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독서-040] 이찬수 외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 중에서
인류 역사에서 종교의 위상이 지금처럼 위태로웠던 적이 있을까?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조선시대 말엽, 유교(성리학)의 권위가 격감하고, 그에 따라 사회적 성장 동력이 잠식되면서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것을 떠올리게 할 만큼, 오늘날 종교계가 맞닥뜨린 위기는 심각해 보인다. 전 세계로 눈길을 돌려 보아도, 서구 유럽의 대성당들이 텅텅 비어서 관광객들로 연명한다거나, 그마저도 안 되어 경매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이미 오래고, 출발점이 무엇이 되었든 [나는 주로, 제국주의 침략의 결과라는 데에 무게중심을 두지만] 중동을 중심으로 한 종교(종교 간, 종교 내의 종파간)를 핵심적인 차이로 하는 세력(종파 간, 종교 간, 때로는 국가 간, 그리고 문화권 간에 이르기까지)들 사이의 투쟁과 분쟁과 전쟁 들, 그리고 그로 인한 인명과 문화(재)의 상실, 자연 환경의 파괴 등을 생각하면, 종교[적 미신]를 죄악시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한, '과학적 합리론으로 무장한 근대인'들의 파상적인 공세가 당연해 보인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사태의 핵심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시민(종교인, 비종교인을 망라하여) 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점점 종교에 냉담해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종교가 교리와 더불어 핵심적인 근간으로 삼고 있는 종교 의례 체제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과 얼마나 '불화(不和)' 또는 '지체(遲滯)'의 상태에 놓여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에 대한 '반감'과 '혐오감'을 증폭시키는 결정적인 게기들이 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각국의 '종교권력'들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다종다양한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십자가(혹은 목탁이나 염주 등 뭐든) 썩는 줄 모르는 종교권력 놀음'을 이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는 일부의 선한 기능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허위이거나 음흉한 욕망을 감춘 위선'일 뿐인가, 아니면, 다수의 악한 기능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인류가 그것으로부터 이탈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혹은 이 우주와 생명 현상의 진상(眞相)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경로[道]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단답형일 수가 없을 터이다. 결국 각자의 사회, 각자의 삶, 각자의 종교적 기반 내지 환경에 즉하여 그 물음의 답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결코 종교인들만의 문제이거나,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이다. 그러한 권력놀음들의 틀 안에서 내 삶이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종교와 무관하다거나, 나는 종교를 혐오한다고 해서 이러한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돼지우리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돼지우리를 치우고, 깨끗한 집으로 만들면서 살아갈 것인가? 이것도 결국은 내가 선택할 문제이다. 그것이 근대사회 체제이다. [2020.12.28, 아침에]
(전략)
*** 종교는 자신의 세계관이나 가르침에서 보편성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진리는 보편적이라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가르침을 인정하는 이들에게만 보편적 진리가 적용된다는 식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디아서3:28) 이것은 혈연, 지연, 신분, 성차별을 철폐하고 인류가 하나라며 선언하는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을 통해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간주되는 이들을 차별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자기 국민을 보호한다면서 다른 국가의 국민들을 차별하거나 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도화된 종교나 국가의 자기중심적 폭력은 구조적으로 유사합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 영토 안에 있는 이들만을 내세우는 근대 국민국가나 체제 안에 있는 종교가 과연 보편적 진리를 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종교는 보편적 진리를 말한다면서 실제로는 자기중심적 해석을 통해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모순을 범하지 않습니까.
*** 서양의 역사에서 국가와 종교는 대립관계를 지속해 왔지만 오늘날의 종교를 보면 국가의 시스템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국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종교 안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 국가와 종교 모두에 있어서 종교성의 문제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보수와 진보로 드러나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깊이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호(好) 불호(不好)의 문제입니다. 절대성에 대한 추구를 통해 삶의 불안을 극복하고자 하는 종교적 인간의 기대가 무너지는 데 따른 불안과 공포가 특정한 하나의 입장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나 자비나 평화처럼 국가나 종교의 궁극적 지향점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종교가 갈등을 빚고, 종교 간에도 갈등이 지속되는 것은 종교적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공포라는 면에서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은 공모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치권력이 종교 집단에 원하는 것은 표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신도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표를 얻는 게 가능합니다. 때문에 정치권력은 종교를 이용해 표를 얻고, 종교는 정치권력으로부터 각종 혜택을 부여받는 관계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신도들의 시민의식이 성숙하지 않은 종교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 그렇습니다. 정치권으로서는 종교계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종교가 당선은 못 시켜도 낙선은 시킨다고 하지 않습니까? 1987년 대선에서 불교세가 강한 부산 지역에서 김영삼 후보가 예상보다 적게 표를 얻고 결국 낙선된 배경에서 이런 일이 드러났고, 그래서인지 김영삼 씨는 그 뒤 불교계에 과도한 지원을 쏟아 부었고, 이런 일은 또 불교계 일부에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잘못된 자신감을 갖게 해서 그 뒤 선거 때마다 정치권의 예산 지원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일부 신흥종교 집단의 경우에도, 집단을 형성하고 있어서 표의 결집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대선 때에는 그쪽에게 이런저런 약속을 해 주었던 것으로 압니다.
(하략)
레페스심포지엄,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 24-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