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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Jun 11. 2020

코로나, 여행 그리고 교육

[교육답게 제10호]  기고글


알랭 드 보통은 저서 ‘여행의 기술’에서 극히 다른 두 여행자를 소개한다. 첫 번째 인물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다. 독일인인 그는 1799년 스페인 왕에게 재정 후원을 받고 5년간 남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했다. 1만5천 킬로미터를 여행하며 남아메리카 지도를 다시 그리고, 1,600가지의 식물을 채집하고, 지구의 자기를 연구하고, 아마존 유역 사람들의 혈족의식 등을 탐구한 훔볼트는 ‘신대륙의 적도 지역 여행’이라는 30권의 여행기를 썼다. 두 번째 인물은 프랑스인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이다. 그는 거친 날씨와 지형, 범죄 등을 걱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여행 방식을 추천했다. 드 메스트르는 여행을 위해 잠옷을 입고 방문을 걸어 잠궜다. 자신의 침실과 가구들, 창밖의 풍경들을 여행한 후 그는 ‘나의 침실 여행’이란 책을 썼다. 두 번째로 떠난 야심 찬 방 여행기의 제목은 ‘나의 침실 야간 탐험’이다.     


코로나 시대, 어쩌면 우리는 드 메스트르의 여행 방식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지 모른다. 교육방식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인 등교 개학이 시작됐지만, 학교의 풍경과 구성원들의 상호작용 양상은 이전과 다르다. 많은 학생들이 각자의 방에서 수업에 참여하고 있고 추후 코로나 사태의 전개, 또 다른 바이러스, 기후변화 등의 요인에 따라 교육형태는 계속해서 변화를 요구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비대면 수업에 대한 현장의 반응은 다양하다. ‘이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 왜곡된다’, ‘교육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우려와 함께 ‘생각보다 괜찮다’, ‘효율성, 접근성 면에서 만족스럽다’는 의견도 힘을 받는 추세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종래의 교실 수업은 훔볼트의 여행보다 드 메스트르의 방 여행 방식에 더 가깝다. 우리가 멧돼지의 습성을 알고 싶어도 교실에 실물을 놓고 공부하기는 어렵다. 학생들이 수업을 통해 낯선 대륙을 탐험하고, 미지의 식물을 채집하고, 조선 시대 노비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밀레의 그림을 만나게 되는 근본적인 동력은 상상력이다. 온라인 수업에서도 이러한 상상력을 발현할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작가 알랭 드 보통 역시 (방 여행기의 일부가 지루하다고 불평하면서도) 드 메스트르의 방 여행에 의미있는 통찰이 있음을 직시했다. 여행의 목적지보다 여행자의 심리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를 교육에 대입해보면, 계획된 수업 목표와 방법보다 수업을 통한 학생들의 사고와 정서의 역동에 더 무게를 실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거나 우리 앞에 장밋빛 미래가 펼쳐졌다는 말이 아니다. 코로나 시대에 필요한 건 가능성과 한계가 혼재한 교육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용기와 개방적인 자세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자로서의 개방적인 자세란, 교육에 불필요한 것들을 솎아내고 그 자리를 교육의 본질로 메우며 변화에 휩쓸리기보다 변화를 주도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나의 여행, 나의 교육     


불필요한 것들을 솎아내고 교육의 본질을 성찰하는 과정은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교육의 본질이 표면 지각을 뚫고, 맨틀을 건너면 만날 수 있는 핵처럼 단단하고 고정불변한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의 본질은 교육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해석과 실천 속에 각자 고유의 언어로 자리 잡는다.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한 명의 교사로서, 나는 내가 경험한 여행의 맥락에서 내가 생각해온 교육을 말하고 싶다. 학생들이 없는 텅 빈 학교에서 곱씹어보는 교육의 본질, 어느 때보다 여행이 불가한 시절에 떠올리는 여행의 의의가 거울처럼 닮았다.     


혼자서 떠났던 수차례의 장기 여행을 통해 나는 나름의 여행 원칙들을 세웠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겠다고 욕심내지 않기, 사진에 집착하지 않기, 짐을 가볍게 싸기, 불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버리기, 기념품 사지 않기, 기존의 여행 안내서에 매몰되지 않기, 여행 중 글쓰기 등이다.    

  

여행 중에는 한정된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보겠다는 강박에 빠지기 쉽다. 일주일 동안 온 유럽을 돌아보는 여행 패키지 상품이 대표적 형태다. 일군의 사람들이 대형 버스에 몸을 싣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랜드마크라 불리는 곳들을 모조리 밟고 다니는 형식이다. 소위 가성비가 높고, 여행을 마치면 유럽 몇 개국에 가보았다는 모종의 뿌듯함을 얻을 수도 있다. 다만 여행자가 실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는지 자신의 언어로 말하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수업 특히 온라인 수업에서 비슷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나는 지난 몇 주간 수업 영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단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려 노력하는 내 모습을 보았다. 실시간 쌍방향 수업이 아니었기에 잡담하고, 산만하고, 돌발행동을 하는 학생들이 없이 오롯이 나의 설명과 전달에만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평소 40분이 걸리던 수업이 영상 형태로는 20분 이내로 끝났다. 이를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부터의 해방으로 볼지, 빈 공간을 더 많은 학습 내용으로 채우기만 하면 될지, 수업 가성비가 높아졌으니 기뻐해야 할지, 사라진 20분 속에서 나는 낯선 곳을 헤매는 여행자처럼 두리번댔다.    

 

많은 이들이 여행의 필수 장비로 카메라를 꼽는다. 사진을 찍으려 유심히 살피다보면 주위 환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깊이 있게 이해할 가능성이 열린다. 사진이 기억의 환기에 도움이 되는 것도 물론이다. 반면 내 시선과 감정, 경험의 총체가 작은 카메라 렌즈에 갇혀버릴 위험도 있다. 사진이 내 기억을 자동으로 저장해 주리라라는 믿음 때문에, 눈 앞에 펼쳐진 마법 같은 순간들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는 현상은 여행자로서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교육현장에서의 테크놀로지는 비슷한 측면에서 양날의 검이다. 기술의 발전이 교육 환경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기존 인식에 도전하는 건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를 가장 강력하게 추동하고 있다. 온라인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 습득만 가능하다는 건 옛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들이 온라인 수업을 공개하고 있고(MOOC), 제대로 활용만 하면 온라인을 통해 깊이 있는 지식을 자기주도적으로 습득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진열된 학습 콘텐츠를 ‘소유’하듯, 지식과 배움 역시 소유와 거래와 측정의 대상으로 왜곡될 수 있다. 배움의 정도와 깊이가 온라인 수업 진도율과 이수율로 환원될 수도 있다. 교육현장에서 테크놀로지 자체는 만능치트키도 무용지물도 아니다. 테크놀로지에 종속되어 교육적 상상과 내용과 방법을 가두지 않는 것, 테크놀로지를 학생들의 교육적 경험 속에 녹아들게 하는 능력은 새로운 시대를 맞는 교육자들의 역량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좋은 여행을 위해서는 짐가방을 잘 꾸려야 한다. 나의 대원칙은 '무조건 작게, 가볍게 싼다'이다. 낡은 물건들 위주로 가져가 버리고 오는 경우도 많다. 기념품을 거의 사지 않기 때문에 여행에서 돌아올 때 짐가방은 떠날 때 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다. 나도 초창기에는 기념품이나 유명 특산품을 사 오거나, 한국보다 싸게 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사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런 물건들은 갈 곳을 잃고 어색하게 놓여 있다가 결국 버려지기 일쑤였다. 그 덩그런 풍경이 여행과 나의 경험이 유리된 조각난 증거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행에서 두서없이 사 모은 기념품들은 예쁘게 정리했지만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필기 노트, 꾸역꾸역 달성한 온라인 수업 진도율 100%와 닮았다. 잘 정리된 노트나 완성된 진도율이 공부가 잘되었다거나 완벽한 이해에 도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가시적인 장치들은 당장의 불안과 허기를 메꾸며 작은 만족감을 준다. 낯선 여행지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라는 불안감을 기념품을 사 모으며 메꾸듯 말이다. 여행이 남기는 최선의 아름다움과 기쁨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 조금이나마 달라진 내 모습, 단지 그뿐이다. 그래서 채우는 것만큼 버리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교육이 지식 조각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행위가 아니라, 기존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듯 말이다.  

   

마지막 원칙은 여행 중 글쓰기이다. 작곡을 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데생을 하거나, 명상 혹은 달리기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새로운 환경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글쓰기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막연하고, 산만하고, 초점이 없던 것들에 의미가 부여된다. 기존의 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험 앞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여행 중 눈 앞에 펼쳐진 풍경 그 자체보다 그것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중요한 것처럼, 교사가 전달하려는 내용보다 그것이 학생들에게 불어 일으키는 지적 호기심과 경험의 형태가 더 중요하다.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의 씨앗은 교사가 학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교사와 학생을 잇는 끈     


얼마 전 나는 심한 목감기를 앓았다. 병원에 가도 차도가 없고 의사도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는 아픈 까닭을 곰곰이 살피다가, 최근 내가 학생들과 주고받는 호흡없이 주구장창 일방향 온라인 수업만 찍었기 때문이란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엉터리 유사 과학 같은 소리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학생들과 연결된 느낌을 그리워한다는 걸 알았고 이를 위해 작은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목감기가 수업에 대한 고민으로, 그 고민이 작은 교육 실천으로 이어진 셈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모른다. 사태 초기만 해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이 가능해졌다. 이제 교사들은 손쉽게 온라인 수업을 제작하고, 이런 형태수업이 오히려 편하다는 의견까지 있으며, 불편과 분노 속에서도 많은 것들을 배우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나 역시 칠판과 책과 연필과 한숨과 떠드는 소리가 없는 수업 속에서 교육이 무엇인지, 모든 걸 다 버려도 끝까지 남을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어떤 형태의 수업에서도 나는 여전히 수업에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배제할지 선택하고 강조한다. 비형식과 형식을 조화시키고, 내용과 방법의 균형을 찾고, 우연적인 것과 의도적인 것들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수업 형태가 어떻든 교사로서의 나의 관점과 판단은 끈질기게 개입하는데 그것은 교육의 한계라기보다 가능성이자 예술적 가치이고, 교사인 나와 학생을 이어주는 끈이 되었다. 그 끈의 존재가 교사로서 내 책임감의 발로이자 내가 여전히 가르치고 있는 이유였다.     

 

세상은 변할 것이다. 훔볼트처럼 대륙을 횡단하며 미지의 동식물을 탐구하는 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날이 올지 모른다. 우리는 파자마를 입고 방 여행을 하고, 모니터 앞에서만 학생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사와 학생을 연결하는 끈은 존재할 것이고, 우리는 끈질기게 그것을 찾아낼 것이며, 그 끈의 교육적 예술적 가치만큼은 변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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