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위한 질문 찾기 : 아픔이 길이 되기를 (6)
이 글은 2018년 12월 27일 천도교 용담수도원(경주)에서 진행한 ‘한울연대 동계수련 특강’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이 특강의 제목은 ‘ 아픔이 길이 되기를 - 다른 동학, 새로운 천도교를 위한 질문찾기’였다. 여기서는 주제(主題)와 부제(副題)의 자리를 바꾸었다. 이 중 '아픔이 길이 되기를'은 김승섭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2018) 제목에서 ‘영감’을 얻었다. <필자 주>
1. 나는 지금, 누구이며 무슨 말을 하려 하는가? (1회)
2. 오늘의 동학-천도교인은 누구인가?
3. 지금, 어느 세상인가? (이상 2회)
4. 동학-천도교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3회)
5. 오늘의 동학-천도교에 던지는 질문 몇 개 (4회)
6. 동학-천도교의 시대구분(5-1)
6. 동학-천도교의 시대구분(5-2)
7. 전통적인 천도교의 시대구분(인식) (이상 5회)
[졸부귀불상 - 뜻밖의, 혹은 갑작스러운 '부'나 '권력'은 상스럽지 못하다]
‘도성입덕의 천도교 하기’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시대구분론을 우선 급한 대로 ‘졸부귀불상의 시대구분’이라고 명명하여 보았다. 이는 천도교(인)가 일시적, 단기간내 성장[≒猝富貴]에 기대어 성급하게 운동을 지향하는 과정이 ‘성장–쇠퇴[≒不祥]’라는 도식으로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경향에 주목한 것이다.01 다시 말해 천도교가 대승적인 목표를 추구하다가 자멸(自滅/自蔑)을 자초(自招)한 역사의 시대구분이다.02
천도교는 보국안민지도(輔國安民之道)로서 당연히 시대와 민중의 아픔을 함께하고, 이를 극복[開闢]해 나가야 한다고 믿는 관점(觀點)에서 보면, 이 시대구분은 무의미하고(“이런 걸 왜 하는 거야?”), 반역적으로 보이기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과정’이다. 손가락 끝에 시선을 고정하지 말고 달을 바라보기를 당부 드린다.
다르게 말하자면, 휘몰아치듯 했던 “공격형 동학(천도교)하기”(=보국안민)가 지난 1.5세기 동안의 천도교였다면, 앞으로 최소 2세대(60년) 정도는 “수비형 동학(천도교)하기”(=도성입덕)를 해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는 시대구분 방법론이다. 공격형-대승적인 방법론의 폐해를 짚어보는 것이다.03
(1) 제1단계. 1864년 - 1870년 : 수운 선생 순도 이후 해월 선생께서 고비원주(高飛遠走)한 결과 교세가 어느 정도 재건되는 시점에 ‘영해교조신원운동 / 영해민란’이 일어났다. 이필제가 ‘문장군(蚊將軍)’인지 ‘최초의 동학혁명가’인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여기서는 그에 대한 상론(詳論)은 삼간다. 아무튼, 이필제-해월 선생의 ‘무계(無稽)’한 봉기의 결과 동학은 수운 선생 순도 당시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다. [수운 선생의 순도에 따라 최자원 등 지식과 부를 겸비한 제자들 그룹이 와해/해체 단절된 것, 그리고 해월 선생의 고립과 부흥 등의 과정도 별고를 요한다.]
(2) 제2단계. 1871년 - 1890년 : 이 시대는 ‘처남매부포덕’이라는 과정과 그것의 극적(드라마틱)인 최대치로서의 마당포덕의 결과로 성장한 교세가 취회운동(취회 – 척왜양창의운동)으로 불타오르는 과정[≒猝富貴]이다. 그런데 이때 교세 급신장의 진원지인 전라도 지역을 순회한 해월 선생은 뜻밖에도 “도를 아는 자가 적다”[知道者鮮矣≒不祥]라는 진단을 내린다. [그 말씀을 남기고 부안의 김낙철 가에서 유숙하신 후 그곳을 떠나면서 “화개어부안(花開於扶安) 결실어부안(結實於扶安)”의 시를 남긴다. 지도자선의와 결실어부안 사이의 거리, 사이-너머를 궁구(窮究)하는 데에 천도교의 살 길이 있는지도 모른다. 별고(別稿) 기대(企待/期待)]
(3) 제3단계. 1892년 - 1894년 : 1880년대의 폭발적 교세 성장[≒猝富貴]은 민회/취회와 척왜양창의운동(보은취회)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들은 교세 성장의 결과이기도 하고, 이러한 민회-취회-척왜양창의운동의 ‘성공적(?)’인 개최가 ‘에코(echo, 메아리/모방)포덕‘을 불러오는 반복구조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동학혁명’[필자는 올해부터 다시 ‘동학혁명’으로 호칭하기로 했다. cf. 다만, 중고등학교 교과서 속의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으로 명칭 변경 운동을 전개할 때가 되었다.]의 ‘횃불’로 타올랐고, 재화(災禍/灰化)함으로서 불상(≒不祥)으로 귀결되었다.04 수운대신사가 목격한 서세동점은 ‘불취부귀(不取富貴)라 하고 공취천하(攻取天下)하여 입기당행기도(立其堂 行其道)’의 모습이었다면, 동학혁명 전후의 서세동점은 훨씬 더 노골적으로 ‘사람 죽이는 기계(신식무기와 제국주의)’를 감추지 않은 채 ‘개화(改化)’라는 미명을 뒤집어쓴 양두구육(羊頭狗肉)의 모습으로 다가왔다.05 동학혁명이 걸어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었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다.
(4) 제4단계. 1900년 - 1919년 : 이 시기는 의암성사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의 능동적 수용’과 ‘문명론’(학교지원-인재양성-언론출판)의 ‘적극적 전개’로서 폭발적인 교세 확장[≒猝富貴]이 일어났다. 진보회의 갑진개화운동, 진보회(일진회)06의 배반과 공작, 갑진개화운동 이후의 위기(의병의 공격 대상), 교정합분(敎政合分), 천도교 선포(근대-제도종교화 선언), 한일강제합병, 사범강습소 설폐(設廢 - 보성전문학교로 통합), 49일 기도 등의 일련의 과정은 창도 이래 가장 격변(激變)하고 급변(急變)하던 시대상황에 의암성사 등의 주체가 대응하는 다양한 양상들이다.
절체절명[≒餓死]의 위기를 극복하고, 1910년 이후의 폭발적인 확장이 일어났고, 그 자산(資産)을 기반으로 3.1운동을 전개했으나, ‘독립정신의 선양’이나 ‘천도교청년회’의 탄생이라는 결실(結實)외에 교단 중추 세력의 분열이나 재정적 기반의 와해라는 또 다른 불상(不祥)의 부면(部面)도 크게 드러났다.07 예컨대 3.1운동의 결과로 천도교단은 보성전문학교를 다른 재단에 넘겨주어야 했으나, 기독교 계통이 학교가 폐쇄되거나 다른 교단으로 넘어갔다는 사례는 드문 것 같다. 다른 부문(<개벽사> 지원금 축소) 등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5) 제5단계 : 1920년 –1945년08 : 3.1운동 이후 공백(空白)으로 변할 위기에 처한 천도교의 지도부의 자리를 천도교 신지식인[≒靑年]들이 급속하게 메워 나갔다. 1920년대의 신문화운동은 그러한 청년들의 ‘운동’으로서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개벽>지로 대표되는 1920년대 신문화운동의 기조(基調)는 ‘개조(改造)’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개벽>지의 ‘조선문화기본조사’나 ‘횡으로 본 조선’ ‘종으로 본 조선’ 등의 ‘민족적 자긍심 발견과 발휘’ 맥락도 대단히 중대하지만 ‘개화-개조’의 정서 역시 개벽과 크게 구분되지 않은 채 제기되고 있다. 그 정점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개벽> 1922년 5월호 발표)이 있다. 이러한 ‘개조로서의 개벽 이해’가 1930년대 이후 청년당(청우당)의 좌절과 변절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1940년대 전후에는 ‘친일’로 현현(顯現)하고 만다. 이 또한 ‘졸부귀불상’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민족개조론’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필자는 <민족개조론>을 읽지 않았다. 진지하게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한번 읽어볼 계획이다.][**그 대척점에 ‘김기전’ 같은 인물이 있다. 그런데, 김기전은 ‘개벽’은 물론 ‘천도교청년당(청우당)’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이 점은 본문에서의 필자의 논지를 뒤흔드는 요소이다. 앞으로 더 정교한 논구(論究)가 필요한 까닭이다.]
(6) 제6단계. 1945년 - 1960년 : 해방 직후 북한지역에서는 폭발적인 교세 확장이 일어난다. 이는 일제강점기 말에 지하화하였던 천도교 세력이 부흥한 측면과 분단 직후 북한 지역에서 군정(소련)의 정책에 따라 모든 사람이 ‘정당 가입’을 권장하는 연장선상에서 노동당(공산당)이나 민주당 양측 모두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 대거 청우당으로 몰려옴으로써 확장된 두 측면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 동인(動因)이었는지는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는 그 성장을 배경으로 ‘통일운동(3.1재현)’을 전개하였지만, 당시의 엄중한 시대 환경(해방정국)의 엄중함의 결과로 ‘남에서는 빨갱이, 북에서는 친미주의’로 낙인 찍혀 남북 전쟁을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는 점만을 확인하고 둔다. 물론, 이 시기 ‘몰락’은 해방 직후의 인플레이션 자체가 원인이라기보다는 분단을 매개로 고착된 남북 양 정권의 반공-반미/반한 이데올로기의 정치화[여기서 ‘이데올로기의 정치화’란 이데올로기(자유주의 – 공산주의 / 자본주의 -사회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한 ‘반공주의’와 ‘반-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악용’이 문제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가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남한 사회에서의 이승만의 제1공화국(1948-1960) 시기는 병적인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미국 일변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제 구축이 강제되면서 기독교의 비약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비(非)기독교’로서의 천도교의 토대가 그야말로 ‘토대’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945-1960 시기 천도교단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인재의 유실’이다. 해방공간에서 남북 양측으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소거되기(병사, 사고사 포함) 시작한 천도교의 인재들은 1공화국에서도 몰락과 이탈이 가속화되었고, 이는 6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어 천도교가 주류사회로부터 거리가 멀어질수록 인재들의 이탈도 확장되고 심화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조차 ‘기독교인’이 아니라 ‘천도교인’이라는 이유로 대학 전임강사에서 탈락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7) 제7단계. 1961년 – 2018년 : 1960년대 이후 우리가 ‘천도교의 졸부귀’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 대목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지금 우리와 멀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그 높이가 낮아 보이는 착시현상 때문일 수도 있으나, 1960년대 이후 천도교는 ‘지속적이고 경향적인 쇠락’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 쇠락에도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분석은 필요하지만, 이는 다음 장에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1960년대 이후, 눈에 보이지 않는 토대의 흔들림에 비하여 지상부(地上部), 즉 눈에 보이는 천도교인 숫자나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종교로서의 천도교’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커지는 것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 1960년 이후 박정희 정권하에서 ‘민족종교로서의 천도교’는 한때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뿌리는 썩어가는 가운데, ‘역사’를 자양분 삼아 꽃봉오리만 마지막으로 그 화려함을 자랑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회 전반이 서구화, 산업화, 전문화, 도시화*하는 가운데 천도교는 그 어느 부문에서도 비교우위를 갖지 못한 채, 오히려 사회의 주류적인 흐름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산업화, 도시화를 ‘추세(趨勢)’하자는 것은 아니다. ‘산업화’ ‘도시화’ 시대의 동학의 성공방식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것이 ‘한살림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단편적이지만, 예외적인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해 둘 필요는 있을 듯하다.
① 1960년대 이후 ‘졸부귀불상’의 유형은 최덕신 교령을 ‘교령’으로 영입하여 ‘졸부귀’를 추구하는 노골적인 발상(發祥)으로 드러났다. 그 성과로 ‘수운회관’ 등의 ‘이(利)’를 얻었으나, 그 값으로 얼마나 많은 ‘해악(害惡)’ 돌려받았는지는,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② 1960년, 동학창도 100주년에 즈음하여, 그리고 신용구 교령의 도력에 의지하던 짧은 시기, 그리고 1969년 3.1운동 50주년을 전후한 한때(의암성사기념사업, 대구 달성공원, 용담정 성역화 등)의 ‘일시적 중흥 기운’이 보인 때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론이지만, 이 호기(?)를 좀더 지혜롭게[=전략적으로] 경과(經過)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③ 한때 ‘김지하’나 ‘김용옥’이 동학(천도교)에 졸부귀를 가져다주었고, 기대도 높았으나,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준비와 채비[시스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④ 1994년 동학혁명 100주년에 다가올수록 ‘동학연구’와 ‘동학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였고, 지자체를 중심으로 ‘동학’을 지역의 ‘자산’으로 삼는 움직임이 ‘폭발적’ 늘어났다. 그러나 이 또한 ‘도고일척(道高一尺)에 마고일장(魔高一丈)’으로 전개되었다.[이것은 “공짜는 없다”는 우주적 진리를 증명하는 사례이다. 이에 대해서는 <개벽신문> 78호(2018년9.10월 합병호) 2-3쪽의 졸고, “개벽의 창 - 유무상자의 경제학과 우주 궁극의 이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와 ‘덜 문명’의 상관관계” 참조. ‘도고일척-마고일장’은 “도력이 1척(30cm)만큼 높아지는 동안 ’마‘는 1장(=10척, 3m) 높이 쌓인다”는 뜻이다. 마가 쌓이는 것은, 수련할수록 고집/아집이 세지고 확신이 굳어지는 것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⑤ 이러한 반짝 성장에 비하여 천도교이 쇠락이 지속/심화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성장요인이 규모는 크더라도 일회적이어서 확장성, 성장성이 없었던 반면, 쇠락요인은 규모는 작더라도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대부분 실현되었다는 데에서 오늘의 천도교라는 결과가 도래하게 된다.
간단히 이를 정리하면 첫째, 각자위심 문명(도시화/산업화(전문화)/물질만능)의 득세에 적응/대응하지 못하였다. 둘째, 현대적 교단 운영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였다.(교구-연원의 어설픈 병존, 허수(虛數) 투성이의 대의원 제도*의 폐해, 80년대 이후 전문화의 실패**의 결과로 ‘백약이 무효’의 사태가 정착되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아사(餓死) 사태는 ‘허수-거짓통계’가 불러온 대재앙이라고 알려져 있다.][**cf.민속연구회의 문화운동, 대학생단의 성지순례와 49일 기도, 한울학교]
앞에서 쇠락의 요인을 주로 ‘졸부귀불상’이라는 인식 틀을 통해 살펴보았다. 글의 내용은 성공적이지 못하였지만, 주요한 관점은 ‘쇠락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자’는 것이다. 이것은 천도교 성장의 동력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때 유념해야 할 것은, ‘성장’의 ‘요인’을 찾을 때, 이를 ‘도덕적’인 범위로 제한하거나 그것을 잣대로 놓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종교는 ‘진리’와 ‘도덕’을 생명으로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진리’와 ‘도덕’의 기준을 세우는 것은 누구인지, 왜 그 기준을 채택하는지는 ‘진리 그 자체’와 ‘도덕 그 자체’와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이 둘을 분리하지 못하면 종교적인 차원의 ‘근본주의’나 ‘도덕주의’로 빠지고 만다.[이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이므로, 글로 쓰기보다, 기회가 되는 대로 이야기해 보겠다.]
수운대신사 시절에는 ‘도덕’이 출발점이고 기준점[단순구조]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 그리고 미래사회에서 ‘도덕’은 ‘결과’이거나 ‘시스템’[네트워킹과 복함구조]의 ‘성과’로서만 가능하다. 이 둘 사이의 거리-차이를 용시용활(用時用活)할 수 있어야 한다.[이에 대한 원론적인 이유는 오구라 기조 지음, 조성환 옮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모시는사람들, 2018 참조]
내가 하지 않아도 이미 아는 이야기, 나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아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오로지 '시대구분'이라는 측면에 집중하기로 한다. 다시 말해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는 것이다(이 이야기조차 ‘다른 이야기’ 범주에 미치지 못할 수는 있다.)
(1) 수운 선생에게서 당시의 사람들은 희망을 보았다. 지금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저기에 있는가? ‘유무상자’는 물론이고 ‘남녀혼거’ 같은 동학배척통문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 수운대신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가 ‘새로운 이야기’였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이야기들을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같이 ‘기이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다. 우리가 아는 것들은 그중 대표적인 것, 그리고 걸러지고 걸러진 이야기들이다.
아래 통문 요지를 유생들의 ‘동학에 대한 편견’은 물론 ‘도덕적 편견’까지도 최대한 제거하며 읽어 보면, 동학에 기대하는 당시 민중들의 희망과 동학을 통해 얻는 해원(解冤)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각자위심/불순천리불고천명/천부(賤夫) ⇒ 동귀일체/순천순천/삼경/군자/성인]
“요망한 마귀와 같은 흉칙한 무리들이 하는 짓은 서학을 개두환명(改頭幻名)한 것이 분명한데, 옛날에는 이 땅(상주)에 감히 들어와 어정거리지 못했다. 이 어찌 매우 한심스러운 처지가 아닌가. … 그 동학이란 것은 바로 선과 악을 무너뜨리는 것이요 싹을 어지럽히는 가라지 잡초와 같다. 이제부터 햇빛을 못 보게 뽑아 없애며 어리석음을 없애야 한다. 이 어찌 우리들의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 귀천이 같고 등위의 구별이 없으니 백정이나 술장사들이 모이며, 남녀가 혼입하여 부녀자들 품행이 단정치 못하니 원광자(怨曠者, 과부와 홀아비)들이 모인다. 좋은 재화를 유무상자(有無相資)하니 궁핍자들이 기뻐한다. 마침내 도당을 널리 모으는 일을 첫 번째 업으로 삼게 되니 마을에 거(居)하게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을 모두 휩쓸며, 향리에 거하게 되면 온 향리를 휩쓸고 만다. 차례차례로 전해져서 그들의 세력은 하늘을 뒤덮을 것 같으며, 장각(張角)을 36방에 배치하고 교주를 받들며, 우두머리는 숨어서 장차 사목(司牧, 지방관)의 권한까지도 빼앗아 마음대로 행사하게 될 것이다.”
(2) <수덕문>의 ‘유부녀지방색(有夫女之防塞) 국대전지소금(國大典之所禁)’과 동학혁명 당시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라!’는 구호 ‘사이-너머’에 답이 있다. 수운 선생은 <수덕문>에서 스스로를 공자에 비견하며, 제자들이 용담의 ‘동학공동체’를 ‘공부공동체’로 만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문을 열고 손님을 맞으니 그 수효가 그럴 듯 하며, 자리를 펴고 법을 베푸니 그 재미가 그럴듯하도다. 어른들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은 마치 삼천제자의 반열 같고, 어린이들이 읍하고 절하는 것은 육칠의 읊음이 있는 것 같도다. 나이가 나보다 많으니 이 또한 자공의 예와 같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니 어찌 공자의 춤과 다르랴.(<<동경대전>><수덕문>)”
이 장면에 등장하는 ‘어른’ ‘어린이’ ‘나이 많은’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에게 그곳은 천국이고, 해방구였으며, 잔치판이었고, 놀이마당이었다. 그것이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때 용담은 오늘의 ‘촛불광장-광화문’이었고, ‘방통대’나 ‘문화교실’이었다. 그곳에서는 ‘동학-먹방’이 상영되었고(곶감이야기, 그러나 곶감뿐이겠는가!), 그러다보니 뜻밖에도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으로 소박을 터뜨리는 사람(나무꾼)도 나왔다. 그러나 그 속에서 때로 불미스런 일(유부녀)도 일어났고, ‘노식수후(路食手후)’의 얼치기 양반도 등장하였고, 와고송주(臥高誦呪) 같은 자행자지(自行自之)도 비일비재했다.
(3) 수운대신사는 당시 자진해서, 또는 요청에 응해서 글씨를 상서로운 글씨를 써 주었다.
“최복술(崔福述)이 본래 글씨를 잘 쓴다는 칭찬을 들어오기 때문에 거북 귀(龜) 자, 용 룡(龍) 자, 구름 운(雲) 자, 상서로울 상(祥) 자, 의로울 의(義) 자 등의 글자를 써서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그러면 그 부형들이 약간의 돈이나 곡식으로 수고를 갚았지 사실 토색질을 한 적은 없습니다. (경상감사 서헌순의 장계 중에서)”
(4) 수운대신사의 주문을 외면, 병이 나았다(나은 사람도 있고, 효험을 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앞의 ‘서헌순 장계’에는 포덕문의 ‘제인질병 – 혹유차불차’의 사례들이 (주관적이며, 모면을 위한 변명투로 윤색되기는 했지만)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시기의 표면적이고 공식적인 교단 흐름은 “수운 선생의 가르침 실천운동 --> 유무상자, 사인여천, 보국안민(취회~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 유무상자의 동학교단의 전통과 제인질병의 효험은 수운대신사 시대보다 해월신사의 마당포덕시대에 훨씬 더 강력한 유인 요인으로 다가갔다. 해월신사께서 ‘위생’을 강조함으로써 동학도인이 사는 동네에는 괴질이 유행하지 않았고, 그 이후 ‘동학에 들어가면 삼재팔난을 면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동학의 교문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또한 박맹수 교수가 ‘최초의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라고 불렀던바, 지목이나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동학교도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소비를 절약하고 비용을 모으거나 갹출을 통해 ‘석방자금’을 모금하여 교인의 방면에 힘썼던 일은 ‘유무상자’가 단순히 먹거리 해결 차원만이 아니라 좀더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여유가 생기기를 기다린 후에 사람을 구제한다면 평생토록 사람을 구제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크게 바라건대 모든 군자들은 해당 접중(接中)에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자는 각각 약간의 성의를 내서, 항심(恒心)이 없는 자로 하여금 한 해 동안의 가뭄 걱정을 면하게 해 주고서 무극의 큰 원천을 함께 닦는 것이 어찌 크게 좋고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해월문집>> 중에서)”09
(2) <최선생문집도원기서>나 <동경대전><용담유사>의 간행(刊行⇔筆寫)은 ‘최초의 출판’으로서, 이것은 한편으로 동학교세 성장의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다시 ‘동학교세’의 재성장을 추동하는 유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육임’이라는 ‘시스템’의 도입도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혁신’적이고 ‘개혁’적이다. R&D(연구개발)이 –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 깊이 진행되었다는 측면에서 재고해 보아야 한다.
(3) 이러한 조건에서 1차 인재 영입이 이루어진다[충청도의 지식인(ex. 및 전라도의 ‘지식인(ex.훈장)’ 및 의기남아들].
(4) 1880년 말 ~1892년까지 ‘대포덕-마당포덕-우물포덕’은 전적으로 ‘신원운동-취회’라는 ‘촛불광장’ 속으로 민중들의 물결이 ‘밀물’을 이룬 덕분이다.
(5) 이상 수운 선생 시대와 해월 선생 시대를 아울러 민중들 수준에서 동학 유인이 되었던, 그런 만큼 널리 유통되던 이야기(소문) 몇 가지를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신 귀한 존재다. 나도 군자가 될 수 있다 ② 귀하고 부한 사람이 되고, 삼재팔난 괴질운수를 벗어날 수 있다. ③ 동학공동체에 가면, 만인평등의 대접, 유무상자의 살길이 열린다(공동체) ④사람은 평등이라. 적서차별, 반상차별을 철폐한다(사회개벽)!
(1) 일본 망명에서 의암성사께서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일까? 1900년 – 1904년의 일본 역사를 깊이, 깊이 공부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의암성사’에 대한 소문 수준의 단편적인 에피소드 몇 편뿐이다. 이 시기의 일본에 대해서, 의암성사의 눈과 귀가 되어 의암성사가 알았던 것보다 더 잘 알아보아야 한다. 지금은 의암성사보다 더 잘 당시의 일본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 그때 의암성사께서 보고 들은 것 중에 어떤 것들이 천도교가 되었다.
(2) <만세보>와 <천도교회월보> <시천교월보>* 등 이 시기의 잡지와 교서류(敎書類)를 읽어보아야 한다.(거의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시천교 측 간행물 포함). 한마디로 이 시기는 ‘천도교의 정체성 형성’ 투쟁기이다. 수십만 명의 교인들에게 ‘동학 -> 천도교’로의 의식 전환을 이루는 것이 말 몇 마디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전환은 지금껏 완성/완료되지 않은 과제이기도 하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더 심화하고, 어느 방향으로 더 확장해야 하는지, 우리는 사실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었다(운동을 하느라 너무 바빴고, 그 이후 싸우느라 바빴고, 또 오랫동안 먹고 사느라고 바빴다). [*<시천교월보(侍天敎月報)>는 1911년 2월 27일자로 창간된 시천교 기관지인데, 1913년 4월 통권 27호로 종간되었으나 그 후속으로 <구악종보(龜岳宗報><중앙시천교회종보> 등으로 이어졌다.]
(3) 이 시기의 ‘문명개화론’ 등도 재조명해야 한다.(ex. 오상준, 초등교서)
(4) 이 시기 2차 인재영입이 이루어진다. 이때 인재들의 ‘질’은 1차 인재영입 때보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수준이 높았다. 왜 그렇게 되었으며, 그것이 교단에 미친 순기능과 악기능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로부터 오늘 우리가 얻어야 하는 교훈은 무엇인지 숙고해야 한다.
이때의 인재는 크게 보아 ①의암성사의 자장에 이끌려 입도한 인사, ②의암성사를 배경으로 하는 명망가의 자장에 이끌려 입도한 인사, ③동학-천도교의 대세를 추세(趨勢)하여 입도한 인사, ④이상 1,2,3의 인사들과 천도교의 대세에 동참 ~ 편승하고자 하는 신지식인과 민중들로 대별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천도교단은 ‘플랫폼’ 역할/기능/위력을 수행하였다.
(5) 무엇보다 이 시기 동학-천도교 성장의 핵심 동력은 ‘교육-출판-언론’이었고, 이것을 한마디로 꿰는 용어가 바로 ‘문명-개화’였다. 당시 의암성사 이하 지도자들이 인식했던 문명은 무엇이고 개화(이를 더 넓은 의미 범위에서 이야기하면 ‘근대화’가 된다)는 무엇이었는지 이해해야 한다(여기에도 ‘긍정적인 면’가 ‘부정적인 면’이 함께 있다).
(6) 이 시기 민중들을 사로잡아 동학-천도교로 이끌었던 이야기들을 민중의 측면에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된다. ①천도교에 참여하면 새 나라의 주인이 된다.② 천도교가 앞장서서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있다. ③ 천도교가 세상 사람들을 계몽 교화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신국가를 건설한다. 나도 그 신국가의 주역이 되고 요인(要人)이 될 수 있다.
(1) 천도교청년회/청년당이 주도한 1920년대의 신문화 운동은 <개벽><어린이>지를 필두로 한 잡지 간행, 어린이운동을 위시한 ‘농민’ ‘여성’ ‘노동’ 운동 등의 ‘7대 부문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개벽지와 농민사 등은 이 시대 ‘플랫폼’이었다. 오늘날 플랫폼 기업이 승승장구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당시의 천도교청년당은 세력을 확장하였고, 신구파의 파쟁으로 끊임없이 차질을 빚는 가운데서도, 일정 부분 천도교 성장에 이바지하였다.
(2) 이러한 세력의 신장을 기반으로 하여, 그리고 3.1운동에서 보여준 영도력과 물적 기반에 대한 여타 세력의 신뢰를 기반으로 해서 6.10만세운동(천도교 구파)나 당시 민족최대 연대기구인 신간회 등에서도 핵심적인 지분/역할을 감당하였다. 무엇보다 청년당을 앞세운 천도교의 신문화운동은 ‘개조’라는 당대의 핵심 트렌드를 ‘개벽’으로 재해석하여 ‘선도적’이고 ‘선구적’이고 ‘선진적’으로 추동함으로써, 비교우위를 확보하였다.* 이때도 ‘이야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벽>을 위시한 개벽사의 잡지들은 새롭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넘쳐난다.**
[*물론 그 속에서 비극(쇠락)의 씨앗은 자라고 있었다. **cf.개벽≒개조 천도교청년회가 조선농민사를 위시한 7대부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하지만, 한때 <개벽사>에 대한 지원금이 청년당 전체 예산의 60%를 상회하기도 하였다. 청년당이 개벽사이고, 개벽사가 청년당이었다.]
암흑시대이다. 다른 시기는 그나마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던 시대인식과 시대구분이, 이 시기에는 ‘실패’한 데서 암흑시대를 자초하고 말았다. 예외적으로 ‘무인멸왜기도운동’이나 ‘불불당’ 운동* 등이 있다. 역사의 최전선이 북간도나 충칭을 떠돌았다. [**이에 대해서는 임형진, <<동학의 정치사상>>, 모시는사람들, 2004. 참조]
(1) 이 시기는 억눌렸던, 지하하했던 천도교(청우당) 세력의 부활이라는 측면[이것이 기존의 천도교의 역사인식이다] 외에, 1900-1904년간의 경우처럼 대안부재의 상황에서 ‘청우당’에서 길을 찾았거나 안민처를 찾았던 인민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온 시기이다(앞의 표2 참조). 그러나 ‘인민’ 이상의 지식분자(知識分子)나 지도자 그룹으로 시선을 좁히면, 이때는 ‘인물상해(人物傷害)’가 극에 달했던 시기이도 하다.
(2) 사회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미군정하 이승만 정권이 미국의 원조물자를 등에 업고 한반도에 ‘자본주의-신자유주의’ ‘(미국)기독교’ ‘미국식 교육 체계’를 이식시키는 시대이다. 그리고 그 최종 귀결이 ‘일본의 귀환(한일국교정상화)’이다. 이는 앞의 제3절(3. 신(新) 서세동점의 시대? 옛(yet) 서세동점 시대?)에서 밝힌 대로 ‘서세동점이 다시금 가시화되는 시기’이다.
이 은폐된, 그리고 ‘식민-잔재’와 ‘반공체제’에 의해 면역력을 상실한 채 속절없이 서세동점의 자장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그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시기이다.
(1) 1961년 박정희 체제 이후 – 1987년
① 민족적 민주주의’의 허상을 좇아 ‘민족종교’의 일시적인 부흥이라는 착시에 휘둘리고 도시화, 산업화 체제에 부적능아로 전락하고, 정교유착(기독교-불교)에 의한 독재체제-민주정부 시기의 눈가리고 아웅에 눈뜬장님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시기이다. 주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마디로 공부 부족에 따른 실력 부족이 내면화 되고, 이미 결과화 되던 시기이다.
② 이 시기 한때 전국적인 수도운동(수도원)의 성과 및 ‘80년대 이후 동학에 대한 관심’ 나타나는 듯하였으나, ‘경영마인드’와 결합하지 못한 채 ‘전근대적인 수준의 수행’(전문화의 실패)에 머무른 결과, 그리고 교인 중심세력이 친정부/반공 프레임에 안주함으로써, 1988년 이후 세계화, 민주화-이후 시대에는 더 이상 성장 동력으로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③ 1994년 동학혁명 100주년을 전후한 ‘동학 관심의 비등(飛騰)’은 천도교로서는 득실이 동률이거나, 장기적으로는 ‘실(失)’의 내면화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④ 1987년 체제(1987년~현재) 하에 생명운동/평화운동/통일운동 (7대종단-4대종단-5대종단)이라는 ‘대승적인 방법의 천도교(동학)’하기를 통해 천도교의 중흥을 꾀해야 한다는 주장과 실천이 끊이지 않았으나 다른 종단, 다른 단체에 비하여 그 양적인 규모나 질적인 수준 모두 경쟁력과 비교 우위를 갖지 못하고 뒤쳐지고 말았다.[*천도교와 원불교의 골드크로스는 이미 이 시기 어디쯤에서 이루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의 ‘4대종론’ 담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그 시작은 이미 최소한 30년 전에 이루어졌다.]
***페친 Byeong Doo Lee님의 최근 페북 글에 이에 관한 분석글이 있어서, 참고로 그 일부를 인용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찾아온 민족해방, 그 뒤로 75년이 가까워오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종교 인구와 그에 따르는 교세가 급변하여 주류 종교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게 된 점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례일 것이다.
1945년~1953년 ‘불교‧유교‧대종교‧천도교‧개신교‧가톨릭의 6대 종교’, 1954년~1960년 ‘불교‧개신교‧천도교‧가톨릭‧유교의 5대 종교’, 1961년~1965년 ‘불교‧개신교‧가톨릭‧천도교의 4대 종교’ 시대를 지나게 되면서 토착 종교 중 유교‧대종교‧천도교가 주류에서 밀려나 불교만 살아남고, 1966년부터는 ‘불교‧개신교‧가톨릭의 3대 종교’ 체제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종교 분포 변화로만 보면 이 기간은 ‘유교‧대종교‧천도교 등 토착종교의 침체 또는 몰락과 개신교‧가톨릭의 급성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렇게 된 배경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 우대 정책이 있었던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미군정과 그를 이은 이승만 정권 기간 동안에 고위 공직자 임용과 군종장교 제도‧방송사 설립‧미국 원조물자 배분 등에서 특혜를 누리게 해주어 국교에 가까운 ‘유사 국가종교’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1951년 초에 시작된 군종장교 제도를 기독교에만 도입하고 그 중에서도 개신교의 압도적인 우위를 인정해주어 5‧16쿠데타 이후로 그 위력이 나타나게 되면서 1966년도에는 ‘국방장관, 육군‧해군‧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 주월한국군사령관’ 등 군 수뇌부 전체가 개신교인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최근에 최대 신도 숫자를 자랑하는 제1종교의 자리를 내주었다고 하지만 불교가 아직까지 이른바 ‘3대 종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2) 19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문민화-IMF-민주정부-앙시앙레짐(이명박근혜)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시기 개혁추진위원회(1994-1998년간) 활동이 또 한 번의 희망의 조짐을 보여 주었으나, 주체의 역량 부족(교단이 처한 환경과 주관적인 역량 파악, 대중(일반교인)과의 소통 및 대중역량 파악 부족 등등) 등의 이유로 실패하고 말았다.
(3) 2020년 이후 발전동력을 마련하기 위한 조건은 ① 생명개벽 – 기후변화 시대 ② 생활개벽 – 더불어 살기 / 궁을촌 만들기 = 유무상자 공동체10 ③ 생업개벽 – 4차 산업혁명 시대 일자리 같은 것들이다. 이것을 일이관지하는 ‘실마리’는 무엇인가?
이상의 두 가지 시대구분을 표로 재구성해 보았다.
01 임상욱, <제4의 동학 정체성을 위한 조건들>, <<동학학보>> 제46호, 2018.3. 14쪽. “한 공동체를 주로 숫자로 설명하는 외연 진단은 그 공동체의 현 상황은 물론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 탐색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기초 자료로 기능한다. 공동체의 볼륨은 그 활동의 핵심 방향과 범위는 물론 당면한 현실적 사안들에 대한 우선순위 결정에 실질적 동력을 제공하는 기반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02 천도교 쇠락의 원인을 ‘시대상황(환경)’이나 ‘배반자’ 같은 외적인 요인으로 돌리는 태도는 벗어나야 한다. 객관적인 시대상황이 교단의 성쇠(盛衰)를 야기하는 요인은 분명 중대하며,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한 외부 요인을 탐색하는 일이 ‘남 탓’으로까지 나아가 버린 것이 그동안 천도교(인)의 역사인식이었다. ‘외부’라는 것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에서 ‘원인’을 찾으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졸부귀불상의 시대인식이 지금까지의 단순한 ‘쇠퇴의 원인’ 찾기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지점은 그것이 “내 안에서 쇠퇴 원인 찾기”라는 점이다.
03 수련은 도성입덕 방법론의 ‘소극적인 방법론’이라면 수양은 도성입덕 방법론의 ‘적극적인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 이것은 필자의 생각(개념-아직은 머릿속에 있는-좀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이다. 수련을 수양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수련을 기본으로 하고 수양까지 나아가야만이 수련의 유효성도 담보된다는 의미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국영수(수련)는 기본이고 사회과목(수양)까지 잘해야 in-서울대를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고(別稿)를 기약한다.
04 그때의 순도가 오늘의 영광(榮光)으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cf.동학농민혁명국가기념일 제정 / 촛불혁명의 원형(原型) 등등.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혁명을 성공으로 볼 것이냐 실패로 볼 것이냐?”가 문제다. 이 문제는 언제까지나 문제일 것이다. 답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 삼는 게 핵심이다. 문제 삼아야 한다.
05 cf. 活人機 = 도덕 / 1919-1945의 서세동점과 1945-2019의 서세동점의 모습도 각각의 특징이 있다. 별고(別稿) 1919-1945의 서세동점의 대표적인 모순은 ‘민족자결주의’와 ‘1차 세계대전 승전국 중심’의 제국주의적 세계재편(식민지 쟁탈전)의 지속이라고 특징 지을 수 있다. 이러한 ‘식민지 쟁탈전’이 결국 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 ‘동양’의 입장에서는 1860년 – 1945년의 서세동점은 각 시기별 차별성보다 ‘일관성’이 더 두드러진다. 그러나 1945년 이후의 서세동점(특히 한반도)의 특징은 ‘미국 / 미국(근본주의) 기독교’의 쓰나미적 동점과 1960년 이후 일본의 부흥(한일국교정상화 – 이 이면에도 미국이 있다)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역시 1945(1998)년 이후 1997년까지의 서세동점은 비가시적(非可視的)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사실은 “눈 가리고 아웅”의 수준이지만, ‘신식민지’ 또는 ‘신자유주의’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유형(類型)으로 다가왔다는 점을 주목하고 규명할 필요가 있다. 1997년(IMF체제) 이후에도 ‘서세동점’은 계속되고 있다. 별고가 요구된다.
06 “진보회 운동은 ‘이용구의 친일’(一進會 變節)로 변질(變質)되면서 실패했다”는 것이 지금 천도교단의 진보회운동 인식이다. 이러한 ‘도덕적’ 판단을 넘어서 ‘근대화의 방법론’을 둘러싼 노선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 별고(別稿)
07 cf.1. <만세보>와 <천도교회월보>에 나타난 초기 천도교의 정체성 탐색 및 구축의 방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全無)하다. 발표자는 특히 <천도교회월보>를 재조명/재발굴함으로써 앞으로 “천도교 살림”의 큰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에서는 동학(천도교)를 공부하는 학자들과 함께 <천도교회월보> 독회 모임을 경영하고 있다.
cf.2. 보성전문학교 인수 후 그때까지 천도교단의 핵심 과업인 인재양성을 위한 “사범강습소-교역자양성 기관”을 폐지하였다. 보성전문학교의 학과 과정과 중복되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은 천도교(청년/학생)들이 보성전문학교에 편입되거나, 보성전문학교에 ‘종교학 과정’이 개설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천도교는 “닭 쫓던 개” 꼴이 되고 말았다. 의암성사의 쿨(cool)한 결단(그래? 학생들이 반대한다면 (천도교 과정) 개설하지 마!)은 결과론적으로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다.
08 cf. 오늘날 ‘대의원 대회’의 ‘연원수보’를 둘러싼 잡음, 춘암상사가 경계하고 경계했던 “거짓말하지 말라”는 이미 1920년대 초(성미 – 대의원 연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이때가 처음이 아니라, 그 이전-일진회 시절 / 동학시절-에도 나타났다.
09 이 인용문은 본래 “무릇 사람이 일을 할 때에 한가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책을 읽는다면 평생토록 책을 읽을 날이 없을 것이고”라는 대목으로부터 시작한다. ‘유무상자’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꽤 많이 인용되어 왔으나, 이번에 새롭게 발굴한(해월문집 강독-2017 상반기) 이 ‘무릇 ~ 것이고’의 대목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조명해야 할 신(新)자료이다 (別稿를 期約한다).
10 “시스템 생물학자들은 어떤 생명 시스템의 건강한 기능은 협동에 달려 있다는 입장이다. 큰 그림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대부분 살아 있는 유기체는 근본적으로 협동적인 시너지를 유발하는 지속적인 공유와 교환하는 생명공동체에서만 존재하고 번성하며 공진한다.” (110) “보살피는 관계가 건강한 가족과 공동체에 필수적인 토대가 되고, 이것이 되돌아와서 개인 건강과 행복에도 필수라는 사실은 일상생활 경험에서 너무도 명백하다.”(110) “좀 더 평등한 사회가 덜 평등한 사회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나타냈다. 가장 건강한 사회는 더 많은 소득, 돈이 있는(심지어는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회가 아니다. 건강한 사회는 주고받으며 그들이 가진 것을 가장 공평하게 나누는 사회다.”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