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은 종교운동이며, 독립선언서는 민족의 대헌장이다
[필자주 : 이 글은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의 발표(2019.11.22)와 <신인간>(2019.2, 3, 4월호 3회 연재 예정)에 투고하는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증보한 것이다. [발표 및 신인간의 230여 매 원고가 450여 매로 증보되었다.] [3월 1일이 되는 날까지 이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발표 당시에 "3.1운동"이라고 한 것을"3.1혁명"으로 호명하였다. - 구체적인 논증은 別稿를 기약한다]
Ⅰ. 기도와 상상력으로 3.1혁명 바라보기
Ⅱ. 3.1혁명은 다시개벽 혁명이다 (이상 1회)
Ⅲ. 3.1혁명은 종교운동이다 (2회)
Ⅳ. 독립선언서 전말기 (3회)
Ⅴ. 종교적 ‘상상력’으로 독립선언서를 읽자 (4회)
독립선언서는 기도문이자 비는 글이므로 그 안에는 당연히 ‘바라는 바’가 들어 있다. 자주, 독립, 정의, 인도, 평화 등도 그중 핵심적인 주제어이기도 하지만, 전일(全一)적인 관점에서 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천지(天志․天智)가 빚어 놓은 비결(祕訣)02로서 그 속에서 우리 민족과 인류의 미래 비전(祕典)을 발견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글은 우리 민족 전체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널리,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많이 되풀이되어 읽고 공감한 글이다. 그런 점에서 ‘민족의 헌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헌장에는 우리 민족의 비전이 들어 있다.
3.1혁명 80주년을 앞둔 1999년 전후로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새천년에 우리 민족과 인류 사회에 귀감이 될 정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때 독립선언서에서 ‘미래지향적인 삼일정신’03으로 일곱 가지를 발견하였다. 필자는 그러한 미래지향적인 삼일정신을 가능케 한 근본 동력이 바로 종교적인 상상력 내지 낭만성으로부터 기인했다고 믿는다.04
첫째, 독립선언서는 자유와 평등, 평화와 행복의 새로운 인류 사회를 제시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자주 독립의 선언인 동시에 헌장(憲章-21世紀大憲章)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중략) 1942년 이후에 제정된 유엔헌장보다 20~30년이 앞선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중략) 독립선언서는 자유, 평등, 평화뿐만 아니라 인류 행복까지 다루었다.”(80쪽)
자유와 평등, 평화와 행복은 종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며, 신(神)이 인간에게 약속한 복락(福樂)이다. 동서고금의 무수한 경전(經典)에서 거듭거듭 교화(敎化)하고 교훈(敎訓)하고 교양(敎養)하는 덕목이 바로 자유와 평등, 평화와 행복이다. 이것을 세계 개조, 민족 자결의 기운의 흐름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우리(종교) 안에 있던 것을 세속세계에서도 주장하고 있다는 발견이자, 그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절차일 뿐이지, 종교인들이 세속의 가치로부터 계발(啓發)을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둘째, 미래(未來-아직 오지 않음)의 사회를 적극적으로 개척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던 당시는 ‘침략주의, 강권주의’가 득세하던 때였다.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되기는 하였으나, 우리 민족, 특히 민족대표들은 그것은 강대국 중심의 나눠먹기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의 주체들은 도의(道義)가 펼쳐지는 신천지(新天地)를 예상(豫想)하였고, 인도적(人道的) 새 문명(文明)을 예기(豫期)하였고, 생명(生命)의 잔치[繁榮]가 벌어지는 새 봄을 예감(豫感)하였다. ‘꿈은 이루어진다’와 ‘상상하는 대로 다 이뤄!’란 다름 아니라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에도 믿음과 신념을 버리거나 굴하지 않고, 기도하는 그 정신, 다시 말하면 ‘미래를 개척하는 불굴의 정신’이다.(84쪽) 미래지향성과 개척정신이야말로 종교의 본성이다. 다만, 종교의 미래 지향성은 다시 그 미래가 ‘지금-여기’에서 현현(顯顯)되는 이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地上天國-佛國土).
셋째, “독립선언서는 글로벌 사상이 그 기반이다.”(84쪽) 3.1혁명 당시만 해도 지구촌을 지배하던 주류 이데올로기는 약육강식, 적자생존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사람의 정당한 생존’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동양의 지지자로서의 중책을 감당하게 하며’ ‘중국에게 안녕을 제공하고’ ‘동양평화’와 ‘세계평화’까지를 기약(期約)하고 기대(期待)하고 기필(期必)하는 것이 독립선언서이다. 종교적인 견지에서 볼 때 ‘글로벌’은 단지 ‘지구촌’ 차원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지구 안의 모든 족속(族屬; 민족, 국가, 공동체, 인간-생물)은 물론이고 무생물(사물)05까지를 아우르는 것이다.
넷째, “독립선언서는 21세기 사회의 경쟁원리를 (중략) 즉 윈윈(win-win)게임의 원리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세계사에 길이 빛날 업적임에 틀림없다.”(86쪽) 이것은 단순한 구두선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독창성(獨創性)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세계와 인류사회, 그리고 생명세계 전반에 기여보비(寄與補裨)할 수 있는 덕목이다. 상생(相生)의 덕목 또한 이 세상만물이 모두 나와 한 동포(同胞; 한배에서 나온 형제자매)라는 인오동포(人吾同胞), 물오동포(物吾同胞)의 동귀일체(同歸一體) 사상06, 하나님의 한 자손(형제님, 자매님)임을 기반으로 한다.
다섯째, “독립선언서는 전체적으로 이성(理性)이나 지성(知性)보다는 감성(感性)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중략) 21세기 사회는 바로 감성중심의 사회이다.”(88쪽) 여기서 감성은 공감능력(共感能力)으로 표현된다. 이는 ‘세계개조의 대기운’을 읽고, 우리 민족이 처한 주관적 객관적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며, 일본-중국까지 아울러 그 처지를 광정(匡正)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선생은 공감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내 마음[한울님 마음]이 곧 네 마음[수운-인간]의 마음이니라(吾心卽汝心)”라는 천어(天語)를 들었다. 여기서는 한울님-인간(수운)만이 아니라, 귀신(鬼神)까지 아울러 공감하고 공존하는 이치를 설파한다. 07
여섯째, 독립선언서는 “21세기 지식사회의 핵심적인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92쪽) 이것은 구체적으로 자기건설(自己建設)과 자기운명개척(自己運命開拓) 자기생명번영(自己生命繁榮)으로서의 “자기실현”의 정신,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민족문화의 창달”, “새로운 세계문화 창달에 이바지함”, 그리고 뉴 에이지 시대의 도래로서의 ‘새 하늘 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지는’(천도교경전과 성경에 공통되는 말) 뉴 에이지(New age)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08 과연, 오늘 이 시대는 ‘새로움’이 득세하는 시대이다. 그 새로움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야말로 독립선언서의 지향점이다.
일곱째, “독립선언서는 21세기 참여민주주의의 이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95쪽) 참여민주주의의 덕성(德性)을 가장 전면적이고 근본적으로 제시하는 장면이 바로 공약삼장(公約三章)이다. “제1장의 ‘배타적 감정을 배제’하고 ‘자유적 정신의 발휘’하여 참여하기, 제2장의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참여하기, 제3장 ‘질서를 존중’하고 ‘광명정대’하게 참여하기”의 정신이야말로 지난 100년 우리 민족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면면히 살아서 계승되어 왔고, 가장 최근의 촛불혁명에서 생생하게 재현된 바 있다. 이러한 참여정신은 종교인의 기초덕목이자 근본덕목인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구현에 다름 아니다.09
이 참여민주주의는 ‘자주’(自主)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바, 대외적으로 국가 대 국가의 자주뿐만이 아니라 대내적으로 중앙과 지방 사이의 자주, 관과 민 사이의 자주, 남녀노소 사이의 자주를 포함한 ‘자치정신(自治精神)’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치정신 또한 동학-천도교의 ‘포접제(包接制)’에서부터 기원하여 ‘집강소(執綱所)’로 면면히 이어져 온 것에 다름 아니다.
1900년대 초 천도교단의 신지식인(新知識人) 중의 한 사람인 오상준(吳尙俊)은 1907년 <<초등교서(初等敎書)>>라는 ‘교과서’적인 서적을 펴냈다. 이 책은 청년 <<국민수지>>(1906, 작자미상), <<유년필독>>(현채, 1907)과 더불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많이 읽혔던 문명 계몽서였다. 이 책에는 모두 28개 장에 걸쳐 근대국가 체재(體裁)와 그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덕목(德目)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다.10 특히 ‘독립’이라는 단어에 대한 다각도의 이해, 우리나라의 독립이 위협(탈취)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근대)독립 국가를 건설할 것인지, 공화제(共和制)에 대한 이해와 전파가 상당한 수준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동학-천도교 운동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보국안민-다시개벽으로서의 영성적 근대의 추구, 개화(改化) 아닌 개벽(開闢)으로서의 자생적․토착적 근대의 추구, 침략주의-강권주의의 서구적 근대에 대한 저항적 근대로서의 자주적 근대의 추구가 1910년대 직전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전거(典據)이다.11
영성적 근대운동으로서의 3.1혁명의 현대적 의의는 ‘영혼의 탈식민지화’ 담론12으로 계승되고 있고,13 개벽적 근대운동으로서의 3.1혁명의 현대적 의의는 ‘토착적 근대화’ 담론14으로 계승되고 있으며, 자주적 근대운동으로 3.1혁명의 현대적 의의는 ‘3.1혁명의 완성으로서의 통일운동론’으로 계승되고 있다.
동학-천도교의 운동을 영성적 근대라고 하는 것은 서구의 근대가 ‘탈종교’인 반면에, 동학(을 위시한 근대 개벽종교)에서의 근대화는 종교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는 특질을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동학-천도교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비서구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기도 하다.
동학이 한국철학의 옛날식 표현이라면, 그것의 별칭인 천도는 영성운동을 의미하고, 그들이 내걸었던 개벽은 영성운동 중심의 한국적 근대를 상징하는 말이다. 동학은 인간평등이나 정치참여와 같은 근대적 가치, 더 나아가서는 생명 중심의 탈근대적 가치들을 수양을 통한 영성실천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 점은 동학을 이은 천도교나 원불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구의 근대가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가 물러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면, 비서구 지역에서는 반대로 종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것이다. 이 점은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의 간디나 아프리카의 투투 대주교(인종차별 철폐정책) 등의 사례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력한 실천성을 동반하는 영성 운동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개화에서 개벽으로>>,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8.11, 131쪽.]
이처럼 ‘영성적 근대’ ‘개벽적 근대’ ‘자주적 근대’로서의 3.1혁명의 성격을 밝히는 것은 3.1혁명이 세계사적․문명사적․개벽적 지평의 사건이라는 점을 주목하는 일이다.15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된 역사적인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는 공식수행원 14명과 특별수행원 52명이 참석하였다. 그중 종교계 특별 수행원으로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의 수장(대리) 네 분이 참여하였다.[김희중 천주교 대주교, 원택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이홍정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한은숙 원불교 교정원장.] 한반도 위에서, 3.1혁명의 현재적 재현이라고 하는 민족통일의 도상(途上)의 중대한 자리에 천도교의 수장이 참석하지 못한 것을 두고, 이 사실에 주목한 남측의 종교계 내부에 ‘뜻있는(?)’는 인사들 중 일부는 설왕설래하고, 개탄과 우려를 넘어 분개(憤慨)하는 분들까지도 있다. 천도교단 내부 일각에서도 이를 두고 통분(痛忿)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이번 사건은 천도교인에게 새삼스런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첫째, “역사는 흐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한국 사회 속에서 천도교의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부(청와대) 내부에서 특별수행원(종교계)을 선정하는 업무를 맡은 분이 의식했든 아니든 간에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분들은 지나간 역사, 심지어 현재의 역사보다는 미래의 역사를 더 중시하고, ‘전략적’으로 종교계 특별수행원을 선정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전략이 바람직한가, 훌륭한가, 진실로 미래를 중시하는 것인가를 두고는 논쟁할 수 있을 것 같다.
추가1 : 3.1절 중앙(국가) 기념식이 광화문에서 거행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경축사를 발표하는 가운데, 올해 국가유공자 서훈 3등급에 1등급으로 승급된 유관순에 대해 특별히 언급을 하였다. 해방 후 75년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3.1혁명의 성과를 거의 독식하다시피하다가 최근 10년 사이에 제자리(1/n)를 찾는 듯하더니, 현 정부 들어서 급격히 재평가 내지 재조명의 발걸음이 급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지경"을 맞이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친일파"의 승리이며, 친일파에 의한 역사왜곡보다 더 심각한 "우리 편에 의한 역사왜곡"의 한 정점을 찍는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것이 종착점이 아니라, "신 역사왜곡"의 새로운 도약대가 되리라는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천도교인이 잘하고, 그동안 '의연하게' 해 오던 대로,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울분을 되뇌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역사교체가 필요하다.)
추가2 : 이런 점에서 3.1혁명 100주년에는 새로운 삼재(三災)를 명백히 인식하고 자리매김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100년 역사는 '서세동점'이 서서히 완성되고, 그로부터 2, 3세대로 고착-심화-확산-재고착-재심화되어 온 과정이다. 이제는 어디까지가 참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도 모르는 매트릭스의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새로운 삼재란, 기존의 '친일잔재'와 '이승만잔재(기독교화-서구화)' 그리고 '분단잔재(미군정-반공)' 잔재의 세 가지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화 - 산업화 - 과학화'라고 하는 거역할 수 없는 물결 또한 '신 서세동점'의 일면으로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개벽파" "개벽학" "개벽저널-다시개벽" "개벽포럼" "개벽학당 - 통칭 <개벽+>"의 저변에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자리매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무겁게 풀어나가지 않고 경쾌발랄하게 풀어나가고자 한다는 데 <개벽+>의 미덕이 있다.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이 실효성 있게 진척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무엇보다 3.1혁명의 ‘다시개벽’으로서의 의의, 새로운 문명세계 구축, 종교적 이상세계로서의 한반도를 향한 이정표로 삼기 위해서는 사실 3.1혁명을 전 교단적 차원의 역사적 성과로 여기는 천도교단이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된다. 3.1혁명 100주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제안할 수 있는 천도교가 배제되었다는 것이, 특별수행원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현재의 천도교단의 역량(교세)은 이 과제를 선도적으로 추진할 여건이 되지 않으며, 정부(청와대) 차원에서도 이에 대한 유의미한 고려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중에는 정부차원에서 2019년을 3.1혁명 100주년보다는 3.1혁명 100주년을 계기로 수립된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에 더 큰 비중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유도 포함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3.1혁명에 대한 그동안의 불충분한 관심과 온갖 종류의 역사왜곡보다 더 결정적인 역사 왜곡이 3.1혁명 100주년을 전후로 하여 부지불식간에 전개되고 있다는 의심과 두려움을 지울 수가 없다.
둘째로, 3.1혁명의 성과로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만주를 비롯한 중국 일원,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의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고, 마침내 1945년 광복을 성취하였다. 우리는 3.1혁명의 성과로 건국하였음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정작 ‘기미독립선언서’의 근본정신이 온전히 ‘대한민국정부’로 승계되고, 또 6.25 이후의 민주화운동 속에서 오늘날까지 유루(流淚) 없이 구현되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친일잔재의 청산’이라는 네거티브한 측면은 물론이고, ‘기도문으로서의 독립선언서’에 담긴 정신과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가 하는 포지티브한 측면에서 볼 때, 지난 100년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기미독립선언서는 침략주의, 강권주의를 타파하고 자주, 자립, 자생을 기반으로 하는 서로 살림의 신천지(新天地)를 지향하는 유토피아(지상천국) 건설, 신인류문명 건설운동이었지만, 실제로 해방(1945.8.15.) 이후 이 땅에서 실현된 것은 분단의 고착화와 서구화, 물질문명의 득세, 종교의 타락, 외세 의존적 근대화(신자유주의의 득세)의 길이 아니었는가. 우리는 ‘살을 주고 뼈를 얻고자’ 하였는데, 실제로는 ‘살을 얻은 대신 피와 뼈, 그리고 영혼까지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반도의 남과 북은 주변강대국의 입김과 서구적 근대문명(물질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그 언저리에서의 ‘통일’이라도 선취하기에 급급한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현실적으로 존재감이 미미한 ‘천도교’의 역사적 유산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한들, 그리고 천도교의 보국안민-다시개벽의 이상이 아무리 거룩하다고 한들, 그것을 안고 ‘유무상자’해 가면서 근본적인 통일을 추구할 여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태가 바로 이번 방북에서 천도교의 탈락한 사건의 의미가 아닌가.16 다시 말해, 1860-1919년까지 한 갑자(60년)의 시기가 서세동점의 쓰나미에 휩쓸린 시기라면, 1920-2019년까지 한 세기(100년) 세월은 그 ‘서세동점’에 무젖어 가며 스스로 체화(體化)해 간 영혼의 식민지 시대가 아니었는가.17
이것이 진실의 한 모습이라면, 천도교는 가장 아래에 있기에,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 쇠락을 경험하였기에, 그 모습이 잘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태의 책임은 당연히 ‘보국안민-다시개벽’ 운동의 형해화(形骸化)를 자초하고, 방지하지 못한 천도교에 절대적으로 물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서, 3.1혁명-100주년과 관련하여 선행해야 할 과업으로서, 종교인의 감수성으로 3.1혁명의 의의를 재조명(‘종교운동’)하고 그 정신을 관(觀‘독립선언서-기도문’)하며, 그 안에 녹아 있는 ‘다시 개벽의 꿈’을 조명해 보았다.
3.1혁명 당시의 천도교의 모습과 오늘날의 천도교인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한마디로 “불효한 이내 마음, 비감회심 절로난다.”(<용담유사>'용담가') 여기서 불효란 천명(天命)을 따르지 못한, 즉 한울님[天地父母]에 대한 불효, 사명(師命)을 일일이 어겨 가며 살아온, 즉 스승님에 대한 불효, 그리고 (遺業)을 계승하지 못한, 즉 선열에 대한 불효의 심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말조차도 곱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3.1혁명)을 바라보며, 저마다 자기의 목소리, 역할을 드높이는 것은 퇴락한 촌로(村老)로 전락하여 초겨울 스산한 바람 부는 국도변에 앉아 있는 천도교의 모습으로, 화려한 주말별장에 휴가온 도시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다.
종교인은 ‘보이는 것’만 쫓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cf.없이 계신 한울님!)18을 쫓는 사람이다. 명백히 그런 것(其然)만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한울님을 믿어야만 믿을 수 있는 멀고 어렵고 불가능한 것(不然)까지를 믿는 사람이다.19 그 진리와 진심과 진정의 세계를 ‘알고, 믿고, 마음으로 크게 느끼는’ 사람이다.
지금 민족대표 33인과 기미독립선언서가 폄훼되고 저평가되는 까닭은 사실은 지금의 종교․종교계․종교인의 모습을 거기에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1혁명과 독립선언서의 의미와 의의를 되살리는 길은 지금 여기의 종교․종교계․종교인이 되살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올해 처음으로 소개되는 다음의계보도는 민족대표의 역할이 단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 글 "3.1혁명과 다시 개벽의 꿈" 은 “3.1혁명 100주년에 종교인들은 어떤 문명세계를 바라며 심고(心告, 기도)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 물음을 던진 2018년은 ‘전 지구적 파멸을 예감케 하는’ 위기감을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실감하는 첫 해였다. 그런 의미에서 3.1혁명 100주년 이후 우리가 한울님(하느님, 부처님)께 갈구하는 문명세계 - 신천지(新天地)는 하늘과 땅과 인간이 본래의 ‘조화로움’을 회복한 세계일 터이다. 그 조화로움은 무엇보다도 ‘인간에 의한 천(天)-지(地)의 훼손이 더 이상 없을 뿐만 아니라 기왕의 상처들도 온전히 치유(治癒)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일 터이다.
하늘 – 땅 – 사람의 조화로움의 회복은 한울님과 -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증오와 원망이 사라지는 것을 포함한다. 3.1혁명의 현재적 계승의 직접적인 과제인 ‘민족의 평화통일’도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는가?”
‘게임체인저’란 말이 있다. ‘일의 결과나 흐름의 판도를 바꾸어 놓는 사람이나 발명품(cf.스마트폰)’을 뜻한다. 다시개벽은 다르게 말해 게임체인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게임체인저가 될 것인가(선택/의지), 될 수 있을 것인가(가능).
생각해 보면 우리(종교개혁연대-3.1혁명 100주년 기념 제2독립선언서)의 위상은 기미년 당시의 민족대표나 종교인들의 역량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게다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종교계에 대한 세간의 시선과 인식도 그때와는 판이하게 다르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종교’가 이 세계에서 감당하는 ‘존재감’이 100년 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변하였다.
이런 주관적, 객관적인 조건 속에서 제2의 독립선언서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자칫 우리가 내놓은 결과물은 한갓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노력이 구두선에 그치는 것(무위로 돌아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아니어도, 이 세계가 온전히 바람직한 미래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 세계의 형편(물질만능주의, 기상이변, 4차 산업혁명의 파고 등, 게다가 종교계 일반의 타락과 탈기(脫氣) 등)을 보면, “안 되면 말고”라고 호기롭게 대처할 여유는 없어 보인다. 이때 게임체인징이 필요하다.
위의 질문의 첫 번째 답은 이것이다;
“게임체인저가 되는 길은 이야기를 새롭게 쓰는 것이다.” 20
위의 질문의 첫 번째 답은 이것이다; “다시개벽의 길은 이야기를 새롭게 쓰는 것이다.” 21
‘이야기’는 과거의 역사이되, ‘새롭게 쓴 이야기’는 미래의 역사이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를 새롭게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 이야기를 새롭게 쓰는 것이라 하더라고 결국 새로운 미래를 발명하는 것이다. 발견과 발명이 다른 것은, 발견은 아무리 해도 과거의 틀(팩트)에 구애된 채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발명이란 그 틀마저도 과감히 탈피하는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역사와 있기를 바랐던 역사, 있었으면 좋았을 역사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중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에만 얽매여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데까지 나아가야 발명-다시개벽이 시작된다.
위의 질문의 두 번째 답은 이것이다;
“다시개벽의 길은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인식의 틀이다. ‘틀’이 되려면, 한번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학(學)하여 신념으로 승화시키고 체질화되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도록 습(習)해야 한다[學而時習]. 그것이 수행이고 수양이다.
다시 말하면, 패러다임 전환이 현란한 논리의 전개나 설득, 장황한 역사적 맥락의 서술이나 당위론의 나열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의 종교․종교계․종교인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얼마나 실제 생활, 역사에서 실현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프레임 바꾸기(시프트)는 3.1혁명을 ‘종교운동’으로 바라보고, ‘종교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종교운동’으로 계승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설픈(=서구화, 세속화, 합리적) 근대화’에 휘둘렸던 19세기말-20세기초를 반성하면서, 나아가 한울님/하나님을 거스르고[不順天理], 망각[不顧天命]하였던 지난 시절을 참회하면서 다시금 신앙화, 영성화, 생명화하는 운동으로서의 종교운동으로 3.1혁명을 ‘패러다임 전환’하는 일이다.22 오늘의 종교계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그 시종(始終)이다. 다만,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아니면, 무지(無知)일 뿐이다.
이런 바람에 더하여 우리가 운동해 나갈 3.1혁명, 너머 100년의 방향을 전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탈종교 시대에 걸맞은 종교(인)의 자기정화와 구원-신인합일의 길을 실천․실행․실현해야 한다.
둘째, 순교-부활의 본성을 회복하여 시민/인민을 생명 세계로 인도할 길을 개통․개척․개선해야 한다.
셋째,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문명세계/생명세계에 대한 비전을 공감․공창․공유해야 한다.
넷째, 인간-인간의 평화, 인간-자연의 상생, 생명-우주의 다시개벽의 기도를 상생․상호․상달해야 한다.”
이미 다시 개벽의 길은 부활[無往不復]의 조짐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서세동점의 끝물이다. 서구적 근대의 말세이다. 동과 서는 비로소 재균형을 찾아가고, 구대륙과 신대륙의 위상 또한 전변한다. 이웃나라는 '신시대'라고 한다. 우리 식으로는 '(다시) 개벽'이다. 만인과 만국과 만물이 연결되는 개벽의 새벽을 예감한다. 모심과 섬김과 살림의 원리를 깊이 긴히 천착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백년, 개화파가 주류였다. 민주화 세대 또한 진보/보수, 좌/우로 갈리었으되, 개화파의 후예이기는 매한가지였다. 20세기, ‘구시대의 막내’였던 것이다. 21세기, 다른 백년으로 진입했건만 여태 개화우파와 개화좌파의 철지난 길항이 지루하다. 적체이자 적폐이다. 백년간 고독했던 ‘개벽파’를 다시 호출해야 할 시점이다. 3.1운동 일백주년, 2019년이 적기이다. [이병한, <추천사>, 조성환, 앞의 책. 표4]
하이데거는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나의 자리를 비워(허.공.무) 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제, 3.1혁명 100주년, '3.1혁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이제부터의 일은 '개벽파'가 '개벽학'으로 '다시 개벽'의 새 날을 여는 일이다!
새 시대다!
(연재 끝)
01 독립선언서은 일찍부터 ‘최고유일의 대헌장’(설의식, <동아일보> 1946.2.26.) ‘민족자존의 대헌장’(사설, <동아일보>1946.2.28.)이라고 호명되었다.
02 결(訣)이란 ≪사원(辭源)≫에 따르면, 결(訣)자는 법도(法度), 또는 방술가의 비법의 뜻인데[法也 方術家秘法曰訣], ≪훈민정음≫에서는 제자해(制字解)•초성해(初聲解)•중성해(中聲解)•종성해(終聲解)•합자해(合字解) 등의 각 내용을 요약한 중요한 비결이라는 말로 사용되었으니, 요결(要訣)의 뜻임.[네이버 지식백과] 결 [訣]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수운 선생의 시나 글에도 '결'로서의 시 또는 '결'을 포함한 제목의 글들이 매우 많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이 단어를 썼다.
03 하인호, <<미래를 읽는 9가지 방법>>, 일송북, 2008, 77-97쪽. 이 책에 수록된 글은 2000년 3월 1일 개최된 3.1운동 81주년 기념강연회 “1정신으로 새천년의 역사를 창조하자”(주최-3.1운동기념사업회(회장 이원범), 코리아나호텔 7층 글로리아 홀)의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하는 대목은 괄호 안에 쪽수를 표시함.
04 인터넷의 블로그 등에 게시된 기독교의 설교문에서는 3.1혁명을 ‘하나님의 계시’의 선상에서 해석하거나, 3.1혁명을 현재적․미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의 주요 정신에서 기도 정신, 미래 지향 정신을 읽어내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제 이러한 설교와 학술적 연구를 통섭하는 작업이 우리 앞에 주어지고 있다. [이 글을 쓴 이후, 기독교 학자들이 쓴 논문을 여럿 읽으면서 나는 이 각주의 내용이 순진무구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기독교 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철저하게 3.1혁명의 정신과 역사를 기독교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논증하고 해석해 놓았다. 그리고 100주년에 즈음하여 그 연구들은 더욱 풍부해지고 성숙해져 있음을 목격하였다. -,.- 천도교인들은 세 치 혀로만 "3.1혁명은 천도교가 주도했다!"고 되뇌어 왔던 것이 분명하다!!]
05 <<천도교경전>><해월신사법설>'삼경(三敬-敬天, 敬人, 敬物)', “셋째는 물건을 공경함이니 사람은 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최고 경지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물건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의 덕에 합일될 수 있느니라.”
06 <<천도교경전>><해월신사법설>'삼경', “사람은 敬天함으로써 自己의 永生을 알게 될 것이요, 敬天함으로써 人吾同胞 物吾同胞의 全的理諦를 깨달을 것이요, 敬天함으로써 남을 爲하여 犧牲하는 마음, 世上을 爲하여 義務를 다할 마음이 생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敬天은 모든 眞理의 中樞를 把持함이니라.”
07 <<천도교경전><동경대전>'논학문',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는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08 이러한 관점에서 3.1혁명 이후 전개된 국내에서의 ‘신문화운동’이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에 호응한 타협적(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운동이요, 오로지 ‘무장투쟁’이 정당한 독립운동이라는 관점은 단견(斷見)이라고 할 수 있다. 3.1혁명 이후 언론, 출판, 결사 등의 자유가 ‘일정부분’ 허용되는 공간을 최대한 넓혀가며 ‘청년(靑年)’회의 결성이 폭발적으로 증대하고, 천도교청년회의 <<개벽>>지 간행, 천도교소년회(방정환 등)의 어린이 운동과 같은 뉴에이지 운동을 통해 민족의 독립과 문명의 개조를 추구해 나간 것을 주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09 70, 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종교계가 앞장을 서거나 87년 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이나 성공회 성당 증 종교 기관이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된 것은 종교라는 온상(인큐베이터) 안에서 최소한의 안전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 외에도 국민들의 종교․종교계․종교인에 대한 기억―3.1혁명 당시에 국민들에게 각인되었던―을 소환하여 민주화운동이 운동권의 운동이 아니라 범국민(시민)운동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전략의일환이었다. 또한 2016-17년간의 촛불혁명 초창기에도 종교인들이 촛불행진의 선두에 서서 경찰벽과 시민 사이의 ‘안전’을 책임짐으로써, 시민혁명으로 승화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모두 3.1혁명의 역사적․종교적 계승이다.
10 각 장별 제목은 다음과 같다. 천덕(天德), 사은(師恩), 오천(吾天), 오교(吾敎), 오천(吾天)의 요소(要素), 오교(吾敎)의 정신(精神), 인(人)의 직분, 인(人)의 자유, 인(人)의 자격, 의식주(衣食住)와의 관계, 위생(衛生), 경제(經濟), 국가(國家), 아국(我國)의 정신, 법률의 개의(槪義), 인민(人民)과 국민(國民), 개인과 단체의 관계, 오(吾), 오교(吾敎), 오국(吾國)의 관계, 오교(吾敎)와 오국(吾國)의 관계, 오교인(吾敎人)의 의무, 오국인(吾國人)의 의무, 도덕(道德), 윤리(倫理), 관습(慣習), 방정(方正)한 마음(正心), 성의(誠意)
11 이 책은 읽기 쉬운 형태로 곧 재간행될 예정이다. 이러한 1910년대 이전의 ‘영성적 근대’ ‘개벽적 근대’ ‘자주적 근대’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공부한다면 “식민지근대화론”은 터무니없는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2 김태창(金泰창)-후카오 요코(深尾葉子, 오사카대학 준교수) 대담,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未來共創)>, <<개벽신문>> 제65호, 2017년 7월호, 9-16쪽.
13 2018년 3월 1일, 최진석 교수는 자신의 SNS에 한 편의 글을 올렸다. 그중에 영혼의 탈식민지와 관련 지어 생각해 볼 대목이 있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각성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까지만 살다 갈 수 있습니다. 이 이상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후손들에게 영광이 아니라 치욕을 물려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한계를 돌파해야 진정한 독립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이룬 번영은 종속적 단계에서의 번영입니다. 이를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단계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전술적 단계의 삶에서 전략적 단계의 삶으로 상승해야 합니다. 종속적인 문명에서 선도적 문명으로 나아가는 도전에 나서야 합니다. 대답하는 습관을 질문하는 습관으로 바꿔야 합니다. 사적 이익에 빠진 주체가 공적 책임성을 가진 시민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념과 신념의 수호자가 아니라 신념과 이념의 생산자로 나서야 합니다. 지식 수입자가 아니라 지식 생산자가 되어야 합니다. 안전이 아니라 모험의 길을 나서야 합니다. 믿음을 벗어나 생각을 시작해야 합니다.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믿음보다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시선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자신에게 계속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계속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꿈이 있는지?”를 계속 물어야 합니다. 잡다한 쾌락을 끊고, 책을 읽어야 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인데, 우리가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발전시킨 나라인데, 여기까지만 살다가도 괜찮은가? 좌우의 동선에서 왔다 갔다 하던 일을 끝내야 합니다. 이제는 상하의 수직선상에서 상승을 꿈꿔야 합니다.> 최진석 교수는 최근 연작에서 일관되게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21세기북스, 2018 등 참조.
14 학술대회 <근대 한국종교의 토착적 근대화 운동>(2018년 8월 14일-15일, 원불교사상연구원 주최); 조성환, 「한국은 ‘어떤 근대’를 추구하였나?-근대 한국종교의 토착적 근대화운동 학술대회를 마치며」, <<개벽신문>> 제77호, 2018년 8월호, 28-29쪽.
15 <1919년의 세계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평화 연구’ 필요>, ≪한겨레신문≫ 2018.09.13.(다음뉴스). 이 기사에 의하면 인류학자 권헌익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1919년은 무척 중요한 해이지만 세계 학계에서 아직 그 의미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습니다. 그 의미를 어떻게 제대로 밝힐 것이냐가 앞으로 한국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이때,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은 그것이 바로 ‘자생적 근대화’이면서 ‘탈근대 혁명’이며, 무엇보다 ‘영성적 혁명’이라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16 이 단락은 ‘비관론적’으로 넋두리하듯 쓴 대목이지만, 이러한 역사인식 내지는 비관론을 뒤집어 우리 역사와 근대 사상사를 새롭게 조명하자는 연구와 노력이 최근 들어 활기를 띠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무게중심으로 “‘개화(서구적 근대)’에서 ‘개벽(자생적․토착적 근대)’으로” 전환하는 것, 동학-증산도-천도교-대종교-원불교 등 일련의 종교적․사상적․철학적 움직임을 “개벽종교”라는 틀로 묶어서, 다시 개벽(영성적 근대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이러한 다시 개벽의 주체세력을 ‘개화파’ ‘척사파’에 대하여 “개벽파”라고 호칭하자는 것 등이 이런 연구, 노력의 성과들이다. 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개화에서 개벽으로≫(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8.11) 및 <<개벽신문>> 참조.
17 그런가 하면 지난 9월 14일에는 서울 시내에 3개 코스에 걸쳐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로마 교황청이 승인한 일을 두고 이를 기념하고 공식화하는 선포식이 서소문역사공원 공사현장에서 진행되었다. ‘서소문역사공원’은 현재 수조원(부지포함)의 공사비를 들여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로 조성되고 있다(공식 명칭은 ‘서소문역사공원’이지만 그 실제 내용은 천주교성지순례공원이다). 이곳 서소문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들이 처형되거나 그 수급이 효시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내내 개혁적 운동가들이 참형된 명실상부한 ‘한국개혁운동사’의 현장이다. 그런데 그곳에 교황이 다녀가고, 결국은 민관(천주교단-중구청 등)이 협력하여 ‘천주교 성지’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 자리에서 1년여에 걸친 천막농성을 비롯한 다양한 노력을 통해 ‘가톨릭 순교성지화 반대’를 외쳐온 천도교와 시민단체 회원들의 목소리는 메아리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힘없이 쪼그라든 동학-천도교의 현실을 여실히 절감하는 현장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 단체(천도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18 <<천도교경전>><동경대전>'논학문',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수심정기하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하략)”; 이기상, ≪우리 말로 철학하기≫, 살림, 2013(4쇄), 19-20쪽. “다석은 ‘태양을 꺼라’라고 외친다. 태양을 끄면, 그때 비로소 없는 것들이, 즉 무(無)가 보이기 시작한다. (중략) ‘태양을 꺼라’라는 다석의 화두 속에는, (근대-이성-합리의 – 인용자 주) 서양 사람들이 매달린 단 하나의 진리.이성.존재라는 우상을 깰 때 그들은 비로소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리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19 <<천도교경전>><동경대전>'불연기연', “이러므로 기필키 어려운 것은 불연이요, 판단하기 쉬운 것은 기연이라. 먼 데를 캐어 견주어 생각하면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고 또 그렇지 않은 일이요, 조물자에 부쳐 보면 그렇고 그렇고 또 그러한 이치인저(是故 難必者不然 易斷者其然 比之於究其遠則 不然不然 又不然之事 付之於造物者則其然其然 又其然
20 데이비드 코튼 지음, 앞의 책, “이야기를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12쪽).”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선택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 사람이다(217쪽).” 앞에서 인용한 최진석 교수의 SNS 글의 결론은 이러하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정해진 모든 것,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모든 언어들 모든 생각들, 백설의 새 바탕에 새 이야기 새로 쓰세. 새 세상 여는 일 말고 그 무엇 무거우랴! 새 말 새 몸짓으로 새 세상 열어보세.”
21 데이비드 코튼 지음, 앞의 책, “이야기를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12쪽).”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선택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 사람이다(217쪽).”
22 조성환, 앞의 책, 51-52쪽 참조.
후기 :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이 글이 발표될 '장소'와 '시간'을 고려하여, 그리고 나와 함께 연계발표를 하는 '김춘성 교수님(천도교와 3.1운동)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3.1운동을 종교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종교인의 심성으로 다시 읽자"는 목표를 세웠고, 거기에 충실하게 서술하였다. 그 시점이 이 원고와 관련하여 성취감이 최대치에 도달하였던 시점이다. 거의 탈고가 끝난 시점은 2018년 11월 초순.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4개월 동안 발표도 완결되고, 그 결과물(단행본-자료집)도 완결되었으며, 3.1혁명 100주년도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이 글의 초고를 완성하였을 때의 성취감은 시나브로 삭감되어 갔다. 기독교나 불교에 비하여 너무초 초라한 천도교의 현실을 보며, 자괴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쨌든 예상했던 바이다. 어쩌면, 예상대로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좌절되고, 사태는 예상한 대로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갈 것 같다. 어제 내가 천도교인들과 함께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출발하여 탑골공원 앞까지 갔다가 거기에서 좌회전하지 않고(의암성사 동상 참례) 우회전하여 만북울림의 현장으로 나아간 것처럼, 이제, 다시개벽의 길로 가야 할 일만 남았다. 때때로 집으로 돌아와 묵은 짐들을 챙기고 손질하겠지만 그것에 미련을 두거나, 그곳에서 상처받는 일은 없을 것. 그곳이 나를 필요로 할 때가 온다면, 그것은 다행한 일이겠지만, 그때에도 나만의 방식을 양보하지는 않을 것! 그것이 천도교를 위한 길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