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an 20. 2021

생태적 지혜의 철학적 뿌리를 찾아서

[잠깐독서-049] [지구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 

[책 속에서]


플라톤의 실재론과 동물 실험실을 연결시켜 사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사람은 프랑스 과학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 )이다.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이론(ANT: actor network theory)은 생명, 사물, 인간, 기계, 미생물 등을 넘나드는 혼종적인 주체성 양상을 드러내는 이론이다. ANT이론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에 의해서 창안된, 인간/비인간의 횡단면을 구성하는 배치(agencement)라는 개념과 유사성을 띤다.(중략) 


라투르의 실재론에 대한 문제제기는 과학철학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실재론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명제가 사실은 실험실 외부에 있는 진짜 현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작되고 인위적으로 조성된 실험실 환경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 세상은 현실 세상을 넘어 아주 다른 진리의 공간을 조성해 냈으며, 그것은 마치 실험실과도 같은 이상화된 공간일 뿐인 것이다.


과학철학 논쟁에서 반실재론극단화된 상대주의로 간주되어 왔다. 여전히 주류 과학은 분석실재론의 영향으로 종합적인 현실을 단칭명제로 잘게 분해시켜 각각의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에 따라 참과 거짓으로 정보 값을 나누어 평가하는 관행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다시 종합적으로 평가하고자 할 때 연결망의 배치, 즉 행위자네트워크(ANT)는 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중략) 생태적 지혜는 연결망의 지혜, 돌봄(care)의 지혜, 정동(affect)의 지혜라고도 불린다. 분리시키고 격리시켜 이상화하는 방식, 즉 분석적 실재론의 방식이 아니라, 공유지에서의 연결과 접속, 접촉을 통해서 암묵지, 노하우, 집단지성, 오픈소스 등을 추구하는 것이 생태적 지혜이다. 분석 실재론은 왜(why?)라는 질문을 통해서 본질과 이유, 기능을 묻는다면, 생태적 지혜는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통해 작동과 양상, 과정을 묻는다. 연구소를 만들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가입해 왔고, 우리는 지혜와 정동(affect)의 오래된 미래를 향해 탈주하고 있는 중이다.

- 신승철, [지구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 29~32쪽 


[책을 열고 닫으며] 


1. 


요즘 참여하는 공부모임 중에 '지구인문학 강독모임'이 있다.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의 책임연구원들이 중심이 되고,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10여 명 규모의 공부모임이다. '지구인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혹은 지구인문학에 영감을 줄 수 있는 도서 / 원전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이다. 


나로서는, 모시는사람들에서 곧 개소할 '지구인문학연구소'의 전개를 위한 기본적인 내공을 쌓는 과정의 일환이기도 하고, 동학(同學)들과 호흡을 맞춰 가기 위한, 경험의 공유를 위한 참여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오로지 내 방식의 언어[東學]에 대하여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하는 데서 벗어나, '그들의 언어' 혹은 '시대의 언어' 또는 '우리의 언어'로 '함께'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일이기도 하다. '배우고 익힌다'는 말은, 지금 공부모임에서 읽고 있는 책[생동하는 물질]을 그야말로, 초등학생이 영어 처음 배우듯이, 초보적인 개념 이해부터 '머리에 쥐가 나도록' 애써 가며 배우고, 익히는 중이라서, "매우 현실적(실제적)"인 느낌을 담아서 쓴 말이다. 


어렴풋이 귀동냥한 수준으로는 매우 익숙한 것(?)이라도, 그것을 '충분히' 알기, 또는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방식[결]으로' 배우고 이해하는 데는 많은 정성(시간)이 필요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언가를 '배우는 데'에 익숙하지 못한 듯하다. 그것은 지금-여기에서 생각해 보면, 다른 말로는, 배우는 데에 정성(시간)을 기울이지 않았다는/못했다는 뜻이다. 눈앞의 일을 하기에 급급한, '자전거 출판'을 십여 년째 해 나가는 처지에서, 게다가, 나머지 시간은 또 '동학과 개벽'에 관련된 생산물(글/간행물)을 만들어내기에 여념이 없는 처지로서, '무언가를 (차분히)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요즘 내가 참여하는, 지구인문학 강독 모임을 비롯한 여러 개의 공부모임들은 이러한 처지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는" 삶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이다. 


2. 


어제[1월 29일] 공부 모임의 대목 중에는 '먹는 것'에 관련된 이야기가 핵심 주제 중의 하나였다. 


 [야규 마코토 발제문 중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음식을 ‘삶이 계속된다면 소유할 수 있는’ 도구로 바라보는 관점에 반대하며, 음식 그 자체를 배치의 구성요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신진대사, 인지, 도덕적 감수성을 포함하는 행위적 배치 내의 행위소로서 해석한다.”(140쪽) 다시 말하면 음식(을 먹는 것)은 단지 영양 성분을 섭취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송지용 발제문 중에서]

저자는 “음식을 집단적인 신체 내에서 서로 경쟁하거나 다른 신체들과 경쟁하는 의욕적인 신체로 간주할 것이다.”(115)라고 하였고 데이비드 굿맨을 이용하며 음식을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능동적이고 활기 넘치는 존재로”보는 관점을 소개한다.(123쪽) 이는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는 동학의 이천식천 개념 유사한데 음식을 단순히 분리되고 독립된 수동적인 물질이 아닌 하늘님으로 보고 또한 먹는 주체도 이와 동등한 하늘님으로 보고 있다.

또한 저자가 소개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그의 신체를 더 예민하고 야위게 만들며 사물의 힘을 더 잘 식별할 수 있게 만드는 일련의 신체들과 연합 것을 열망했다(131)는 것 그리고 저자가 소개하는 이들의 ‘식사 체험’ 즉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끊임없는 상호 변형 과정” (135쪽)은 동학의 향아설위 또는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다는 만사지식일완(萬事知食一碗)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    

또 저자가 소개하는 이탈리아의 슬로푸드 운동은 우리나라의 생활협동조합으로 건강하고 생태적인 먹거리와 생산자와 소비자의 상생적 유통 그리고 동학에 기반한 대안적이고 도덕적인 세계를 꿈꾼 ‘한살림운동’과 공통점이 많다. 


먼저 책의 제목('생동하는 물질')과 관련하여, 이 발제문들의 기본적인 의미를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음식을 먹는 행위에서 '인간'을 주체로 보고, 음식을 '객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음식이 모두 '동등한 주체'로서 '상호작용'하는 것, 사물(음식)들 또한 '생동하는 주체'라고 하는 관점을 말해준다. 


위의 발제문들은[특히 송지용] 단순한 '생동하는 물질'의 기계적 이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우리의 관점' 특히 개벽학(종교)의 시각에서 재음미, 재해석, 재확산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각과 태도는 앞으로 더욱 확장시켜 가야 할 우리의 기본 자세이다. 


생동하는 주체로서의 음식이라는 관점은, 위의 인용문[지구살림~~]에 등장하는 '정동(情動)'의 개념으로도 설명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음식은 단지 우리 몸에 흡수되어 소화되어 '없어지는/안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감정[만족감]을 '불러일으키고', 인간간의 소개팅 [식사 모임에서 서로 교류하는 것]을 '주선'하기도 하는, '능동적'인 존재로서, 인간[음식 이외이 타자]에게 감정과 행동을 하게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3.


[생동하는 물질]의 2장과 3장을 읽는 동안 (2장은 이해하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나로서는 '범-신유물론'의 시도들은 끊임없이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세상 만물이 동등한 존재가치와 행위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일깨우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특히 '근대 이후'에 사회적으로나[ex-전쟁, 빈익빈 부익부] 환경적으로[지구 생태계 파괴, 기후위기 야기, 생물종 멸종 위기] 저질러 온 문제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서, 혹은 치유의 방안으로서 제기된 것일 터이다. 


2020년 1년 동안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코로나19가 영영 종식되지 아니하고, 인간 사회에 굳건히 자기 영토를 확보하고 인간과 공존(共存)하게 되리라는 전망이 점점 우세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코로나19 바이러스[半생명체]라는 존재는 최근의 그 어떤 인간 존재보다도 더 강력하게 인간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낸 '당당한 '사회운동자(運動者)/실천가(實踐家)'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 과시(誇示)가 과욕(過欲)으로 이어져서 자멸(自滅)하기를 바라는 것은 문자그대로 인지상정(人志相情, 人之常情)이다. 


그러나 인간의 간절한 바람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 자체에도 '강력한 생존의 의지'와 '자기 의지를 관철시켜 나갈 역량과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사물의 생기성(生氣性)을 인정하는 것은 이제, 피치 못할 일이기도 하거니와, 인간 자신의 생존과 안녕을 위하여 필수적인 지식이자 덕목이 되었다. '생태적 지혜'는 '진리'여서 수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속 가능한 존속의 필수요건이라는 말이다. 


그 귀결이 어떻게 되든, 인간은 이제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부정적인 의미로)의 아집과 망상을 떨쳐 버리고, 이 세계가 인간뿐만 아니라, 뭇 사물[事+物]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라는 것을 각성(覺醒)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수용하겠다고 각오(覺悟)하고, 겸손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각득(覺得)해야 할 때이다. 우선은 '나'부터 그리할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참칭하는 종교인, 정치인은 천벌을 받으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