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은 종교운동이며, 독립선언서는 민족의 대헌장이다
[필자주 : 이 글은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의 발표(2019.11.22)와 <신인간>(2019.2, 3, 4월호 3회 연재 예정)에 투고하는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증보한 것이다. [발표 및 신인간의 230여 매 원고가 450여 매로 증보되었다.] [3월 1일이 되는 날까지 이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발표 당시에 "3.1운동"이라고 한 것을"3.1혁명"으로 호명하였다. - 구체적인 논증은 別稿를 기약한다]
Ⅰ. 기도와 상상력으로 3.1혁명 바라보기
Ⅱ. 3.1혁명은 다시개벽 혁명이다 (이상 1회)
Ⅲ. 3.1혁명은 종교운동이다 (2회)
1910년부터 1945년 사이 35년 동안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모두 103개에 달하고, 그 가운데 1910년에서 1919년까지만 해도 61개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01 그중 기미독립선언서에 대해서는 ‘일반 민중이 이해하기는 너무 어렵다’거나 ‘투쟁성이 빈약하다’는 비판(오해)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언서’라고 하는 것이 정당한 평가라고 본다.02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사상의 의의뿐만이 아니라, 그동안의 독립선언서에 관한 이해에서 ‘종교적 상상력과 혜안(慧眼)’이 누락됨으로써 그것의 가치가 충분히 해명되지 못했다고 보고, 이 글에서는 그 관점을 주로 언급하고자 한다.
기미년의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작성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상식’인가? 독립선언서를 최남선이 썼다고 말하는 것은, 의도했든 안 했든지 간에 3.1운동과 독립선언서의 가치를 폄훼하는 데 일조한다. 민족의 대헌장인 독립선언서를 한 개인의 지력(知力)과 필력(筆力)의 의거하여 작성하였다는 발상 자체가 자기 비하와 ‘몰상식’의 극단적 사례라 할 만하다. 더욱이, 그 말미에 민족대표 33인의 씨명이 버젓이 명기(明記)되어 있음에도 그런 말이 떠도는 것은 사안(事案)과 사태(事態)의 본질보다 입살에 올리기 좋은 소재가 과잉 전파되는 언론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안이기도 하다. 100주년을 앞두고, 특히 종교인들이 공부하는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작성하였다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독립선언서 작성자는 1차적으로는 최남선이다. 그러나 그 본질에서 독립선언서는 민족대표33인의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집단지성은 인심(人心)이 아닌 천심(天心)이며, 다시 말해 한울님(하느님, 부처님)의 감응(感應/應答)의 결실이다. 무엇보다 명명백백하게 선언서 말미에 33인의 성명을 기재하여 “이것은 우리의 말씀이요!”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독립선언서를 직접 쓴 사람은 최남선이지만, 최남선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쓸 수 있게 한 사람은 의암 손병희다. 의암 손병희의 정신이 메신저인 최린을 통해 최남선에게 전달되었고 최남선은 그 정신을 현현(顯現)하는 메신저가 되어 문자화한 것이다.03
이때 ‘의암 손병희’는 한 자연인 또는 천도교의 교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서의 손병희요, 당대 민심(民心)의 대변자로서의 손병희이다. 천심-민심-종교인-손병희-최남선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이 작동하는 데는 최소한 지난 20년(1900-1919)년간의, 좀더 길게 보면 1860년 이래 면면한 위정척사(衛正斥邪)-개화혁신(改化革新)-다시개벽(開闢) 운동의 노정에서 축적되어온 민중/민족의 지혜와 성심(性心․聖心․誠心)의 결실로서 독립선언서는 지어진 것이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썼다’는 말이 선언서 집필자 관련 화제(話題)의 중심이 된 것이야말로 본말전도의 전형이다(cf-노이즈마케팅).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며 코끼리를 논하는 형국이다. 최남선이 손이라면, 머리는 민족대표요, 몸통은 과 팔과 다리는 한민족 전체이다. 그 온몸을 일컬어 한울님이라 한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명문이라면 그 명문에 대한 찬사와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이 종교인(민족대표33인)에게 돌아갈 것이요, 독립선언서가 졸문(拙文)이라면 그 비난과 그에 따르는 책망이 역시 종교인(민족대표33인)에게 돌아가야 한다. 독립선언서 작성을 자천(自薦)하고 나선 최남선이 “독립선언문만은 내가 지어볼까 하는데 그 작성상의 책임은 최 형(최린-인용자)이 져야 합니다”(의암손병희선생전기, 346쪽)라고 말할 때에, 그는 자신의 역할을 ‘문안작성’에 국한시키고 그 내용은 종교 지도자들의 독립 선언의 취지에 입각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3.1운동이 종교운동인 한에 있어서, 그 종교인들은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이상주의자인 한에 있어서, 기미년 독립선언서는 ‘세계로, 미래로, 그리고 하늘로’ 열린 명문 중의 명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독립선언서의 내용에 대한 종교적인 이해는 다음 장에서).
1910년 후반에 이르러 의암 손병희 선생은 최린, 권동진, 오세창 세 분과 국내외 정세를 두고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1919년 1월 이들 세 사람은 상춘원에서 연성수련 중이던 손병희 선생을 찾아뵙고 결정적인 시기가 다가왔음을 보고하였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이때 독립운동 추진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며,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을 지시하였다.
一. 독립운동을 대중화할 것
一. 독립운동을 일원화할 것
一. 독립운동을 비폭력화할 것 (의암손병희선생전기, 326쪽)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특히 공약삼장에 나타난 정신은 이러한 3대원칙을 시대와 상황에 맞추어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04
이러한 ‘진실’을 전제로 하고, <의암손병희선생전기>에 나타난 독립선언서 작성과 인쇄 및 배포 과정을 아래에 열기한다.(인용 뒤의 쪽수는 <의암손병희선생전기>의 쪽수)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던 보성사의 사장이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묵암(默菴) 이종일(李鍾一)선생의 일기(<默菴備忘錄>)에 이와 관련된 이견(異見)이나 보충 자료는 각주로 보완하였다.
(1) 1단계: 최린이 최남선에게 독립선언문 작성을 의뢰하다
독립선언문은 1월 하순 최남선, 최린, 현상윤이 합동하여 독립운동의 기본 형태를 논의할 때 송계백이 휴래(携來)한 일본 동경유학생들의 선언문이 제시되어 검토된 일이 있다. 이때 ‘독립선언’의 형태를 취할 것에 합의되었으므로 그 선언문을 미리 작성해 둘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여 작성자의 물색이 논의되었다. 최남선은 ‘나는 내 생애를 통하여 학자의 생활로 관철하려고 이미 결심한 바 있으므로 독립운동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독립선언문만은 내가 지어볼까 하는데 그 작성상의 책임은 최 형이 져야 합니다.’ 하고 최린에게 물으며 자천(自薦)하고 나섰다. 최린은 그의 문장력을 인정해 온 터라 그의 심정에 동정하여 이를 승낙하였다. 다만 의암 선생의 뜻이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내세우니 이를 반드시 선언문에 반영하도록 부탁하고 속히 착수하도록 말하였다. 그후 최남선은 독립선언문과 일본정부 귀족 중의 양원 및 조선총독부에 보낼 통고문(通告文),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보낼 청원서(請願書)와 파리강화회의 열국위원에 보낼 서한을 작성키로 하고 두문불출 초고작성에 힘썼다. (345-346쪽) 05
(2) 2단계 : 최남선, 초고를 작성하여 최린에게 보내다
그는 2월 25일 우선 완료된 선언문의 초고를 최린에게 가지고 와 교부하였는데 기밀의 누설을 염려하여 일녀(日女)의 안방을 빌려 거기서 작성하였노라 말하였다. 최린은 초고를 읽어 본 후 벽에 걸어 두었던 거문고 내부에 감추어 두었다가 오세창, 권동진에게만 보여주어 문안에 대하여 별 이의가 없음을 확인하였다.(346쪽)
민족대표에 대한 심문조서에 따르면 최린은 오세창, 권동진 외에도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도 이 문건을 보여주었고, 기독교 측과 대표자와도 이 문건을 공유하였다.
(3) 3단계 : 공약3장
<公約三章>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ㅣ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06
공약삼장을 누가 작성했느냐에 대해 김삼웅은 <<만해 한용운 평전>>에서는 이에 관한 이설(異說)이 등장하고, 반론과 재반론이 전개되어 온 과정을 소개하고 최종적으로 “여러 가지 정황과 증언을 종합할 때 ‘공약삼장’은 만해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07고 했다.
<<의암손병희선생전기>>에도 이와 관련된 대목이 나온다.
그 후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 질 수 없다는 최남선으로 하여금 선언문을 작성케 함은 불가하니 자기가 짓겠노라고 주장하였다. 최린은 책임이야 누구 지든지 선언문만은 최남선이 짓는 것이 옳다고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다소 불쾌히 여긴 한용운은 최남선이 지은 선언문을 보고 선언문 말미에 공약3장을 첨가하자고 주장하므로 최린도 이를 수락하였다.08 (346쪽)
그러나 필자는 다음 몇 가지 사유로 공약삼장 역시 최남선 소작(所作)으로 본다.
(1) 최린 자서전에서 육당의 제의(독립선언서 초안 작성)를 거절했다고 밝힌 점
(2) 만해가 스스로 공약삼장을 자신이 썼다고 밝힌 사실이 없는 점
(3) 만해가 공약삼장을 추가할 여지(시간과 상황)이 없었던 점
(4) 최린이 명시적으로 선언서 초안을 육당에게 일임했다고 밝혔던 점
(5) 최남선이 ‘학자적 양심’을 걸고 선언서 초안만은 자신이 작성하겠다고 자임하였던 점
(6)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공약삼장이 선언서의 본문의 취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점[일반적으로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를 결연하고, 투쟁적인 의지의 소산으로서, 최남선은 표명할 수 없는 의지라고 평가하는데, 공약삼장의 요점은 '질서존중, 평화'이고,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은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대중화와 일원화하여 이 운동을 전개할 것에 대한 반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이해라고 본다.] 09
(7) 무엇보다 이 공약삼장은 최린이 의암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신칙(申飭) 받고, 최린으로부터 최남선에게 전달된 독립운동의 3원칙(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서, 독립선언서의 근본정신은 최남선의 필력(筆力)이 아니라 의암 손병희, 나아가 종교인들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대목이다.
한용운 선생이 이르기를 “독립선언에 참여치 않는 사람이 독립선언서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내가 다시 쓰겠다”고 하였다 함은 하나의 사실(事實)적인 이야기일 수는 있어도, 진실은 아니며, 우리가 기록해야 할 사실(史實)의 전부도 아니다. 그 이면을 보아야 한다. 더욱이 최남선 선생은 '선언서'만 쓴 것이 아니라, 통고서라든지 청원서 등 수종의 문서를 작성하였는데, 한용운이 유독 핵심 문서인 '선언서'에 가필을 고집하고 관철시켰다면, 이는 염치 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0
“독립선언서 서명에도 참여하지 못한 육당의 인격이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와 같은 혁명적인 행동 강령을 쓸 수 있었겠느냐라는 의문을 제기”(<만해 한용운 평전> 180쪽)하는 것은 최남선이 독립선언 준비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독립선언 준비 주체(최린, 권동진, 오세창–손병희)의 내심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최남선의 훗날 행적(친일)으로부터 선입관을 갖고 예단한 견해라고 본다.
또한 대다수의 독립선언서 서명자(민족대표)들은 이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를 ‘폭력적 투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앞의 사람이 구속되더라도 그다음 사람이 그 뜻을 계승하여’ 진행하는 것, 서울에서뿐만이 아니라 지방 각지 고을고을마다에 이르기까지 독립선언을 계속해 나가라는 뜻으로 이해하였고, 실제의 만세운동도 그렇게 전개되었다. 11
2019년 1월 6일, 역사학자 박찬승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이 문제에 관한 팩트 체크 내용을 게재하였다. 이에 따르면 독립선언서는 공약삼장은 물론이고 그 본문까지 의암손병희 - 최린(권동진, 오세창) - 최남선 라인을 통해 기획퇴고 그 대강이 정리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최남선이 이를 '집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길지만, 훗날의 기록을 위하여 이를 전재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최남선이 공약3장까지 다 쓴 것으로 보고 있다. 2008년에 나온 충북대 박걸순 교수의 논문 < 3.1독립선언서 공약3장 기초자에 대한 재론>(<한국근현대사연구> 46집, 2008년 가을호)이라는 논문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검토하고 있다. 결론은 역시 최남선이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한용운은 한 번도 공약3장을 자신이 썼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 공판과정에서 최린은 최남선이 선언서를 기초했다고 말했을 뿐 한용운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 재판정에서 판사는 최남선과 최린에게 공약 3장의 문구 중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가 무슨 의미인가를 거듭 물었지만, 한용운에게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비슷한 수준의 질문만 하였다는 것, 최린은 자서전에서 "한용운이 자신이 독립선언서를 쓰겠다고 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최남선에게 맡겼다고 썼다는 것 등이다.
한용운이 공약3장을 썼다는 주장은 1946년 한용운의 제자 김법린이 독립선언서의 기초위원이 최린, 최남선, 한용운이었다고 말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1919년 2~3월 기초위원이라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1969년 3,.1운동 50주년을 계기로 불교계와 일부 학자를 중심으로 한용운 기초설이 널리 확산되었고, 2001년에는 한용운 생가에 공약3장비까지 세워졌다고 한다.
최린은 최남선에게 이미 2월 10일경 기독교와의 연합이 안 되면 천도교 단독으로라도 독립운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최남선에게 선언문 기초를 부탁했다.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이 협의하여 선언문의 대강의 취지를 정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최남선에게 선언문을 온건한 톤으로 써달라고 부탁했으며, 특히 최린은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민족의 독립을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최남선은 선언문 작성과정에서 최린과 몇 차례 만나서 문안을 조율했다고 최린은 진술하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문안이 완성된 뒤에는 권동진, 오세창, 그리고 손병희에게 이를 보여서 승락을 얻었다. 또 기독교와의 연합이 성사된 뒤에는 기독교측(아마도 함태영, 이승훈)에게도 이를 보여주고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최남선은 선언문 초안을 자신이 경영하는 신문관에서 활판으로 만들어 오세창을 통해 보성사의 이종일에게 건네주었고, 27일 저녁 이를 인쇄하게 된 것이다.
지방법원 예심조서에 의하면, 한용운은 24일 최린의 집을 방문했을 때, 기독교와 합동이 성사되었다면서 독립선언서 원고를 보여주어 이를 처음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용운은 여기에 자신이 어떤 문안을 추가했다는 진술은 전혀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이 원고에 손을 댈 시간은 없었다. 이틀 뒤인 26일 최남선은 이종일에게 독립선언서를 활판으로 만들어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용운은 최린으로부터 미국이나 일본정부, 총독부 등에 보내는 문서를 한 부 필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체포될 때 경찰에도 제출하기 위한 것이었다.실제로 한용은은 이 문서를 가지고 있다가 경찰에 이를 제출했다
또 공약3장의 내용 가운데 첫번째 항에 나오는 "이 일은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의 요구"라는 문장에서 '정의 인도'라는 말은 이미 선언서의 본문에도 한 차례 나오는 단어이다. 그리고 최린은 스스로 이러한 내용을 담아달라고 최남선에게 부탁했다고 하니, 이 대목은 최린과 최남선의 공동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항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라는 문장의 의미에 대해서는 최린과 최남선이 재판과정에서 계속 추궁을 당하였다. 일제 사법 당국도 두 사람이 이 문안을 만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월 1일 최린은 태화관에처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로 옮겨진 직후 있었던 최초의 경찰 신문에서 "선언문은 누가 썼는가"라는 질문에 "최남선이 썼다"고 말하였다. 그는 숨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디에서도 한용운이 이 선언서에 공약3장을 추가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1970년대에 이미 신용하 교수, 1980년대에 홍일식 교수가 최남선이 모두 쓴 것이라고 주장해왔고, 최근 박걸순 교수도 여러 자료를 치밀하게 검토하여 같은 결론을 냈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는 이제 결론이 거의 났다고 보여진다.]
선언서 문장 전체와 마찬가지로 공약삼장에서 우리가 깊이 논의해야 할 것은 누가 썼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첫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것은 일찍이 천도교에서 3.1운동을 기획할 당시에 염두에 두었던 3대원칙의 구체적 반영이라는 점이다.
둘째, 공약삼장의 ‘자유적 정신 – 배타적 감정’이 대를 이룬다. 따라서 배타적 감정은 단지 일본(의 무단통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만세운동에의 참여가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의견․의사․의지에 의한 것[自由]임, 다른 말로 주체적임을 의미한다. 또 감정으로부터 ‘정신’으로의 초월을 전제로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셋째,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는 동학-천도교의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사회적 천명이요, 불교 ‘돈오점수(頓悟漸修)’ ‘환멸연기(還滅緣起)’의 민족적 구현이다. 12
넷째, ‘질서존중–광명정대’가 호응하는데, 질서존중이 광명정대(光明正大)의 조건이 됨을 볼 때 질서란 단지 사회적 질서만이 아니라, 종교적․철학적․교육적으로 요구되는 일체의 수행 행위까지를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4단계 :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
보성사는 1910년 천도교에서 보성학교(보성전문, 보성중학, 보성소학; 현 조계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었음)를 인수할 때 함께 인수한 ‘보성학교 구내 인쇄소’이다. 기미년 당시 사장이던 이종일(李鍾一,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의 주도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와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인쇄하였던 보성사는 일제의 방화(1919.6.28.)로 소실되었다. <의암손병희선생전기> 305쪽,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과서적 그리고 학교 교과서의 인쇄에만 응한 것이 아니라 일반 인쇄 출판업까지 영업범위를 넓혀 한국 출판문화의 향상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한때 보성사의 결손 운영을 근심한 교회간부는 차라리 이를 폐쇄함이 좋지 않을까 하고 선생에게 말하였던바 선생은 ‘지금 결손을 몬다고 문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한 나라가 많은 돈을 들여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일조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오. 우리 보성사도 그 역할을 다할 때가 반드시 올 거요.’하고 거의 건의를 물리치었다.” 현재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에는 보성사가 조계사 자리에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과 당시 보성사 사장 이종일 선생의 동상, 그리고 3.1운동 80주년이 되던 1999년에 ‘종교지도자협의회’가 주최하여 건립한 ‘보성사기념조형물’이 건립되어 있다.
<<默菴備忘錄>>에 따른 2월 20일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시작하였다고 되어 있다.
1919.2.20. “오늘부터 독립선언서를 보성사에서 인쇄하기 시작하다. 장효근, 김홍규, 최남선, 신영구와 내가 좁은 인쇄소에서 문을 굳게 닫고 찍기 시작했다.”
1919.2.25. “2만 5천매를 우선 1차로 인쇄 완료하여 천도교본부로 운반하다.”
1919.2.26. “1차로 인쇄된 것을 각계동지들 7, 8명에게 2천매에서 3천매씩 배포했다. 이갑성에게 2천5백매가 전달됐다.”
1919.2.27. “오늘까지 2차로 1만매를 더 인쇄하여 천도교당으로 가지고 가다가 파출소에서 검문 당했으나 족보라고 속이고 겨우 운반했다. 어제 대한인 형사는 의암과 상의하여 겨우 매수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은 다른 역사 기록 및 실제 참여자(독립선언서 배포 담당자)들의 동선 등과 비교할 때 다른 자료와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2월 24, 5일경까지 민족대표 인원 선정 등의 논란이 이어지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2월 20일/25일 인쇄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독립선언서 인쇄를 책임진 이종일의 기록이므로, 이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앞으로 기존의 역사적 견해을 바탕으로 서술한다.
독립선언문 초고가 완성된 후 인쇄는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학원 내 보성사 인쇄소에서 행하였다. 그러나 문선상(文選上=植字)의 기술이 부족하다 하여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 인쇄소에서 조판한 후 이를 최린 집에 은닉해 두었다가 27일부터 보성사 인쇄소에서 인쇄에 회부하였다. 극비의 문서를 인쇄해야 될 사장 이종일은 일반 사원과 직공들이 퇴근한 후 하오 6시부터 인쇄에 착수하였다. 야간의 인쇄 작업에 켜놓은 등불이 외부에 새어나지 않도록 공장 내의 창을 모두 가리고 신임할 수 있는 공장 감독 김홍규와 사동(使童)의 셋이서 독립선언문의 인쇄에 들어갔다. 김홍규가 인쇄한 후 이종일이 교정을 보고 다시 인쇄에 돌려 오식 탈자가 없음을 확인한 후 인쇄를 시작하였다. (346-347쪽)
(5) 5단계 :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배포하다
독립선언서는 1차 인쇄가 완료(25일, 묵암비망록에 따름)된 다음날인 26일부터 이종일과 이갑성의 주도하에 미리 약속된 표식(청색 쪽지)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천도교에서는 인종익, 안상덕, 김흥렬, 이경섭 등이 북선, 서선, 남선으로 나뉘어 각 교구(敎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기독교에서는 이갑성, 오화영, 김창준, 함태영 등을 경유하여 각각 8도를 분담하였다. 불교 측에서는 한용운이 이종일로부터 3천매를 받아서 중앙학림(현 동국대학교) 학생 정병헌, 김상헌, 오택언, 전규현, 신상환, 김법륜 등을 통해 배포하도록 하였다. 학생단은 이갑성, 박희도, 김문진을 경유하여 김성국, 강기덕, 김원벽 등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학생 대표들을 통해 서울 시내에 배포토록 하였다.13 학생들은 3월 1일 새벽에 서울 시내 각 가정에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다.
(3월 1일 아침) 이윽고 최린이 나타났다. 그는 아침 일찍 자기 집 대문에 뿌려졌던 독립선언문 2매를 보고 선생께 달려왔다면서 선언서가 발표된 이상 일경이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을 그냥 둘 리 없으니, 집에 앉아서 연행되어 가느니 차라리 예정된 장소에 가서 동지들과 합동함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 선생은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이들 3인(최린 외 권동진, 오세창 – 인용자 주)과 함께 인력거에 몸을 실어 12시경 인사동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 이르렀다.
기미 독립선언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이다. 비폭력 무저항이었기에 세세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치 않았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선언서’의 보급과 그 정신의 전파가 기미 독립만세운동의 더 큰 목표였다는 차원에서 이해함이 더 정당하다.
독립선언서의 인쇄 및 배포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선독립신문>의 인쇄 및 배포이다. 조선독립신문은 3월 1일 보성사에서 제1호가 발행된 이래로 ‘신출귀몰한’ 방식으로 수개월간 전국 각지에서 발행되면서 3.1운동의 확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장문(長文)인데다 한자어투성이인 독립선언서는 그 대의(大義․大意-뜻)를 선포하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전포하는 데 이바지했다면, 독립운동을 실질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선포․전포하는 데는 간략하게 취지를 요약 정리하여 전하고, 실제 소식 위주인 이 조선독립신문이 더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14
훗날 일제 당국이 민족대표를 비롯한 독립운동 참가자들(주동자들)을 검거하여 심문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얼마나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실행했는지를 가늠하는 준거가 바로 ‘조선독립신문을 언제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심문조서에서 <조선독립신문>은 빼놓지 않고 등장하였다.15
아래는 이에 관한 귀중한 연구 성과로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므로, 길게 인용한다.
3․1 운동 와중에 발행된 매체로서 대표격인 <(조선)독립신문>은 당시 매체의 증식과 변형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시위 전개 과정에서 <(조선)독립신문>은 종종 독립선언서와 유사한 역할을 해 냈다. 3월 1일 당일 서울에 1만매가 뿌려졌던 만큼 <(조선)독립신문>은 독립선언서 못지않게 풍부한 언어적 자원이 됐다. 국장 배관객들은 거리에서 얻은 선언서나 <(조선)독립신문>을 짐 속에 꾸려 넣고 귀향길에 오르곤 했다. 선언서가 없으면 <(조선)독립신문>을 낭독함으로써 계몽과 선동의 효과를 꾀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니 그것을 문장으로 써 달라”는 요청에서 출발한 제1호는 보성사에서 1만부를 인쇄, 3월 1일 시중에 배포했다. 노동자 네 명을 각 50전씩에 고용해 배포를 의뢰하는 방식으로였다. 당일 이종일이 검거되고 보성사가 폐쇄된 후에는 이종린과 장종건․ 최기성이 경성서적조합 사무소 등에서 신문 발행을 계속한다. (중략) 제4호까지의 원고는 이종린이 작성했으나 그가 체포된 후에는 장종건이 “스스로 독립신문의 발간을 계속하고자 생각하여” 최기성 등 학생 여럿의 협력에 의지해 제9호까지를 발행해 냈다. (중략) 장종건까지 검거된 후에도 <(조선)독립신문>은 계속 발행된다. 무명씨들의 자발적 속전(續戰)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중략) <(조선)독립신문>이 3․1 운동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로까지 계승된 것은 이 때문이라 할 터이다. <(조선)독립신문>은 창간호 1만부 인쇄에 그치지 않고 자발적 릴레이에 의해 여러 달을 발간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증식과 변형의 운동성을 상징해 냈다. 그것은 곧 3․1 운동 자체의 생리이기도 했다..16
조선독립신문의 이러한 발행 방식이야말로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에서 밝힌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의 실질적인 실천이기도 하다.
(다음 호에 계속)
01 김소진, 앞의 「1910年代의 獨立宣言書 硏究」, 박사학위논문, 숙명여자대학교대학원 사학과, 1995, 79쪽.
02 이윤상,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86쪽, “이 선언서는 누가 읽어도 커다란 박력을 가지고 감명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두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대목에서부터 끝의 공약삼장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언서라고 할 만한다.”
03 이것은 오늘날 대통령의 각종 연설문을 ‘연설문 비서관’이 작성하는 것과 같다. 대통령 연설문 말미에 연설문 비서관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대통령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미독립선언서의 말미에는 33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 33인은 모두 ‘종교인’이다. 연설문 비서관의 역할은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알고, 그 말투까지도 대통령에 적합하도록 써 내는 것이다. 최남선은 당대 최고의 문필가였다. 그는 ‘최남선의 선언서’를 쓰지 않고,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를 썼다고 나는 확신한다.
04 <<默菴備忘錄>>에 따르면, 묵암은 갑진년(1914)부터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키 위하여 의암선생에게 건의하여 왔으며, 무오년(1918)에 비로소 독립운동 추진을 승인받았다. 이때 이종일 외에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훈 등이 의논에 참여하였다.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원칙도 이때 합의되었다. 이때 ‘독립선언서’ 초안을 이종일이 작성하여 여러 사람에게 회람하였다. 그러나 원로 교섭의 지연, 자금의 부족, 민중동원 역량의 부족함 등의 이유로 무위로 돌아갔다. <<의암손병희선생전기>> 등을 기초로 할 때 이 무렵 이미 의암 선생은 이종일보다 ‘최린’을 직접적인 라인으로 하여 대외 교섭을 맡겨서 별도로 독립만세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默菴備忘錄>>, 1918.12.15. “지난번의 독립운동 3대원칙을 재확인했다. 이젠 나도 기진맥진이다. 나를 과격파라고만 일축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05 <<默菴備忘錄>>, 1919.2.8. “내(이종일-인용자 주)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려 했으나 뜻과 같이 되지 않다.” 1919.2.11. “육당이 선언서를 작성 완료하다.”
06 필자는 공약삼장을 아래와 같이 번역해 보았다.
하나, 우리는 자유정신에서 정의·인도·생존·번영을 요구하는 것이니, 오직 평화롭게 전진하라.
하나,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한 순간까지 모두 하나 되어 민족의 의사를 당당하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되, 우리의 주장과 비전을 끝끝내 공명정대하게 선포하라.
07 김삼웅, <<만해 한용운 평전>>, 시대의 창, 2011(3쇄), 172-181쪽 참조.
08 <의암손병희선생전기>에 이 대목이 삽입된 것은 이갑성 선생의 증언을 반영한 것이라고 전한다. 이 <의암손병희선생전기>가 씌어질 무렵, 공약삼장에 대한 최초의 이론(異論)-한용운 선생 소작(所作)이라는-이 비등하는 때였다.
09 최남선 자신도 독립선언서와 대일본 통고문, 윌슨대통령에게 보내는 의견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메시지 등 일체의 ‘내 의사로서 작성해서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했다. 최남선,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찰>, <<신세계>>, 1956, 18쪽(이윤상, 앞의 책, 85쪽 재인용).
10 기전(김기전), 「오호의암선생(嗚呼義菴先生)」, �개벽� 제24호, 1922년 6월호, “그와 얼마 동안의 고초를 같이 한 한용운(韓龍雲) 씨는 일전(日前)에 말하되 ‘내가 그(의암 손병희 선생 : 1922년 5월 19일 동대문 밖 상춘원에서 환원-인용자 주)를 대한 후로는 곧 나의 평소의 결처(缺處)이던 편급성(偏急性)을 깨달았노라.’ 하였다.”
11 김소진, 앞의 글, 104-105쪽 참조. 그러나 여기서 ‘그다음 사람’의 의미를 ‘One by One’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All-One’으로서의 ‘최후의 1인까지’이다. 다시 말해 최후의 일인은 전일적(全一的)인 하나로서의 개체(個體=全體)이다.
12 김지하, <인간의 사회적 성화(聖化)-수운사상 묵상>, <<남녘땅 뱃노래>>, 두레, 1985, , 137-138쪽.
13 이때 인쇄소 불이 꺼져 있는데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수상히 여긴 종로경찰서 신승희(申勝熙)가 들이닥쳤다. 이종일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애원에 애원을 거듭하여 “선생(의암 손병희)에게 갑시다”라고 하였다. 신승희는 “나는 여기에 있을 테니 당신이 갔다 오오”라고 하였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종이뭉치(일금 오천원)을 내어 와서 신승희에게 전하라 하였다. 신승희는 그 돈을 받고 순순히 물러나 3.1운동 발발 시까지 함구하였다. 후에 만주에 출장하였다가 5월 14일 서울로 귀경하던 신승희는 체포되었고, 체포된 후 미리 준비하였던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다(당시 40세).
14 조선독립신문의 제작과 배포 과정에 대해서는 이동초, <<천도교 민족운동의 새로운 이해 - 분열의 역사를 넘어서는 통섭적 천도교 민족운동사를 위한 시론>>,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0 참조. 이 책 부록에는 <조선독립신문> 관련자에 대한 일제의 심문 조서가 실려 있다.
15 이병헌, 앞의 글, “한편 손병희 선생의 명으로 ‘(조선)독립신문’이 발행되었다. 윤익선 선생을 사장, 이종린 선생을 편집인으로 한 이 신문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때에 함께 인쇄하였다. 이것은 3월 1일 탑동공원을 위시하여 시내 각처에 철포되었는데, 천도교청년들이 그 배포를 담당하였다.”
권보드레, 앞의 글, 379-381쪽.
16 권보드레, <선언과 등사(謄寫)-3․1 운동에 있어 문자와 테크놀로지>, 반교어문학회, <<泮橋語文硏究>> 제40집, 2015, 379-3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