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는 데는 많아도 갈 데가 없는 사람의, 안물안궁할 이야기
3.1혁명 100주년이 낼모레다.
오라는 데는 많은 데 갈 데가 없다.
아니,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비감회심을 금할 길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픔이 길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지난 1984년 이래로(내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때)로 매년 3월 1일 오전 11시 전후에 천도교중앙대교당 이외의 곳에 있었던 적이/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으니, 3.1혁명 100주년의 날에 내가 있을 곳으로 그곳을 제1순위로 꼽는 것은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도교인이다). 그러나, 굳이 이 글을 쓰는 데서 알 수 있듯이, 3.1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며, 이제 그 36년간의 행동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걸 느낀다/생각한다/기도(祈禱/企圖)한다. 내가 3.1혁명을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맞이한다는 것은 '천도교 중심성' 내지 '천도교의 위상 회복'을 꿈꾸고,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36년 동안의 3월 1일마다 내가 한 일의 대종(大宗)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이다. 내일로 다가온 3.1혁명 100주년 기념일, 3.1절에 즈음하여 돌이켜보면, 그 노력은 '대체로 실패하였음'으로 귀결된다. 적어도 '천도교중앙대교당(경운동88)'를 기준으로 했을 때 그렇다. 그 36년간[일제강점기만큼이다]의 노력의 흔적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나가 다른 곳, 다른 사람들에게서 꽃피우고 있음을 본다. 그들은 그 (마음) 씨앗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그 많은 부분들은 이곳에서, 나를 비롯한 '동덕'들이 날려 보냈던(보내려고 했던) 씨앗들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정작, 그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야 할 경운동 88번지,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의연함'과 '의구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본다. 3.1혁명 100주년의 꽃이 이렇게 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므로, 3월 1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 서 있기는 '힘들 것 같다.'
탑골공원은 대부분 3.1운동 당시 학생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시작한 3.1운동의 발화점으로만 기억한다. 내게 탑골공원은 3.1운동 조선민족대표 33인의 총수로서의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이 있는 곳이다. 지금 의암 선생 동상이 서 있던 자리에는 처음에 이승만의 동상이 서 있었다. 이승만 동상이 그곳에 서게 된 것은 아마도 평소 '국부(國父)'를 자처한 이승만의 심기에 영합한 사람들이, 3.1운동-대한민국의 상징성에 기대어 이승만을 추앙하기 위해 벌인 짓일 터이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이승만 동상을 쓰러뜨리고, 몇 년 뒤 그 자리에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섰다. 의암은 그날 그때 '태화관'에 있었다며 항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지만,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정당하다고 나는 믿는다(의암 선생은 3.1운동 직후 결성된 국내외 유수한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에 가장 많이 추대된 분이다). 아무튼 내가 그 자리에 간다는 것은 1980년대 후반 이래 '천도교청년'으로서, 대개 그 청년들로 구성된 '풍물패'의 '상쇠'로서 풍물패를 이끌고, 뒤따르는 천도교인들은 인도하여 의암 선생 동상을 참례하던 기억을 떠올려서이다. 지난 36년 동안 최소한 20차례는 3월 1일에 풍물패를 이끌고 그곳을 참례했다. 경운동 88번지에서 탑골공원까지의 거리는 내가 청춘을 바쳐 투쟁했던 "동학과 개벽"의 삶의 연장으로서, 내 빛나는 시절-청년운동-을 상징하는 한 장소이기도 하다. 게다가 의암 선생은 '청년'을 위해 3.1운동을 벌였다고 했다. 몇년 전부터 천도교청년풍물패는 사라지고, 초청된 풍물패가 그 일을 한다. 나는 도저히, 그 행렬을 따라 그곳에 갈 수가 없다.
그곳은 본래는 지금 조계사 대웅전과 그 앞마당 자리인데, 표지석과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동상은 그 뒷편의 수송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보성사는 100년 전에 '기미독립선언서'와, 3.1혁명 확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조선독립신문' 창간호를 인쇄한 인쇄소이다. 당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학교의 구내 인쇄소이면서, 천도교의 교서를 인쇄하는 천도교 인쇄소이며, 경영을 위해 여타 인쇄물들을 (상업적으로) 인쇄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20년 전 '팔팔한 청년'이던 시절, 나와 또 다른 두 사람의 청년들이 의기투합하여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의 마음을 얻어, 그 조직 주최로 "3.1운동 80주년 기념, 3.1정신현창사업"을 전개하였고, 그 결실로, 보성사 기념조형물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실무일꾼 세 사람은 앞으로 20년 후 100주년에는 더 크고 바람직하게 100주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자고 결의하였고, 그로부터 20년간 해마다 그 마음을 되새기며, 크고 작은 3.1운동 행사를 기획, 실행해 왔다. 그러나 20년간 타임루프만을 거듭했던가. 앞서 '천도교중앙대교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보성사터는 여전히 음침한 도심속 소공원을 면치 못하고 (몇몇 방송국에서 특집방송에서 '보성사'에 대해서 조명하기는 한다), 그 일을 주도했던 천도교에 대해서는 적지않은 세상사람들이 "천도교가 큰일을 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말 공양'(그건 고마운 일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느낀다. 고맙습니다!)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이 말 공양 이상의 것이 되려면, 그 주체 역할을 할 천도교(와 그 후예들)인들이 그릇을 크게 만들어 놓았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3월 1일, 보성사 터에 서 있기는 '힘들 것 같다.'
그곳은 의암 손병희 선생이 1910년에 국권을 피탈당한 후 "내 10년 안에 나라를 찾으리라!"라고 작심하시고, '봉황각'을 건립하여 1912년부터 3년간 483명의 전국 두목들을 교육시킨 곳이다. 이들이 전국 각 지역의 핵심 지도자들이 되어 훗날 3.1혁명 당시에 해당 지역의 3.1혁명을 실행하는 현장 지도자들이 되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1919년에는 3.1혁명을 앞두고 전국의 천도교인들에 49일 기도를 하게 하셨고, 마침내 "지금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 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만세를 불러야겠다"고 선포하시고, 3.1운동을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즉 3.1운동은 일찍이 단군왕검이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을 내걸고 (고)조선을 건국하였던 것처럼, 당장의 독립이나 배타적/폭력적 궐기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의식을 형성하고 새 '나라', 근대 '나라'의 건국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위한 민족적 동력을 마련한다는 데 뜻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곳이 봉황각이다. 이점을 간과한 그 어떤 3.1혁명 100주년 기념 행사나 사업도 2% 부족함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봉황각을 방문한다는 것은 단지 그곳에서 483명이 49일 기도를 한 흔적을 찾아 기념하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3.1운동에 깃들인 의암 손병희 선생, 나아가 천도교 선열들의 거룩한 정신이 성령출세하기를 기원하고, 기약하고, 기도하기 위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매년 그곳에서 진행되는 강북구 주최의 3.1운동 행사를 최초로 기획(의뢰를 받아)하고 몇년 동안 주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서야 다시금 그렇게 하기에는 염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위에서 이야기한 천도교중앙대교당, 탑골공원, 보성사터, 봉황각을 모두 포함하고, 그보다 더 많은 3.1혁명 관련 사적(주로 4대문 안)들을 두루 돌아보는 일이다. 3.1혁명 당시 그 기획의 본거지이자, 민족대표들이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가회동의 의암 손병희 선생 가택(터), 민족대표 48인으로 의암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고, 의암 이후 천도교단을 책임질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던 춘암 박인호 선생 댁(가회동), 당시 천도교중앙총부가 있었으며, 의암 선생 집무실(3.1혁명 기획, 기독교-불교-천도교 합동의 최종 결정 완성), 학생대표들의 주요 회합처이던 승동교회(탑골공원 맞은편)이나 YMCA, 2.8독립선언과 3.1혁명의 연결고리이자, 최린-윤익선-김성수-최남선 등 북촌 사람들(주로 교육자)의 주요 회합처이던 중앙고등학교, 민족대표를 비롯한 3.1혁명 참여자들이 수감되었던 서대문감옥, 감옥에서 받은 고초로 인하여 사경을 넘나드는 몸이 되어서야 병보석으로 풀려 나온 의암 선생이 마지막 병치료를 하다가 순국한 상춘원 터(의암 선생의 별장 겸 천도교인 집합처 - 동대문밖/망양봉 아래) 등등. 그 공간들은 천도교의 가장 화려했던 시간, 풍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고,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여, 약 10년 전부터 필자는 올해를 기필하고 '3.1올레길' 코스를 개발하고, 매년 탐방객을 모집하여 순례를 하였고, 요청에 따라 수시로 역사 탐방 안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타임루프(동어반복)을 면치 못한 지난 10년의 세월이었다. 100주년을 앞두고 쏟아지는 수많은 자료들은 3.1혁명의 지평을 새롭게 넓혀가고 있고, 북촌과 종로 중심의 3.1올레길이란, 옛말이 되고 말았다.
가야 할 곳도 많고, 오라는 곳도 많으면, 발길이 허락하는 대로 여기저기 두루 섭렵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결국 프렉탈 구조, 인드라망 같은 것이라고 보면,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것도 한 방법일 터.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깝기로 따지면, 서대문 역사공원도 한 후보지가 된다. 그곳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30분도 채 안 걸리는 곳이다. 특히 이곳은 3.1혁명 당시 총독부(남산)에 연행되었던 민족대표들은 결국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예심과 본심을 거쳐 징역 3년에서 1년까지가 선고되었다. 이곳에서 양한묵 선생은 옥고를 견디던 끝에 옥사하였고, 의암 손병희 선생은 뇌일혈로 인사불성의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민족대표들은 기도하거나, 시를 짓거나,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유서' 등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의암 손병희 선생은 이곳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으러 오가는 길에 옥 밖에서 옥바라지를 하며, 때로 먼발치에서 당신을 지켜보는 부인 주옥경 여사 꽃을 들어 보이는 여유(?)를 보이기도 하였다. 서대문 감옥에서 꽃피다!! 어떤 이들은 민족대표가 유약하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하였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태화관이 그들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될 것임을 예감하고 각오한 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최근 발굴된(3월 1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공개될 예정인) 3.1운동 당시 주동자 계보도를 보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은 33인 이하로도 치밀한 조직과 연락 계통을 구축하여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조직적 확산을 기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모두 140명이 등장하는 이 계보도를 보면, 명실상부하게"반역"(일제 입장에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마저도 일제 당국에 파악된 것에 불과하고, 그 밖에 무수한 (오늘날 실증 자료로서 확인되는) 자료들을 통해, 그 조직은 전국 각지 각처 고을고을마다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참뜻은 자료로 드러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에 품었던 뜻까지를 살려 모시는 데에서 비로소 제 빛을 발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대문 독립공원도 3월 1일을 맞이하기에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 수감되었던 의암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 대표들, 그리고 옥 밖에서 그분들을 옥바라지 하던 주옥경 여사를 비롯한 천도교 여성들의 흔적은 지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그동안 몇 차례 그곳을 탐방한 적이 있다). 3.1혁명 100주년의 날에, 무슨 염치로 그곳을 방문하랴!!
그곳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고, '만북울림' '줄다리기' 같은,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행사들이 거행되는, 3.1운동 100주년 행사의 중심지라고 할 만한 곳이다. 특히 이 글을 쓰기 직전에 접한, '만북울림'의 행사장에서 발표될 <만북으로 열어가는 새로운 100년 선언문>은 3.1혁명을 우리나라 정신사 흐름에 자리매김하고 무엇보다 동학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괄목할 만한 시선'을 보여준다. 특히 '개벽'이라는 말을 9회나 사용하, 게다가 '동학-천도교'의 용어임이 분명한 '다시 개벽'이라는 말을 핵심 화두-길잡이-등대로 삼아 3.1혁명 100주년 이후를 전망하고 있다. 이 만북울림이야말로 100년 전 3.1운동을 기획하던 선열(천도교 지도자들) 들의 마음을 가장 잘 반영하고, 20년 전 '내 청년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새로운 100년 선언문'은 여러 사람이 마음을 맞대고 썼을 터이며, 그 여러 사람은 다시 전국/세계에서 모인 마음을 반영하여 자기 마음으로 삼았으리라. 글뿐이 아니라, 만개의 북을 모아 울려서 8000만의 마음을 하나로 꿰고, 다시 온 세계에 그 울림을 전하는 거대한 기획을 하고, 그것을 성사시켜 나간 공력에 찬사와 고마움을 보낸다. 확연히, 3.1혁명 기념은 이처럼, '만인'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더욱이, '만북울림'이라니!! "꽹가리를 치면서 뛰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다!"고 말하던 때가 30년 전이다! 만북이 울리는 그곳이 내 수구초심의 고향이기는 하다! 그러나 36년 동안의 내 발걸음을 가다듬어 그날 거기에 다다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살아 온 정의(情宜)로 말하자면, 천도교중앙대교당이 제1순위임이 분명하다. 그곳에서는 3월 1일 오전 11시부터 천도교가 해방 이후 매년 진행해 온 3.1절 기념식이 거행되고, 2시부터는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천도교 주관으로 7대종단과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여 5년 전 결성한 조직)가 주최하는 "3.1혁명 100주년 기념대회"도 열린다. 그 추진위원회에서 나는 몇년 동안 일한 적도 있으니, 명분과 책임마저 뚜렷해 보인다. 구구절절히 이야기한 대로, 나를 오라는 곳도 없고 어쩌면 갈 곳도 마땅치 않지만, 가야 할 곳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번 3.1혁명 100주년을 나는 내 생(36년-한 세대)의 한 변곡점으로 삼아서, 3.1운동과 관련된 내 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변곡점(심지어 특이점)을 마련하고 싶다/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3.1운동과 관련되는 것만이 아니라, 내게 3.1운동의 또다른 의미이기도 한 "동학-천도교"를 "하는" 지금까지의 방식과 결별하는 것을 포함하는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궁금하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는 이야기이지만, 내게는 중차대한 의미가 있다. 이런 상황을 예감하고, 지난해부터 "3.1혁명 100주년은 다시 개벽운동으로서의 3.1혁명의 의미가 밝혀지는 해여야 하고, 100주년 이후는 "다시 개벽" 날들[이것을 감당하는 것이 '개벽학' '개벽파' '개벽저널'이다]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해 오고 있다.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이든, 그것이 3.1혁명 100주년의 참 뜻이다/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