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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Jul 18. 2020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ART as THERAPY


알랭 드 보통은 즐거운 대화 상대다. 섬세하면서도 담대하고 위트가 넘치지만 가볍지 않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한참 그의 인기가 치솟을 때 그의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그러다 올해 우연히 ‘여행의 기술’, ‘영혼의 미술관’을 읽고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는 왜 이제야 읽었을까라는 생각. 하지만 이전에 읽었다면 이해한다고 여기면서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겠다는 생각이다. 여러 면에서 대중 교양서로서 흠잡을 데가 없다. 내용과 구성은 물론이고 수록된 예술품과 디자인, 건축물들의 사진을 보는 즐거움까지 있어 (일반적으로 책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소장 가치가 있다.

     

원제는 Art as Therapy이다. '방법론', '사랑', '자연', '돈', '정치'의 주제로 구성된다. 다섯 가지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은 ‘예술의 가치를 세속에서 실현시키려는 의지’이다. 이 의지는 인간의 내밀한 감정과 관계에서부터, 자본주의 개혁의 길잡이로서의 예술, 진보한 투자, 비평가의 역할, 정치 미술의 목표 등으로까지 폭넓고 균형 잡힌 시선으로 나아간다. 모든 주제가 좋았지만 나는 예술과 돈, 정치의 관계를 이렇게 분명하면서도 깊이 있게, 재미와 설득력과 균형감각을 갖고 풀어낸 글을 이전까지 본 적이 없다.


예술의 가치의 세속적 실현은 지난하면서도 필연적인 과제다. 나는 평소 통찰은 영역을 초월해 전이한다고 믿어왔다. 플라톤 철학에서도 선善이란 근본적으로 같은, 전이 가능한 요소라고 말한다. 즉 한 영역에서 선을 알아보면, 그게 사람이든 책이든 의자 디자인이든, 다른 영역에서도 그것을 더 민감하게 알아보고 격려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p.107). 예술에 관한 알랭 드 보통의 통찰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책을 읽으며 예술과 교육의 일맥상통함, 예술의 방법론과 교육의 방법론의 연결 지점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의 가치를 세속에서 실현시키려는 알랭 드 보통의 의지가 예술의 가치를 교육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내 의지로 '전이'된 건지도 모르겠다.


예술의 가치와 교육적 의지


다음은 예술의 7가지 기능 중 '기억'에 관한 내용인데, 성공적인 예술작품을 성공적인 수업과 교육으로 바꿔도 유의미한 통찰을 준다.

"(p.10) 어떤 예술작품을 성공적이라고 말할 때, 그 작품은 가치 있지만 붙잡아두기 어려운 요소들을 전경에 내놓는다. 좋은 작품은 중요한 핵심을 못으로 박아 강조하는 반면, 나쁜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명백히 일깨운다 해도 본질이 어디론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런 작품은 공허한 기념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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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통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하고, 망각해도 좋은가? 공허한 기념품 같은 교육이란 무엇일까?



“(p.58) 잠재적으로 위협을 느끼는 대상 앞에서 어떻게 나 자신을 견고하게 유지할지 깨달을 때 우리는 성장한다. 성숙함은 대처 능력을 소유한 상태로, 예전 같으면 우리의 발목을 잡아 비틀거리게 했을 대상을 가볍게 건너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그런 발견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의식을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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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경험과 교육적 성장은 어떻게 연결될까?



“(p.94)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미술관은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그들이 사랑했던 것을 우리도 사랑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곳이다. 작지만 중대한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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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학교’가 될 수 있고 실제로 알버트 반스(필라델피아 반스 파운데이션 미술관의 창립자)는 그렇게 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술과 '정치' 주제 부분에서 ‘검열을 위한 변명’을 읽어보자. ‘검열’을 교육현장에서의 '정당한 권위'로 바꿔 이해해도 훌륭한 통찰을 준다.


“우리는 검열이라는 개념을 재검토해, 검열이 중요한 사상에 대한 무지몽매한 억압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 세계를 조직하려는 진지한 시도일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의 위험은 악의에 찬 권력이 고귀한 진리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엉뚱하고 무익하고 하찮은 것들에 압도되어 진짜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못한 채 혼돈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다.”(p.221)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주장은 20세기의 삼사분기까지는 유효했다..... 세계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충동은 ‘무엇이 아름다운지는 아무도 모른다’라는 주장 때문에 힘을 잃는 경우가 너무 빈번하다. 이 주장은 자신의 편리를 위해 증명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을 증명해보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떠안는다.”(p.227)     
“문제는 기본적으로 섹스나 폭력성 자체에 있지 않다. 사실 우리가 걱정하는 바는 어떤 장면들이 우리의 집단적 존엄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그런 장면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수치스러운 관점을 선사한다. 검열은 그런 자료를 아예 못 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의 의미는 그런 관심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공적인 승인을 거부하는 데 있다.”(p.224)     


사랑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 '너를 사랑한다는 건', '인생 학교' 등 다수의 작품을 통해 사랑을 탐구해왔다. 이 책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는 더 잘 사랑할 수 있을까? 좋은 연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사랑에 필요한 능력과 관점은 무엇일까? 사랑은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 예술은 어떤 도움을 줄까? 그는 낭만주의, 페미니즘, 인권운동의 예를 든다.

"18세기 낭만주의 시인들은 얼핏 사소해 보이는 시골 산책의 즐거움을 감성적이고 좋은 삶의 기본적인 경험으로 격상시켰다. 20세기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태도를 용인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그런 태도가 남녀관계의 사소한 순간에도 만연해 있음을 지적했다. 1960년대 미국 인권운동은 특별할 것 없는 태도였던 인종적 멸시를 개인이 가지는 가장 비열한 감정 중 하나로 바꿔놓았다. 저마다 방식은 달랐지만 낭만주의, 페미니즘, 인권운동은 인간의 감정 스펙트럼 중 어느 부분에 집중하고, 어느 부분을 거부하는 것이 현명한지에 대한 인식의 혁명을 일으켰다." (p.100)


사랑의 성장을 위해서도 집중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그는 '세부에 주목하는 능력', '인내',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 '전체적 관점'을 사랑을 위한 태도와 요소로 본다.  

“사랑에서 생각, 습관, 태도, 통찰은 항해에서 닻, 육분의, 기타 장비에 해당한다. 미래의 이상적인 문화에서는 먼저 올바른 장비를 손에 넣고 그 사용법을 익히지 않으면 사랑의 들판에 나서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p.126)     


'사랑'에 관한 명불허전의 통찰과 명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니콜로 피사노의 <목가시: 다프니스와 클로에>, 휘호 판 데르 휘스 <목동들의 경배>에 관한 보통의 해석을 읽다가 꽤나 울고 말았다.

“다프니스는 클로에가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감히 만지지 못하고 있다. 그의 모든 애정, 경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의 마음속에서 생생히 깨어난다. 자신이 그녀에게 부족함 없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지 아직 모르고, 이 의심은 그를 더욱 연약하게 만든다. 그의 눈에 그녀는 절대로 당연하게 주어진 존재가 아니다. ”   (p.105)

“꽃을 향한 이런 태도가 감동적인 까닭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받기를 갈망하고 또 그만큼 되돌려줄 수 있기를 바라는 배려의 눈길을 작은 꽃을 통해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서다” (p.108)
     


나는 늘 그렇듯이 왜 눈물이 나는지, 내가 느끼는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한동안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 이제 조금은 말할 수 있다. 그건 내가 늘 경험하지만 명확히 알지 못하고, 쑥스러워 다른 곳을 보느라 잊기 쉬운 '배려의 눈길'이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문장으로 쓰여 내게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청주 현대미술관에서 배려의 눈길 속에 '발견'했고 며칠 후 선물로 받아 소중하게 읽었다.

(2020. 6. 6.)

                                                                                                                    


타이틀 화면 : 폴 고갱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 18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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