경대전, 논학문)


21자 가운데 ‘천(天)’에 대한 해설이 없는 것을 두고 여러 가지 학설(學說)이 분분하나 이에 대한 논의는 후일로 미루고, 또한, ‘지~정’에 이르는 각 글자의 해설에 대한 필자의 주해도 후일로 미루고, 오늘은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만사지(萬事知)’의 의미를 짚어 보는 것으로 그친다.


만사지는 한마디로 궁극의 질문에 대한 궁극의 대답이다. ‘지~정’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경지가 바로 ‘만사지’이다. 이때 ‘지’야말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구할 수 있는 길로서의 ‘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음”으로써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에 이르”는 것이 주문의 뜻이요, 좁혀 말하면 ‘만사지’의 의미이다.


여기서 지는 단순한 ‘지식’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는 오히려 해월 선생이 「대인접물(待人接物)」이라는 글에서 “그 그러함을 아는[知] 사람과 그 그러함을 믿는[恃] 사람과 그 그러한 마음을 기쁘게 느끼는[快哉] 사람은 거리가 같지 아니하니, 마음이 흐뭇하고 유쾌하게 느낌이 있은 뒤에라야 능히 천지의 큰일[大事]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할 때의 ‘그러함을 아는 것’ ‘그러함을 믿는 것’ ‘그러한 마음을 기쁘게 느끼는 것’을 아무르는 경지이다. ‘지행합일’이 절로 이루어진 후의 ‘지’요, 질문이 끊어지는 자리의 ‘물음’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감각의 구멍을 막고 욕망의 문을 닫아걸며,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헝클어진 것을 풀며,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하나가 되면, 이것을 일러 현묘한 합일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가까이 할 수도 없고, 소홀히 할 수도 없으며,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으며,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으니, 이 때문에 천하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疎,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


해월 선생은 “일이 있으면 사리를 가리어 일에 응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마음공부를 하라. 말을 많이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심술(心術)에 가장 해로우니라”(대인접물)라고 했다. '침묵의 도'이다. 아니 '침묵이 도'이다. 


지난 호에 언급한바 한울님과 수운 선생 사이의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가운데 “(수운 선생에게)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視之不見],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다[聽而不聞]가 “(한울님이 마침내 대답하시기를)내 마음이 곧 내 마음이니라(吾心卽汝心).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人何知之].”라고 고백하는 대목이 있다. 이것이 바로 ‘침묵’ 속에서 오가는 문답의 모습이요, ‘만사지’의 절정이다.


‘인하지지(人何知之)’와 ‘만사지(萬事知)’의 사이, 너머로 동학 천도의 길이 흐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학의 공부법(14.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