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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04. 2019

동학과 지상천국, 지상신선 (하)

[필자주] 이 글은 <개벽신문> 78호-79호(2018.10-11)에 게재되었지만, 본래 2001년에 <東學思想과 地上天國 建設運動>(<<無極>> 창간호, 東學無極思想硏究會, 2001)에 게재된 것을 증보한 것이다. 이 브런치에 재수록하면서, 다시 한번 증보를 시도한다. 


https://brunch.co.kr/@sichunju/513


3. 지상신선과 군자공동체


지상천국은 지상신선(地上神仙)이 사는 나라이다. 다시 말해 지상천국은 지상신선공동체이다. 지상신선이라는 말은 수운이 1863년(癸亥) 새해 첫날 한울님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예언적인 시에 등장한다.


도를 묻는 오늘에 무엇을 알 것인가 뜻이 신원 계해년에 있었더라 …

봄 오는 소식을 응당히 알 수 있나니 지상신선의 소식이 가까워 오네.1


또 ‘애를 썼으나 이룬 것이 없던’[勞而無功] 한울님이 “공을 이루는 다른 날에 좋게 신선의 연분[仙分]을 지으리라”(“功成他日 好作仙緣”, 嘆道儒心急)고 하는 말도 지상천국에서 지상신선이 되어 만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 되어 무위이화 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 아니냐”(<교훈가>)라고 하여 궁극적, 이상적 인간형으로서의 지상신선을, 당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군자’라고 재정의하고, 군자가 되는 길을 제시했다. 즉, 지상신선 또는 군자는 동학이 지향하는 이상사회인 지상천국에서 살아가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이는 “새 한울 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이니라”(해월, <개벽운수>)는 예언적 선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단지 사람에 대한 규정일 뿐만 아니라 ‘생명공동체’ 전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새 한울’ ‘새 땅’ ‘새 사람’ ‘새 만물’은 서로가 한 모태에서 화생(化生)한 동포(同胞)2로서 서로가 서로의 전제 조건이자 각각이 지상천국의 필요조건이 된다는 점이다. 


다만 그중에서 인간은 ‘가장 신령한 자’3로서 나머지 요소들을 아울러 일을 성사시키는4 데에 이르게 하는 주된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주요요소일 뿐 유일한 요소도 아니요, 특권을 누려도 좋은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서 동학의 ‘인간존중 사상’은 서구로부터 유래한 ‘인간중심주의’와는 다르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동학이라는 신앙공동체에 참여한 군자 사람들은 “전 생명계를 하나의 거대한 통일된 몸으로 인식하며, 동귀일체를 삶의 원리로 실천해 나가는 후천 문화 개벽의 선구자들이다. 이 공동체는 전 생명계와의 친화, 협동과 상생, 섬김과 화합의 삶을 지향하기 때문에 영적이며 도덕적 수행을 토대로 스스로 정화하고 쇄신하면서, 전 생명계와 사람람을 하나의 통일적인 살아 있는 건강한 몸으로 탈바꿈시킨, 생명운동 조직”5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의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는 ‘시천주’를 내면화하여 마음과 기운이 본래 자리를 찾아 들어감으로써 외부 조건에 흔들리 않는 상태에 이른 사람이다.6 


이는 수운이 21자 주문 가운데 ‘시(侍)’ 자를 풀이하여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으며,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各知不移]이요.”(<논학문>)라고 한 것과도 상통한다. 불이(不移)이므로 불이(不二)가 되고 그것은 일체(同歸一體)를 깨달아 체득(體得)하는 경지를 말한다. 


또 한편으로 군자는 당대의 현실에서 적서의 차별이나 반상의 차별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다. 해월은 적서(嫡庶)를 차별하는 것이 한 집안을 망치고, 반상을 구별하는 것이 한 나라를 망친다고 하여 신분 차별 철폐를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해월신사법설>><포덕>) 이는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성리학(性理學)은 사단칠정설 (四端七情說)에 기초해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등 상하(上下) 차등을 두어 상(上)에 대한 하(下)의 주종 윤리적 복종을 이기(理氣)의 비례에 따르는 계층적 존재론으로 정당화”7했던 데 반해 수운은 시천주 신앙을 통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의 실천적 반영이다. 


여기서 동학공동체의 중요한 속성을 간취할 수 있다. 즉 동학의 신앙공동체는 지상천국을 지향하는 하나의 운동체이자 그 자체로 지상천국의 하위 구성요소로서의 군자공동체이다. 군자공동체로서의 지상천국을 꿈꾸는 동학으로 당시 민중들이 몰려들었던 것도 바로 양반층이 독점했던 군자가 되는 길을 민중들에게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8 다시 말해 동학의 군자공동체는 ‘천상천국’이 아닌 ‘이 땅의 한울나라’를 지향하는 동학의 근본정신 그대로를 원리로 하여 그려진다.

첫째, 동학은 내일의 천국이 아닌 오늘의 천국을 향유(享有)하는 것을 지향한다. 동학사상은 철저한 현실 부정에서 출발하여 철저한 현실 긍정으로 돌아오는 순환 고리 위에 놓여 있다.9 그것은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온다”(<권학가>)는 선후천의 갈아듦을 선언하는 말에서 드러난다. 수운은 이렇게 역사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당대의 현실과 역사를 인식하고, 지극한 쇠운인 이 시대가 후천개벽을 통해 성운의 시대로 돌입하면, 지상천국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10


구체적으로 지상천국은 ‘땅 위 어느 특정한 지역에 구현되는 한울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발붙이고 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에서 구현되는 세상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세상사람이 무극대도에 참여하는[入道] 순간에 무위이화로 구현되며,11 만권시서를 외우는 어려운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열세 자 주문만 지극히 공부하면 구현된다12는 의미에서 지상천국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며,13 죽은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살아서 누리는 복된 세상이라는 의미에서 지상천국이다. 이러한 동학의 현세 지향성은 한편으로 강한 현실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14 이 현실 부정의 정신이 바로 당대의 민중들을 동학으로 향하게 하는 주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은 이러한 현실 부정을 대립과 갈등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상생으로 새 차원으로 승화시킨다.15 또 선천 시대에 군자의 요건이던 지벌이나 가세, 문필 따위는 후천개벽으로 도래하는 지상천국의 구성원인 지상신선 또는 군자가 되는데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16


둘째, 동학의 동귀일체 사상은 전체(공동체)를 위해 개체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개체가 서로를 살리는 입장에 서 있게 한다.17 이런 점에서 동귀일체는 획일화나 전체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만물의 다양성을 깨닫는 것이 동귀일체의 전제조건이다.18 마찬가지로 개인이 도성입덕하고 지극한 성인에 이르는 길은 전체의 성운에 따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19 


이런 점에서 동학에 입도한 개개인의 수도 자세가 중요한 요소다. 수운은 후천 개벽의 새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며 조급해 하는 교인들을 타이르기도 하고,20 사람의 할 도리를 하지 않고 명만을 바라는 급급한 제자들의 태도를 꾸짖기까지 한다.21 셋째, 개인의 도성입덕뿐만 아니라 ‘세계’의 개벽까지 목적으로 삼는다.2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개벽 혹은 세계개벽은 우리나라의 운수 다음이며 우리나라의 운수는 “요순공맹의 성스러운 인물이 많이 나리라”(<개벽운수>) 하는 개인적 도성입덕으로부터 비롯한다는 점이다. 


물론 각 단계는 독립되고 분절된 것이 아니라 연계되고 통일된 유기적 관계이지만, 어쨌든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사회변혁운동이 ‘개벽운동’의 성격을 규정하고 파악하는 데 있어 우선 고려되는 폐단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후천의 군자공동체(는) … 욕망 억제 체제의 사회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유’ 관념이 나타날 수 있는 적극적인 계기는 발견하기 어렵다”거나 “생산과 발전에 대한 근대적 관념은 상

당히 제한 적”23이라는 동학의 특성도 부정적인 것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빈낙도(安貧樂道)24와 소국과민(小國寡民)25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된다. 이처럼 동귀일체 사상으로 인간관계를 해석할 때 모든 사람들이 도성입덕을 통해 군자가 된 ‘군자공동체’야말로 동학이 이 세상 사람에게 제시하고자 했던 이상사회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시천주를 통해 한울과 사람 사이의 일체화를 이루는 것은 물론 사인여천(事人如天)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체화를 이루고, 대인접물 하여 사람과 만물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삼경[敬天-敬人-敬物]의 경지에 이르른, 즉 한울과 사람과 만물 사이의 일체화가 이루어진 공동체사회임을 알 수 있다.26



4. 지상천국 건설운동의 전개


동학의 후천개벽의 세계관이나 동학이 그리는 이상사회로서의 지상천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각자위심’과 ‘동귀일체’를 동학 이해의 화두로 삼아 동학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 새 작업은 기존의 연구 성과와 동떨어진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동학사상 연구에서 ‘지상천국 건설 또는 군자공동체 구현’의 측면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연구들조차 사상으로부터 현실로 나아가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구현될 수 있는가를 논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27 지상천국 건설의 사상으로서의 동학 연구를 확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학의 역사를 지상천국, 즉 군자공동체건설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글에서는 동학 초기의 공동체 형성의 원리와 더불어 대표적인 동학공동체 조직인 접과 포의 구성 원리를 검토하고 그 이후 동학공동체 운동사를 약술(略述)하자 한다.


(1) 포·접과 신앙공동체


동학 창도 초기에는 수운이 거처하던 ‘용담’28에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29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므로 수운은 의관을 정제하고, 걸어 다니면서 먹지 말며, 드러누워 주문을 소리 높여 외지 말 것 등 ‘동학공동체’의 생활윤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기에 이른다.30 입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동학 본연의 목적인 지상천국 건설을 위한 노력은 신앙(학습)공동체인 접(接)과 포(包)를 바탕으로 해서 조직적으로 진행되어 나간다. 접과 포는 대체로 인맥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공동체와 그것이 확장되어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31 즉, “동학 포덕의 역사에서 포는, 접이 한 마을 등의 가족, 친척, 친지, 계, 두레 등의 생산·생활·혈연적 바탕을 가진 개방 확산적 영적인 공생 공동체였는데 비해, 숱한 이질적인 다양한 특성을 가진 접들을 겹쳐 싸는 산 그물 보따리로서 당시 마을 주민과 주민 사이 삶의 접촉 관계인 상권(商圈), 즉 통혼권(通婚圈)을 따라가면서 퍼져 나갔다.”32 즉 접과 포는 훗날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군 이 ‘기포(起包)’하는 전투 단위이기 이전에 새로운 삶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가려는 사람들의 신앙생활 공동체의 단위였다.


이러한 신앙공동체에 귀속되는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경지에 이르러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되었으며,33 이에 감응된 사람들의 새로운 기운은 기득권자인 유림들에게 심대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킬 만큼 향촌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왔다. 동학의 위세가 커지는 데 위기감을 느낀 양반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동학을 반대하고 탄핵하는 통문을 돌려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서도 동학 신앙공동 체의 성격을 짐작케 하는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들(동학도;필자 주)이 천주(天主)를 송주(誦呪)한 법은 서양에 의부(依附)한 것이고, 부적이나 정화수로 병을 치료한다는 말은 황건(黃巾)을 답습한 것이며, 귀천(貴賤)이 같고 등위(等威)의 차별을 없이 하니 도법자(屠法者-백정;필자 주)라도 여기에 나아가고, 남녀를 섞어 하나의 휘장만을 설치해 두면 원광자(怨曠者-과부와 홀아비)가 여기에 나아가고, 貨財를 좋아하여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베푸니[有無相資] 빈궁한 사람이 기뻐하고…. 34


수운이 살아 있던 당시에는 비교적 소규모의 공동체 집단인 접만 구성되었다.35 그러나 접·포의 개벽적 의의와 성격은 접의 단계에서 이미 구현되고 있었다.


동학이라는 신앙공동체는 최제우가 포덕할 당시 조직적 차원에서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등주의라는 새로운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집단을 조직했다. 이 자체가 이미 사회변혁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36


수운이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의 죄목으로 대구감영의 사형장인 장대(將臺) 관덕당(觀德堂) 앞뜰에서 순도(1864.3.10)한 후37 동학의 도통을 계승한 해월(海月 崔時亨, 1827-1898)은 관의 추격을 피해 산지사방으로 옮겨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흩어진 동학교인들을 수습하고 경전 간행38을 통해 교단의 항구적인 발전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해월의 포덕 활동 덕분으로 접의 숫자나 규모, 분포 지역이 확장되고 확대됨에 따라 1890년대 초에 여러 개의 접을 아우르는 조직으로서 포(包)가 등장한다. 


1893년의 보은취회는 이 포를 기본 단위로 하여 동학도들이 집결함으로써 규모 있게 진행되었으며39 이는 동학의 조직력을 시험하고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군의 ‘기포’가 비교적 원할이 진행될 수 있었다. 한편, 동학의 포접제는 전통사회의 생활공동체인 두레의 전통을 계승한 바탕 위에 동학의 사인여천 윤리가 통용되고 “하늘에서 열고 하늘에서 접하니 하늘에서 운을 받고 하늘에서 명을 받는 개접의 이치”40를 아울러 접과 접의 연대에 의해 구축된 체계이다. 


초창기에 접은 30~50호의 동학도들로 이루어졌다. 한 호(戶)의 가족 수를 4-5인으로 볼 때 대략 200명에서 250명 정도의 집단이 된다. 한 집단 내에서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인간적’으로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최대 규모의 인원이 300명 내외라는 공동체 운동 원리를 놓고 보더라도 접은 매우 이상적인 공동체의 규모임을 알 수 있다. 이 접 집단의 규모가 커져서 포를 이루게 되어서도, 접이 해체되고 포 조직으로 단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포가 일종의 ‘접 연합체’ 형식을 갖고 있었다.41 즉 동학교단 조직에서 접이 공동체 원리를 좀더 직접 적으로 드러내는 조직 단위라고 한다면 포는 상대적으로 결사체(結社體)의 성격이 강한 ‘공동체 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42 이처럼 접 연합체가 보편적 조직 단위로 통용되는 단계에 이르러 자연 발생적인 원리, 즉 생명 원리43를 광범위한 영역까지 미치게 하려는 필요성에 의해 육임제(六任制)라는 제도를 빚어낸다.


육임은 교장(敎長, 알차고 덕망 있는 사람), 교수(敎授, 성심 수도하여 가르칠 사람), 도집(都執, 위풍을 갖추고 기강을 세워 다스릴 사람), 집강(執綱, 시비를 밝혀 기강을 잡을 사람), 대정(大正, 공평을 유지하며 근후한 사람), 중정(中正, 능히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사람)이며, 그밖에도 도소(都所, 전국을 통괄하는 최고 지도부가 설치된 곳), 장실(丈室, 北接法軒 해월 최시형이 머무르며 지도하던 곳), 봉교(奉敎, 장실의 비서), 접사(接司, 접주의 연락 사무 담당) 등의 기구가 1880년 대 이후 차례로 마련되었다.44 


접과 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투 단위로 전환되었다가 집강소 통치기에는 행정단위로, 혁명전쟁 이후 다시 신앙 조직으로 전환하여 오늘날에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오늘날 천도교에서도 ‘포(布)’라고 불리는 각 단위 조직은, 도정(道正)이라고 불리는 대접주 산하에 도훈(道訓), 교훈(敎訓) 등의 소접주를 포함하고 있다. 이 ‘포(布)’는 순수 인맥 조직의 성격을 그대로 계승하여 전교(傳敎) - 수교(受敎)의 계통이면 전국 어디에 있든지 같은 포에 속하게 된다. 한편 포·접의 지역적 속성은 오늘날 교구(敎區) - 전교실(傳敎室)로 변천되어 계승되고 있다.45 


동학의 후예들인 오늘날의 천도교인들은 연원의 윤리, 즉 포(布)의 활성화만이 침체된 천도교의 부흥을 가져와 동학 본연의 지상천국 건설운동이 다시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난 한 세기 동안의 동학 계승 역사에서 접·포 내부의 인맥 간에 신앙적 유대와 교화 관계가 지나치게 느슨해진 것이, 오늘날의 동학(천도교)이 초기의 후천개벽 운동의 활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포의 활성화란 다름 아닌 포나 교구를 막론하고 신앙공동체의 성격을 되살려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동학농민혁명과 갑진개화운동


동학농민혁명(1894)과 갑진개화운동(1904)은 접·포라는 신앙공동체가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적 과제에 정치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사회적·역사적 과제 상황, 즉 보국안민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 운동이었다. 다시 말하면 동학이 지향하는 이상사회로서의 군자공동체, 즉 지상천국 건설의 장애 요소인 왜와 양의 침략을 일거에 제압하고 국정을 쇄신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을 수립하려는 운동이었다. 


당시 제국주의 세력은 전 세계적으로 확장일로를 걷는 가운데 시시각각으로 동양 각국과 우리나라에까지 압력을 가하여 왔고, 한편으로 조선조 사회조차 국가적 구심력과 지도력을 상실하여 국가의 위기 상황은 날로 심화되어, 사람들은 정신상으로나 경제상으로 극도로 피폐해지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동학 신앙을 금압(禁壓)하는 조정의 태도와 이를 빌미로 수탈을 자행하는 지방관의 횡포는 나날이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은 안으로 침잠하며 접과 포의 신앙공동체의 내실을 다지는 데서 다시 방향을 선회하여, 실천적인 변혁·저항 운동을 통해 보국안민을 실천하는 데로 역량을 분출한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권귀진멸(權貴盡滅)과 척왜양창의(斥倭洋昌義)의 기치를 내걸고 무력을 동원하여 일거에 체제를 혁신하려는 운동에 나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자칫 동학군 내부의 분열상으로 비치기도 하는 지역 단위의 동학군의 배치와 자율적 활동은 사실은 동학군이 각 지역 단위 동학 공동체-포-의 연대를 바탕으로 구성된 ‘자치 연대’의 형태로 조직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46 이와 관련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한때의 일이고 전라도에 국한되기는 했으나, 정부와 협의를 통해 이끌어 낸 집강소(執綱所) 정치를 통해 민정(民政)과 자치(自治)의 역사를 구현한 것은 지상천국 건설운동의 역사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47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를 거울삼아 전개한 갑진개혁운동 또한 보국안민의 계책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이제 보국안민의 계책이 상중하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거혁명(大擧革命)하여 폐혼입명(廢昏立明)이 그 상책이요, 둘째는 그 나쁜 정부[惡政府]를 소탕하고 신정부(新政府)를 조직함이 중책이요, 셋째는 러일전쟁에 간여하여 전승국[優勝]의 지위를 획득함이 하책이라.48


갑진개혁운동은 성신쌍전(性身雙全)과 교정일치(敎政一)이 이념으로 종교적 수도와 더불어 흑의단발(黑衣斷髮)로 결의를 다지고 민회를 통해 비정혁신(批政革新)을 이끌어 냄으로써 국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동학 신앙의 자유를 꾀하며 그를 통해 만 백성을 새 문명 세계로 인도하고자 한 변혁운동이었다.49


그러나 진보회 운동이 이용구에 의해 변질되면서 동학의 보루마저 오염될 위기에 처하자 의암(義菴 孫秉熙, 1861-1922)은 ‘동학’에서 ‘천도교’로 대고천하(大告天下)하고 근대화(제도종교), 철학화를 통해 동학의 지상천국건설 노력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때 시급하게 제기된 운동의 내용은 그 첫째가 민지(民智)계발 사업으로서 교육운동과 언론운동이었으며, 둘째가 근대(서구)적 제도종교로의 대대적인 개편을 통해 주류사회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그 성과로 동학교단은 대대적인 제도의 정비를 거쳐 동학농민혁명 이후 와해되었던 교세를 일거에 회복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 무렵 신진 개화 지식인을 동학교단에 영입함으로써 교단의 활력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성과와 더불어 이신환성(以身煥性)의 연성 수련50을 통해 쌓은 내적 역량을 이 3·1운동을 통해 분출하였다.


이어 1920년대 이후 문화운동 형식으로 전개된 동학의 운동은 ‘신인간 창조 운동’ 등과 같이 동학의 사상과 수양으로 거듭난 ‘신인간’, 즉 근대화된 군자들 에 의한 신세계 수립, 신문명 건설을 추구한 지상천국 건설운동이었다.51 이러한 천도교의 이상사회 추구에 대한 집념은 동학교단 내부뿐만 아니라 당시 ‘공산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새롭게 세력을 키워 가던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 세력들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52

(3) 대고천하 이후의 지상천국 건설운동


한편에서는 동학의 지상천국 건설운동에 대해 “동학의 미래에 대한 설계는 ‘지상신선’과 ‘지상천국’을 상정하면서 유토피아의 세계를 구상하였고, 합리적으로 체계화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미래 세계를 실현가능하게 정립하지 못했다”53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동학의 종교사상 속에는 유토피아적 변혁사상이 내포되어 있으나 근대적 민족국가 형성의 선명한 미래상을 부각시키기에는 사상적 토대가 너무도 전통적 유교고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 1920년대 이후 정치적인 면에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과제를 감당해야 할 단계에 와서는 종교적 방면을 정치적 도피처로 이용하기도 하고 점차 한국근대사의 중심적 과제와 대결할 비전도 리더십도 잃어간다”54고까지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동학의 개벽사상에 입각한 지상천국 건설운동이 몽환적이고 내세적이 아닌 만큼, 투쟁적이고 대결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도외시한 단면적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초창기의 천도교 교리 연구가인 오상준은 대고천하 직후인 1907년에 발간한 교리 입문서인 <<초등교서>>에서 동학(천도교)이 인간·사회·국가와의 연관 속에서 생활종교로서 지상천국건설에 나서고자 하는 절차와 도정을 서술하고 있다.55 


또 20년대 이후의 동학(천도교)의 운동사에서도, 최근 들어 비로소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하는 천도교청년동맹의 민족운동이나 조국광복회와의 연대 활동 등 비타협적 민족운동이나 무장 독립투쟁사56는 차치하고라도, 1920~30년대의 각종 문화운동의 근본이념을 ‘전적운동(全的運動)’이라 한 데서도 지상천국 건설운동과 관련한 새로운 연구 과제는 적지 않게 발견된다. 전적운동이란 “우리 교(천도교; 필자 주)의 목적이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또는 지상천국이니만치 우리 도는 어디까지나 전체 운동입니다. 전 우주의 운동이요, 전 인류의 운동이요, 전 세계의 운동입니다. 온 인류로 하여금 미화·선화를 하고, 온 세계로 하여금 천국적 낙원을 만들자는 것이 즉 우리 도의 목적입니다”57라고 하는 데서 보이는 것처럼 당대의 동학도인들이 동학의 운동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말이며, 비록 운동의 역량이 소진되고 칼끝이 무디어졌다 하더라도 지상천국을 지향하는 종교적 정신은 굳건히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전적운동은 그때까지 동학의 지상천국 건설운동을 당대 현실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재조직하려는 당대 동학도(천도교인)의 깊은 신앙적 고뇌 속에서 나온 그 시대의 지상천국 건설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조선농민사의 농촌계몽운동이나 공생조합운동, 공동경작운동은 최근 대안경제체제 건설 운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협동조합공동체’ ‘생태마을공동체’ 등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연구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선)농민사는 당면문제의 해결을 통하여 장래에 있어서 신사회 실현의 기초를 준비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들이 구상하는 신 사회란, 예를 든다면 ‘농민을 본위로 한 정치와 경제와 종교와 문학과 예술과 교육 등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이며, ‘농민본위의 사회적 기초와 농민경제를 중심으로 한 경제제도’를 갖는 사회”58라는 설명은 당시 인구 구성으로 보아 농민운동이 계층운동이라기보다 ‘전체운동’으로서의 성격이 짙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좀더 본격적인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일반 민중으로 하여금 재래의 인습을 타파하고 우리당(天道敎靑年黨, 필자 주)의 이상(理想)하는 지상천국 생활을 모 두 동경할 기회를 주기 위한 운동”이라고 성격을 규정한 통속운동59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또 언론출판운동이나 어린이·학생·청년·여성 등의 각 부문 운동도 구체적인 전개 양상만을 살피거나 일제의 ‘문화주의’ 정책의 산물이라는 한계를 지적하는 데서 선회하여 “이전의 시대가 물질적 문명이 실패한 시대이니만큼 앞으로의 시대는 도덕적 문명의 시대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도덕적 문명은 자천(自天)을 신앙하는 천도교에 의하여 실현될 것”60이라고 한 천도교 문화운동 주도자들의 의식에도 주목하여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4. 결론 ; 지상천국 건설운동의 과제


동귀일체를 기반으로 하는 동학(천도교)의 이상사회 건설운동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으며, 분단이라고 하는 격변기에도 전위단체(청우당, 보국당)를 통해 ‘민족통일’을 계기로 하여 표출되었다. 이를테면 천도교청우당이 주요 강령으로 


1.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 건설(민족주의, 민주주의), 

2. 사인여천의 정신에 맞는 새 윤리의 수립(민권주의, 자유주의), 

3. 동귀일체의 신생활 이념에 기초한 새 경제제도의 실현(민생주의, 평등주의) 등이다”61


라고 한 것이나 천도교보국당(天道敎輔國黨)이 그 강령으로 


1. 인내천주의의 교정(敎政)의 실현 

2. 오심여심[吾心(卽)汝心]의 민족주권 독립국가의 건설 

3. 동귀일체의 세계적 평화수립62 


등을 내세운 것이 그것이다. 창도 이후 동학의 백년 역사를 이처럼 지상천국 건설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하고자 할 때, 동학은 과거 한때의 ‘위대했던 운동’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사상이자 운동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또 한편으로 오늘날 동학의 사상과 신앙이 사회의 이면으로 물러 앉아 소침(銷沈)한 현실을 타개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동학은 역사나 철학만이 아니며, 또한 사상이나 ‘제도화된 종교’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후천개벽으로 군자공동체인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문명사 차원의 시도였다. 즉, 본체생명인 한울님이 자기실현[有功]을 위해 노력[勞而]하는 과정이 바로 생명과 정신 그리고 인류의 역사이며, 이를 당대 현실에서 구현한 것이 동학이었다.


군자공동체 혹은 지상천국은 단지 추상적인 이상사회상으로서뿐만 아니라 현실화된 모습으로 끊임없이 연구·논의되어야 한다. 최근 들어 협동조합운동이나 대안공동체운동, 기본소득을 통한 평등사회 구현 등의 논의도 그 뿌리를 동학의 이상사회 건설운동에서부터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동학(天道敎)이 단지 한 교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민족, 나아가 인류 사회가 공히 누려야 할 유산63이자 현재의 세계가 직면한 과제 상황에 대한 근본 대안을 제시할 진리이기 때문이며, 또 그런 관점을 가질 때 동학교단이 전개해 온 일련의 운동들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 이해하는 한편, 각각의 운동들의 성과와 한계도 분명히 비평할 수 있는 준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64 다시 말해 동학의 교리, 사상, 철학을 이해하는 방식은 그것이 얼마나 동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했는가 하는 관점, 즉 ‘천도의 측면’과, 그것이 구체적인 역사 시대의 국면을 얼마나 이해하고 그에 적절하게 조응했는가 하는 관점 즉 ‘동학의 측면’ 양 방향에서 그 성패와 공과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동학은 구체적인 국가공동체 또는 민족공동체를 도외시한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되 한 왕조 또는 한 국가에 국한된 이념이나 정치사상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동학은 창도 이후 계속하여 사람들에게 살 길을 열어 주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구제의 방책을 제시해 왔다. 동학이 내세운 보국안민의 관념은 시대와 세계 환경에 따라서 무력혁명의 방법에서부터 문화운동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지만, 그 근본은 이상사회인 군자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는 믿음, 공경, 정성이라는 실천이었으며 후천개벽의 천명을 내면화한 군자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였다. 

그동안의 동학 연구는 동학의 측면 그 중에서도 ‘운동’의 측면에서 전체를 아울러 보려고 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내천’이나 ‘사인여천’ 등의 화두를 이 시대의 대안적인 사상의 실마리로 이해하려는 연구 태도가 주목을 받고 있으나 아직은 미흡한 실정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동학의 큰 틀은 군자들이 ‘동귀일체’한 군자공동체로서의 이상사회-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신앙 즉 ‘천도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에 기울이는 관심만큼을 “밥그릇 하나 들어서 몇 뼘 안 되는 밥상 맞은편에 옮겨 놓은 것[向我設位; 필자 주]과, 밤중의 제사 시간으로부터 대낮의 식사 시간으로 (제사)를 옮겨 놓은 것은 보잘 것 없는 수고인 것 같으나 … 모든 기성종교의 인내천적 개혁을 상징한다. 그것은 밤의 저승과 죽음의 피안(彼岸)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대 낮의 이승과 삶의 차안(此岸)으로 인내천의 발걸음을 옳겨 놓은 혁명적 삼보(三步)”65라거나, “동학사상은 동귀일체적(同歸一體的) 지상신선사상(地上神仙思想)에 이르러, 가장 반봉건적, 반 계급주의적, 다시 말하자면 민중주의적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66는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있었던 사건으로서의 역사’뿐만 아니라 ‘이루려고 했던 역사’에까지 동학연구의 지평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며, 전자에 있어서 한계와 실패로만 나타났던 역사적 사건들의 본래 의미도 비로소 제 빛을 발하게 되어 후천개벽 사상, 군자공동체로서의 지상천국 건설운동이라고 하는 동학의 진면목은 다시 인류와 생명계의 역사에 새 지평을 열어 줄 것이다.


01 『동경대전」, <결(訣)>, “問道今日何所知意在新元 年成功幾時又作時莫為恨晚其為然時有其時恨奈何新朝唱韻待好風去歲西北靈友尋後知吾家此日期,春來消息應有知 地上神仙聞近 此日七時靈友會 人道其中不知心” 이 시의 제목인 ‘訣’은 ‘秘訣’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이 시는 후천개벽 세상에 대한 예언적 성격을 갖고 있다.

02 『해월신사법설』, <삼경>, “敬天함으로써 人吾同胞 物吾同胞 全的理諦를 깨달을 것이요.”

03 『동경대전』, <논학문> “陰陽相均 雖百千萬物 化出於其中 獨惟人最靈者也.”『; 용담유사』, <도덕가> “天地陰陽始判後에 百千萬物 化해 나서 至愚者 禽獸요 最靈者 사람이라.”

04 『동경대전」 <포덕문>, “余亦無功故 生汝世間 敎人此法”;『 용담유사』, <용담가>,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 너희 집안 운수로다.” 다시 말해 全知全能하고 無所不爲하고, 無事不涉하고 無漏無增한 한울님의 능력도 너=수운=사람을 만나서 비로소 발휘된다는 말이다. 神人 相應相補의 이 교리야말로 동학사상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이다.

05 홍성엽 외,『경전으로 본 세계 종교, 전통문화연구회, 2001, 409쪽.

06 『동경대전』, <논학문>, “군자의 덕은 기운이 바르고 마음이 정해져 있으므로 천지와 더불어 그 덕에 합하고 소인의 덕은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옮기므로 천지와 더불어 그 명에 어기나니, 이것이 성쇠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07 申一徹, <崔水雲의 歷史意識)『, 韓國思想』12집, 40-41쪽.

08 송준석『, 동학의 교육사상』, 학지사, 2001, 49-51쪽 참조.

09 曺敏, <東學 : 국가 없는 사회의 理想>『, 동학연구』 3, 한국동학학회, 1989,9, 49쪽 참조.

10 尹錫山『, 수운 최제우 연구』, 慶州大學校 慶州文化硏究所, 2001, 199쪽 참조.

11 『용담유사』, <敎訓歌>,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 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 아니냐.”

12 『용담유사』, <敎訓歌>, “열세 자 至極하면 萬卷詩書 무엇하며 心學이라 하였으니 不忘其意 하였어라. 賢人君子 될 것이니 道成立德 못 미칠까.”

13 『용담유사』, <龍潭歌>, “나도 또한 神仙이라 飛上天한다 해도 이내 仙境 구미용담 다시 보기 어렵도다.”; 김지하, <개벽과 생명운동>『, 신인간』통권 487호, 1990.10, “向壁設位는 저 벽 쪽에, 내 시선의 저쪽, 시간적으로는 미래에, 내일에 신이 있고, 천국이 있고, 약속의 땅이 있고, 행복된 낙원이 있다는 식의 구조입니다. … 자기 꿈과 모든 희망을 미래에로 저 벽 쪽에 갖다 놓고 그 쪽에 절하면서 오늘을 견디고 희생하는, 오늘을 없이 하는, 오늘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생활 (중략)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제사 드리고 있는 상제, 즉 사람, 나, 우리 속에 살아 있는 신, 우리 속에 살아 있는 우주 생명, 우리 속에 지금 여기서 실현되어야 할 낙원, 이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따라서 향아설위(向我設位)는 메밥의 위치를 벽에서부터 제사 지내는 상제의 앞으로 돌려놓음으로써 인류문명사 전체를 개벽 시키는, 사상적으로 개벽 시기는 일대 전환점을 만든 것입니다.”

14 『용담유사』, <慶老少問答歌>, “아서라 이 세상은 堯舜之治라도 不足施요. 孔孟之德이라도 不足言이라. 胸中에 품은 懷抱 一時에 打破하고….

15 『용담유사』, <敎訓歌>, “富하고 貴한 사람 以前 時節 貧賤이요 貧하고 賤한 사람 오는 時節 富貴로세. 天運이 循環하사 無往不復 하시나니….” 여기서 현실 사회의 貧賤者는 富貴者의 富貴를 차지함으로써 ‘새로운 부자’와 ‘새로운 빈자’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有無相資’라는 양식으로 이해에 접근해야 한다.

16 『용담유사』, <道德歌>, “若干 어찌 修身하면 地閥 보고 家勢 보아 趨勢해서 하는 말이 아무는 地閥도 좋거니와 文筆이 有餘하니 道德君子 分明타고 冒沒廉恥 推尊하니 우습다 저 사람은 地閥이 무엇이게 君子를 比喩하며 文筆이 무엇이게 道德을 議論하노.”

17 『해월신사법설』, <待人接物>, “한 사람이 착해짐에 천하가 착해지고, 한 사람이 화해짐에 한 집안이 화해지고, 한 집안이 화해짐에 한 나라가 화해지고, 한 나라가 화해짐에 천하가 같이 화하리니, 비 내리듯 하는 것을 누가 능히 막으리오.”

18 『동경대전』, <不然其然>, “千古之萬物兮 各有成各有形”

19 『용담유사』, <敎訓歌>, “運數야 좋거니와 닦아야 道德이라 너희라 무슨 팔자 不勞自得 되단 말가. 해음 없는 이것들아 날로 믿고 그러하냐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어서라. 네 몸에 모셨으니 捨近取遠 하단 말가.”

20『동경대전』, <嘆道儒心急>, 특히 “玄機는 不露하나니 勿爲心急하라”는 구절 등이 그러하다.

21 『용담유사』, <道修詞>, “急急한 諸君들은 人事는 아니 닦고 天命을 바라오니 猝富貴 不祥이라 萬古遺傳 아닐런가 修人事 待天命은 仔細히도 알지마는 어찌 그리 急急한고.”

22 『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 “우리 도는 우리나라에서 나서 장차 우리나라 운수를 좋게 할 것이라. 우리 도의 운수로 인하여 우리나라 안에 영웅호걸이 많이 날 것이니, 세계 각국에 파송하여 활동하면 형상 있는 한울님이요, 사람 살리는 부처라는 칭송을 얻을 것이니라.”

23 조민, 앞의 글, 48쪽.

24 林鍾哲, <東學의 經濟理念>, 유병덕 편,『 東學·天道敎』, 1993, 敎文社, 476쪽. “(동학의)안빈이란 당시의 물질적 생산력이 허용하는 생활수준의 평균에 만족하고 결코 물욕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제철학이라고 해석된다. … 낙도는 자연히 도덕적 가치로의 빠른 전환을 가르치시는 것으로 해석 된다.” 이와 관련하여 ‘후천개벽’의 세상, 즉 ‘지상천국’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경제 활동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빈곤 문제나 교육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논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 논구는 사변적이고 학구적인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역사 현장과 현재의 동학(천도교)에 대한 實査와 더불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5 조민, 앞의 글, 참조『; 해월신사법설』, <待人接物>, “人是天이니 事人如天하라.”

26 李明男, <初期東學의 政治思想的 性格에 관한 硏究>, 釜山大學校大學院博士學位, 1992, 69-71쪽 참조.

27 오문환, 앞의 <수운 최제우(동학)에 대한 연구 현황> 11쪽 참조.

28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는 水雲이 태어난 곳이다. 그 앞으로 龜尾山이 가로 놓여 있고 구미산의 주 계곡은 용담골로 불리며, 그곳에 수운이 동학을 창도한 장소인 ‘龍潭亭’이 있다.

29 『동경대전』, <修德文>, “開門納客 其數其然 肆筵設法 其味其如 冠子進退 况若有三千之班 童子拜拱 倚然有六七之詠 年高於我 是亦子貢之禮 歌詠而舞 豈非仲尼之蹈.” 이 용담의 동학공동체는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 춤추는 문화 양식까지를 아울러 갖춘 공동체였다. 동학의 신앙공동체의 존재 양식과 운영 원리는 앞으로 본격적이고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야 詳論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연구에는 ‘종교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30 『동경대전』, <修德文>, “仁義禮智 先聖之所敎 守心正氣 惟我之更定 一番致祭 永侍之重盟 萬惑罷去 守誠之故也 衣冠整齊 君子之行 路食手後 賤夫之事 道家不食 一四足之惡肉 陽身所害 又寒泉之急坐 有夫女之防塞 國大典之所禁 臥高聲之誦呪 我誠道之太慢 然而肆之 是爲之則” 이것은 동학에 참여하여 새로 운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기로 맹세한 동학도들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수칙 중 일부이다. 이것은 동학이 고유한 생활 윤리를 가진 생활공동체로 확립된 것을 의미한다.

31 접과 포를 모두 ‘인맥’을 따라 조직한 단위 조직으로 보기도 하지만, 인맥에 따라 형성된 신앙공동체가 어느 정도의 규모를 넘어서는 순간 그것은 지역적 속성을 어느 정도나마 띨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이 구

성되는 원리는 ‘人脈’이지만 존재하는 형식은 ‘地域性’을 갖게 마련이었다. 이에는 이동이 빈번하지 않았던 당

시의 사회상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32 김지하, <동학사상과 지상신선의 실현>,『 동학사상의 시대적 사명과 현실적 과제』, 동학사상토론회 팜플렛 (1991.11.28) 14쪽.

33 『동경대전』, <修德文>, “美哉 吾道之行 投筆成字 人亦疑王羲之迹 開口唱韻 孰不服樵夫之前 懺咎斯人 慾不及石氏之貲 極誠其兒 更不羨師曠之聰 容貌之幻態 意仙風之吹臨 宿病之自效 忘盧醫之良名.” 이러한 현상은 주로 呪文 修練의 결과로 일어난다.

34 崔孝軾, <水雲 崔濟愚의 生涯와 思想>,『 동학연구』 2, 한국동학학회, 1998.4, 61쪽 참조. 특히 ‘有無相資’라는 구절은 이 글 각주 58)의 문제의식 속에서 구체적으로 論究되어야 할 대목이다.

35 布德3년(1862, 壬戌) 歲暮에 水雲은 홍해 매곡의 손봉조家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때 직접 慶州府西 白士吉 등 모두 10여 개 처의 접주를 정하였다. <崔先生文集道源記書>『, 韓國學資料叢書-東學農民運動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6, 196쪽 참조.

36 김기승,『 <용담유사』의 역사적 이해- 최제우 사상의 발전과정을 중심으로>, 동학학회 편저『, 동학과 동학경전의 재인식』, 신서원, 2001, 118쪽.

37 표삼암(영삼), <대구관덕당>『, 신인간』 356호, 1978.3, 58-64쪽 참조.

38 수운의 한문 저작을 모은『 東經大全』이 1880(庚辰)년 6월에 인제군 갑둔리에서 처음 간행되고 한글 저작을 모은『 龍潭遺詞』가 1881(辛巳)년 6월 충북 단양 샘골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나 이 두 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동경대전의 現存 最古 판본은 1883(癸未)년에 간행된 것 ‘계미판’이다.

39 陳鉉, <報恩 斥倭洋倡義運動)『, 韓國思想』第24輯, 1998, 211 254쪽.

40 <崔先生文集道源記書>, 앞의 책, 270쪽..

41 表暎三, <接·包 組織과 南·北接의 實像>『, 韓國學論集』第25輯, 156쪽. 그동안 동학의 接·包 조직에 관해서는 주로 동학농민혁명 기포 당시 동학군의 동원 체제를 이해하는 방편으로 연구되거나 남·북접 대립의 상황에서 동학교문과 동학농민혁명의 상관성을 밝히는 연구의 일환으로 이해되어 왔다. 접이나 포가 원래 동학의 신앙 공동체였다는 관점에서 접·포 운영의 실상을 논구하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42 노태구『, 동학과 신문명론」, 아름다운 세상, 2000, 141쪽 참조.

43 趙鏞一, <孤雲에서 찾아본 水雲의 思想的系譜>『, 韓國思想』第9輯,韓國思想硏究會, 1968, 143-176쪽. 이 글에서 조용일은 동학의 ‘접’과 ‘포’가 고운 최치원이 밝힌 화랑도의 운동 원리인 ‘接化群生’과 ‘包含三敎’에서 온 말이며, 또한 수운이 侍 자를 풀어 말하며 內有接靈之氣라고 한 것과도 통한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했다.

44 表暎三, <東學敎門의 成立過程>, <<韓國思想>> 第24輯, 韓國思想硏究會, 1996, 119쪽.

45 2000년 말 현재 천도교에는 30여 개의 포(布)와 150여 개의 교구-전교실이 있다.

46 이는 오늘날 새롭게 전개되는 대안사회운동으로서의 공동체운동에서 공동체 내부의 권위주의를 배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비추어 보아도 매우 시사적이다.

47 盧鏞弼,『 [東學史]와 執綱所 硏究』,國學資料院,2001 참조. 이 책에 게재된 집강소 연구 논문에서 노용필은 집강소가 ‘地方自治機關’이었다는 주장은 지나치다(187-190쪽)고 하고 다만 동학군들의 폐정개혁 요구가 기존의 행정체계를 통해 道政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려는 組織이었다고 보았다(190쪽).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論究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전라도라는 한정된 지역만을 장악한 동학군으로서는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권력기구를 획득하였다’는 수준만 인정할지라도 집강소의 의의는 적지 않다고 할 것이며 특히 “9월 13일 전봉준이 동학군들의 재봉기를 촉구한 이후에는 … 동학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수행함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210쪽)” 등을 보아서도 집강소의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48 이돈화, <天道敎創建史>『, 東學思想資料集』, 서울 亞細文化耐, 1973, 221

49 갑진개혁운동의 시말은 이현종, <갑진개화혁신운동의 전말>,『 동학사상론총』 제1집, 천도교중앙총부, 포덕123(1982), 105-121쪽 참조. 의암은 이 운동을 통해 동학을 조선의 국교로 삼아 세계 문명을 선도하는 나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50 일제에 국권이 피탈된 직후인 1912년 4월 15일 시작된 제1회 49일 기도를 시작으로 1914년 2월 5일 시작된 제7회 49일 기도에 이르기까지 7차에 걸쳐 전국 483명의 두목들을 서울 우이동의 봉황각라는 수련장에서 수도하도록 하여 이들이 각 지역으로 귀환하여 동학(천도교)의 신앙과 국권회복운동의 연결을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을 구축하였다.

51 1924년 10월 28일. 수운탄생백주년기념사업으로 <大神師出世百周年紀念館(서울 종로구 경운동 88)>을 세우고 전국적으로 포덕 전단을 배포했다. 여기서 수운의 생애를 정리하여 “人乃天主義의 창시자, 地上天國의 唱道者, 사상혁명의 주동자 원조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 … 당시 조선특권계급의 배척을 받아 필경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지상천국의 미래를 고창하면서 형을 당하니 당년이 41세”라 했다. 이어 수운 선생의 사상을 4개 항으로 정리했는데 “제1 신인일체(神人一體) … 제2 후천개벽(後天開闢) … 제3 사람성자연(性自然) … 제4 지상천국(地上天國) : 천도의 교의(敎義)는 인류사회 장래에 당연히 도래할 만한 지상천국을 주창하여 인간의 극악생활을 세상에 건설하기로 고안한 것”이라고 했다. 韓國思想硏究會『, 韓國思想』 12집, 592쪽 재인용.

52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은 인내천이라는 천도교의 종지가 공산주의의 본지와 같다고 보고, 천도교와 연계하여운동을 전개할 것을 1924년경부터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조규태, <1920년대 천도교연합회의 변혁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집, 1996, 230-231쪽 참조)

53 신용하, <西勢와 體制에 대한 東學의 對應)『, 韓國의 社會와 文化』第19輯, 별쇄본, 50쪽.

54 신일철, <東學思想의 展開>, 유병덕 편, 앞의 책, 437쪽.

55 송준석, <初等敎書>(자료소개), <<한국민족운동사연구>>28,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1.8, 396-401 쪽 참조, 송준석이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한 <초등교서(初等敎書)>는 天德, 師恩, 吾天, 吾敎, 吾天의 要素, 吾敎의 精神, 人의 職分, 人의 自由, 人의 資格, 衣食住와의 關係, 衛生, 經濟, 國家, 我國의 精神, 法律의 槪義, 人民과 國民, 個人과 團體의 關係, 吾-吾敎-吾國의 關係, 吾敎와 吾國의 關係, 吾敎人의 義務, 吾國人의 義務, 道德, 倫理, 慣習, 正心, 誠意, 結論 등 총 2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국민수지>(1906, 작자미상)<유년필독>(현채, 1907)과 더불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많이 읽혔던 문명 계몽서였다.

56 이에 대해서는『 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 543-640쪽의 ‘천도교 청년회와 민족운동’ 항목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조국광복회와 천도교의 연대 움직임은 노태구 지음,『 평화통일의 정치사상』(노태구 지음, 신인간사, 2000년) 233-266쪽의 제8장 ‘천도교와 민족통일전선’ 참조.

57  朴達成 記, <도령(崔麟) 선생의 말씀 그대로>『, 신인간』 통권 51호(1930.9), 2쪽.

58  최창파 역, 西條勉, <조선농민사의 자립경제운동>(上)『, 신인간』통권 421호 (1984.8.9.합병), 34쪽.

59  通俗運動의 전개과정은『 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 제7절 천도교의 사회화를 위한 통속운동, 399-422쪽 참조.

60  金明昊, <時代>『, 天道敎會月報』 115호, 1920.3, 68쪽.

61  노태구, 앞의 책, 135쪽.

62  韓國思想硏究會, 앞의 책, 592쪽 참조.

63  <<의암성사법설, 천도교와 신종교>>, “天道敎는 天道敎人의 私有物이 아니요. 世界人類의 公有物이니라”

64  그동안 東學의 史觀을 循環史觀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연구들은 많았으나 정작 東學史를 연구하는 史觀 다시 말해 동학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소홀히 하였다. 어떤 관점을 갖는가에 따라, 역사 적인 사건의 의미와 내용도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65  尹老彬,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 東學思想과 東學革命』, 청아출판사, 1984, 155쪽.

66  李明男, 앞의 논문,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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