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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Dec 30. 2017

밥이 약이다, 밥이 하늘이기 때문이다

동학으로 묻다, 물음으로 동학하다 4-2

[필자주] 지난회차에서,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수운 선생의 답이 바로 '제인질병'이며, 그때 '병'은 '괴질'이라는 점을 

동학의 경전 속에 나오는 수운 선생, 한울님의 말씀 들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 글에 계속되는 글이다. 

밥이 약이다, 밥이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괴질운수에 처하여 일신의 안녕을 도모(安民)하거나 세상 사람들의 평안(安民)하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동학이 강조하는 것은 밥이다. 


내 역시 사십 평생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내다가, 이제야 이 세상에 홀연히 생각하니, 시운이 둘렀던가. 만고 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창건하니 이도 역시 시운이라. 매일매일(日日時時) 먹는 음식 성경(誠敬) 두 글자 지켜내어 한울님을 공경하면 어렸을 때부터(自兒時) 있던 병이라도 약을 쓰지 않고 고칠 수 있지 않겠는가(勿藥自效) 아닐런가(권학가). 


이 구절의 의미는 우리 시대 고질병 중의 하나인 아토피 피부염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역사적으로도 이 말은 증명되었다. 동학의 역사에서 수운 선생 순도(1864) 이후에 동학이 가장 극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1890년대 후반에서 1890년대 초반기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폭발적인 성장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1865, 6년 사이에 대유행한 괴질(콜레라)와 관련이 있다. 유행에 앞서 당시 해월 최시형 선생은 “올해도 악질이 크게 유행할 것이니, 도인들은 기도에 더욱 힘쓰는 동시에 청결에 유의하라” 하시고 이어 세세한 생활 지침을 제시한다. 


먹던 밥 새 밥에 섞지 말고, 먹던 국 새 국에 섞지 말고, 먹던 김치(침채) 새 김치에 섞지 말고, 먹던 반찬 새 반찬에 섞지 말고, 먹던 밥과 국과 김치와 장과 반찬 등절은 따로 두었다가 시장하거든 먹되, 고하지 말고 그저 ‘먹습니다’ 하옵소서. 아침 저녁 지을 때에 새 물에다 쌀 다섯 번 씻어 안치고, 밥해서 풀 때에 국이나 장이나 김치나 한 그릇 놓고 고하옵소서. 금난 그릇에 먹지 말고, 이 빠진 그릇에 먹지 말고, 살생하지 말고, 삼시를 부모님 제사와 같이 받드옵소서(내수도문).


먹는 것도 위생적으로 해야 하지만, 생활공간 주변, 나아가 자연환경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공경)을 갖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신 물이나 아무 물이나 땅에 부을 때에 멀리 뿌리지 말며, 가래침을 멀리 뱉지 말며, 코를 멀리 풀지 말며, 침과 코가 땅에 떨어지거든 닦아 없이 하고, 또한 침을 멀리 뱉고, 코를 멀리 풀고, 물을 멀리 뿌리면 곧 천지부모님 얼굴에 뱉는 것이니 부디 그리 아시고 조심하옵소서(내수도문).


이러한 예방적 가르침 덕분으로 당시 해월 선생이 계시던 전성촌이라는 마을에는 40여 호의 집에 한 사람도 괴질에 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학 도인들도 무사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한 당시 민중들은 앞다투어 동학으로 몰려들었다. “동학을 하면 괴질을 면한다!”는 소문 아닌 소문이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해월 선생 당시의 사례가 일시적이고 우연한 것이 아님을 증언해 준다. 


(음식을 성경 이자 지켜 가면서 먹으면) 집안 식구들(家中次第)이 우환 없어 일년 삼백육십 일을 하루처럼 편안하고 무사하게 보내니 한울님이 도우시는 것(天佑神助) 아닐런가. 차차차차 증험하니 다시 개벽의 운수(輪廻時運)가 분명하다(권학가).


수운 선생은 또 “용모가 환태된 것은 마치 신선의 바람이 불어온 듯하고, 오랜 병이 저절로 낫는 것은 편작(중국의 전설적인 명의)의 어진 이름도 잊어버릴 만하더라(수덕문).”라고 했다. 


한울님을 공경하면 괴질을 피할 수 있다는 말씀은 다음과 같이 재확인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상 천국과 같은 허무한) 그말 저말 다 던지고, 한울님을 공경하면 우리나라(我東方)에서 삼년 동안 이어지는 괴질(三年怪疾)이라도 죽을 염려 있을소냐(권학가).


그러나 이 말씀에서 유의할 대목이 있다. ‘한울님을 공경’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서다. 자칫 이 말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이해할 경우 괴질에 걸리고 걸리지 않는 것은 개인위생 내지 개인의 삶의 태도 문제로만 귀착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궁궁촌의 사례와 각자위심론에서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사회적이며, 특히 오늘날의 경우 ‘국가’에 많은 책임이 주어져 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여기서 오늘날 비대해진 ‘국가’의 위상과 역할이 지금처럼 계속되어도 좋은가, 혹은 실제로는 전통적인 ‘국가’의 역할과 권한을 잠식해 들어오는 다국적 기업이나 거대 플랫폼 기업-ex: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등의 ‘개인’의 삶의 영역 침탈이 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은가, 그것을 거부하려 한다면, 그 대안을 찾는 것은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논의를 요한다. 이는 다른 날에, 다른 지면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한울님은 수운 선생에게 ‘주문’과 ‘영부’를 주기 전부터 끊임없이 이 세상의 괴질(생물학적, 사회학적, 우주적)이 치유될 것임을 때로 암시하고, 때로 명시한다. 


천운이 둘렀으니 근심 말고 돌아가서 윤회시운 구경하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 불평불만(慨歎之心) 하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몽중노소문답가). 


수많은(許多) 세상 악질 약이 없이도 고치게 되었으니 기이하고 두려운 일이다. 이 세상 인심으로 물욕을 없애고 허물을 고쳐 착하게(改過遷善) 되었으니 성경(誠敬) 두 글자 못 지킬까(도덕가).

(다음 4-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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