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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26. 2019

3.1혁명과 다시개벽의 꿈 (1)

- 3.1운동은 종교운동이며, 독립선언서는 민족의 대헌장이다  

[필자주 : 이 글은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의 발표(2019.11.22)와 <신인간>(2019.2, 3, 4월호 3회 연재 예정)에 투고하는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증보한 것이다. [발표 및 신인간의 230여 매 원고가 450여 매로 증보되었다.] [3월 1일이 되는 날까지 이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발표 당시에 "3.1운동"이라고 한 것을"3.1혁명"으로 호명하였다. - 구체적인 논증은 別稿를 기약한다]


박 길 수 (천도교중앙도서관 관장)




Ⅰ. 기도와 상상력으로 3.1혁명 바라보기 


3.1혁명 100주년은 두 개의 사건을 지나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은 남북-북미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이다. 이에 선행하여 촛불혁명이 있었고, 그에 앞서서 세월호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150-200년간의 자본주의(서구세계)의 세계화와 연결된다. 

두 번째 사건은 2018년의 폭염이다. 이는 기후변화의 결과로 도래할 전 지구적 미래-‘생명의 종말’-의 기미(幾微)를 한반도에서 보여준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을 통해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문명사적 전환기라는 사건 속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3.1혁명 100주년이라는 말은 개념적인 사실일 뿐이고, 위의 두 사건-문명사적인 전환-이야말로 역사적이며 실존적이다. 이 글은, 이러한 전환기에 아래와 같은 하나의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보기 위한 탐색의 과정이다.


“3.1혁명 100주년에 종교인들은 어떤 문명세계를 바라며 심고(心告, 기도)할 것인가?”


그리고 이 물음은 기미년(1919)의 3.1혁명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첫째, 3.1혁명은 종교인들이 주관하고 전 민족이 참여한 혁명운동이었다. 

둘째, 3.1혁명은 각성과 학습의 수도장이자 종교운동/기도운동이었다.

셋째, 3.1혁명의 독립선언서는 민족의 기도문이요 민족의 헌장이었다. 

넷째, 3.1혁명은 자주독립을 넘어 새 문명세계를 지향하는 혁명운동이었다. 


100주년에 즈음하여 더욱 힘을 얻고 있는 말이 “3.1혁명은 종교(인만의)운동이 아니라 전 민족이 궐기한 민족운동이었다”는 말이다. 형식적으로 '정교분리'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체제' 아래서, 이 말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 말은 3.1혁명 당시에 비하여, 시민사회의 발언권과 활동영역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장되고, 종교인구 점유율이 정점을 지나 하락세로 돌아선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3.1혁명은 종교운동이라는 말은?             


그러나 “3.1혁명이 종교(교단)를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뜻으로는 일부 수긍할 수 있으나, 그 말을 강조하다보니, ‘종교인’들인 것이 마치 무슨 흠결이나 되는 양 여기는 정서가 아무 반성 없이 반영되는 경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는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종교인/종교계의 위상에 비추어 과거의 위업마저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1혁명은 종교인들이 선창(先唱)하고 선도(先導/善導)하고 선구(先驅)하여 새로운 세계와 문명에 대한 비전을 상상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한 종교혁명”이라는 점은 재조명해야 할 3.1혁명의 의의라는 것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점에서 '종교인 중심의 사회 - 국가'로 돌아가자거나, 오늘날의 종교인답지 못한 종교인이나 종교계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아니다.] 3.1혁명을 굳이 '종교혁명'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3.1혁명의 정신적인 핵심 가치를 재조명하고 이를 기반으로 오늘 이후의 세계를 전망하고 비전을 가다듬는 데 충분한 효용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종교인의 관점에서 3.1혁명을 조명하고, 또 그것을 체계화하는 한 시도로서 독립선언서(기도문)에 담긴 정신을 다시 읽어 봄으로써 100주년 이후 한국사회의 전망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그 길 위에서 기미년의 3.1혁명의 준비과정과 기미독립선언서를 둘러싼 익숙하고도 구구(區區)*한 해석에서 한번쯤은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과 진심어린 덕담으로 그때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자는 것이다. [「선언서」, “이 엇지 區區한 感情上 問題ㅣ리오.”]


기도와 종교적 상상력과 사랑으로 다시 보는 3.1혁명                         


이때 필요한 것은 '기도'와 '(종교적)상상력'과 '사랑'이다. 그동안 종교인들조차 3.1혁명에 관한 이해와 접근을 학술적, 객관적으로 (해야) 한다는 명분을 좇아, 실은 너무 세속적으로 해 왔다. 눈에 보이는 것(세속적)에 집착하여 3.1혁명과 관련한 사료(史料)에 얽매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종교적, 신적) 성령(性靈․聖靈)의 빛을 직관(直觀)하고 각득(覺得)하기를 포기하였다. [기도는 개벽종교의 전통에서 말하면 수양(修養)과 같은 말이고, 상상력이란 학술적 용어로는 ‘해석학적 이해’이다. 또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전적으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그 시(詩)에서의 ‘사랑’이다. 이 시는 조선후기 문장가였던 유한준(1732~1811) 선생이 남긴 글을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인용하면서 되살려 냈다.]


3.1혁명을 선도하였던 우리의 스승, 선열, 선배[=민족대표 33인과 각처의 종교지도자들]들은 3.1혁명을 준비하면서 종교(신앙과 수행) 영역을 벗어나 정치 영역으로 외도(外道)를 한다고 고백(告白)하고 고뇌하였으나, 실은 종교적인 상상력과 심성을 기반으로 종교적인 방식으로 3.1혁명을 기획하고 종교적인 방식으로 선도하였다. 3.1혁명이 오늘날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적 자산이 되고,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혁명적 유산이 된 것은 바로 그 덕분이다.


여기서 (3.1혁명이) 종교적 상상력과 심성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은 단지 3.1혁명이 기독교, 불교, 천도교 세 종단의 지도자와 조직적, 물적인 역량이 결합되어서 전개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3.1혁명의 내용과 방법과 지향 자체가 ‘종교적’이었다는 점을 말한다. 


남북 공동 3.1혁명 100주년 기념행사 - 희망과 좌절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종교인으로 구성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한 독립선언이 미온적이고, 독립선언서도 ‘맹탕’이라고 비판한다. 그 말에 응대하는 방식이, 당시 종교인들이 충분히 투쟁적이고 헌신적이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3.1혁명은 눈앞의 과제를 간과하지 않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말해 종교적임으로 해서, 10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혁명운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며, 그것아 한마디로 ‘종교적 생명력’[靈生․永生․長生]이다. [이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3.1혁명 당시의 ‘종교․종교인․종교계’의 위상과 오늘날의 ‘종교․종교계․종교인’의 위상이 같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오늘날의 종교․종교계․종교인에 대한 ‘종교개혁연대’의 대표성 여부도 관건이 된다. 3.1혁명 당시의 종교인구, 종교계(인)의 사회적 위상 등이 오늘과는 판이하였다. 천도교인이 '조직화된' 즉 '근대적 체제'를 갖춘 종교 중에서는 신도수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시기 종교인구에 대해서는 좀더 엄밀한 재조사가 요구된다. 천도교인 숫자가 최대 300만이라고까지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필자는 1919년 당시 천도교인의 최대치는 50만으로 보고, 가장 가능성이 많은 숫자는 30만명 정도로 본다. 당시 기독교인 숫자를 20-25만(감리고, 장로교, 성공회, 천주교 포함)으로 본다. 유교나 불교는 '근대적 체제'를 갖추지 않아, 종교인구 숫자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이 이번 제3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9.19평양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화해와 단합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우리 민족의 기개를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적극 추진하”는 가운데 특히 “3.1혁명 100주년을 남북이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한 사실이다. 3.1혁명은 남과 북의 공유할 수 있는 한국 근대사의 역사의 원점(原點)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3.1혁명의 기본정신인 비폭력 평화사상은 평화와 통일의 공존을 위한 기본정신이 되고, 새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진취성은 통일 조국의 미래상을 함께 그려 가는 토대가 된다.[남과 북에서의 3.1혁명의 위상과 역사적 위상(평가)는 같지 않다. 3.1혁명 100주년을 남과 북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것의 의의는 남북의 종교인들이 얼마나 그 의미를 확장․확대․확산하고 심화(深化)․체화(體化-실천)․성화(聖化)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북의 입장에서 3.1혁명을 ‘통일조국’ 역사의 핵심적인 ‘사건’으로 인정하고 인용하게 된다는 것은 통일의 의의를 한층 고양하고 한 차원 승화시키는 중대한 사안이(되도록 해야 하는 문제)다. 즉 북에서 3.1혁명 100주년을 남과 공동으로 기념한다는 것은 크나큰 통일의 진전이다.] [이 글을 발표하던 시점(2018.11.22)로부터 만 3개월이 지나면서 남북 공동의 3.1절행사는 '물건너 가는' 모양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정부의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이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과 한 묶음으로 진행되는 것은 물론, 정부의 기조가 '3.1혁명 100주년'보다 '임시정부 100주년'에 기울어져 있는 것에서 이미 예고된 바이기도 하다. 남과 북은 3.1혁명은 함께할 수 있겠지만 - 그리고 그렇게 했어야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함께 기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문재인 정부(의 이 부문 주요 정책 담당자들)는 마치 냉전시대의 '자존심 싸움'을 재현이라도 하듯이,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에 치우친 균형감을 찾지 못하고, 3.1혁명 100주년의 남북 공동행사 - 사업에 대한 전향적인 비전을 내놓지 못한 채 남북 관계 호전의 또 하나의 모멘텀을 사장시켜 버리고, 역사에 두고두고 한으로 남을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다.]


3.1혁명은 종교운동 - 즉 천도교의 보국안민 운동이다                          


그렇게 3.1혁명의 종교운동으로서의 의의를 밝히고 3.1혁명 100주년을 준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이 글은 3.1혁명에서의 천도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까지의 전사(前史)와 천도교 중심의 3.1혁명 준비 과정을 살펴보고, 기미독립선언서에 담긴 ‘천도교의 사상’을 주목하는 데 주로 주력할 것이다. 이것은 ‘천도교가 3.1혁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 사료로 논증하겠다는 구구(區區)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3.1혁명은 천도교의 보국안민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지극히 ‘종교적인 운동’이었고, 기미독립선언서가 지극히 종교적인 문서–기도문–라는 점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나 불교 혹은 원불교나 천주교까지 3.1혁명과 기미독립선언서를 ‘자기 종교’의 관점에서 이 글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논리 전개의 방식도 논증이나 객관을 추구하기보다 ‘한울님’의 힘을 믿고, 신앙적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주관적인 이해와 감성에 치우침, 거친 생략과 비약[지성․야성․감성]을 마다하지 않고, 오로지 한울님의 말씀[天語]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祈禱․企圖)한다.]

[천어 :  <<천도교경전>><해월신사법설>'천어(天語)', “그러면 天語와 人語의 區別은 어디서 分別되는 것이냐하면, 天語는 大槪 降話로 나오는 말을 이름인데 降話는 사람의 私慾과 感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요, 公理와 天心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킴이니, 말이 理에 合하고 道에 通한다 하면 어느 것이 天語 아님이 있겠느냐.”]


이런 점에서,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논증하는 글이기도 하다. 

"3.1혁명 100주년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어야 한다."


Ⅱ. 3.1혁명은 다시개벽 혁명이다 


1. 사회적 성화로서의 모심의 혁명


동학에서 생명의 전일성은 시천(侍天)의 자각과 양천(養天)의 수행, 그리고 체천(體天)의 실천의 삼위일체로 완성된다. 3.1혁명은 이런 의미에서 시천과 양천과 체천이 상즉상입한 채로 특히 체천으로 구현된 동학-천도교의 종교적 활동의 일환이다. 


이를 다르게는 모심의 혁명-동귀일체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모신다는 것은 동학-천도교의 신앙과 교리와 사상과 철학의 정점으로서 제출되는 가치이다. [*졸고, 「유무상자 경제학과 모심의 혁명」(1)(2), <<개벽신문>> 76호, 77호, 2018년 7월호, 8월호, 개벽의 창(2-3쪽) 참조.]


동학의 만(萬) 진리는 주문 21자[至氣今至 願爲大降 天主 造化 永世不忘 萬事]에 귀결되고, 다시 주문 21자는 시․정․지(侍定知) 세 글자, 종국에 가서는 시(侍) 한 글자에 귀납된다. 시(侍), 즉 모심은 다시 ‘안으로 신령이 있고(內有神靈)’ ‘밖으로 기화가 있어(外有氣化)’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못하는 것임을 깨닫는다(一世之人 各知不移)는 셋으로 분화하는데, 이 시에 모심의 혁명-동귀일체 혁명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시(侍) 한 글자는 곧 인간 생명의 주체인 영(靈)의 유기적 표현입니다. 인간과 우주의 자연적 통일,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통일, 인간과 사회의 혁명적 통일이 이 시(侍) 한 글자, ‘모심’ 하나에 다 통일되어 있습니다. ‘시(侍)’ 안에는 최수운 선생의 인간과 우주의 자연적 통일로서의 시천(侍天) 사상 뿐만 아니라, 뒷날 최해월 선생의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통일로서의 양천(養天) 사상, 나아가 동학혁명 민중 전체와 전봉준 선생, 3.1운동 민족 전체와 손병희 선생 등의 인간과 사회의 혁명적 통일로서의 체천(體天) 사상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천(侍天) 안에 양천(養天)․체천(體天)이 들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양천 안에도 시천․체천이 있으며 체천 안에도 시천․양천이 있습니다. 씨앗 가운데 이미 성장과 열매가, 성장 가운데 씨앗과 열매가, 열매 가운데 씨앗과 성장이 다 있는 것과 같이. [김지하, 「인간의 사회적 성화(聖化)-수운사상 묵상」, <<남녘땅 뱃노래>>, 두레, 1985, 112쪽. 이 '남녘땅 뱃노래'는 최근 '남조선 뱃노래'라는 본래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모심의 직접적인 효능은 우리를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세속으로부터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신성(神性․神聖), 즉 종교적 지평으로 승화하는 데 있다.  

[각자위심과 동귀일체 : <<천도교경전>>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 * 각자위심은 이 ‘세계’의 일체성(一體性)을 망각(忘却)하고, 불순천리불고천명(不順天理不顧天命)하는 삶. 이것이 “억압과 분단, 정복과 전쟁, 왜곡, 소모, 파괴, 약탈, 질병, 오염, 변질, 멸종, 기만, 증오” 같은 전우주중생의 ‘죽임’을 불러온다. ‘죽임’의 의미는 김지하, 앞의 글 참조. ** 동귀일체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천인일여(天人一如)와 시천주(侍天主)-인내천(人乃天)을 깨닫고, 경천명순천리(敬天命順天理)의 자세로 살아가는 삶. ‘사람이 곧 한울님임’을 회복하므로, ‘죽임’에 대한 ‘살림’의 삶이 곧 ‘동귀일체’이다. 따라서 해방과 독립, 통일과 진리, 유무상자와 창조, 치유, 청신간결(淸新簡潔)과 자아완성(自我完成-변질의 반대), 영생, 진실, 사랑, 이 그 속성이다.]


2. 해방-고비원주 운동


지금은 8.15해방이라는 말보다 8.15광복이라고 쓴다. ‘해방절’이 아니라 ‘광복절’이다. 해방이라는 말 대신 광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해방’이 강대국의 전승의 결과로 주어진 것을 의미하는 대신 ‘광복’이 광복군과 한민족의 끊임없는 독립전쟁의 결과로서 쟁취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뜻에서다. 해방은 ‘되는 것’이고 광복은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쓴다. 절절(切切)하지만, 자칫 구구(區區)할 수도 있다. 그 둘은 갈라서 어느 한쪽을 버려서는 안 될 일이다. 광복은 해방하는 것이고, 해방은 광복되는 것이다. 


3.1혁명은 ‘해방하는’ 혁명이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하는 순교(殉敎) 운동이요,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는 구원(救援-출애굽)의 생명(生命) 운동이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각각의 사슬로부터 해방하여 스스로의 주인[自主]이 되고 주체[自由]가 되는 혁명이요, 선천의 적폐로부터 해방하는 후천(後天)의 개벽(開闢)운동이요, 일체의 낡은 것으로부터 해방하는 개화혁신(改化革新) 운동이요, 암울한 식민체제로부터 해방하는 독립(獨立) 운동이요, 일본을 몽매한 군국주의, 침략주의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하는 계몽교화(啓蒙敎化)운동이요, 중국과 전 세계 식민국을 해방하는 평화(平和)운동이요, 이 세계를 강권주의,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하는 혁명(革命)운동이요, 우리 민족이 앞장선 인류의 고비원주(高飛遠走)운동이다.[ ‘고비원주’의 의미는 졸고, 「고비원주, 고비원주, 고비원주」, <<개벽신문>> 제75호, 2018.6. 2쪽. “높이 날고 멀리 뛰라”라는 뜻으로, 기본적으로 ‘과거로부터의 단절’ ‘뜻을 펼침’ 등의 의미이며, 나아가 ‘모심의 혁명’을 완성하는 다시-개벽, 신문명세계 개척운동이다. ] 


3.1혁명은 이렇게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왕불복(無往不復)하며, 원시반본(原始返本)하고, ‘광복되는’ 운동이다. 해방은 과정으로서의 줄탁(啐琢)이고 광복은 완성으로서의 동시(同時)이다. 빛[光]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그때 그 빛이며, 그 원형이 한울님이다. 그러므로 광복은 다시 한울님과 하나 됨, 즉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의 체천행도(體天行道) 운동이다. [김지하, 앞의 글, 148쪽, “(전략) 그러므로 민중과 중생 속에 살아계신 생명이 민중과 중생의 줄기찬 생명운동을 통해서 중생 속에서 드러남 열림, 즉 생명이 스스로 생명에 이르름, 생명이 스스로 생명답게 자기 자신의 주체에 돌아감, 자아로의 단순반복이 아니라 극히 창조적으로 돌아감입니다. 즉 귀향이며 통일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해방이며, 자유이며, 해탈이며, 개벽입니다. 뭐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민중생명의 자아회복이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3. 보국안민-다시개벽 혁명


1) 천도교 보국안민 혁명운동사와 3.1혁명


역사적으로 볼 때, 3.1혁명은 천도교 보국안민(輔國安民) 운동사의 한 정점(頂点)이다. 보국안민이라고 하면 보통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보국안민은 천도교(동학)를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 창도의 과정과 그 의의(목적)를 밝힌 글[布德文(天道와 天德을 펴는 뜻을 밝힌 글)]에 이미 명시되어 있다.[<<천도교경전>><동경대전>'포덕문', “이러므로 우리나라는 악질이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언제나 편안할 때가 없으니 이 또한 상해의 운수요,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다 멸망하면 또한 순망지탄이 없지 않을 것이라.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


보국안민에서 ‘국(國)’은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치국-평천하’의 계기, 즉 평화 세계의 기점(起點․基點)으로서의 ‘나라’이다. 


<<천도교경전>><용담유사> '안심가', “개벽시(開闢時) 국초일(國初日)을 만지장서(滿紙長書) 나리시고 십이제국(十二諸國) 다 버리고 아국운수(我國運數) 먼저 하네.”

<<천도교경전>><용담유사> '안심가',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개벽(開闢) 아닐런가. 요순성세(堯舜聖世) 다시 와서 국태민안(國泰民安) 되지마는 기험(崎險)하다 기험하다 아국운수(我國運數) 기험하다.” 

<<천도교경전>><용담유사> '몽중노소문답가', “천운(天運)이 둘렀으니 근심 말고 돌아가서 윤회시운(輪廻時運) 구경하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太平聖世)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 개탄지심(慨歎之心)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


다시 말해 천도교는 창도 당시부터 한 나라의 평화로서 그 인민을 평안(平安)하게 하고, 나아가 온 세계[十二諸國]의 괴질(怪疾=帝國主義, 侵略主義, 强權主義)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세계를 열고자 한 ‘다시-개벽’혁명이었다. 


보국안민 운동으로 건설할 새로운 평화 세계를 천도교에서는 ‘다시개벽’의 세계로 지칭하였고, 따라서 천도교 입장에서 3.1혁명은 천도교 창도 목적인 보국안민 운동이며, 다시개벽[後天開闢] 혁명운동의 한 계기로서의 자주독립운동이다. 다시개벽 혁명운동으로써 이룩되는 새로운 평화세계를 천도교에서는 ‘지상천국(地上天國)’으로 지칭하였고, 따라서 천도교 입장에서 3.1혁명은 이 땅에 한울님 세상(나라)을 세우는 지상천국 건설운동’이었다.[졸고, <東學思想과 地上天國 建設運動>, <<無極>> 창간호, 東學無極思想硏究會, 2001 참조.] 이 보국안민-다시개벽-지상천국 건설운동은 천도교 창도(1860.4.5.) 이래 지금까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오는 혁명운동이다. 


3.1혁명 전까지 동학의 보국안민 운동은 다음 몇 가지 단계를 거치며 전개되었다. 


첫째,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창의운동으로서의 민회(民會=敎祖伸冤運動)운동이다.   


1860년 4월 5일 동학(천도교)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 순도(殉道)하였고[핵심 죄목은 ‘左道亂正律(좌도난정률)’이다. 이때 左道란 비(非)朱子學, 특히 西學을 가리킨다. 즉 수운 최제우는 ‘서학을 傳布했다’는 죄목으로 순도했다], 이후 동학(천도교)는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이끌었다. 1860, 1870년대의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1880년대 들어서면서 동학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가 폭발적으로 점증하며 세력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동학(천도교는) 1890년대 접어들면서 수운 최제우의 신원(伸冤; 억울한 원한을 풀어 버림)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동학(천도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동학도인들에게 가해지는 탄압을 제거하며, 동학이 지향하는 새 국가 건설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최초의 대규모 민회(民會)운동이었다.[1800년대 일반적인 ‘民會’은 고을 단위였던 반면, 동학의 民會운동은 ‘범 지역’적 특성을 갖는다. 즉 공주-삼례-한양(光化門前 伏疏)-보은으로 이어지는 민회(‘敎祖伸冤運動’이라고도 함)에는 전국 각지에서 각 연원의 주요 지도자들이 1천명~3만 명까지 참집(參集)하였다. 2000년대의 ‘촛불시위’는 동학의 이 ‘민회’운동이 면면히 계승되어 온 것으로 본다. 김종철, <촛불시위와 ‘시민권력’>, <<녹색평론>> 제152호 2017년 1-2월호. “이 겨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래 처참한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끝끝내 꺾이지 않고 역사의 저류(底流)로 면면히 지속돼온 풀뿌리 저항정신이 다시 전면으로 분출하고 있는 장면임이 분명하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금 우리는 심히 긴장된 흥분 속에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이러한 초기 교조신원운동-신앙의 자유 획득 운동에서 보국안민의 과제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구호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 척왜양창의의 정신이야말로 기미년 3.1혁명에서의 자주, 독립 정신의 직접적인 연원이 된다. 또한 민회(民會)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운동은 훗날 3.1혁명의 성과로 등장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화정을 채택할 수 있는 사상적, 역사적(전통적) 연원이 된다. [이러한 논쟁(의견의 대립) 때문에 이미 15년 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등에 의해 제정하도록 명시된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아직도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


둘째, 신(新)존왕주의 국가 기틀 강화 운동으로서의 동학혁명이다. 


동학혁명이 혁명이냐 아니냐, 동학혁명에서 동학(천도교) 교단 또는 동학의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역할은 무엇이냐를 두고 아직도 역사적인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필자는 현재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통칭되는 역사적 사건의 올바른 명칭은 ‘동학혁명’이라고 본다]. 동학혁명의 성격을 두고 그 ‘혁명’성을 의심하는 학자들은 동학군이 조선왕조를 전복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건설할 명확한 의지와 로드맵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점을 거론한다. 이들은 동학혁명의 핵심 지도자인 전봉준의 공초 등에서 오히려 군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근왕주의(勤王主義)를 읽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반봉건반외세’운동이라고 규정하면서 제1차 동학농민혁명(3월-6월)은 ‘반봉건’ 운동, 제2차 동학농민혁명(9월 이후)은 ‘반외세’ 운동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역사왜곡이다.]


그러나 동학군이 지향한 것은 근대적 민주국가 건설-선거에 의한 정부의 구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학군들은 ‘신(新)존왕주의’를 기반으로, 권귀(權貴=부패 관료)를 배제한 가운데, 민권(民權)을 군권(君權)과 직결(直結)하여 국권(國權)을 강화하고, 이로써 서구적 근대(=帝國主義)의 쓰나미에 대항하는 자주로운 신(新)조선을 만들어가자는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이영재, <<근대와 민 인간존중·신분해방 사상이 만든 민주공화국>>(2018.5.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은 이런 관점에서 조선조 말기의 동학운동을 재조명하였다]


다시 말해, 동학혁명은 자생적(자주적), 토착적 근대화 운동이었다.[이런 관점에서 인류학자 권헌익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1919년의 세계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평화 연구’ 필요”라는 기사(한겨레신문)에서 적어도 한국에서의 운동의 기점은 1894년으로 상향조정할 필요가 있다.]


셋째, 입헌군주국(立憲君主國) 건설운동으로서의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이다.


동학혁명 좌절 이후 10여 년이 경과하는 동안 동학(천도교)교단 내에서는 서구의 역사와 세계 정치상황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조선의 자주적 근대를 어떻게 주도하여 보국안민-다시개벽의 과제를 성취할 것인가 하는 전략적 모색이 진행되었다. 1900년 초부터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더 거치며 동학(천도교)은 진보회(進步會)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대한제국을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서구적 근대화의 길을 통해 보국안민의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는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동학혁명 당시의 존왕주의와 갑진개혁운동에서의 입헌군주국 추진운동은 ‘근대’ 운동의 제1기의 전기-후기로 구분하여 명명할 수 있겠다.]


그러나 1904년 20만 명의 일시적인 단발(斷髮)과 흑의 착용 운동 등으로 전개된 이 운동은 내부적인 혼선으로 좌절되었고, 당시의 동학교주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에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라는 근대적 제도종교의 명칭으로 선포(宣布)하면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천도교가 취한 보국안민 운동 전략이 교정쌍전(敎政雙全)이다.[오문환, <의암 손병희의 ‘교정쌍전’의 국가건설 사상: 문명계몽, 민회운동, 3.1독립운동>, 한국정치사상학회, <<정치사상연구>> 제10집 2호, 2004, 59-84쪽; [네이버백과 – 성신쌍전(性身雙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일제하 3.1혁명은 대외적인 자주 독립의 확인이었으며, 대내적으로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전환하는 계기였다.” 특히 “교정쌍전은 동학의 도덕정치의 근대적 계승ㆍ발전이다. 의암은 동학을 근대적 종교로 발전시켜 천도교로 이름하고 언론사업과 교육사업을 통하여 근대적 민을 형성하여 새로운 국가 형성의 주제로 삼았다. 민의 활동은 민회를 통하여 구체화ㆍ제도화되었으며, 민회는 일련의 근대화 운동의 자치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천도교의 근대화 운동은 천도에 기초한 민족자결의 자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인 3.1혁명에 이르러 그 정점에 이르렀다.” 교정쌍전이라는 말은 그에 앞서 ‘성신쌍전(性身雙全)이라는 교리 개념으로부터 유래한다. “원래 천도교는 물(物)과 심(心)을 이원(二元)으로 보지 않고 오직 지기(至氣)의 발작(發作)에서 물과 심이 생겼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천도교는 유심(唯心)에 속한 것도 아니며 유물(唯物)에 속한 것도 아니요, 오직 지기일원실재체(至氣一元實在體)인 한울을 그 대상으로 한 것이나, 그 작용의 점(點)에 있어서는 물·심이 병행하는 것으로 보아 물심이자(物心二者)를 총섭수행(總攝修行)함을 성신쌍전이라 이름하고 행위상으로 나타날 때에 성변사(性邊事)와 신변사(身邊事)를 달리 말하게 되는 것이다.” ]


다시 말해 동학에서 천도교로의 개신(改新)은 동학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틀로 폐칩(閉蟄)하는 운동이 아니라, 변화된 정세(동학혁명의 좌절과 일진회)에 대응하여 장기적으로 보국안민 운동을 전개하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 교정쌍전은 동학혁명이 ‘국(國)’과 ‘민(民)’을 우위로 한 운동이었던 데서 ‘교(敎=宗敎)와 정(政=國家)을 겸전(兼全=雙全)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오문환, 앞의 글]


이는 천도교(東學) 중심의 근대국가 건설운동이 영성운동(靈性運動)과도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오문환, 「천도교의 이상정치론: ‘교정쌍전(敎政雙全)’을 중심으로」,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16호, 2008, 125-144쪽 참조.]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할 때 의암 손병희는 근대 국가의 헌법체계를 그대로 반영하여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채택하였다. [다만, <천도교대헌>에서 국가의 君主 자리에는 ‘대도주(大道主)’라는 종교 수장이 자리매김되어 있다. 이동초, <천도교제도변천사>(미간행) 서문, “1906년 2월 10일 종령 제5로 발표한 대헌의 체재는 12장(대도주, 원직, 주직, 중앙총부직원, 대교구직원, 중교구직원, 소교구직원, 장실, 중앙총부, 대교구, 중교구, 소교구)으로 편제되고 부칙으로 총칙 36장과 총칙목차 및 의회(제1장 제9조)로 구성되어 있다. (중략) 대헌 제1장 대도주는 ‘천天의 영감으로 계승하고, 도道의 전체를 통리하며, 교敎를 세상(人界)에 선포한다’고 규정하여 절대적인 지위에 있는 대도주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고 동학을 계승하여 천도교로 선포한 당위성을 천명하였다. 대도주가 종령을 발포하고 공안을 인준하며 모든 중요 교직을 선임하는 권한을 쥐고 있어 국가의 입헌군주제의 헌정 체제와 흡사한 교회 조직이라 하겠다.”]


이 천도교대헌은 그 구조상 입헌군주국 ‘헌법(憲法)’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실제로 갑진개화운동 전후로 천도교가 내세우던 주요 주장 가운데 하나가 국교(國敎)의 필요성이었다.  [오상준, <<初等敎書>> 참조. <<初等敎書>>는 1907년 천도교중앙총부의 오상준이 간행한 국민계몽 교과서. 근대 문명국가의 건설이념과 노선 등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시되는 것이 오교(吾敎-천도교 또는 국가의 정신을 대표하는 ‘國敎’)와 오국(吾國)의 관계이다. 오상준은 의암 손병희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 신지식인이기도 하다. 오상준의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독립선언서에 내포된 자유, 정의, 평화, 인도의 정신이 어떻게 조선인에게 내면화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계사적인 지평을 가지면서도 어떻게 그것과 차별화되어 ‘조선(東學)’ 고유의 사상으로서 재해석되고 승화되어 갔는지를 엿볼 수 있다. 즉 독립선언서의 자유, 정의, 평화, 인도 등의 근본정신은 외래(外來)한 것이 아니라 자생(自生-靈生), 토착(土着-自主)의 사상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탐구는 향후의 과제로 남긴다. 오상준-1882년(임오)  평남 평원군(숙천군)  출신. 1900년 법관양성소를 수료. 서북학회 활동. 1902년 천도교 입교하여 동학교단 파견으로 일본유학(1904), 총리대신이완용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왜경에 피체, 한일합방 때에는 예비검속. <<천도교회월보>> 창간에 참가. 중앙총부 각종 직위 두려 역임, 삼일운동으로 피검(1919). 해방 이후 서울 자택에서 환원(1947.11).]


넷째,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측면에서의 교육운동과 언론출판을 통한 계몽운동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개화혁신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도 있으나. 독립적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의암 손병희는 일본 망명(1900-1905) 시절 국내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켰으며 귀국 후에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포함하는 보성학교, 동덕여자의숙(현 동덕여대) 등 전국적으로 십여 개의 각급학교를 직접 경영하거나 정기적인 보조를 하였다. 


또한 보문관(普文館)이라는 출판사를 세워 각종 교서(敎書)와 더불어 <만세보(萬歲報)>라는 일간신문을 간행하여 신문물과 사상을 소개하고, 일진회 등과 사상 노선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천도교가 명시적으로 앞장서고, 그 이념을 뚜렷이 한 이러한 운동 이외에도 1895년의 을미의병,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운동 등에서도 근대적 자주 독립 국가를 향한 모색은 계속되었다. 


크게 보아 이러한 네 단계의 보국안민-다시개벽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의 열망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 기미년의 3.1운동이다. 


[보론 : 천도교단 내에서는 1914년, 훗날 3.1혁명 때에 독립선언서 인쇄를 책임졌던 이종일(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기도 함) 보성사 사장을 중심으로 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종일은 보성사를 근거로 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기획하여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교단적 차원의 독립운동 전개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때 의암 선생은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고 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나 1917년부터는 이종일이 중심이 된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이 기획되고 있었다(cf.<묵암비망록>) 갑오년(1894)의 동학혁명, 갑진년(1904)년의 개혁운동, 갑인년(1914)의 독립운동을 통칭하여 삼갑운동(三甲運動)이라고 호명하기도 한다.(이현희, <<3.1혁명 그 진실을 밝힌다>>, 신인간사, 1999)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교양총서>>(PDF판), 13쪽, “손병희가 이와 같이 독립선언과 독립운동 제의에 적극적으로 찬의를 표한 것은 그 스스로도 오랫동안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또 이전부터 교도들로부터 독립운동의 제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도교도들 사이에서는 이미 제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6년부터 천도교도들을 동원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교주 손병희에게 요청하는 신도가 있었으며, 1917년에도 같은 요청이 대두되었다. 또한 1917년 겨울에는 김시학(金時學)이 발의하여, 우선 천도교·기독교·유림의 3종단이 연합하고 사회계와 구관료계의 저명인사들을 모아서 1만 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승전국으로 간주되는 독일 수뇌에 제출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여 손병희도 이에 찬성해서 계획이 급진전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독일이 승전하고 협상국에 가담한 일본이 패전할 것을 전제로 한 운동인데, 1918년에 들어와서 협상국(일본 포함)의 승리가 전망되고 종전의 결과는 일본의 승전국의 하나가 되었으므로 이 계획은 국제정세의 오판으로 인한 차질 때문에 중단되었었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국제정세가 한국민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고 판단되어 다시 독립운동이 제의되었으며 손병희도 이에 적극 찬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사교양총서>>에서는 3.1운동이 해외의 4개 단체(신한청년당, 만주와 노령, 미주지역, 동경유학생)에서 선도적으로 진행하던 독립운동이 국내에 유입되어 천도교에서는 ‘다섯 번째’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편향된 시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3.1혁명은 조선 후기 이래 민족, 민중운동의 여러 갈래들이 흘러들어 이루어진 한바다였고, 이후 오늘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는 민족민주운동의 연원(淵源)이 되는 운동이었다. 

[제1기 = (개화파․위정척사파) - 개벽파 - 동학혁명 - (의병운동) - 자주적 (서구형) 근대화(애국계몽운동, 민회운동) ; 제2기 = 3.1혁명 ; 제3기 = 문화운동․무장투쟁․임시정부 ; 제4기 = 통일운동/민주화운동/근대화(산업화)운동/생명운동(한살림)․민족(종교)운동(반서구화․반기독교화) ; 제5기 = 3.1혁명 100주년 이후의 운동]


여기서 다시개벽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더불어 새로워지는 것으로, 하늘과 땅이 나뉘는 선천개벽이 물리적 개벽인 데 비하여 인문개벽이며, 영성개벽이며, 생명개벽이다. 

[<<천도교경전>><해월신사법설>'개벽운수(開闢運數)'; <의암성사법설>'인여물개벽설(人與物開闢說)']


그 면면한 운동에서 천도교의 위치는 명시적이며 선두적일 때도 있었고, 암시적이고 추수적일 때도 많았다. 그러나 최소한 3.1혁명에서 천도교는 전 민족적 역량을 총결집한 대열을 형성하고, 선도하는 데 주도적이며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2) 3.1혁명과 천도교의 전력투구 


이상에서 살펴본바, 창도(1860)년 이래 면면히 이어 온 보국안민운동의 전통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을 기반으로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혁명을 일시적인 기분이나 일회적인 기회(이 운동으로 즉각적인 독립을 성취하겠다는)가 아니라, 영구적인 혁명,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을 전파하는 운동으로 기획하고 준비해 나아갔다. 3.1혁명에서의 ‘주도적이고 선구적인 역할’에 값하기 위하여 천도교는 ‘전심전력(全心全力)’-시쳇말로 올인(all-in)-하였다. 


첫째,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한일합병조약’이 선포되는 날 의암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중앙총부의 교역자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국권회복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고 천명하였다.[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 <천도교와 3.1운동>,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포덕155(2014).12. 2쪽. ]


둘째, 독립운동을 지도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학숙(學塾)으로서 봉황각(鳳凰閣)을 지금의 강북구 우이동, 당시로서는 인가가 거의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 건립하였다. 이곳에서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3개년(만 2개년)에 걸쳐 전국 각지의 두목(頭目, 敎區 또는 淵源의 지도자) 483명을 7차에 걸쳐(21-49-49-49-105-105-105) 49일간의 특별 연성(煉性=性靈 修煉)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훗날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각 지역의 3.1운동을 기획하고 선도하였다. [이 밖에도 서울 시내 곳곳에는 3.1혁명과 관련된 천도교 사적(史蹟)들이 수십 곳에 달한다. 박길수, <서울, 3·1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포덕152(2011)년 12월 24일; 이동초, <<보국안민의 발길로 서울을 걷다>>,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7. 참조.]


셋째,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전국의 천도교인들에게 일제히 49일 기도를 실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49일 기도에서 핵심적으로 강조된 덕목이 이신환성(以身煥性)이다. 

[「33인심문조서」, 문 ; 천도교는 본년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회를 열 것을 각 교도에게 시달하고 실행한 일이 있는가.

 답 ; 나는 해마다 기도를 올리는데, 천도교에서는 협의상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문 ; 그 일을 각 교구에 문서로 배포 전달하였는가, 교구장을 모아서 시달하였는가.

 답 ; 그것은 교주가 문서로 발표하였다.

 문 ; 그 기도는 어느 때부터 조선독립을 성취할 시기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넷째,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가 경영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그대로 두라”고 하면서, 거듭된 손실을 보전해 주며 계속 경영하게 하였다.   


다섯째, 천도교중앙대교당을 건립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의 천도교인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하여 일부 자금으로 대교당을 짓고 대부분의 자금은 만세운동 준비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방면의 독립운동 자금, 상해 방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제공하였다. 그 결과로 3.1혁명 후에 천도교단은 재정적인 면으로나 인적(조직)인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나 동덕여학교(현 동덕여대) 등 천도교단에서 운영하던 각급학교를 차례로 다른 사람(단체)에게 넘겨주었고, 북촌과 종로 일대에 수십 채에 달하던 교회 소유의 주택(당시 주요 천도교 두목들이 기거했다)들도 채무 변제나 기부(그때까지 지원하던 학교 운영 자금) 등의 형태로 넘겨주고 말았다. [이것이 훗날(일제강점기 – 해방과 분단 – 산업화시기) 천도교 쇠퇴의 원인(遠因)이자 근인(根因) 중의 하나가 된다. 이상 <<의암손병희선생전기>> 등 참조.]


여섯째,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3.1혁명의 이념과 이상과 이론을 천도교가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이념과 이상과 이론이 ‘기미독립선언서’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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