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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11. 2016

동학의 공부법(1)

-오래된 미래의 공부법, 동학

정신문명의 위기와 수련 

*이 글은 필자가 <신인간>에 연재했던 글을, 시의성을 감안하며 수정 증보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오늘날처럼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괴리가 심했던 적은 없었다고 한다. 동학에서는 그것을 후천 개벽의 징후로 읽는다. 문제는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 것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됨으로써 '생명의 생명성'이 더럽혀져서 상처입고 병약해진 데 있다. 동학에서는 그것을 일러 '괴질(怪疾)'이라 하였다.


십이제국(十二諸國, 온세상)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 아닐런가. (안심가)


송송가가(松松家家, 이전 시절의 도참) 알았으되 이재궁궁(利在弓弓, 후천 시대의 도참) 어찌 알꼬   

천운(天運)이 둘렀으니 근심 말고 돌아가서  윤회시운(輪廻時運, 돌고도는 시운) 구경하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몽중노소문답가)


합리성과 효율성을 목표로 추진되어 온 서구 근대 문명의 역사가 이루어 놓은 물질문명의 대평원 가운데서 사람들은 비로소 정신적 허기와 정신문명의 빈곤 문제를 심각한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정신문명의 빈곤은 다시 물질문명의 위기를 불러와 생태계 위기와 되풀이되는 경제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만들어지지만, 더 이상 사람들은 그것들만으로 인류의 평화와 인간의 행복이 보장된다는 믿음을 갖지 않는다. 


오랜 모색 끝에 사람들은 그 대안으로 ‘명상’을 통한 정신문명의 복원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여기서 명상은 어느 한 종파에 속한 수련(수도) 형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선’이나 기독교의 묵상,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여러 ‘수행단체’들의 수행 과목 전반을 아우르는 의미로 쓰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수련 문화는 각 종단은 물론이고 여러 수련 단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경향은 앞으로 더욱 확산되고 심화될 전망이다. 

*필자는 '수행'을 '수양'과는 다른 의미로 쓴다. 수행으로부터 수양으로 나아가는 것이 동학의 공부법의 형식적 흐름이라고 본다. 다만, 이 글에서는 주로 수행의 측면을 강조하며 글을 쓰고자 합니다. 또 수행과 수양을 포괄하는 용어로 '공부'라는 말을 씁니다. 다만, 동아시아적 지평에서 '공부'란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다른 의미로 자리매김하고 있기에, 수행과 수양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게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좀더 깊이 고민하여, "공부"를 대체할 보편적인 용어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증보 주)


그 가운데 동학의 수련이 놓여 있다. ‘그 가운데’라고 하면 ‘지금에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했으며, 지금에도 비할 바 없고 옛적에서도 비할 바 없는(수운, 논학문)’ 무극대도인 동학의 진리에 누가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동학인)의 마음이나 믿음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새로운 진리와는 관계없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학 수행 방법은 여러 ‘명상’ 프로그램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나마도 잘 알려져 있지 못하기까지 하다. 그 낮은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동학의 수행을 본래의 자리, 수행 중의 수행법으로 자리매김하는 길을 찾아 보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다음 "동학 수행법의 다양성"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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