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일 기도의 경우 이 글(동학의 공부법)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 천도교 수련의 본령인 ‘주문수련’의 일환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분명 49일 기도는 ‘주문 수련’의 측면에서 깊이 논구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49일 기도는 21일기도와 함께 오늘날에도 천도교단의 주요 수련 의례로서 시행되고 있다는 점도 이 항목을 이 글에서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문 수련’에 접근하는 다양한 형식의 하나로 49일 기도를 이해하고 그 역사적 맥락을 짚어 봄으로써,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 보기 위해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49일 기도는 매일기도와 21일 기도, 105일 기도 등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시행하는 기도 중 하나이다. 특히 천도교에서 49일 기도는 수운 선생이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시행하였던 내력을 갖고 있으며, 이후 해월 최시형 선생(신사), 의암 손병희 선생(성사) 시대에도 꾸준히 시행되었고, 의암 선생 이후로는 교단의 주요 의례로서 다뤄지는 기도 형식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천도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시행하는 특별기도의 경우 ‘21일 기도’가 대종을 이루는 동학 시대(수운-해월)에는 오히려 49일 기도가 보편적인 형식이었다는 점도 염두에 둘 내용이다.
21, 49 등의 기도 기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21자 주문과 이로부터 파생하는 ‘3’, ‘7’ 등 숫자의 배수에서 유래했다거나, 불교적 의례인 49재 의례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좀 더 면밀한 논구가 필요하다. 수운 선생의 49일 기도 기록은 득도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별도의 기도 기간을 정할 필요 없이 수시로 기도하고 수련하는 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월 선생 시대에 49일 기도는 고사(枯死) 위기에 처한 교단을 회생시키는 응급방(應急方)이자 도약을 위한 터잡기 역할을 했다.
이필제란으로 교단이 또다시 누란지위(累卵之危)에 처했을 때 해월 선생은 49일 기도로써 도의 기운을 새롭게 하였고, 그로부터 거의 해마다 49일 기도를 시행하였다. 처음에는 모든 교인들이 연 4차례의 49일 기도를 시행하게 하였으며, 포덕 12(1871)년 10월에는 인제군 직곡리의 박용걸 가에서, 포덕 13(1872)년 봄에는 정선군 무은담리(霧隱潭里) 유인상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또 이듬해 포덕 14(1873)년 겨울에는 태백산 적조암에서 49일기도를 행하셨던 것이다. 이때의 수련 방법은 주문의 심송(心誦), 미음구송(微音口誦), 묵송(黙誦), 세음송(細音誦) 등으로 다양했다.
초창기 주종을 이루던 49일 기도가 오늘날의 21일기도로 ‘변화’한 이유에 대해서는 논증할 자료가 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초창기 49일 기도의 경우 대체로 ‘사찰’ 등의 별도 기도처를 정해 놓고 ‘독공수련’의 형태로 진행되었으나 의암성사 시대 이후 49일 또는 21일 기도는 대체로 재가기도로서 종일 수련이 아니라 새벽 또는 저녁 기도식 시간에 일정 회수의 주문을 송(誦)하는 것이었음도 유념할 내용이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포덕 50년을 전후하여 적멸굴에서의 49일 기도와 춘암 박인호 등을 대동하고 삼성암에서의 49일 기도 등으로 국운을 회복하고 교단의 바른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또국권을 일제에 빼앗긴 이후 후일의 거사(3.1운동)를 준비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모두 7차에 걸쳐 483명의 지도자들을 서울로 불러 올려 49일간 기도와 교육 등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훗날 3.1운동 당시 각각의 지역에서 3.1운동에 앞장서서 혁혁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오늘날 21일 기도가 대체로 14일간의 재가기도와 7일 동안의 합동수련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 21일 기도가 전통적인 49(21)일 수련의 형식을 계승하되 ‘교구’제 시행에 따르는 ‘집단 교화’로서의 ‘합동수련’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천도교의 중요 수련 장소로 활용되는 ‘수도원’은 수운 선생이나 해월 선생, 그리고 의암 선생과 춘암 박인호 등이 절과 암자 등을 전전하시면서 수행하시던 것을 교단 자체의 수도장을 마련함으로써 계승하려는 의지의 소산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49일 기도는 천도교 대학생단이 포덕 130년 12월 18일부터 제1회 49일 기도를 시행한 것을 시작으로 수년에 걸쳐 49일 기도를 시행함으로써 부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교단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포덕 138년 10월 27일부터 12월 14일까지 ‘도의 기운 회복을 위한 49일 기도’를 시행한 것이 실로 반세기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당시 오익제 교령의 월북이라는 교단의 위기 상황을 도의 기운으로 극복해 내고자 하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또한 동학 천도교 전성기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2000년대 이후 천도교단에서는 교단 차원에서 49일 기도를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나, 달라진 사회 여건 등을 고려할 때 집단적인 합숙을 통한 49일 시행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이처럼 49일 기도는 ‘입산수련’이라는 독공 수련의 형태와 ‘재가수련’이라는 생활 속의 수련의 경계 지점에서 그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 어느 것이 ‘49일 수도’의 본령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적멸굴에서의 ‘독공수련’이 시대적 환경의 변화를 거쳐 오늘날 ‘재가수련’의 형태로 진화(進化)해온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앞서 얘기하였듯이, 오늘날의 사회생활 구조상 ‘49일’ 기도를 ‘입산수련’의 형태로 진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매일 기도식을 이미 시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21일’ ‘49일’이라는 기간만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도 어려움은 있다. 49일 기도나 21일 기도의 시행 방법을 다각도로 검토하는 일은 현대 사회의 생활 방식과 교인들의 요구 수준을 감안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동학의 공부 방법이 다양하다는 점을 논증하며, 이 시대에 계승하고, 부활시키며, 그것을 기반으로 동학의 꿈을 재생시키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었다.
글을 써 나가면서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수준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러면서 스스로 공부가 되었다는 점도 사실이다.
이제, 지금까지의 사변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좀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동학의 공부법에 대한 공부와 대화를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약속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