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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19. 2021

동학개미에 관한 질문1

[개벽통문-180] 

이 글[메모]은 이 주제에 관한 좀더 본격적인 글쓰기를 위한 메모 겸 설문조사이다. 작년부터 열풍으로 불어가고 있는 '동학개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질문은 동학개미라는 말은 동학에 대한 오마주[존경, 감사, 경의]인가, 혹은 앞으로 오마주가 되어 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동학개미라는 말은 '개인투자자'를 의미하는 '개미'에 '동학(민중)'을 접두어로 붙인 별칭일 텐데, 개인투자자들에게 동학개미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스스로 또는 타칭으로 - 언제 누가 이 말을 쓰기 시작했는지도 찾아보아야겠다], 기관투자자 등을 위시한 재벌급 투자자(-이런 게 있나?)나, 아니면 동학혁명(1894) 당시 타도 대상이던 부패한 중앙-지방의 정부처럼, 개인 투자자에게 불리한 제도-정책(ex-공매도)를 유지하거나 지지하는 정부(정책, 제도)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격으로 혹은 골리앗에 저항하는 다윗처럼 대항(?)하는 개인투자자의 처지를 동학혁명-농민군에 빗대어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내 질문을 다시 말하자면, 동학개미들은 스스로를 의로운 입장에 놓고, 그 반대편의 <기관투자자>, <국가(금융당국)>을 악마시하며, 그러한 불리한 조건하에서도 스스로의 투자 성과를 일구어 냄으로써 이 자본가 위주의 부익부빈익빈 사회에서 자생적, 자주적 생존권 확보 노력을 기울이며, 나아가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쉽게 말해, 그들에게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기존의 경제체제나 기득권[기관투자자/큰손(?) 들]에 대한 대항 의지(의식), 그리고 기득권에 균열을 냄으로써, 기득권 위주의 경제체제를 재편하고, 개인(=시민, 인민)의 경제 자주권(주권)을 획득/회복/확보하려는 의지까지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니면, '동학개미' '동학민중'의 '多衆性'을 빌려다 쓰기만 한 것일 뿐인가? 나는 그야말로 '주알못[주식을 알지 못하는]'이고, 게다가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반감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라, 나로서는 근본적으로 '개인(기관) 투자자와 투기자'를 엄밀히 구분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주식이 자본주의(기업)의 유지-성장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설명도, 또 어린이들에게 '금융-투자 지능-감각'을 길러주기 위해 주식 계좌(?) 하나쯤 만들어 주는 것이 현대 부모의 필수, 자녀를 사랑하는 인싸부모의 필수 덕목이라는 설명조차도 외눈을 뜨고 바라보게 되는지라, 스스로 또는 타칭으로 '개인투자자'들에게 '동학민중'이라는 별호(別號)를 붙이는 게 아직은 마뜩잖다. 동학개미들에게 '존봉준'으로 불리는 '존 리'라는 사람이 TV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건전한(?) 투자로서의 투식 투자"의 '훌륭함' '건전함' '건강함'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존리'라는 그의 이름 '존'과 '전봉준'을 결합한[이름+이름] '존봉준'은 '전봉준'에 대한 오마주가 되는가 아니면 '참칭'에다가 '엿먹이기'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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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의 시대에서 투자의 시대로" 시대 환경이 바뀐 오늘날, '부동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오히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다수의 민중=시민=인민들에게 '주식 투자'는 마지막 '희망의 촛불'이 되는가, 아니면 (부동산에 이은) 또 하나의 욕망의 분출구가 되는가? 동학농민혁명유족회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혹은 모모한 동학 관련 단체나 사람들은 이 사태[오마주/참칭?]를 방관하고 있어도 되는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닌 일인가? 민중=시민=인민[다수]이 스스로 붙이고 자처/자부 또는 자조(自嘲)하는 말이 아니라 호사가(好事家)들이 찍어 붙인 이름이니, 무시하고 넘어가면 그만인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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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뇌리 속에 주식은 우리나라에 일본의 상업적 침탈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1900년대 전반기에 유행했던 '미두'[쌀을 매개로 한 '공개도박']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야인시대?]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이 미두 투기에 전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올라 앉아 절규하고 자살하는 당시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다뤄진 적이 있다. 딱, 오늘날 주식 등락에 울고 웃는 개미 투자자, 대개는 쪽박 신세로 종결되는 오늘날의 '현실판 주식 드라마'와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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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개미들의 꿈중의 하나가 '대박'이고 할 수 있으면, 그들이 '대박'라는 방법을 통해 도달하려고 하는 건, '(지금보다) 상위 계층'이 아니겠는가.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아니라. 그에 비해 우리가 생각하는 '동학군'은 '허황된 꿈'이라 할지라도,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생각해 보면, (갑오년의) 동학민중들에게도 '개인적인 욕망과 포부'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것이 혁명 동력의 주요(양적인 측면에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날 우리가 동학혁명을 '위대한 민중 혁명,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것[동학혁명=동학민중+지도자]이 내세운 대의명분이 '보국안민, 척양척왜, 광제창생' 같은 '공공성 있는 것들'이었던 덕분이 아니겠는가. 오늘날이나 그때나, 공공성을 내세운다고 해서 다 선하고 바람직한 것만은 아닐 테지. 그것을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어떻게 계승하느냐 하는 것은 그 시대 민중[=시민, 인민, 서민]들의 집단선택에 달리 문제가 될 것이다. 그 '집단선택'의 물꼬를 공공적인 방향, 선한 방향, 다시개벽의 방향으로 터 나가는 사람이, 이 시대의 동학군(접주)다! 해월이다! 

[*이 단락 내용은 이 글 댓글에 대한 필자의 답변을 일부 수정하여, 초고에서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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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의 현실적인 문제로, 지금 벌어지는 '동학개미운동'이 오마주이든 참칭이든, 오늘의 '동학개미'들이 넘어야 할 우금티는 어디일까? 우금티 넘어 도달해야 할 '한양'은 어디일까, 진멸(盡滅)해야 할 '권귀'는 또 누구일까? 동학명명 당시 우금티 넘어 '한양'에는 '권귀'만이 아니라 '일본'이 있었고 일본의 배후에는 또 '제국주의-자본주의 세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일개 앞잡이 군대'로 '일본군'을 파견하여, 동학군들을 '토벌'하고 '대토벌'하고 '전멸(全滅)'시켰다. 오늘의 동학개미들은 126년 만에 우금티를 넘어, 보국안민, 제폭구민하고 척왜양창의하여 광제창생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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