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은 종교운동이며, 독립선언서는 민족의 대헌장이다
[필자주 : 이 글은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의 발표(2019.11.22)와 <신인간>(2019.2, 3, 4월호 3회 연재 예정)에 투고하는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증보한 것이다. [발표 및 신인간의 230여 매 원고가 450여 매로 증보되었다.] [3월 1일이 되는 날까지 이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발표 당시에 "3.1운동"이라고 한 것을"3.1혁명"으로 호명하였다. - 구체적인 논증은 別稿를 기약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천도교는 이처럼 오랫동안, 그리고 전면적으로 3.1만세운동을 준비했지만, 기미년 만세운동을 천도교만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 1919년을 전후해서 한국 사회에는 독립운동의 필요성 내지 가능성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가 비등하고 있었다.01 즉 당시 서울 시내의 분위기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겠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팽만해 있었다. 실제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3.1혁명을 준비하고 있었고, 학생들 또한 특히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에 자극받아 학생 독자적인 3.1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3.1혁명이 3.1혁명이게 된 까닭은 천도교(의암 손병희)가 중심이 되어 그 운동의 핵심을 부여잡고, 그 모든 흐름을 하나의 운동으로 귀결시킨 덕분이다. 02
독립 만세를 선언하는 대표, 즉 민족대표들은 우여곡절 끝에, 그러나 천명(天命-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종교인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3.1혁명은 종교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3.1혁명이 처음부터 ‘종교운동’으로 추진된 것은 아니다. 천도교는 처음부터 전민족의 일원화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3.1혁명 기획 단계에서 가장 먼저 연대의 대상으로 고려된 것은 구한국(대한제국) 박영호, 윤치호, 한규설 관료들이었다. 나아가 이완용 같은 친일매국분자까지 함께하기를 권유하였다. 자칫 3.1혁명의 낌새가 일제 당국에 노출될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였으나, 의암 손병희의 포부는 원대하였다.03
1차로 연대의 대상으로 고려되었던 이들이 거부의사를 밝히자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던 3.1운동의 흐름은 ‘종교계’와 연계를 맺으면서 극적인 반전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것은 3.1운동이 종교(기도)운동으로서 오늘날 세계사적인 지평의 의의를 갖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여러 메신저들의 노력 끝에 2월 24일에는 기독교, 불교와의 연대가 최종 결정되었고, 종교계의 연대 소식을 접한 학생들도 25~26일 사이에 독립운동을 일원화하는 데 동의하였다. 이로써 ‘종교운동’으로서의 ‘3.1운동’이 완성되고, 그럼으로써,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3.1운동이 동시적으로 완성되었다.
‘민족대표’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정서가 최근 들어 팽배해지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서명자 33명을 선정하는 과정을 보면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당대 각 교단의 실질적인 명망을 온전히 대표하는 분들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이들이 시종일관 3.1운동 준비를 함께한 것도 아니다.04 때로는 편의에 따라(국장에 拜觀코자 上京한 人物 중에서) 선정한 경우도 있으며, 지역에서의 명망이나 조직적 역량으로 보면 충분히 들어갈 만한 사람이 후사(後事)를 담당하기 위하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빠진 경우도 있다. 또 단순히 ‘시간 관계상’ 빠진 분들도 많다. 그러나 선출(選出/先出)되지 않은 대표일지언정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선두(先頭)에서 선도(先導/善導)하는 선생(先生)으로서의 민족대표의 위상은 결코 폄하될 수 없다. 다만, 여기서 민족대표란 ‘민족을 대표’하는 것이니만큼, 주어(主語)는 민족 구성원 ‘최후의 일인(一人)’까지를 일컫는 것이며, 대표(代表/代身)란 말은 ‘용사(用辭)’로 이해함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05
또한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의 역할은 당시에 국내외적으로 팽배하던 민족독립의 기운을 천도교의 조직력과 자금력을 활용하여 현실화하고, 대중화․일원화․평화화(비폭력)하는 것으로 완성하는 것이었을 뿐이다.06 그리고 보국안민-다시개벽운동이라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3.1운동에 즈음한 종교(계/인)의 역할은 ‘자주적이며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민주공화국’을 산출(産出)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문명세계[新天地]의 비전을 세상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보국안민-다시개벽-지상천국 건설운동의 근대적 버전이 바로 3.1운동이다.07
3.1운동 준비의 핵심 세력인 민족대표 33인은 왜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였는가? 기미독립선언서는 왜 3.1독립선언서나 무오독립선언서보다 투쟁력이 떨어지는가? 민족대표들은 왜 좀더 ‘전투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는가?
이러한 류의 (잘못된) 물음들이 3.1운동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고, 그것이 되풀이된다. 3.1운동을 ‘기도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이해도 가능해진다.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의 한 분인 권동진은 ‘독립선언’이 ‘뜻을 가지고 씨앗을 심는 일’이며, ‘장래 기필코 열매가 맺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은 단순한 종교적인 신념(信念)을 넘어서는 ‘기원(祈願=祈禱)’이었다.08
천도교에서는 거교적(擧敎的)인 독립만세 운동을 앞두고,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전국의 교인들이 49일 기도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하여 지방의 두목(頭目)들이 서울의 중앙총부를 방문하고, 의암 손병희 선생을 배알(拜謁)하였다. 그때 의암 손병희 선생은 독립운동의 의의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건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09
실로 이것은 3.1운동의 핵심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언명이다. 같은 맥락에서 3.1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 민족대표들의 회고담이나 자서전, 심문조서와 역사기록 들을 보면,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작심하고, 천도교와 합동하기로 결심하고, 피검 이후 감옥에서 고난과 순교를 심정(審定)하는 매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응답을 구하는 장면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한마디로 민족 부활의 난장(亂場)이자 축제로서의 ‘천제(天祭)’였으며, 민족 각성(覺性-修道/覺醒-啓蒙)의 수도장(修道場)10이자 민족학교였으며, 설교(說敎)와 통성기도(通聲祈禱)가 펼쳐지는 교당(敎堂/敎會)이자 부흥회장이었다. 그 천제에 전 민족이 동참11하였고 학습하고 수도하고 계몽되었으며 교양12되고 마침내 각성(覺醒)13되었다. 3.1운동이 기도운동인 한에서, 기미독립선언서는 ‘기도문’이다(기도문으로서의 독립선언서 분석은 다음 절에서).
3.1운동은 앞서 말한바 시천, 양천, 체천의 삼위일체이면서, ‘셋이 하나가 되어 전개하는 운동이다. 기독교, 불교, 천도교가 하나 되어 추구한 운동이며, 종교계와 시민사회와 학생단의 셋이 하나가 되어 추구한 운동이다. 중앙과 지역 그리고 해외가 하나가 되어 추구한 운동이다.14
끝으로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3.1운동’의 명칭이다. 물론 3월 1일에 선언서를 발표한 데서 온 것이지만, ‘3.1’은 삼위일체의 뜻으로 여러 가지로 적용된다. 세 교단이 일체가 되어서 일으킨 운동이라는 의미도 되고, 영토․국민․주권으로 세 요건으로서 일 국가가 성립된다는 의미로서도 삼위일체가 부합되는 것이다. ‘33인’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정수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3.1운동과 수리적으로 관련성이 있고,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정한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15
3.1운동에서 기독교, 불교, 천도교는 각각의 역할을 수행했다. 천도교는 앞에서 살펴본바, 면면한 민족운동사의 맥락, 물질적․조직적 기반을 동원하고 제공하는 역할이 상대적으로 중대했다. 기독교의 참여는 신앙적 결단16으로써 종교운동으로서의 3.1운동의 내포를 깊고 풍부하게 하였으며, 학생단의 참여를 결단할 수 있게 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였다.17 무엇보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3.1운동의 실상을 전 세계적으로 전파함으로써 3.1운동이 세계사적 위상과 영향력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일제 당국의 3.1운동에 대한 대응 수위를 누그러뜨리는 데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불교는 어려운 여건18 속에서도 백용성 스님이라는 상징적인 지도자와 한용운 선사가 동참함으로써 ‘삼위일체’를 완성하는 역할을 다하였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3.1운동에서 기독교, 불교, 천도교의 삼위일체는 중앙(서울)에서만의 일이 아니라 지방 각지의 하부조직 차원에서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만열 교수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400여 회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준비 과정이 자료로 남겨진 323지역 가운데, 78개 지역이 기독교가 선도하고 천도교가 동참하였으며, 66개 지역에서는 천도교가 선도하고 기독교가 동참하였다. 또 42개 지역은 초기 기획단계에서부터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동하여 거사를 일으켰다.
(백세명) : (전략) 그때는 3월 1일(2일-인용자 주)이라 벌써 독립만세를 부르고 난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천도교구에 들러 그 경로를 물어보니까 3월 1일 며칠 전부터 의주 동교회 목사인 유여대(劉如大-33인 중 한 사람) 씨가 우리 천도교구에 찾아와서 서울서 무슨 소식이 없었느냐고 묻기에 아무런 연락도 없다고 했더니 또 몇 시간 후에 찾아와선 또 무슨 연락이 없었느냐고 수삼 차에 걸쳐 묻고 가고는 또 묻고 가서 천도교구에서는 다 이상하게 여겼답니다. 그런데 마침 평안남북도의 연락을 맡으신 선천(宣川)의 김상렬(천도교인) 씨가 찾아와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서울 소식을 전했답니다. 그리고 이어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천도교발행 잡지)가 도착했는데 그 안에 3.1운동에 대한 비밀지령이 있었지요. 그 비밀지령이란 다름 아닌 기독교와 제휴해서 거사하라는 말씀이었거든. 그래서 의주에서 각 면에 있는 전교실까지 밤길을 육십 리나 뛰어 다니며 연락을 취하였답니다. 19
이러한 사례는 전국 곳곳에서 산견(散見)된다.20
이처럼 3.1운동은 천시(天時)-‘한울님(神)’의 감응과 지리(地理)-민족자결주의와 세계개조의 대기운, 그리고 인화(人和)-민족대단결, 다시 말해 천지인(天地人)의 삼위일체 운동이다.
3.1운동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청년운동이다.
첫째, 구시대 인물들이 스스로 제2선으로 물러서는 계기가 되며,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청년운동이다.
독립운동 준비단계에서 ‘대중화’를 달성하기 위해 최초로 접촉한 인물들은 당시의 ‘명망가’(보․혁을 망라한)이자 우리 사회의 ‘(전통적 의미의)원로’들이었다. 박영효, 한규설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고사하였다. 이미 자신들은 구습(친일 포함)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21
이렇게 하여 새롭게 주목하게 된 것이 ‘새로운 세대’로서의 종교계 인물들이다.22 당시 민족대표들 가운데는 60세를 넘긴 이(이종일, 이종훈)도 있었으나, ‘육신’의 나이와 상관없이 이들은 새로운 신앙과 사상으로 스스로를 세례하고, 새로운 세계(문명세계)를 지향하는 ‘청년’들이었다(60대-2명, 50대-16명, 40대-12, 30대-3명). 이중 천도교인은 대체로 동학혁명 이전부터 참여하여 ‘반봉건․반제’ 활동의 경력이 있는 인물들과 1900년 이후 동학-천도교의 근대화 과정에서 입도한 구한국 관료 또는 지식인 출신의 개화당 계열 인물들로 대별되며, 기독교계는 ‘목사’라는 신분의 특성상 근대 신학문을 이수한 사람이 다수를 차지한다. 천도교계의 대표들은 기독교계의 대표들보다 평균연령이 10세 이상 높은데, 이는 기독교-천도교의 경우 천도교가 당시로서는 ‘더 오래된 전통종교’였다는 데 기인한다.
둘째,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남녀 청년 학생들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3월 1일 서울에서의 만세시위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3월 5일 다시 학생 중심의 대규모 시위가 서울 시내를 휩쓸면서 이 운동은 ‘청년들(육신+정신)’이 이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지방에서도 학생들은 만세 시위의 주역이거나 대중 동원의 핵심 동력이었다. 당연히 청년운동은 여성(여학생) 운동과, 청년(+여성)이 지도하는 ‘소년․학생’운동까지를 포괄한다.23
셋째, 3.1운동 이후 특히 1920년대는 청년운동의 시대였다.
국내에서는 문화운동이, 해외에서는 독립투쟁이 그 주류를 차지하며, 그것을 주도적으로, 그리고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동력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간 주체로서의 청년이 형성되었다. 실로 3.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의 전통은 ‘청년운동’이라는 주제어와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며 오늘 이 시간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역시 이때 청년은 ‘남성’과 ‘여성’을 포괄한다.[천도교여성회는 1926년 결성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청년운동’의 역사적 전개야말로 민족대표 33인, 적어도/특히 의암 손병희 선생이 3.1운동을 기획한 핵심적인 목표였다. 3.1운동 후 천도교중앙총부의 한 두목(鄭廣朝)이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의암 손병희 선생을 면회하여 교회의 청년들이 청년단체로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설립(1919.9.2.)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전략) “(정광조) 교중(敎中) 청년들의 신앙이 더욱 돈독하여 가오며, 요새 와서는 청년교리강연부를 조직하여 교리의 연구, 선전과 조선신문화의 향상발전에 노력할 각오들을 가집니다.”
하고 말씀을 끝내자마자
“(손병희) 응, 그래! 그럴 걸, 그러리라. 앞으로는 포덕이 더 많이 나니라. 그리고 청년들이 하는 일을 부디 잘 도와 주어 ‘그것이’ 잘 되어야지 ‘그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여. 나도 그것을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시고 말씀을 그치시었다 한다. 24
그 순간에 의암 선생은 3.1운동의 성공을 재확인하시고, 성공자거(成功者去; 공을 이룬 사람은 떠남)의 자리에 들어갔다.25
01 이병헌, <<3.1운동비사>>, 시사신보사, 1969. 59-60쪽.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독립 가능의 풍설은 자못 조선(과) 내지(日本)에 전파되며, 또 상해 재류의 조선인은 비밀히 서선(西鮮)에 출몰하여 독립운동을 선전하니, 경성 각지의 인심이 점차 동요하여, 도처에서 독립운동이 발발의 징조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外的)인 조건의 성숙 이전에 중요한 것은 천도교단(기독교나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로) 자체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러한 외적 조건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나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상해 신한청년단의 각종 공작 등은 독립만세의 시기를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3월 1일로 결정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고종황제의 훙거(薨去)와 인산(因山)이었다. “3.1운동이 고종의 죽음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3.1운동이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일어났다거나 ‘2.8독립선언의 영향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 된다.
02 가장 단적인, 그리고 직접적인 계기는 (1)역력한 투쟁의 경험, (2)재정역량 (3)조직 동원력이다. 당시 2,000만의 조선인 중 종교인의 분포로 보면 천도교는 최대 300만 명, 기독교(개신교)는 최대 30만 명, 즉 10:1의 비율로 나타난다. 다만, 최근 필자는 이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품게 되었다. 우선은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당시 실제 천도교인 숫자는 최대 50만 정도로 보는 것이 여러 다른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좀더 현실적이며, 실제에 부합하는 수치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3.1운동 직후 피체자 및 재판, 수형자 숫자나 1920년대 초의 천도교 성금록(대신사출세백년-1924-기념관 건립성금 모금 참여자 숫자) 등을 참조한 결과다.
03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널리 알려진 사실은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국권이 피탈된 이후 국내의 모든 정치(적인) 결사가 해산되었으므로, 종교 단체가 유일하게 ‘조직적인’ 운동을 준비하고 전개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한울님의 명령(命令)이 종교기관에 내려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04 김소진, 「1910年代의 獨立宣言書 硏究」, 박사학위논문, 숙명여자대학교대학원 사학과, 1995, 79쪽.
05 민족대표들의 심문조서를 보면 독립선언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많고, 독립선언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식의 진술도 다수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건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심문조서에서 무엇을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는 점, 민족대표들이 (재판과 관련한) 사태의 확산과 연루 관계를 최대한 축소하려고 했던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33인을 ‘영웅시’하는 관점에서 심문조서의 ‘미흡함’을 상대적으로 ‘과비판’할 필요도 없다. 김소진, 앞의 논문 101-106쪽 참조.
06 오랫동안 3.1운동은 전체 민족(대중화)이 한목소리(대한독립만세!)를 내며 일제히 궐기한(일원화) 비폭력운동(평화화)’이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상식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3.1운동에서 비폭력을 강조하는 것을 ‘패배주의’로 규정하고, “상층부에서는 비폭력을 주장하였으나 민중들은 과감하게 폭력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결국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역할을 제한하는 논거로 이용된다. 그러나 1894년 2백만 명의 동학군들이 1년여에 걸친 ‘동학혁명’을 전개하면서 수십만 명의 동학군들이 일제의 신식 무기 앞에 낙엽처럼 쓰러져 가던 장면을 직접 겪은 의암 손병희와 천도교의 대접주(그중 7명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다)들로서는 ‘비무장 투쟁’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리고 위력의 야만 시대를 보내고 도의의 신 문명세계를 지향하는 천도교 보국안민 운동사의 맥락에서, 최선의 선택지이기도 했다.
07 3.1운동 이후의 보국안민운동은 크게 세 갈래의 길로 분화 발전하였다. (1) 국내에서의 문화운동 [사상운동, 교육운동 / 신간회운동, 노동-농민운동, 여성운동 / 종교운동] (2) 국외에서의 임시정부운동 (3) 만주를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무장투쟁). 이러한 각 운동은 우열(優劣)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상황을 반영한 ‘다양성’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08 이병헌, 앞의 책, 184-185쪽(4월 8일자 심문조서).
(전략) 문 : 피고는 한일합방에 반대하는가?
답 : 물론 반대한다.
문 : 피고는 금후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 그렇다. 독립이 될 때까지는 어떻게 하든지 할 것이다. 지금 독립이 안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의 뜻을 가지고 씨를 심어 놓으면 장래 기필코 열매가 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중략) 여하가 우리는 전통적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찌 하든지 독립을 하여야만 행복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하략)
09 앞의 <<의암손병희선생전기>>, 343쪽. 이것은 동학-천도교의 역사에 있어서는 전통이 있는 강화(講話)이다. 일찍이 해월 최시형 선생은 동학혁명의 의의를 이렇게 강화(講話)하셨다; “신택우 묻기를 「갑오 전란으로 인하여 우리 도를 비방하여 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많으니 어떤 방책으로 능히 이 원성을 면할 수 있습니까.」 신사 대답하시기를 「갑오 일로 말하면 인사로 된 것이 아니요 천명으로 된 일이니, 사람을 원망하고 한울을 원망하나 이후부터는 한울이 귀화하는 것을 보이어 원성이 없어지고 도리어 찬성하리라. 갑오년과 같은 때가 되어 갑오년과 같은 일을 하면, 우리나라 일이 이로 말미암아 빛나게 되어 세계 인민의 정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니라.」(<<천도교경전>>, <해월신사법설>, '오도지운(吾道之運)'.
10 천도교에서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인내천(人乃天)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도(修道)를 한다. 이러한 수도를 하는 장소가 ‘수도장(修道場)’이다.
11 문화콘텐츠닷컴(http://www.culturecontent.com) “경무국 발행 <<소요사건개황(騷擾事件槪況)>>에 게재된 3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의 '조선소요사건 총계일람표‘에는 소요인원 총계 587,641명, 검거인원 13,175명, 조선측 사망자 553명, 부상자 1,409명이라고 씌어 있다. <<고등경찰요사>>(1929)에도 역시 50명이상 소요발생시 총계 618개소, 횟수 847회, 소요인원 587,641명이라고 되어 위의 통계와 합치된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수 2,023,098명, 피수자(被囚者) 46.948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을 입은 자가 15,961명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국외에서 신문통신의 보도와 개인구두보고를 종합한 것이다. 한편 조선총독부 관방 서무부 조사와 발행의 『조선독립사상 및 운동』(1924)에는 3월 이후 12월 말까지 13도 11부 206군에 걸쳐 독립운동 3,200건이 발생하여 검거된 사람 수가 19,522명인데, 검거된 자는 실제 운동자의 기십(幾十) 분지 일에 불과하므로 가령 50배만 치더라도 실제 참가인원은 100만에 달할 것이라고 하였다.”
12 권보드레, 「선언과 등사(謄寫)-3․1 운동에 있어 문자와 테크놀로지」, 반교어문학회, �泮橋語文硏究� 제40집, 2015, 398쪽. “하나의 사례로 시위에 참여했던 이발사 박응수의 상고문을 보자. 박응수는 흡사 독립선언서를 풀이하기라도 하는 양 “십년 전 침략주의의 낡은 사상에 접촉한 일본 정치가의 공명적 희생이 되어‘ 식민지가 된 지 10년, 민족자결주의의 본지에 의해 자주 독립을 결심하니 ‘정의 인도로써 세계를 개조하려는 이 시대에 가령 타국의 영토․식민지로서 그 기반 하에 있는 민족이라 할지라도 문명의 정도가 충분히 자주할 만하다면 민족자결을 할 수 있을 것’(847)이라고 진술한다. 신문과 재판 과정을 통해 그의 진술은 마치 독립선언서가 인격화된 듯한 언술로써 가득 차 있다. 대중 스스로 언어가 되고 또 언어를 실천한 이들 사례들은 3․1 운동이 언어적 사건이었음을, 그러면서도 언어와 현실 사이 이분법을 꿰뚫는 수행적 사건이었음(perlocution; 발화효과행위)을 증명하고 있다.”
13 <<천도교경전>><동경대전>'논학문', “일세지인 각지불이(一世之人 各知不移).”
14 민족대표 33인의 역할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태화관에 모여서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 3창을 한 것으로 종료되고, 그 이후는 학생들의 주도로, 또 각 지역별로 자생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역사 왜곡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 천도교단의 10년에 걸친 조직적인 독립운동 준비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이고, 3.1운동에 임박해서는 첫째, 2월 하순부터 기독교계 참여자들은 자기 고향 또는 주 근거지를 순회하며 ‘만세운동’을 암시하고, 중앙에서 궐기하면 지역에서 호응할 수 있도록 조직화를 전개하였으며, 둘째, 3.1운동 이전에 독립선언서가 각 지역별로 ‘조직적’으로 분배되면서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위한 조직적 준비가 진행되었으며, 셋째, 3월 1일에 기미독립선언서와 더불어 ‘보성사’에서 ‘조선독립신문’ 제1호가 발행된 것을 필두로 지하신문으로서의 조선독립신문이 수십 호에 걸쳐 발행되어 지속적인 독립만세 시위의 확산을 독려하였고, 넷째, 각 지역별로 기독교나 천도교 단독, 또는 기독교와 천도교 연합으로 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준비되고 결행되었다는 점, 다섯째, 일본과 미국은 물론 상해로 사전 또는 사후에 메신저를 파견하여 등을 통해서 볼 때, 3.1운동은 그 시작과 전개과정 그리고 1년 내내 지속되었던 것 모두가 민족대표(종교계)의 치밀한 준비와 계속적인 동력 제공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점이 3.1운동의 본질이다.
15 이병헌, <내가 본 3.1운동의 일단면>,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동아일보사, 1969. 이병헌은 당시 천도교중앙총부의 직원으로 직간접으로 의암 손병희 선생의 행적을 지켜보았으며, 3월 1일 당일에는 태화관 별실에서 민족대표 33인들을 보좌하고, 탑골공원에 있는 학생들과의 연락을 맡아 하였다. “이 때 이 자리(-태화관; 인용자 주)에 있던 이로는 현재(1969년-인용자 주) 33인 중 이갑성 선생이 생존해 계시고, 태화관 별관에서 당일 사건을 기록하고 (탑골)공원으로 연락을 하는 등의 일을 본 청년이 6인인데 청년들을 총지휘하던 이규갑 선생과 필자의 양인이 현재 생존해 있다.”(앞의 글)
16 당시 천도교는 교주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절대적인 카리스마에 의거하여 대규모 조직이라도 일사불란하게 기포(起包)할 수 있는 조직 체계와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에 비하여 기독교는 각 지역별(교회별) 독립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가운데서도, 민족 독립을 위한 궐기라는 기치(旗幟)에 주목하여 신앙적 결단(하나님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얻음)으로써 운동에 참여하였다. 기독교 민족대표 중 한분이신 신석구 목사는 목사로서 정치운동에 간여하는 것과 교리가를 상용(相容)할 수 없는 천도교와 합동하는 것을 두고 고뇌를 거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던(기도) 중 “4천년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하는 음성을 듣고 최종 합류를 결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극복해야 할 ‘신앙적 고뇌’는 천도교보다 기독교가 더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는 이로써 3.1운동을 통해 “신앙-정치의 통섭(교정일치)”이라는 ‘동학적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7 당시 학생단과의 교섭은 기독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박희도 선생이 담당하였다.
18 한용운 선생에게는 가장 늦게 3.1운동 참여 제의가 전달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전국의 주요 불교 지도자(스님)들을 다수 참여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19 <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 <<신인간>> 262호 (3.1운동 50주년 기념 좌담회), 1969.3.(백세명 談). 이 글에서 인용하는 회고(이갑성, 이종일(備忘錄), 이우영 등)를 포함한 회고는 역사적(학계, 공인기관)으로 드러난 ‘팩트’와 상위(相違)되거나 과장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실’이 ‘진실’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행해진 실제 사실(事實)과 상관없이 ‘회고’는 그 본인이 의도했던 바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 ‘행위들’의 의미를 사후적으로 부연(敷衍)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실과 다른’ ‘과장된’ ‘회고’는 사태의 또 다른 ‘진실’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20 이런 가운데 천도교여성들의 독립만세 참여 정황도 포착할 수 있다. 함경도 북청 출신의 군암 이우영 선도사는 회고담에서 북청 지역의 3.1운동 소식을 전한다. “(이우영) 3월 10일경에 가서야 우리 천도교인인 한형표 씨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었거든요. 그리고 그제야 서울 소식을 전해 들었었단 말이야. 이 소식을 듣자 교구장 김태종 씨의 지휘 아래 밤새워 독립선언서를 이승록 씨가 쓰고 내가 (등사기로) 프린트한 다음 정기수 씨 댁에선 태극기를 만들고 ‘조선독립만세’라는 플래카드를 썼었지. 그런데 그만 왜놈 헌병들이 미리 눈치를 채고 우리 천도교의 중견간부들을 예비검속한 다음 교통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중략) 교회 중견 간부들이 구속되었기 때문에 결국 천도교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남문과 북문 밖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몰려들어왔습니다. (중략) 그런데 이튿날부터 주모자들을 하나둘 검속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저희 어머님도 함께 붙들려 가서 많은 고생을 했고, 물로 저도 유치장 신세를 졌습니다마는. 앞의 「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이우영 씨 談 참조).
21 이완용 등 친일파는 물론이고, 김윤식, 박영효, 한규설, 윤치호 등 구한국 관료 들에 대한 참여 권유가 무위로 돌아가자 최린 “그 사람들은 이미 노후(老朽)한 인물들이오. 독립운동은 민족의 제전이오. 신성한 제수(祭需)에는 늙은 소보다도 어린 양이 더 좋을 것이외다. 차라리 깨끗한 우리가 민족운동의 제물이 되면 어떻소.”(<<의암손병희선생전기>>, 330쪽)라며 손병희 선생을 ‘領導者)’로 모시고 최린, 권동진, 오세창을 위시하여 김성수, 최남선, 현상윤 등 “젊은이들”이 민족대표가 되는 방향으로 ‘민족대표’ 선정의 방향을 전환하였다. 유교(유림)의 원로들은 동참하기를 거절하였고, 신진 세력에게는 미처 연락할 시간이 없어서 결합하지 못하였다.
22 민족대표 33인의 당시 연령은 다음과 같다(연령순). ▷이종일 62(1858-1925) ▷이종훈 62(1858-1931) ▷권동진 59(1861-1947 ▷손병희 59(1861-1922) ▷양한묵 58(1862-1919) ▷나용환 56(1864-1936) ▷오세창 56(1864-1953) ▷이승훈 56(1864-1930) ▷백용성 55(1865-1940) ▷임예환 55(1865-1949) ▷홍기조 55(1865-1938) ▷박준승 54(1866-1921) ▷권병덕 53(1867-1944) ▷길선주 51(1869-1935) ▷박희도 51(1869-1951) ▷양전백 51(1869-1933) ▷이필주 51(1869-1942) ▷홍병기 51(1869-1949) ▷나인협 47(1872-1951) ▷신홍식 47(1872-1937) ▷이명룡 47(1872-1956) ▷김완규 46(1876-1949) ▷최성모 46(1874-1937) ▷신석구 45(1875-1950) ▷정춘수 45(1875- 1951) ▷김병조 43(1877-1948) ▷유여대 42(1878-1937) ▷최린 42(1878-1958) ▷한용운 41(1879- 1944) ▷오화영 40(1880-1950) ▷박동완 35(1885-1941) ▷김창준 31(1889-1956) ▷이갑성 31(1889 -1981)
23 1919년 9월 결성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는 1923년 ‘천도교청년당(天道敎靑年黨)’을 개편하는데, 이때 청년당의 하부 조직으로 ‘청년회(靑年會)’가 있었다. 다시 말해 ‘청년운동’은 단순히 ‘계층으로서의 청년’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시대의 주역이자 전위(前衛)로서의 청년을 의미한다. 예컨대 <<개벽>>지 창간호(1920년 7월호/1920.6.25)에 발표된 방정환의 소설 「유범」에는 경성 시내의 남녀 학생들이 모종의 '운동'을 위하여 준비하고, 또 선두에 서서 시위를 이끌 사람을 선정하는 등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내용은 '민족대표'들의 그것을 학생들에게 투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4 천도교청년당 편, �천도교청년당소사�, 천도교청년당본부, 1935.
25 이 말은 원래 1863년 8월 14일, 수운 최제우 선생이 해월 최시형 선생에게 동학-천도교의 도통(道統)을 물려주면서 한 말이다. “뜻한 바를 다 이룬 사람은 떠나도 여한이 없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