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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17. 2021

참칭하는 종교인, 정치인은 천벌을 받으라

[잠깐독서-047] [사회는 왜 아픈가] 중에서

[책 속에서] 정치인과 종교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인은 국민의 뜻을 받든다 하고, 종교인은 하늘의 뜻에 따른다고 하는 ‘형식’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자신보다는 국민과 하늘을 앞세우는 듯한 모습에서 이들은 참 닮았다.


그러면 그 받들고 따르는 ‘내용’은 어떨까? 국민과 하늘이란 서로 다른 개념인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만은 않다. 국가론과 종교론을 나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내린 결론 중의 하나는 국민의 뜻과 하늘의 뜻 운운하는 언어는 외견상 다른 듯해도, 정말로 받들고 따르는 것은 사실상 자기의 ‘욕망’인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받든다’는 미명하에 사실상 그 이름을 ‘팔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할 때가 많다면 그저 억측일까? 행여 ‘욕망’이라는 원초적인 표현이 거슬린다면, 그저 ‘자신의 뜻’이라고 해도 좋다. 국민/하늘의 뜻이라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사실상 자신의 뜻일 때가 태반이다. 흔히 자신의 뜻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뜻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 아닌 것을 가져오는데, 그것이 자신을 자신 되게 해 주는 근거, 정치와 종교의 용어로 말하면, 국민과 하늘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사실은 아닐 테고, 모든 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만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의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뜻과 하늘의 뜻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받들어져야 할 국민이 무시되는 일은 왜 벌어지며, 저마다 하늘의 뜻을 따른다면서 종교인들의 아집과 종교 간 갈등이 어찌 이리 끝없을 수 있겠는가.


-이찬수, [사회는 왜 아픈가], 115-116쪽 




[책을 닫으며] 이처럼 자기의 뜻과 이해관계를 '하늘' 또는 '국민'의 뜻과 이해관계라고 호도하는 것을 '참칭'이라고 한다. 정치인과 종교인에 이어, 이 참칭하는 무리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업종이 최소한 둘이 더 있다.


첫째는 언론권력이다. 언론권력(기자와 그 기자의 배후)은 아주 자주 자신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여론'이라고 호도한다. 그들의 기사들은 대개 '팩트'에 기반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팩트' 중에서 특정 팩트를 주목하고, 다른 특정 팩트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또는 '여러 의견을 가진 다수의 전문가들' 중에서 특정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인터뷰)하고, 특정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결국은 자기들이 배설하고 싶은 이야기를 '국민의 뜻'이라며 늘어놓는다.


여러 측면 가운데 일부 측면, 여러 사실 가운데 일부 사실만을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능력 상의 한계에 대한 인정이, 임의의 취사선택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언론은 최소한의 사실의 다면성의 전모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 그 사건의 핵심적인 문제에 도달하겠다는 태도, 자신이 주목하는 측면과 사실의 이면 내지 반면이 있을 수 있다는 겸허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기사를 독자(국민)들에게 알려 주는 것에 대한 대가로서 취하는 이득[=신문판매=월급] 이외에 다른 방식의 이득[어떤 기사를, 어떠한 방식(논조)으로 보도하는 대가 등]을 취하지는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어떤 특정한[=대개는 지엽적이며, 다른 부분들이 은폐된] 사실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나팔수 노릇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때 '최선을 다해야'라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규범일 뿐만 아니라, 기자의 '수칙'으로서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였을 때는 법적(일반법률), 제도적(언론사 자율 등), 도덕적 제재를 감수해야 하는 규범이다.


둘째로 '참칭'의 대명사로 추가되어야 할 업종이 바로 사법 검찰 권력이다. 이때 사법 권력은 '사법부'를 필두로 해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검찰 권력, 그리고 최근 '수사권'이 경찰에게로 일부 이관된 점을 고려하면, '경찰 권력'까지를 포괄한다. 또한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변호사'들 또한 대체로 이 범주 속에 포괄하여 다룰 수도 있다. 이들은 모두 사실상의 '자기의 뜻'을 '법의 뜻' 또는 '정의' 또는 '국민의 이익[뜻]'으로 호도할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러한 전례와 전력이 차고 넘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마디로 '인민(人民)'이 속편하게, 믿을 "집단"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대개 '집단'으로서 작동할 때는 사회의 어떤 부문이든 간에 다소간 '집단의 이익' 내지 일종의 직업병 같은 '집단적 히스테리'를 발휘하게 마련이다. 최근의 검찰권력이 보여주는 '狂風'은 검찰권력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 또한 사실상, 사익을 위한 행위를  공통(=검찰, 사법)의 이익을 위한 행위로 호도하는 측면이 있지만]이고 보면, 이처럼 '개인'으로서의 한 사람과 특정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한 사람의 행동의 의미와 방향은 천양지차가 있게 마련이다. 정치인 개개인, 종교인 개개인, 언론인 개개인을 만나보면 대체로 선량하고, 정의감 넘치며, 사랑으로 충만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의 '현장'에 돌아가 '(종교계의 일원인) 종교인'으로서 '(정치계의 일원인) 정치인'으로서, '(사법부의 일원인) 판사'나 '(준사법부의 일원인) 검찰'로서 행동할 때는, 핑계도 많고 이유도 많게시리 온갖 부정의[不眞], 불선(不善), 불미(不美)에 쉽게 투항한다.


결국은 '인민' 개개인의 '자주성'이 또렷이 살아 있지 않으면, '집단'으로서의 정치, 종교, 사법, 언론 권력은 인민의 이익, 나아가 진, 선, 미의 토대 위에서 작동하지 않은다. 그것들은 이 사회의 내장(內腸)과 같은 조직이다. 동물의 사체(짐승, 어류, 인간 등)는 즉시 내장을 빼내지 않으면 쉽게 부패한다. 내장은 그 본체가 죽는 즉시로 부패하기 시작하여 곧 육신까지 덩달아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치, 종교, 사법, 언론이라는 이 사회의 내장 기관은 이 사회에 불안과 절망, 갈등과 폭력이 끊이지 않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수시로 부패하기를 거듭한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돌이켜 '살아있는[生生] 것'으로 돌이키는 방법은 인민의 자주적인 개입과 끊임없는 '내장 빼내기' 작업이다. 부패한 자[정치인, 종교인, 사법인, 언론인]은 즉시로 그 계(界)로부터 이탈시켜 불태우거나, 매장하거나, 팔팔 끓여서 씹어먹어 버려야 한다. 그래야 그 본래의 계(界)도 살고, 우리도 산다. 또한 '민심이 곧 천심'임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것이, 참칭하는 자에게 천벌을 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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