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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04. 2018

동학의 공부법(11)

군자의 도, 선비의 도

6. 천도교 수련의 유형4 : 군자의 도, 선비의 도



주문 수련만으로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수운 선생은 한울님으로부터 영부와 주문을 받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질병에서 구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영부와 주문만을 전해주고 가르치고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행동의 규범들을 일일이 가르치고 지적하였다. 


“(신유년 6월 이후) 저절로 풍문을 듣고 찾아 오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 전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혹은 불러서 입도하게 하고, 혹은 명하여 포덕하게 하니, 전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스물한 자뿐이었다. … 닦아서 가르치는 것 가운데 한가지는 식고(食告)요, 다른 한 가지는 나아갈 때에 반드시 고하고(出必告) 들어올 때 반드시는 고하는 것(入必告)이다. 약을 쓰지 아니하며,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물욕을 스스로 버리며 다른 이익을 찾지 않으며, 유부녀을 취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꼬집어 말하지 않으며, 악육(惡肉)을 먹지 않으며, 신경성(信敬誠) 석 자를 으뜸으로 삼았다.”(윤석산 역주, 『초기 동학의 역사-도원기서』, 신서원,  46-47쪽)


이러한 역사 기록은 물론이고 경전에까지 반영되었다.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니라. 한번 입 도식을 지내는 것은 한울님을 길이 모시겠다는 중한 맹세요, 모든 의심을 깨쳐버리는 것은 정성을 지키는 까닭이니라. 의관을 바로 갖추는 것은 군자의 행실이요, 길에서 먹으며 뒷짐지는 것은 천한 사람의 버릇이니라. 도가에서 먹지 아니할 것은 한 가지 네발 짐승의 나쁜 고기요, 몸에 해로운 것은 또한 찬물에 갑자기 앉는 것이니라. 유부녀를 막는 것은 나라 법으로도 금하는 것이요, 누워서 큰 소리로 주문 외우는 것은 나의 정성된 도에 태만함이니라. 그렇듯이 펴니 이것이 수칙이 되느니라.”(『동경대전』「수덕문)


오늘날 천도교인들이 지켜야 할 절차와 행동 규범을 담은 현행 『천도교의절』에도 이러한 가르침의 전통은 이어져 와서, ‘출입시에 반드시 고하는’ 것은 ‘심고(心告)’ 의례로서 일동정일어묵(一動靜一語黙)에 모두 한울님께 고하는 것으로 더욱 구체화했다. 

이에서 한 걸음 나아가 다음과 같은 실천 덕목을 일상 생활의 예법으로 정리하여 제안한다.


“천도교인은 각자위심(各自爲心)하여 불순천리(不順天理) 불순도덕하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의 도덕을 지키게 하고 새 세상을 건설해야 하므로, 모든 교인들은 예절을 철저히 지켜 새로운 도덕문명세계 건설의 기초를 다져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천도교인은 사인여천(事人如天) 정신으로 항상 사람을 한울같이 섬기는 마음가짐과 생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잘못을 용서하며, 욕을 하거나 때리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또한 민중을 속이거나 억압, 착취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교인은 성·경·신(誠敬信)을 좌우명으로 삼고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삼경사상을 실천하며, 모든 사람은 물론 천지만물과 화합하는 동귀일체(同歸一體)·만화귀일(萬和歸一)의 새 생활, 새 예절을 실행해야 한다.”


먼저 가정 생활예절로서 가화(家和)와 청결, 부화부순(夫和婦順)과 내수도(內修道), 효도(孝道)와 보국안민 등을 규정하였다. 또 일상생활 규범으로서 기침 심고와 취침 심고를 비롯하여 의관정제, 음식 예절, 인사하는 법, 언어, 자세, 공중도덕, 대인접물 등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여 바람직한 생활 태도상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 기록 또는 경전 속에 제시된 규범들과 오늘날 ‘의절’ 속에 제시된 여러 구체적인 ‘예절’들은 한마디로 ‘대동이소이(大同而小異)’하고 할 수 있다. “대체로는 같으나 작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대동소이(大同小異)’라는 말이 ‘대동’에 방점이 찍힌다면, ‘대동이소이’는 ‘소이’에 방점이 찍힌다. 그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날 ‘의절’에 명시된 구체적인 규범들은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는 규칙으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을 위한 규칙이 규칙에 따르는 사람을 만드는 조항이 된다면,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의절에 제시된 여러 행동 규범들은 경전의 ‘금칙(禁飭)’ 조항들을 지극히 ‘피상적’으로 계승하고 있다.(이것이 ‘의절’ 자체의 문제인지, 오늘날 천도교단의 신앙문화 전반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좀더 다각도의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행동 규범’들을 나열하고 지키라고 해서는 결코  본질에 다다를 수 없다.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들을 일일이 나열해서는 한도 끝도 없게 된다는 말이다.


수운 선생이 출입시에 반드시 고하도록 가르친 일이나 찬물에 갑자기 앉는 것을 해롭다고 하신 것들은 단지 그 7, 8개의 행동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그로 대표되는 인간의 규범 전체를 아울러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중요한 것은 수운 선생이 어떠한 ‘원리’로부터 이러한 행동 규범을 말씀하셨느냐와, 그것을 오늘의 시공(時空) 속에서 어떻게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오늘 천도교인들, 또는 '동학하는 사람들'의 행동 양식과 규범으로 삼을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군자의 도’ 또는 ‘선비의 도’라고 명명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수운 선생이 “입도한 세상 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라고 말씀하신 데서 유추한 것이다. 수운 선생이 제시한 동학도인으로서의 여러 규범들은 바로 ‘군자’로서 갖추어야 할 행동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천도교인들은 ‘군자’로서의 풍모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군자란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사람인가. 우리는 천도교 신앙 또는 동학공부를 오래 해 오신 분들 가운데, 본받을 만한 분들을 찾곤 하지만 그것이 천도교 신앙 내지 동학 수련의 결과인지 그 사람의 타고난 성품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수련을 통해 인생관을 바꾸었다는 분들을 보아도 타고난 성품과 기질을 바뀐 것은 아니다. 


수운 선생은 군자를 일러 “천지와 더불어 그 덕에 합하고, 귀신과 더불어 길함과 흉함을 합한다”라고 하셨다. 군자는 천지가 운행하는 이치 그대로 살아간다고 보면, 무위이화하는 인간형을 떠올리 수 있지만, ‘무위이화’ 역시 그 범위가 하도 넓어 구체적으로 삶의 지표로 삼기에는 어렵기 그지없는 말이다.


동학을 공부하고 말하는 데는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 있다 


그러나 결론은 간단하다. 천도교인이 천도교에 입문하여  수련을 통해 한울님 모심을 깨닫고 체험하며 / 혹은 여러 경로를 통해 동학을 알고, 동학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구현하고자그 실천하는 것은 수련 또는 '지적인 이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 규범으로 정리된 바람직한 인간 행동의 규범들을 흔쾌히 실천할 수 있는 교육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구체적인 사례의 나열이 아니라, 천도교 대인접물의 근본정신에서 유추된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언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배출되는 인간은 ‘군자’라고 할 수 있다. 군자는 획일적인 인간상이 아니라면, 군자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 역시 유일하고 대안 없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의란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인간(혹은 만물)과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홀로 있을 때조차 우리는 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 다시 말해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생각에 사로잡혀 ‘유아독존(唯我獨存)’ 식의 말과 행동을 할 때, 그는 병들기 시작하며, 죽기 시작한다.


천도교인/동학인의 말과 행동은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날 천도교단에서 들음직하고 본받음직한 말과 행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천도교의 종교적 '고루함'을 비판하며 교단 밖에서 '동학하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오히려 막말과 무례함이 횡행한다. 수도원에 가면, 신발을 가지런히 하는 것부터 실천하듯, 지금 천도교에 필요한 것은 바로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여 기품 있는 군자가 되는 예절 교육이 필요하다. 이는 유학의 공부에서 논어나 맹자, 중용이나 대학에 앞서서, 사자소학이나 소학을 먼저 배워 말하자면, 일용행사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지켜야 할 예법을 먼저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시천주 주문에 앞서 위천주 주문(위천주 고아정 영세불망 만사의)을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 세상에 동학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동학의 실천"을 전면에 내세우며, '나를 따르라' '너는 그르다'를 외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동학 / 천도교의 수련과 수행 그리고 공부가 산속의 '수도원'이나 '교당 안' 또는 집안 고요하고 깨끗한 방 한가운데서 유효하고 가능한 것이라면 세찬 바람, 먼지 날리는 세속과는 괴리된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동학 / 천도교 공부가 온실 속의 화초 가꾸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를 바르게 하는 것"을 게을리하고, 소홀히 하고, 성급하게 세상 사람과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한몸을 바치는 것은 '희생적인 투신'은 될지언정 천도에도 이롭지 아니하고, '나'에게도 이롭지 아니하며, 세상에도 이롭지 아니할 뿐이니, 경계하고 삼갈 일인 것도 분명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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