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의 공부법, 동학
동학 수행을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이 글에서는 동학의 수련/수행 문화가 ‘주문 수련’에 국한되지 않는 풍부한 내용과 형식을 가졌었다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예전에 풍부했던 동학 수행 문화의 많은 부분들이 오늘날에 계승되지 못하고 있다. 그 중 원형을 되살려 ‘복원’해야 할 것들도 적지 않다고 본다. 또 원형은 아니더라도, 기본 형식을 변용하고 외연을 넓혀 ‘창조적인 계승’을 모색할 부분도 적지 않다.
또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것들도 그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서 더욱 풍성하게 만들 부분도 많다. 수운 선생이 당대 인류 문화의 병증을 ‘각자위심’이 만연한 데서 비롯하였다고 진단한 것도 결국은 ‘정신문명’의 낙후성이나 타락상을 지적한 것임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러한 정신문명을 고양하는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주문이며 영부다. 주문으로 내 마음(정신)을 닦고 내 기운을 바르게 하며, 영부로써 심신의 한울 마음과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 ‘수련’이다.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묻기를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동경대전, 포덕문)
위에서 말한 '나를 위하게 하는' 법으로서의 "주문"을 빠르게 외거나 혹은 묵송함으로써 한울님 모심을 체인하고 한울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주문 수련"이다.
그러나 ‘수련’에는 ‘주문 수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학 창도 이후 수운 선생이 살아계시던 시절이나 그 이후에 여러 교서에 나타난 공부[수련과 수도/수행]의 모습들은 매우 다양하다. 동학 수행 문화의 올바른 계승을 모색하기 위해 이 글은, 천도교의 역사 속에서 발굴할 수 있는 여러 수련의 형식과 내용을 검토해 보고, 그것을 계승하는 방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천도교 수도의 출발은 한울님이 천지만물(나를 포함)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간섭·명령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은덕에 감사하며 부모님처럼 공경하는 것입니다.”(김용휘, <천도교 수련의 특장(特長)>, 『신인간』 통권577호, 1998년 9월호)
천도교(동학)의 수련이라고 하면 대개는 주문 수련을 지칭하고 주문에 관해서는 이미 한울님과 수운 선생의 문답 과정에서 ‘(한울님의) 주문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한울님)를 위하게 하는 것’이라고 명시(明示)하고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현재의 천도교단 내에서도 수련을 이해하고, 수련에 임하는 입장과 태도 그리고 방법론에 대해서는 충분한 의견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천도교단은 전통적으로 단일한 지도 체제와 기관 중심의 사고 및 교화 행태를 중시하고 있으므로, 특히 수련에서의 규모일치는 오래 전부터 천도교인들의 과제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수련을 활성화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로 여겨지고, 그 선결 조건이 바로 수련 방법의 통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할 것이 있다. ‘규모일치’라는 말을 ‘일사불란’함이나 ‘절대 복종’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거나 사용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이다. ‘각유성(各有性) 각유형(各有形)’(동경대전, 논학문)이라는 말씀도 있거니와 성별과 연령 같은 생물학적인 차이 외에도 사람마다 취향이나 성향이 다르다면, 그에 따른 수련의 방식 또한 다른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규모일치’는 그러한 수련의 방식·형식을 한치의 ‘어김’이 없이 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과 스승님의 가르침이 온전히 각 개인의 마음에 가 닿도록 하는 데서 찾아지는 것이다.
나무에 수천 갈래의 결이 있고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사람 마음의 결 또한 같을 수는 없다. 그 결을 살피고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수련 지도의 ‘규모일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전통적인 수련 방법 이외에 현대적인 수련·수도·수행·명상 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으며, 실제로 공식·비공식으로 다양한 수련 방법이 시행되(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한 다양한 수련 방법이 교리에 얼마나 부합하느냐 또 교단에서 그것을 공인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다양한 현대인들의 욕구와 ‘종교적 요구’에 답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동학 수련(주문 수련)을 좀더 체계화하는 것과 아울러 다양한 수련 방법을 연구하고 도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현재 전통적인 동학 수련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천도교단에서 ‘수련’의 의의와 방법을 연구하고 시행(試行)하는 노력은 충분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교인위아(敎人爲我)’라는 ‘주문’의 활용·의의 설명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주문 공부' 이외에는 '수행, 수도, 수양'의 길을 별로 상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불온시하기까지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주문 수련만 놓고 볼 때, 천도교단 내에서도 그 방법을 두고 다양한 갈래가 형성되어 있다. 주문을 외는 방법(소리를 내어 외는가 아닌가, 빠를게 외는가 아닌가, 생각만으로 외는 것과 그 이상(무념무상), 주문을 욀 때 앉는 방법, 주문을 외는 때와 장소)을 두고 수많은 이론(異論)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자기의 이론(理論, 見解)가 가장 바르고(正), 전통(傳通)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한편으로의 ‘소홀함’과 다른 한편으로의 ‘자시지벽(自是之癖; 자기만이 옳다고 여기는 태도)’이 오늘날 천도교 수련 문화의 ‘쇠퇴’의 빌미가 되고 있다. 규모일치를 해치지 않으면서, 수련의 ‘다양성’을 가져올 수 있는 길, 즉 수련 문화의 새로운 성장을 모색하는 것이 이 글의 또 하나의 목적이다.
이 말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75년 전 김도현은 “대신사님 시대에는 그 당시의 사회라는 테두리에서 적응한 수련이 있었고 해월신사 시대에는… 의암성사 때에는 …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때에 적응한 수련이 있게 됩니다.”라고 하여 시대적 조건에 맞는 수련 문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 이전에도 이러한 인식은 있었을 것이며 그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련의 현대화에 대한 목소리는 여러 모로 제기되어 왔다. 이제 구체적인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수련이 몸에 배고, 수련을 통해 신앙 체험을 한 도인들의 관점에서 ‘수련의 이해’나 ‘체계화’란 어불성설일 수 있다. 즉, 수련은 이해하고 체계화하는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매진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같은 본질에 이르기 위해서 그 방법과 절차는 시대와 지역 그리고 사람의 다름에 따라 적절한 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개선’을 위해서는 우선 ‘계량화(표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수련의 과학화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연구들의 기초 작업 중 하나다. 구체적으로는 천도교의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도의 각종 유형을 재구(再構)하고 그것을 토대로 오늘 이후 천도교 수련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수도 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계기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주문 수련’의 절차와 수도 요령에 관한 것이 아니라, ‘수련’ 또는 ‘수도’라는 부문에 속하는 수련 문화 전반의 외연을 확장하자는 것이다. 수련을 ‘신앙적 단련’이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생활 문화’ 전반으로 확대해서 이해하고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먼저 ‘수련’과 ‘수도’의 의미를 구분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수련’을 ‘주문공부’를 지칭하는 말로, ‘수도’는 ‘주문수련’을 포함한 좀더 넓은 의미의 ‘신앙적 수행’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용례를 좀더 확장하여 특히 ‘수도’의 경우 천도교 신앙을 위해 행하는 종교적 수행 전반을 아우르는 의미로 쓰고, 수행과 수양은 종교적인 틀마저 넘어서는 "동학공부"를 지칭하는 말로 쓰기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천도교의절]에 따르면 ‘교인의 수행 의례’로서 심고, 오관(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 수도(경전봉독, 수련, 8수칙, 십무천, 사계명, 임사실천십개조), 도호와 독공, 포덕 등을 열거하고 있다. 또한 관례상 천도교인이 수행해야 할 세 가지 항목으로, 교리·교사 공부와 수련(수도)을 들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필자가 수련 또는 수도를 언급하는 태도는 수행 문화와 수양 문화라는 범주의 하위범주로서 다루며, 필자가 본격적으로 다루는 범위는 수행을 넘어선 '수양'의 관점이다.
오늘날 동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창도 당시 동학 ‘민중’들에게 암흑세계에서 광명세계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여겨졌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