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주] 이 글은 <개벽신문> 78호-79호(2018.10-11)에 게재되었지만, 본래 2001년에 <東學思想과 地上天國 建設運動>(<<無極>> 창간호, 東學無極思想硏究會, 2001)에 게재된 것을 증보한 것이다. 이 브런치에 재수록하면서, 다시 한번 증보를 시도한다.
역사, 운동사 연구로부터 교리, 종교 사상 연구로
동학을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종교로서 접근하여 교리와 사상을 연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전쟁 또는 운동(교과서)에 사상과 이념을 제공한 원동력 또는 운동 자체로서 연구하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동학연구는 역시 운동으로서의 동학을 연구하는 흐름이 여전히 주류이다. 더욱이 일반 학계에서 동학의 교리와 사상을 연구하는 것도 그 시초는 동학혁명이라고 하는 변혁운동을 이끌어 낸 배경 사상을 이해하려는 데서 출발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언급이 그러하다.
지금까지의 동학에 관한 연구는 대체로 사적(史的)인 연구에 치중된 느낌을 주는 반면 교리 면의 연구, 특히 종교로서의 동학-천도교에 대한 연구는 다소 빈약한 감이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동학사상에 관한 연구는, 설령 그것들이 그 사상의 혁명적인 성격 때문에 종교적 요소와 혁명적 요소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시도되었더라도, 종교학적 내지 종교철학적 측면에서 다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종교학적 입장이란 종교 현상 중에서도 종교체험과 종교적 표현을 중시하는 것을 말한다.2
[이 점은 지난 약 20년 동안 다소 개선이 되었다. 그러나 동학-천도교의 철학/사상/비전(소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본질적인 연구는 - 필자가 보는 입장에서는 - 여전히 소수, 비주류를 면치 못하고 있다. 혹은 방향을 바르게 잡은 경우에는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여,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019년을 기준으로 할 때, 이미 26년 전(=1993)의 진단이어서 그때에 비하면 조금 개선된 면이 없지 않으나, 본질적으로는 달라지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20여 년 전에 ‘동학에 관한 사적인 연구’의 분위기가 비등했던 것은 역사적인 이유에 더하여, ‘동학혁명 100주년’(1994)을 앞두고 크게 일어나는 데 따른 것이었던 반면,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동학혁명’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그 사이 한국철학의 관점(ex-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김용휘))에서 혹은 비교종교학적인 관점(ex-동서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변선환아키브))에서의 연구가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천도교의 교세도 그때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든 것이 그 원인이 된다.[新필자주 : 여기서 필자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라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그 말이 널리 퍼지고 정착되기를 바라면서 작심하고 그렇게 쓴다.]
그 사이에 김지하나 김용옥 등이 불 지핀 ‘(종교로서의) 동학에 대한 관심’이 제고된 때가 없지 않지만, 그것이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여 이 사회에 핵심적인 변화를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다만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하는 <한살림>(1989년 '한살림선언' 발표연도 기준)은 그중 에서도 동학적 ‘살림’의 문화를 사회 깊숙이 뿌리내리게 하는 데 성공적인 1세대 동안의 성장을 지속해 왔다. 이러한 <한살림>의 성공을 ‘동학 전반’에 걸쳐 적용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앞으로 동학하는 사람들의 핵심과제가 될 것이다. 이 글도 그러한 ‘새로운 동학하기’를 위한 소론이다. [新필자주 : 다행히, 수 년 전부터 '개벽/파/학/학당/포럼/저널/종교/대학'에 대한 논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작년에 크나큰 변곡점을 맞이하였고, 올해부터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다. 올해야말로, '개벽학~'의 원년이 될 것이다. 이를 '개벽+'라고 명명한 바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이 신 경향-'개벽학~'에 대한 논의는 최소한으로만 반영할 것이다.]
그리고 동학혁명 이후 동학 교단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갑진개혁운동(1904), 기미년 3.1운동, 1920-30년대 신문화운동과 1945년 이후의 민족통일운동 등을 동학(천도교)3과 관련 지어 이해하는 방식도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동학 교단이 그 운동을 어떻게 계승하고 변화, 변질시켜 갔는가를 연구하여 밝히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4
동학은, 다시 개벽을 통해 지상천국 / 군자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운동
그러나 동학은 혁명/전쟁/운동 또는 민족해방/문화운동을 위해서 창도된 것이 아니라, 다시 개벽을 통해 지상천국 또는 ‘군자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혹은 그러한 이상사회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기 위해 창도되었다. 동학 교단이 앞장선 일련의 민족운동은 동학이 현실 역사의 시대 상황과 조응하면서 전개된 지상천국 실현을 위한 구체적 계기들이었다.
동학은 인류 문명이 낡고 병들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총체적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고 파악하고 “십이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고 하여 ‘다시 개벽’을 외치면서 출현하였다. 즉 동학은 한 국가나 한 사회의 혼란으로 야기된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류문명이 열리는 우주적 차원의 대전환을 예고한 선언이다.5
지금까지 동학 연구는 역사적으로 진행된 구체적인 사건, 특히 동학혁명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그로부터 귀납하여 동학에 접근함으로써 동학의 교리와 사상을, ‘(정치)혁명’의 측면에서 일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동학이 주도 또는 참여한 구체적인 역사를 이해할 때도 동학이 본래 전개하고자 했던 후천개벽운동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관심은 소홀히 함으로써, 오히려 동학운동사 연구조차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거나6 관변기록 또는 일본 측 기록이 가지기 마련인 사관의 한계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학사상이나 동학의 각종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까지 교육학·국문학·사회학·역사학·정치학·종교학·철학적 접근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7 그러한 각 방면에서의 연구 성과들이 하나하나 축적되면 동학의 온전한 이해에 근접해 가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적 축적을 통해 질적 고양을 가져 오는 양질전화(量質轉化)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지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오히려 동학이 본래 추구하던 목적을 이해하고 나서 구체 영역별, 역사 사건별 이해를 시도할 때 새로운 연구의 지평이 열릴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이 글에서는 이상사회에 관한 동학의 입장을 재조명하고, 동학의 정체성을 이상사회상인 군자공동체 혹은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운동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법론을 제안하며, 구체적인 역사를 그런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입장을 모색하려고 한다.
동학은 왜 창도되었는가? 그동안 연구자 또는 동학을 신앙하는 사람들조차 동학을 ‘보국안민’ ‘제폭구민’8이라고 하는 정치적인 측면에 치중해서 이해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제인질병과 같은 개인 구원의 수단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제인질병이나 제폭구민, 포덕천하, 보국안민은 동학의 주요한 목적이지만 그것은 지상천국 실현의 구체적인 계기로서 역사적 시대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제시된 것이다.
지상천국 건설을 위하여 보국안민하고 포덕천하하고 제폭구민하는 것 - 본말을 뒤섞지 않기
① (한울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수운 선생이) 묻기를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한울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9
② (제자들이) 묻기를 “(西道와) 도가 같다고 말하면 서학이라고 이름합니까.”
(수운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나 학인 즉 동학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동경대전’ 論學文)
①은 수운 최제우가 처음으로 한울님을 접했을 때 나눈 대화의 한 장면이다. ②는 수운 최제우가 사람들에게 도를 펴고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그를 찾아온 제자들에게 동학의 이치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즉, ①에서는 영부로써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주문으로써 사람들이 나(한울님)를 위하게 하면, 장생하고 포덕천하한다는 좀더 포괄적인 목적이 제시되었다면 ②에서는그것이 동(東國, 우리나라)이라고 하는 현실 역사에 조응하여 ‘동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까닭을 제시한다.
포덕천하라는 보편적인 목적이 ‘동’이라는 역사적·실존적 현실과 조응할 때 보국안민10이라는 좀더 구제적인 목적이 부여된다. 보국안민은 수운 최제우가 약 20년간에 걸쳐 주유천하(周遊天下)하면서 보고 들은 바, 악질이 온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편할 날이 없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11와 같은 지경에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일차적인 대응 논리다.
다시 말해 보국안민은 포덕천하의 한 방법이 되고, 제인질병을 통한 장생과 포덕천하는 다시 광제창생과 지상천국이라는 좀 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목적으로 승화되어 간다12는 계기적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수운은 진리의 주체가 아니라 진리의 전달자라는 점13에서 볼 때, 수운이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동학’이라고 한 것은 동학의 보편 진리로서의 성격을 말하고 있다. 즉 만화귀일(萬化歸一)의 진리인 천도이다. 그때 보국안민과 포덕천하는 천도가 놓이는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실천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14 이때 ‘동학은 지역적 구체성, 민족적 주체성, 생동하는 현실성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15 이처럼 동학은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문명사적 차원의 과제를 안고 창도되었으며, 그것이 동(東)이라고 하는 지역적·역사적 현실과 조응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실천 과제로 제시된 것이 보국안민과 제인질병 등이다.
동학은 그 창도에 있어서 이미 낙원사상(지상천국 건설; 필자 주)을 그 내면에 지니고 있었으며 나아가 각자위심이라는 타락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한울님의 덕화로 교화시키고 보다 이상적인 세상을 이룩하는 데에 그 중요한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16 그러한 ‘개인주의적 성향’은 온 세상에 가득한 악질(惡疾)과 더불어 ‘각자위심’의 한 단면이 된다.
수운이 파악하기로 당시의 사회적 질병 상태, 즉 악질은 우리나라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세계의 보편 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세계 차원의 문제로서의 ‘괴질’은 운수의 문제라고 보고 있으며, 이를 치유하는 근본 방책으로 다시 개벽을 제시한다. 그것 은 선천 개벽이 있은 지 오만년 만에 도래하는 크고 새로운 운수17이며, 다시 개벽을 통해 도달하는 세상은 요순성세, 또는 ‘태평성세’이고 그것은 우리나라 차원에서는 ‘국태민안’으로 구체화된다.18
각자위심에서 동귀일체로
그러나 수운이 이해한 후천개벽의 과제를 가장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각자위심과 동귀일체다. 지상천국19이란 세상의 각자위심의 문명 상태가 개벽되어 동귀일체의 세계로 전환된 세계를 말한다. 다시 말해 지상천국은 각자위심(各自爲心)에서 동귀일체(同歸一體)로 나아가는 데서 이룩된다. 선천시대가 군자와 성인이 다스리는 치세에서 요순과 공맹의 덕으로도 부족한 난세로 들어선 까닭이 바로 각자위심이다. 각자위심은 불순천리(不順天理)하고 불고천명(不顧天命)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③ 이 근래에 오면서 온 세상 사람이 各自爲心하여 천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동경대전, 布德文).
동학이 창도되던 당시, 분명히 백성들이 피부로 느끼는 가장 절박한 위험 요소는 서세동점이었다. 그러나 수운은 서세동점 이전에 이미 '온 세상 세상 사람들이 각자위심하여 천리를 따르지 않고 천명을 지키지 않는' 상황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서양 사람들이 ‘천주의 뜻’을 앞세워 동으로 밀려드는 것 또한 그들의 말과는 달리 각자위심의 한 형태임을 꿰뚫어 보는 데서 동학이 탄생하게 된 것임을 고려할 때,20 수운이 주된 과제로 삼은 것은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위심 - 제각기 다른 꿈을 꾸는 사람을
각자위심은 대개 스스로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마음, 즉 이기심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한 검토를 해 보면 그 말은 동학의 종교적 과제 상황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 각자위심은 세상 사람들이 쇠운이 지극한 세상에서 대안으로 생각하는 새 세상의 모습이 서로 다른 상황을 지시한다. 즉, ‘궁궁’이라고 하는 구원의 핵심 처방을 찾는 마음은 같으나 서로 자기가 믿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세태를 일컬어 각자위심이라고 했다. 이는 당대의 사상의 혼돈 상황을 잘 드러내 준다.
④ 우리도 이 세상에 利在弓弓 하였다네 賣官賣爵 勢道者도 一心은 궁궁이요 錢穀 쌓인 富僉知도 일심은 궁궁이요, 遊離乞食 敗家者도 일심은 궁궁이라. 風便에 뜨인 자도 或은 弓弓村 찾아가고, 萬疊山中 들어가고 혹은 西學에 入道해서 各自爲心 하는 말이 내 옳고 네 그르지. 是非紛紛 하는 말이 日日時時 그뿐일네. (용담
유사, 몽중노소문답가)
이때 각자위심은 수운이 득도 전에 세상 풍속을 모두 살펴보고 나서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고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답지 못하다”21고 말한 상황과도 연관된다. 이 말은 좁은 의미로는 ‘임금으로서, 신하로서, 아비로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유교 질서 체제’가 붕괴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좀 더 나아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다는 것은 임금 구실을 못한다는 뜻 말고도, 임금은 신하가 있음으로 해서 임금이 된다는 상호 연관성을 인식하고 서로를 살게 하는[相生] 문화의 틀이 와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임금-신하, 아비-자식 간의 인륜뿐만이 아니라 한울 안의 만물이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망각하는 데서 오는 파국이며, 바로 그것이 각자위심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각자가 나만을 위한다’는 현상의 이면에는 나와 너를 갈라서 보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하는, 나는 살고 너는 죽는다고 하는 이원론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갈파한 것이다.
- 말이 달라지다
또한 이것은 ‘말’의 혼돈이 이 세상에 다툼과 분란이 생기는 원인이 되는 것을 암시한다; “말이 반드시 바르면 한울도 또한 바를 것이요, 말이 반드시 바르면 세상도 또한 바를 것이요, 말이 반드시 바르면 나라도 또한 바를 것이요, 말이 반드시 바르면 사람마다 반드시 바를 것이니라.” (의암성사법설, 極樂說)
야뢰는 동으로 밀려오는 서구 과학문명이 말과 본질이 서로 어긋나는, 각자위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生死, 人生 目的에 대한 煩悶; 인용자 주) 煩悶을 느끼게 하는 것은 사람이 한울의 定義를 모르고 사는 데서 온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사람의 根底를 잃은 데서 나온 것이 다. 사람과 한울을 갈라놓고 사람과 자연을 갈라놓고 사람과 사람끼리도 갈라 서 가지고 孤立無依한 孤獨의 分別的 知識에서 나온 것이다. …(중략)… 이것은 확실히 近代科學 文明이 우리에게 준 弊害이다. 科學文明은 사람의 지적 方面을 差別的으로 孤立케 하여 神과 (사람 및) 天地萬有 情的 連絡을 끊게 하였다.”22
이러한 각자위심의 문화 양태가 바로 동학 천도교의 ‘운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상천국은 말이 바르게 된 세계로 그려지기도 한다; “천지가 바르면 만물이 자라고, 세계가 바르면 전쟁이 반드시 그치고, 국가가 바르면 인민이 복을 누리고, 사람사람이 반드시 바르면 천하가 극락이 되리니, 어찌 오늘의 잠잠한 것 이 후일에 많은 말이 될 줄을 알겠는가. 나는 天體公法을 써서 아름답고 거룩한 한울님 마음에 맞게 하노라.” (의암성사법설, 極樂說)
각자위심은 불순천리 불고천명하는 삶
둘째, 각자위심은 한울을 공경하고 천명에 따라 살아가는 삶과 반대되는 삶을 가리킨다. 그런데 공경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이러한 삶 또한 인간과 초목과 군생이 모두 한울에 매인 것, 다시 말해 한울 안에서 한 몸이라는 근본 이치를 잊어버리는 데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⑤ 大抵 人間 草木 群生 死生在天 아닐런가 不時風雨 怨望해도 臨死號天 아닐런가 三皇五帝 聖賢들도 敬天順天 아닐런가 淆薄한 이 세상에 不顧天命 하단 말가 長平坑卒 많은 사람 한울님을 우러러서 造化中에 생겼으니 恩德은 姑捨하고 根本조차 잊을소냐 可憐한 세상사람 各自爲心 하단 말가 敬天順天 하였어라. (용담
유사, 勸學歌)
⑥ 天地 역시 鬼神이오 귀신 역시 陰陽인 줄 이같이 몰랐으니 경전 살펴 무엇하며 도와 덕을 몰랐으니 賢人君子 어찌 알리. (용담유사, 道德歌)
⑦ 한울님은 陰陽五行으로써 萬民을 化生하고 五穀을 長養한즉, 사람은 곧 오행의 가장 빼어난 기운이요, 곡식도 또한 오행의 으뜸가는 기운이라. (해월신사법설, 道訣)
⑧ 天·地·人은 도시 한 理致 氣運뿐이니라. 사람은 바로 한울 덩어리요, 한울은 바로 만물의 정기이니라.(해월신사법설, 天地人·鬼神·陰陽)
또한 만물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어 나와 한 자리에서 나온[同歸] 한몸[一體]임을 깨달으면 살생이 없어질 것이며, 제비의 알을 아끼고, 초목의 싹과 꽃가지를 훼손하지 않으며 폐물까지도 아낌으로써 날짐승, 털벌레에서부터 물건까지 공경하는 경지에 이르면 덕이 만방에 퍼진다는 것23 또한 지상천국이 구현되 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를 설명해 주고 있다.
각자위심에서 동귀일체로
셋째, 각자위심의 의의는 무엇보다 그와 대비되는 동귀일체와 견주어 이해할 때 비로소 명확하게 드러난다.
⑨ 한울님 하신 말씀 너도 역시 사람이라 무엇을 알았으며 億兆蒼生 많은 사람 同歸一體 하는 줄을 사십 평생 알았더냐. (용담유사, 敎訓歌)
⑩ 時運을 議論해도 一盛一衰 아닐런가 衰運이 至極하면 盛運이 오지마는 賢淑한 모든 君子 同歸一體 하였던가. (용담유사, 勸學歌)
⑪ 사람의 手足 動靜 이는 亦是 鬼神이오 善惡間 마음 用事 이는 亦是 氣運이오 말하고 웃는 것은 이는 亦是 造化로세 그러나 한울님은 至公無私 하신 마음 不擇善惡 하시나니 淆薄한 이 世上을 同歸一體 하단 말가. (용담유사, 道德歌)
⑫ 遠處近處 어진 親舊 구름 모듯 하였더라 그中에 賢人君子 義氣男子 몇몇인고 心志相通 그가운데 如此如此 指揮하니 無窮造化 그 理致가 任意用之 分明하다 不過 數朔 못하여서 各自爲心 그 사람이 同歸一體 되었으니 차차차차 試驗하면 一天之下 그가운데 萬化歸一 아닐런가 좋을시고 좋을시고 泰平時節 좋을시고. (의암성사법설, 無何詞)
⑨에서 동귀일체는 수운이 득도 직전까지의 구도행 전체[사십평생]를 통틀어 알아낸 것이라 했다. 특히 이 말은 일찍이 수운이 주유천하를 마치고 용담으로 귀향하여 기천수도(祈天修道)하던 중 경신년(1860년) 입춘을 맞으며 맹세한 “세상의 뭇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겠다[不同歸]”(<立春詩>, “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
는 말에 대해 한울님이 동귀일체의 원리를 제시해 준 것이어서 더욱 주목되는 대목이다.
⑩에서 성운[후천개벽]을 맞이하되 그것을 실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동귀일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동귀일체는 상천국에서 만물이 화생하고 살아가는 원리임을 암시한다.
⑪에서 동귀일체는 인간의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 한울님의 본성에 속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후에 동학이 ‘운동’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로서 자리매김하는 역사 전개의 근거가 되는 측면이다. 다시 말해 동학은 각자위심의 세태에 동귀일체하여 지상천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되, 그 동귀일체는 인간이 의지와 인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울님 본성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비로소 시행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화(造化)이며 조화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 했다.(<논학문>, “造化者 無爲而化也”)
동귀일체로 가는 길, 주문수행
수운은 사람들에게 한울님 마음의 회복을 위해 각종 수행을 요구한다. 그 핵심은 스물한 자로 된 주문이다. 그런데 “무극 대도 닦아 내어 오는 사람 효유해서 삼칠자(21자 주문; 필자 주) 전해 주니 무위이화 아닐런가”(<도수사>)라고 한 것은 그러한 사람들의 수행조차 무위이화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수행은 필요조건이 되고 한울님의 조화는 충분조건이 되어 그 둘의 결합에 의해서 비로소 동귀일체의 새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다. 21자 주문[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을 통해 시천주(侍天主)를 접하며 체험하는 순간 떨림 등의 강령(降靈, 한울님의 영이 개체에 임하는 현상, 필자 주)을 체험하고 지금까지와는 전연 다른 새로운 삶의 세계로 옮겨 간다. 그때 사람들은 기쁨과 평화의 느낌이 온몸에 가득 차는 것을 느끼며 “너와 나의 벽이 허물어지고 모든 생명이 대생명 속에서 동귀일체임을 체득하게 된다.”24에서 동귀일체는 각자위심에서 ‘만화귀일(萬化歸一)’이라는 이상적 상태로 나아가는 길로서 제시된다.
동귀일체 만화귀일의 ‘하나[一]’는 어떤 하나인가. ‘하늘과 땅 이 갈리기 전[天地未判前, 의암성사법설, 무체법경]’의 하나이면서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天符經)’의 하나이다. 전자는 무루무증(無漏無)하는 ‘일기(一氣)’로서 하나라고 한다면 후자는 한울님 ‘조화(造化)’가 ‘천하에 소연(昭然)’한[동경대전, 포덕문] 이후의 하나이다. ‘사람 안에 우주 천지가 하나로 귀일되어 있다[人中天地一]’는 사상을 매개로 할 때 동귀일체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과 시천주(侍天 主)와 통하는 함의(含意)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 인중천지일은 “고대 신화적 판타지와 미래 고도 기술적 멀티미디어를 현재의 문화 창조 과정에서 통합하고 나아가 중력적인 자본국의 사회를 현 실적 근원적으로 변혁하는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뉴타이프 인간을 완성하는 새 철학의 기초가 된다”25고 정의된 바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인심개벽, 문화개벽인 후천개벽의 성격을 드러내 준다.
결론적으로 동귀일체는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 만물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서 모두 하나라는 점을 알지 못하며, 또한 이 세상 만물이 모두 한울님의 은혜 속에서 화생하는 이치를 알지 못하는(<布德文>, “思夫愚民 未知雨露之澤” ) 각자위심의 상태로부터 파생되는 문화 상태를 근본에서부터 새롭게 하는 대안 사상, 대안 문화로 제시되는 것이다. 동귀일체의 본래 뜻은 한울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지상신선의 경지에서부터 이 세상 만물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莫非侍天主]는 경지까지 아울러, 지상천국을 구현하는 후천개벽의 원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01 이 글은 박길수, <東學思想과 地上天國 建設運動>(<<無極>> 창간호, 東學無極思想硏究會, 2001)을 증보하는 것이다.
02 유병덕(柳炳德), <<동학·천도교>>, 교문사, 1993, 19쪽.
03 동학은 창도 이래 공식 비공식적으로 ‘東學(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05년 12월 1일 ‘대고천하(大告天下)’라는 형식을 거쳐 ‘天道敎(천도교)’를 공식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조기주(趙基周) 편저,『 동학의 원류』,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1982, 230쪽 참조.
04 김정인의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한울아카데미, 2009.1)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천도교의 민족운동은 광범위했고 역동적이었다. 좌와 우의 이념과 운동, 그리고 합작의 역사가 천도교의 운명을 이끌었다. 천도교는 민족운동 진영의 일원으로 민족운동의 역사를 이끌어가던 주인공이었다. 그만큼 천도교의 친일은 변절로 받아들여졌고 해방 후에 재기가 어려울 만큼 여파가 컸다. 이 책은 이러한 궤적을 복원하기 위해 천도교의 성립과 분화 과정, 지도부의 정치노선, 교리체계의 변화 등에 초점을 맞추어 일제강점기 천도교의 민족운동과 친일로의 방향 전환을 시계열적인 흐름을 좇아 계통적으로 분석한다. 문명화·근대화를 추종하던 동학 북접 지도부로부터 발원한 천도교 신파는 독점적으로 교단을 장악하고, 자주 독립을 모색하던 소수파인 천도교 혁신파와 천도교 구파를 때로는 배제하고 때로는 견인하면서 자치와 친일노선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토착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정체성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음을 이 책의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출판사 책소개)”고 주장한다.
05 김춘성, <동학의 개벽사상에 대한 연구>, <<논문집>> 제2집(별쇄본), 부산문화예술학교, 1996, 2쪽.
06 이것은 2001년 10월 26일 열린 <동학학회> 추계학술발표회(천도교중앙대교당) 주제가 ‘동학혁명인가 농민봉기인가’인 데서도 드러난다. 다시 말해 ‘동학농민혁명’을 일컫는 용어조차 아직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학을 연구하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모두 동학농민혁명을 지칭하는 용어(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이해하는 방식)를 선정하는 데서 나름대로 선택의 근거를 밝히고자 시도하고 있으며 아예 이 문제만을 집중해서 다룬 논문들도 여러 편이 나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은 근본적으로 동학을 이해하는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07 오문환, <수운 최제우(동학)에 대한 연구 현황>, 동학학회월례발표회자료집(2001.6.18.) 참조.
08 除暴救民(제폭구민)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들이 내건 기치의 구호-혁명 목표의 하나이다.
09 <<동경대전>> <포덕문>, 19쪽(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경전, 포덕 132(1991)년 12월 24일 개정판). 앞으로 이 ‘천도교경전’의 내용을 인용할 때는 각 경편(經篇)의 이름만 기록. 현행 <<천도교경전>>은 수운(水雲, 최제우)의 저작집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 해월(海月, 최시형)의 어록 및 저작-내칙/내수도문-을 모은 <<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 의암(義菴, 손병희)의 저작집인 <<의암성사법설(義菴聖師法說)>>을 모두 담고 있다.
10 <<동경대전>><布德文>, “是故 我國 惡疾滿世 民無四時之安 是亦 傷害之數也 西洋 戰勝功取 無事不成而天下盡滅 亦不無脣亡之歎 輔國安民 計將安出.” 여기에는 보국안민의 계기와 제인질병, <<동경대전>>, 天下盡滅 계기-惡疾滿世-가 모두 밝혀져 있다.
11 위 <포덕문> 참조.
12 <<해월신사법설> <其他> “대신사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요순공 맹의 더이라도 부족언이라 하셨으니 이는 지금 이때가 후천개벽임을 이름이라. 선천은 물질개벽이요 후천은 인심개벽이니 장래 물질발명이 그 극에 달하고 여러 가지 하는 일이 전례 없이 발달을 이룰 것이니, 이때에 있어서 도심은 더욱 쇠약하고 인심은 더욱 위태할 것이며, 더구나 인심을 인도하는 선천도덕이 때에 순응치 못할지라. 그러므로 한울의 신령한 변화 중에 일대 개벽의 운이 회복되었으니, 그러므로 우리 도의 포덕천하·광제창생은 한울의 명하신 바니라.”
13 <<용담유사> <敎訓歌>,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윈 하단말가.”; <安心歌>, 164쪽, “한울님이 내 몸 내서 아국운수 보전하네.”
14 <<동경대전>> <論學文>, “吾亦 生於東受於東 道雖天道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東何謂西.” 및 앞의 각주 10) 참조.
15 오문환, 앞의 글, 16쪽
16 윤석산, <龍潭遺詞에 나타난樂園思想硏究>, <<韓國學論集>>第8輯, 漢陽大學校韓國學硏究所, 1985, 200쪽.
17 <<용담유사>>, <龍潭歌> 171-172쪽.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 후 오만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 무극대도 닦아 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 ; <夢中老少問答歌>, 184-185쪽.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 호시절에 만고 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 <劍歌>,
238쪽.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해월신사법설>>, <道訣>, 261쪽, “우리 스승님께서 오만년 무극대운을 받아 덕을 천하에 펴서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도를 행하여 이 덕을 알게 하는 것은 다만 이 한 가지뿐이라.”
18 <<용담유사>> <安心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되지마는….” ; <夢中老少問答歌>, “십이제국 괴질 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 … 태평곡 격양가를 不久에 볼 것이니….” 여기서 ‘십이제국’이란 당대의 용법으로 ‘세계 모든 나라’라고 할 수 있다.
19 地上天國이라는 용어는 水雲(崔濟愚)과 海月(崔時亨)의 저작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義菴(孫秉熙)이 1905년 東學을 天道敎로 大告天下할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즉, 포덕 46(1905)년 12월 1일자로 일본의 신문에 광고하기를 “…道則天道 學則東學이니 卽古之東學이 今之天道敎라. 宗旨는 人乃天이요 綱領은 性身雙全.敎政一致요 目的은 保國安民, 布德天下, 廣濟蒼生, 地上天國建設이요 倫理는 事人如天이요, 修行道德은 誠敬信이라.”(趙基周編,『 東學의 原流』, 230쪽)고 한 데서 볼 수 있다. 여기서, 地上天國은 천도교의 최종 목표로 제시되고 있다.
20 <<용담유사>> <勸學歌>, “下元甲 庚申年에 전해 오는 世上 말이 妖妄한 西洋 賊이 中國을 侵犯해서 天主堂 높이 세워 거 소위 하는 道를 天下에 遍滿하니 … 우습다 저 사람은(서학 하는 사람 : 인용자 주) 저의 父母 죽은 後에 神도 없다 이름하고 祭祀조차 안 지내며 五倫에 벗어나서 唯願速死 무삼일고 父母 없는 魂靈魂魄 저는 어찌 唯獨 있어 上天하고 무엇하고 어린 소리 말았어라. 그 말 저 말 다 던지고 한울님을 공경하면 我東方 三年 怪疾 죽을 念慮 있을소냐. 虛無한 너희 風俗 듣고 나니 절창이요 보고 나니 慨嘆일세.”
20 <<용담유사>> <夢中老少問答歌>, “平生에 하는 근심 淆薄한 이 세상에 君不君 巨不臣과 父不父 子不子를 晝宵間 數息하니 鬱鬱한 그 懷抱는 心中에 가득하되 아는 사람 전혀 없어 妻子産業 다 버리고 八道江山 다 밟아서 人心風俗 살펴보니 無可奈라 할 길 없네.”
22 이돈화 <<수운심법강의>>.
23 <<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으니 능히 이 이치를 알면 살생은 금치 아니해도 자연히 금해지리라. 제비의 알을 깨치지 아니한 뒤에라야 봉황이 와서 거동하고, 초목의 싹을 꺾지 아니한 뒤에라야 산림이 무성하리라. 손수 꽃가지를 꺾으면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요, 폐물을 버리면 부자가 될 수 없느니라. 날짐승 삼천도 각각 그 종류가 있고 털벌레 삼천도 각각 그 목숨이 있으니, 물건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치리라.”
24 차옥숭, <천도교의 구원관>, <<이성과 신앙>> 제8호(1995.4), 149쪽 참조. 차옥숭은 동학의 수행 체계에 따라 수도하는 도중에 신앙 체험을 한 천도교인들을 면담하고 그 결과를 분석했다.
25 김지하, <한국 전통사상의 현대적 의의와 전망>, <<흰그늘 검은鼓>> 제4호, 율려학교 외, 1999, 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